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지구 궤도에 올린 첫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 (Sputnik 1) 발사
스푸트니크 1호 (Sputnik, 러: Спутник-1)는 소련이 1957년 10월 4일에 타원형의 지구 저궤도로 발사한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스푸트니크 1호의 성공은 미국의 스푸트니크 쇼크를 촉발시켰고, 우주시대와 우주경쟁의 방아쇠를 당겼으며, 냉전기의 정치 상황에도 영향을 주었다.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는 새로운 정치, 군사, 기술 및 과학발전을 이끌었다.
– 스푸트니크 1호 (Sputnik 1)
.발사일: 1957년 10월 4일 오후 7:28
.궤도속도: 8km/s
.최대 속도: 29,000km/h
.궤도 높이: 577km
.전력: 1와트
.제조업체: SP 코롤료프 로켓&스페이스 코퍼레이션 에네르기아
.발사 장소: Gagarin’s Start
스푸트니크 1호는 과학적으로 중요한데, 위성의 궤도에 영향을 미치는 공기저항으로 지구 대기권의 밀도를 추측할 수 있었고, 무선신호의 전파는 전리층에 대한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발사는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인 1957년 10월 4일 19시 28분 34초 (국제 표준시 기준)에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에서 행해졌다. 위성은 29,000km/h의 속도로 비행했으며, 궤도를 한 번 도는데 96.2분 소요되었다. 위성은 전 세계의 아마추어 무선 통신가에 의해 20.005와 40.002MHz 대역에서 관측되었다. 1957년 10월 26일에 송신기의 배터리가 다 떨어질 때까지 신호는 22일동안 계속되었다. 스푸트니크 1호는 3개월동안 약 6천만km를 비행한 뒤, 1958년 1월 4일에 대기권에 재진입하여 불타버렸다.
○ 발사 이전
- 위성 제작 프로젝트
스푸트니크 1호의 역사는, 1954년 12월 17일에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디미트리 안토니오 국방산업장관에게 지구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의 개발을 제안하는 연설에서 시작했다. 코롤료프는 또한 유스티노프에게 해외 유사 프로젝트의 개요에 대한 미하일 티호라보프의 보고서를 전달했다. 티호라보프는 1951년에 로켓 개발에서 인공위성 발사는 피할 수 없는 단계임을 강조했으며, 그 이후 행성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리라고 했다. 1955년 7월 29일에 미국의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미국이 국제지구물리관측년동안 인공위성을 발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8월 8일에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정치국은 인공위성을 만드는 계획을 승인했다. 8월 30일 R-7 로켓 시험 발사의 책임자인 바실리 랴비코프와의 회의에서, 코롤료프는 달궤도로의 우주비행에 대한 계산 데이터를 제시했다. 그들은 인공위성 발사를 위한 R-7 로켓의 3단계 버전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스푸트니크 (Sputnik, 러: Спутник)”란 러시아어로 “여행의 동반자”란 뜻이다. 스푸트니크 1호는 러시아 우주계획의 선구자인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의 탄생 100주년과 국제 지구 관측년 (1957년 7월 1일∼1958년 12월 31일까지의 18개월간의 기간)의 기간에 맞추어 발사되었다.
위성의 외형은, 직경 58cm의 알루미늄제 구이며 거기에 4개의 안테나가 한 방향으로 붙어 있는 것이었다. 중량은 83.6kg이다. 20MHz와 40MHz 짜리 2개의 송신기 (출력 1W)를 탑재하고 있어, 위성의 온도 정보를 0.3초마다 발신했다.
발사에 사용된 로켓은 R-7 로켓이다. 위성의 궤도는 원지점 약 950km, 근지점 약 230km, 궤도 경사각 65°의 타원 궤도이며, 궤도 주기는 96.2분이었다.
○ 스푸트니크의 행적들
스푸트니크 1호~3호는 공식 명칭. 스푸트니크 4호~25호는 소련에서 사용한 공식 명칭이 아닌, 서방에서 붙인 이름이다.
.스푸트니크 1호
인류 최초로 92일 동안 지구를 돈 후에 대기권에 돌입해서 소멸되었다.
.스푸트니크 2호
1957년 11월 3일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발사되었다. 여기에는 개 한 마리가 탑승했으며 이 개가 그 유명한 라이카이다. 그러나 재돌입 기술의 부재로 라이카는 지구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2호는 발사 162일 후인 1958년 4월 14일 대기권에 돌입해서 소멸하였다.
.스푸트니크 3호
1958년 2월 3일에 발사 실패 이후 5월 15일에 성공한 위성체로, 1,327kg에 달하는 무거운 위성이었다. 같은 시기의 미국 위성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무거운 무게(그 해 7월 26일에나 쏘아올린 익스플로러 4호가 25.50kg였으며, 그 이전의 미국 위성들은 이것보다도 가벼웠다). 정식으로 ‘스푸트니크 #’ 네이밍으로 발사된 위성은 이 3호가 마지막이며,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본래는 이 사양이 스푸트니크 1호의 이름을 달고 발사되어야 했지만 부품 제작 업체들이 납품에 차질을 빚는 바람에 계획이 밀려 3호로 발사되었다.
.코라블-스푸트니크 1호 (스푸트니크 4호)
이때부터 소련에서 스푸트니크가 아닌 korabl-Sputnik란 이름으로 발사되었다. 1960년 5월 15일에 발사되었다. 최초의 보스토크 프로그램을 위한 테스트 발사였으며 유인우주비행을 위해 재돌입장비를 탑재하여 실험하였으나 유도장치의 오류로 더 높은 궤도로 튀어올라가 버렸다. 1962년 9월 5일에 대기권에 진입. 잔해 중 일부는 미국 위스콘신 주 매니토웍 시가지에 떨어졌다.
.코라블-스푸트니크 2호 (스푸트니크 5호)
1960년 8월 19일에 발사되었고, 두 마리의 개가 탑승했으며 이들은 모두 무사히 귀환했다. 이 개들의 이름은 벨카와 스트렐카이다.
.코라블-스푸트니크 3호 (스푸트니크 6호)
1960년 12월 2일, 프촐카와 무쉬카라는 두 마리의 개를 태우고 발사되었다. 안타깝게도 대기권 진입 도중 역추진 로켓이 제대로 점화되지 않아 높은 각도로 진입하였다가 폭발하여 산화하였다. 6호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같은 달 22일 담카와 크라사프카라는 두 마리의 개를 태운 스푸트니크가 발사되었으나, 로켓 결함으로 준궤도 비행만 수행한 후 귀환하였다. 결국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소련 당국에 의해 스푸트니크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차젤리 스푸트니크 호 (스푸트니크 7호)
1961년 2월 4일에 발사되었다. 금성탐사를 위한 관측기를 탑재하고 있었으나 분리에 실패하였다.
.베네라 1호 (스푸트니크 8호)
1961년 2월 12일에 발사되었다. 베네라 계획의 첫 탐사선인 베네라 1호를 성공적으로 분리하였다. 베네라 1호는 금성에 10만km 이내의 근접 비행에 성공하였으나 데이터 전송에는 실패하였다.
.코라블-스푸트니크 4호 (스푸트니크 9호)
1961년 3월 9일 무게를 맞춘 우주인 모형과 개 체르누쉬카, 그리고 생쥐와 기니피그를 싣고 지구 궤도를 한 바퀴 돈 뒤 성공적으로 귀환하였다.
.코라블-스푸트니크 5호 (스푸트니크 10호)
1961년 3월 25일에 발사되었으며 우주인 모형과 개 즈뵤즈도쉬카, 그리고 촬영장비와 과학장비를 싣고 발사되었다. 역시 지구 궤도를 한 바퀴 돈 뒤 무사히 귀환했다.
이후 소련은 보스토크 계획을 실현,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지구 궤도에 오름으로서 미국을 다시 한 번 엿먹이며, 그 후로도 우주 경쟁에서 독주한다.
스푸트니크 11호~18호는 소련 당국에 의해 그 존재가 은폐되었으며, 서방의 관측자들에 의해서 순서대로 이름이 붙여졌다. 18호 이후 스푸트니크는 25호까지 발사되었으나, ‘마스 1호’로 명명된 23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기권 밖으로 떠나지조차 못했다. 그 마스 1호조차 화성에 접근하기 전에 파괴되었다.
11호부터 소련 당국은 위성에 스푸트니크라는 이름을 더 이상 붙이지 않았고, 대신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우주시대의 지평선을 연 소련이 스푸트니크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이 공중분해된 뒤였다. 1997년 10월 5일 바이코누르에서 다른 몇 개의 위성과 함께 소유즈 로켓에 실려 발사된 스푸트니크 40호는 11월 3일 미르 우주정거장에서 조립되어 궤도에 안착하였다. 스푸트니크 40호는 PS-2, Radio Sputnik 17 (RS-17)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위성은 사실 스푸트니크 1호 발사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와 프랑스 학생들이 만든 스푸트니크 1호의 1/3 사이즈 축소 위성이었다. 스푸트니크 40호는 1997년 12월 29일 연락이 두절되었고, 1998년 5월 21일 대기권에 진입하여 소멸하였다.
발사까지 우여곡절이 있었고 당시 최첨단 기술이 총동원되었을 스푸트니크 1호를 비록 축소형이지만 40년이 지난 후 학생들이 뚝딱뚝딱 만들어내어 기념으로 우주에 올리는 모습이 참으로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