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월 30일, 오스트리아의 공학박사로 폭스바겐과 포르쉐의 창업주 페르디난트 포르셰 (Ferdinand Porsche, 1875 ~ 1951) 별세
페르디난트 포르셰 (Ferdinand Porsche, 1875년 10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현 체코> 보헤미아 왕국 브라티슬라비체 나트 니소우 ~ 1951년 1월 30일, 서독 슈투트가르트)는 독일의 기계공학자이자 폭스바겐 및 포르쉐의 창업자이다.
메르세데스-벤츠에도 일부분 관여했으며, 하이브리드 자동차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현대의 자동차 기술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여, 1999년에는 “세기의 자동차 전문가”로 인정되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나치 독일 체제에 적극 협조하여 나치당 입당 및 전차 제조나 V1의 개발을 해서 2차대전이 끝난 후 말년에는 옥살이를 했다.
– 페르디난트 포르셰 (Ferdinand Porsche)
.출생: 1875년 10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현 체코) 보헤미아 왕국 브라티슬라비체 나트 니소우
.사망: 1951년 1월 30일 (향년 75세), 서독 슈투트가르트
.배우자: 알로아시아 요한나 카에스
.자녀: 루이제 피에히, 페리 포르셰
.창업: 포르쉐, 폭스바겐
*소속
前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기계공학과 석좌교수
前 오스트리아 빈 공과대학교 기계공학과 전임교수
前 독일 뮌헨 공과대학교 기계공학과 초빙교수
*슈츠슈타펠 (1937년 ~ 1945년) 복무
.계급: 일반친위대 상급대령 (상급지도자)
1875년 체코 주데텐란트 라이헨베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계공학에 상당한 능력이 있었다.
그는 1930년 수평대향식 엔진을 장착한 ‘국민차’라는 뜻을 가진 폭스바겐 비틀 (Volkswagen Beetle)을 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의 탱크 티거 1과 티거 2 등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티거 포르쉐, 페르디난드 등).
하지만 이로 인해 전범으로 몰려 종전 후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복역해야 했고, 그런 와중에도 스포츠카의 디자인을 계속했으며, 초대 비틀의 플랫폼으로 포르쉐 356을 설계했다.
폭스바겐 비틀은 이후 폭스바겐과 포르쉐를 이어 준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는 1951년에 뇌졸중으로 별세하였다.
○ 생애 및 활동
- 젊은 시절
아주 어렸을 시절에도 기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낮에는 아버지의 기계점에서 일을 도우며, 야간에는 현재 체코에 위치한 리베레츠에 있는 황국기계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주경야독식 생활을 이어 나가다가 Béla Egger라는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 후에는 지역 대학교에서 기계에 관련된 수업을 들은 것이 그가 배운 기계학의 전부였다고 한다.
- 포르쉐의 창업
1931년까지 그는 벤츠 등에서 일하다가, 슈투트가르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자동차 회사인 포르쉐를 창업하기에 이른다. 회사는 꽤 잘 되었고, 1934년 그는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의뢰한 “대중 (Volks)을 위한 자동차 (Wagen)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아들여 폭스바겐 (Volkswagen) 비틀을 설계하게 된다.
포르셰 박사는 곧 아돌프 히틀러에게 “위대한 독일 공업자” 라는 명칭까지 받았으며, 그해에 독일 시민권 또한 받는다.
그에 감명받았는지, 전쟁은 옹호하지 않고 그냥 사업상 필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37년에 그는 나치당에 가입하게 된다.
- 히틀러와의 친목
이 사진은 1939년 4월 20일 히틀러의 50번째 생일에 찍은 사진이고,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히틀러에게 차를 선물했다.
위에서 보듯이 1930년대부터 그들의 만남은 시작되었는데, 포르셰 박사는 히틀러와 뜻이 잘 맞았는지 그와 굉장히 친하게 지낸 듯하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사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마도 특출난 기술을 통해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싶었던 히틀러와 독창적인 시도를 즐겨하던 포르셰의 스타일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심지어 히틀러는 체코의 자동차 제조사인 타트라의 차량들을 매우 좋게 보고 포르쉐에게 국민차 개발목표를 제시했는데 포르쉐가 타트라의 T97을 그대로 베껴 폭스바겐 비틀을 만들게 되었을 정도였다. 1937년 슈츠슈타펠에 입대하여 상급대령까지 승진한다.
- 전차 개발
그가 개발한 전차 중 대표적인 것은 6호 전차 티거의 프로토타입이나 그 차체로 만든 대전차자주포 페르디난트 / 엘레판트, 초중전차 마우스 전차 등이다. 이중 엘레판트는 대체적으로 활약상과 카탈로그 스펙 자체는 굉장히 훌륭한 전차라고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전차 전문가들은 그의 업적을 높이 치지 않는다. 주로 그 하이브리드에 대한 집착을 자동차뿐만 아니라 전차에까지 접목하려 했다는 것이 그의 폐단이었으며 그가 만든 전차들은 기동성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히틀러와의 친분이 있었음에도 6호 전차 티거의 차체 결정 경합에서 그가 만든 버전이 떨어졌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심각할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타사 차량의 부품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언을 하기도 하는 등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 말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그는 프랑스에서 폭스바겐의 제조를 계속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동년 12월에 포르셰는 전범으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고, 1948년에 보석금을 내고 출소, 이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체포 후 그에게 은행은 돈을 빌려 주지 않았고, 회사 또한 미국의 엠바고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아들인 페리 포르셰가 335의 생산라인 중 하나를 받아내고 비틀의 엄청난 로열티를 받아 가며 삶을 이어갈 수 있었으며, 페리가 그렇게 모은 돈으로 보석금을 지급하여 페르디난트가 출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에 발작이 일어나 쓰러진 뒤 회복하지 못하고 1951년 1월 30일에 별세했다.
○ 가족관계
페르디난트 포르셰는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장남인 페리는 슬하 4남을 두었다.
페리의 장남이자 페르디난트의 장손인 부치 (풀 네임은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셰)도 포르쉐에서 일하다가 “포르쉐 디자인”이라는 명품 브랜드 회사를 설립하여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페리의 넷째 아들인 볼프강 포르셰는 현재 포르쉐 AG의 회장이다.
딸인 루이제는 폭스바겐 공장을 운영하던 안톤 피에히와 결혼 3남 1녀를 두었다.
그 중 차남인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포르쉐, 아우디 엔지니어를 거쳐 훗날 폭스바겐 그룹 회장을 역임했다.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2019년 8월 26일에 별세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