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제2차 인문학여행 (17)
이집트 역사와 문명 : 제2차 인문학여행지를 중심으로
인류의 최초 4대문명을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으로 꼽 는다. 모든 인류 문명의 발생지에는 공통적으로 강이나 하수를 끼고 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인류가 수렵 채취 생활에서 농사를 짓는 경작문화로 발전하면서 발생한 자연 스러운 현상이었다.
브레이드 우드 (R. J. Braidwood)와 하우 (B. Howe)는 그들이 공저한 책 <이라크 쿠르드 지역의 선사시대 연구>에서, “농업은 현생인류가 초기에 원시적인 문명을 열었던 근동 지역에서 시작되었으며, 발생학적 연구가 고고학적 발견을 뒷바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학자들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과 식물에 대한 발생학적 연구를 통해 인류가 맨처음 재 배한 농산물이 보리와 밀이었다는 데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나일강
나일강의 이름인 ‘나일’은 ‘강’이라는 뜻의 고대 셈어 나헬 (nahal)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강을 뜻하는 나할 ‘nachal’ (히브리어 נח”ל)의 어원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나일강을 이테루 (jtrw) 또는 하피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냥 ‘강’이라는 뜻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나일강이 자신들이 아는 강의 전부였으므로, 이후 이 단어는 크다는 뜻의 ‘아’가 붙은 이테루-아 (jtrw)의 형태로도 쓰였다. 그러다가 이것이 콥트어에서 이아로(ⲓⲁⲣⲟ)로 변형되었는데, 나일강의 경우에는 남성형 정관사 “프”가 붙어 피아로 (“The River”)라고 불렸다.
나일강은 일반적인 다른 강에서는 찾기 힘든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정기적으로 (regular) 범람한다는 것이다. 비가 많이 오면 강은 당연히 범람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나일강은 ‘정기적’으로 범람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정기적으로 범람한다는 것은 예측가능하다는 것이고, 그리고 정기적으로 범람하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 인들은 강의 범람후 어떤 일이 생기는지 지식들이 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강의 범람이 가져오는 풍부한 토양은 문명의 발달을 가져오게 된 원인이 된다.
나일강의 범람은 영양소가 풍부한 부엽토, 부식토를 하류 이집트에 가득 옮겨주고, 홍수에 잠겼다가 드러난 땅은 농사의 지력을 매우 높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나일강의 범람 시기는 인간이 확실하게 예측이 가능하므로 물이 많아져도 닿지 않는 쪽에 주거지를 만들고, 강물이 늘었다가 다시 줄어들면 잠겼던 땅에 농사를 지으면 작물이 쑥쑥 잘 자라게 된다. 7월에 작물을 수확하면 빈 농지에는 다시 홍수가 내려와서 지력을 보충해 준다.
그리고 이런 범람은 다른 특징도 있다. 나일강 유역은 비와 같은 강수량 자체는 적어서 농사를 하려면 물을 끌어다가 쓰는 관개농업 (주1, 농작물이 자라기에 좋은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경작지에 물을 대어 하는 농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관개 농업을 장기간 행하면 지력 소모뿐만 아니라 토지에 소금이 쌓이는 염해가 발생할 수 있다. 한때 나일강 유역만큼이나 번성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현대에 사막으로 변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나 나일강 유역은 강이 주기적으로 범람하면서 이런 소금을 씻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기 때문에 염해를 방지할 수 있었고, 이러한 천연의 농사짓기 좋은 환경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이집트 문명이 꽃 피우게 된 것이다.
나일강의 범람의 이유는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의 계절성 폭우 때문인데, 봄철에 에티오피아 에 폭우가 내리면 5 월경부터 나일강 상류에 홍수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이 홍수는 6 월에 수단 하르툼에 도달하고 9월 아스완, 10월 카이로에 도달한다. 11월이 되면 수위가 낮아지 면서 갈수기에 접어드는데 갈수기의 수량은 홍수기의 60 분의 1에 불과하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세 4 세가 군대를 이끌고 최초로 이집트 영역을 벗어나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원정을 했을 때,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한 이집트인들이 보고 가장 놀란 것은 거꾸로 흐르는 이테루 (강)였다. 당시까지 남에서 북으로만 흐르는 나일강 (이테루) 만 보다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이와 같은 강의 흐름 방향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세계관에서는 아주 중요하다. 북쪽이 위쪽으로 표기된 지도에 익숙한 현재 우리들은 상/하 이집트 개념을 북쪽이 상이집트, 남쪽이 하이집트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지도상 나일강 아래쪽에 위치한 남쪽이 상 이집트, 위쪽인 북쪽이 하이집트이다.
즉, 나일강이 흐르는 방향은 현대의 나침반처럼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지리적 방향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지리적 방향 개념은 상류 방향 (남쪽) /하류 방향 (북쪽)의 두 방향뿐이었다는 설도 전해져 오고 있다. 그리고 이집트의 지리적 특성상 강 유역은 농업이 가능한 비옥한 땅이지만, 강에서 조금만 떨어지면 거주가 불가능하고 인간이 생존하기에 극히 곤란한 사막이 시작되니, 지리적 차원에서는 동, 서 방향은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나일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하면서 많은 양의 퇴적토를 나일강 하류 연안으로 가지고 옴으로, 농업 생산력이 높아져 고대 이집트 문명을 번영시켰다. 또한 강의 주기적인 범람을 예측할 필요성이 크게 작용하여 이집트에 천문학과 역학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범람을 주기 예측하고 범람으로 인한 토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측량술과 수학이 발달했다. 이로 인해 나일강의 신인 하피가 인간이 수학을 하게 만들었다고도 전해져 온다. 비록 이집트만큼 영향력이 크진 않았지만, 수단과 에티오피아에서도 이른 시기에 문명과 국가가 발흥한 것 역시 이집트의 영향과 나일강 덕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해 강가에 쌓이는 퇴적토는 굉장히 비옥했으며, 농부들은 범람이 끝난 후 씨앗을 대충 뿌린 후 소와 돼지를 풀어 씨를 밟아 모종을 했다. 게다가 기온마저 온화 한 지역이다 보니 이렇게 대충 심기만 해도 엄청난 양의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일강의 농민들은 사실상 씨를 뿌리고 수확만 하면 되었기에 다른 지역의 농민들에 비해 일하기가 굉장히 쉬웠으며 수확기까지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너는 네 떡(식물)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도서 11:1)
이러한 잉여 기간 동안 농민들은 국가의 각종 건축 사업 등에 참여하여 추가 소득을 얻을 수 있었고, 덕분에 이집트는 피라미드를 비롯해 압도적인 규모의 국가적 유적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이런 나일강의 중요성은 현대에도 여전해서, 아래에 언급하듯이 이집트는 나일강의 물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대 이집트의 인구 분포 역시 거의 대부분이 나일강 유역과 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집트의 역사
이집트의 역사를 집대성한 사람은 이집트가 그리스(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던 프톨레마이 오스 왕조시대의 제사장 마네토 (Manetho) 이다. 마네토는 이집트의 역사를 크게 고왕국 (Old Kingdom), 중왕국 (Middle Kingdom), 신왕국 (New Kingdom) 시대로 분류하고 각 시대별로 다시 30개의 왕조로 세분했는데 이와 같은 그의 왕조 분류법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기원전 5000년경부터 이집트에서 농경과 목축이 처음으로 시작되면서 나일강을 따라 초기 거주지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 거주지 중 일부는 정치적 중심지로 부상하였으며 이에 따라 주변 지역을 복속시키거나 통합하면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크게 두 시대로 나뉜다. 연표의 가장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선왕조 시대 (Predynastic Period)는 선先왕조라는 이름 그대로 ‘왕조시대 이전의 시기’라는 의미이다. 이 시기 동안 이집트에는 아직 국가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시기 는 문자기록이 시작되지 않은, 즉 ‘선사 시대’인 것이다. 학자들은 선왕조 시대의 시작을 대략 기원전 7000-6000년전 정도로 잡기도 한다.
왕조 시대는 대략 기원전 3100년경 제 1왕조의 전설적인 왕 메네스 (Menes)가 상하 이집트를 통합하여 중앙 집권적인 통일국가를 이룬 후 약 400년 간 초기 왕조시대가 이어 졌다. 메네스는 이 상하 이집트의 경계인 멤피스 (Memphis)에 (주2,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20km 떨어진, 헬완 부근 나일 강 서안에 있는 이집트 고왕국 시대의 수도. 고왕국 시대가 기원전 32~22 세기이므로, 지금으로부터 약 5000 년 전에 수도 역할을 한 곳이다. ‘멤피스’라는 이름은 그리스식 명칭으로 고대에는 ‘이네브 헤지 <Ineb Hedj>’라고 불렸다. 현대 이집트에서는 미트 라히나 ( ميت ) رهينة 라 부른다. 성서에서는 멤피스를 놉이라 부르며 통일 이집트 최초의 수도로서 제6왕조 시대까지 번영하였다) 통일 이집트의 수도를 건설했다. 이집트의 역사과정 속에서 정치적 중심지는 종종 바뀌기도 했지만, 멤피스가 갖고 있는 수도로서의 상징성은 3000여년 내내 유지되었다.
△ 고왕국 제1왕조(초대? /2대?) 파라오 메네스 △ 카이로 남쪽 20Km 지역
마네토에 의하면 메네스는 8 명의 파라오가 재임한 이집트 제 1왕조를 창시하였고, 62년간 파라오로 재임했다. 메네스는 나일강에 거대한 제방을 쌓아 만든 매립지인 멤피스를 건설하였는데, 멤피스는 이집트 초기왕조 (1~2왕조)부터 이집트 고왕국까지 (3~6왕조)의 수도였다. 마네토는 메네스의 해외 원정을 얘기했고, 디오도로스는 메네스가 최초의 입법자 이며 신성한 숭배를 창시하였다고 말했다. 플리니우스 (Plinius)는 메네스가 문자를 발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력하고 아름다운 동물로서 황소는 다른 여러 문명에서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다. 특히 이집트에서 황소 및 황소의 뿔은 선왕조 (제 1왕조 이전의 왕조) 이래 숭배적 중요성을 지닌 것이었다. 파라오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수많은 황소 숭배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피스 (Apis)의 황소 숭배였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메네스는 멤피스에 광대 한 프타 (Ptah) 신전을 건립했다고 하는데, 아피스는 프타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기원전 2575년경부터 고왕국 시대가 시작된다. 고왕국 시대는 강력한 왕실의 후원 아래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고 화려한 왕실문화가 꽃피는 한편, 사카라 (Saqqara), 메이둠 (Meidum), 다슈르 (Dahshur), 기자 (Giza) 지역에 거대한 피라미드가 건립되면서 “피라미드 시대”가 열리게 된다.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
조세르는 이집트 고왕국을 개창한 제 3왕조의 초대 파라오였다. 조세오는 왕위에 올라 19년, 혹은 38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집트를 다스린 파라오로서 역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건축학적으로 더 중요한 파라오이다. 그 이유는 피라미드식 무덤을 만든 최초의 파라오였기 때문이다. 조세르 이전까지의 파라오들은 ‘마스타바’라고 불리는 직육면체 형태의 건물에 묻혔다. 하지만 조세르는 마스타바들을 층층이 쌓아올려 계단식 형태의 무덤을 만들었고, 결과적으로는 제 4 왕조, 제 5 왕조 등 후대까지 전해져 내려가는 피라미드식 무덤의 규범을 최초로 창안했다.
△ 이집트 사카라(Sakkara) 지역에 있는 조세르왕의 계단식 피라미드
기자의 대 피라미드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BC (기원전) 26세기경 이집트 고왕국 제 4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쿠푸 왕의 재위기에 지어졌다. 정확한 건설연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대략 기원전 2700 년에서 2500 년 사이에 대피라미드를 지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피라미드의 건축목적은 단순한 기념비, 정교한 천문대를 비롯해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고고학계에서는 쿠푸왕의 무덤이 가장 유력한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쿠푸 왕 사후 카프레, 멘카우레 등의 후계 파라오들이 쿠푸왕의 피라미드 곁에 자신들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의 황금기였던 제 4 왕조가 끝난 이후, 더이상 이집트에서는 이처럼 거대한 크기의 피라미드들이 지어지지 않았다. 후대의 중왕국, 신왕국의 파라오들은 지나치게 경비가 많이 드는 피라미드 대신 왕가의 계곡에 무덤을 파서 제 관과 미라를 안치하는 방법을 택했다.
BC 5세기경에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해 피라미드를 관광하고 돌아갔다. 헤로도토스는 곁의 이집트 신관 (제사장), 관리들의 증언을 토대로 자신 의 저서 ‘역사’에 피라미드에 대해 기록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는 이미 대피라미드가 지어진지 2,000년이 넘은 시점이었기에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부정확 한 내용들이 많다.
△ 고대의 추정 3D 재현도. 맨 오른쪽의 피라미드가 쿠푸의 대피라미드
△ 기자의 피라미드 오른쪽부터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 카프레왕 / 멘카우레왕
이집트 중왕국 시대
그러나 고왕국 말기 왕권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중앙정부의 힘이 약화되고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이집트는 기원전 2134년경부터 내분기인 제 1중간기 (First Inter – mediate Period)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BC 2050년경 상이집트 출신의 멘투호텝 2세 (Mentuhotep II)가 이집트를 재통일 하면서 제 1중간기가 끝나고 중왕국 시대가 시작된다. 멘투호텝 2세는 제 1중간기를 거치 면서 지나치게 강화된 지방 귀족들과 신전들의 힘을 빼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했다. 방방곳곳에 지방관들을 파견하여 토후들의 세력을 견제했으며, 귀족들 간의 알력 다툼에 불을 붙이는 등 여러 방법을 통해 제 1중간기 시절 땅에 떨어졌던 파라오의 권위를 다시 끌어올렸다.
멘투호텝 2세의 이 같은 노력 덕분에 제 11왕조의 파라오들과 후대의 제 12 왕조의 파라오들은 훨씬 안정적인 치세를 펼칠 수 있었다. 중왕국 시기의 수도는 멤피스보다 상당 히 상류에 있는 테베 (오늘날 룩소르 Luxor)로, 이 시기에는 파라오는 아메넴헤트 1세 이후로는 세누스레트 (Senusret)라는 이름을 물려 사용했으며 (1세 ~ 3세), 고왕국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간에 가까워졌으며 아몬라 (아몬 + 라) 신앙을 바탕으로 사제 계급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제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는 수많은 정복 활동들을 통해 나중에는 유럽으로 친정을 떠났다는 전설이 남을 정도로 중왕국의 영토를 넓혔고, 그의 뒤를 이은 아메넴헤트 3세는 거대한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짓고, 중왕국의 문화예술 발전에 심혈을 기울이며 중왕국의 최전성기를 찍었다.
그리고 이전의 조각상들이 주로 지배층이나 왕족만의 고유품이었던 것에 반해, 이때의 조각상들은 일반인에게까지 전파되어 주로 무덤을 장식하는 용으로 사용되었다.
△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블락 (Block) 조각상 (뉴옥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뿐만 아니라, 이전의 조각상들이 주로 전신, 즉 서있는 모습의 방식이었던 것에 반해, 중왕국시대는 앉아 있거나, 쭈그리고 무릎을 안고 앉아 있는 형태의 블락 (Block: 받침이 있는) 조각상이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역동적인 조각상의 형태는 이후 신왕국 시대까지 이어지게 된다.
특히 이 시대에 사용된 중기 이집트어 (Middle Egyptian)는 이후 수천 년에 걸쳐 이집트의 표준 문어체로 사용되게 되었다. 중왕국 시대 말기부터 하이집트 삼각주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힉소스인’이 제 12왕조 말기의 혼란기를 틈타 하이집트를 지배하게 된다.
‘힉소스 (Hiksos)’인들이 이집트의 풍습과 전통을 받아들여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이집트는 “힉소스”의 지배를 받는 하이집트와 토착 왕조가 다스리는 상이집트로 양분되면서 또 다른 혼란기인 제 2중간기 (Second Intermediate Period)를 맞이한다.
△ 힉소스(왼쪽)와 이집트인 (오른쪽)의 묘사 / 힉소스 지도자는 “외국땅 (이방인)의 통치자”로 분류된다
이집트 신왕국 시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는 BC 1550년부터 BC 1077년까지 지속된 제 18왕조부터 제 20왕조까지가 신왕국에 해당한다. 한때 번영하던 이집트 중왕국은 힉소스인들의 침략으로 멸망했고, 힉소스인들이 나일 하류의 하이집트를 차지하고 제 15왕조를 세우면서 제 2중간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결국 이집트 원주민들이 세운 제 17왕조의 왕통을 이은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이집트 신왕국을 세우면서 제 2중간기의 혼란을 잠재웠다.
신왕국의 첫 왕조인 제 18왕조의 초대 파라오 아흐모세 1세는 약 25년 4개월 동안 재위하며 힉소스인들이 휩쓸고 간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흐모세 1세는 힉소스를 몰아낸 다음 남쪽에서 이집트를 괴롭히던 누비아 (Nubia: 현재의 수단지역) 인들마저 물리치며 국경을 안정시켰다. 외치가 안정되자 오랜 기간 동안 관심 밖에 있었던 예술과 문화에도 관심을 돌렸다. 하이집트 일대의 대신전들을 복구함과 동시에 제 2 중간기 이전에 건축을 시작했으나 전쟁 때문에 중지된 사업들 역시 재개했다. 태양신 아문에게 바치는 신전, 지식의 신 프타에게 바치는 신전들을 지어 전통적인 신들의 권위를 높였고 테베를 수도로 삼아 전국을 평정하는 등 신왕국이 번영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는 업적을 남겼다. 기원전 1524년에 아흐모세 1세가 사망하자 아들 아멘호텝 1세가 새로운 파라오가 되었다.
신왕국 시대는 특히 개성 넘치는 파라오들이 많이 배출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집트가 대제국이 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투트모세 1세 (Thutmose I: BC 1504-1492년)로 시작하여 강력한 여성 파라오로 이집트를 번영으로 이끈 하트셉수트 (Hatshepsut: BC 1473-1458년), 이집트의 정복왕으로 불리는 투트모세 3세 (Thutmose III: BC 1479-1425년), 제국의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역사상 가장 찬란한 궁정문화를 누렸던 아멘호텝 3세 (Amenhotep III: BC 1391-1353년), 인류 최초의 종교개혁을 주도한 아멘호텝 4세 / 아케나텐 (Amenhotep IV / Akhenaten: BC 1353-1335년) 등이 있다.
△ 하트셉수트 여왕 Hatshepsut: BC 1473-1458년 △ 투트모세 3세 Thutmose III: BC 1479-1425년
△ 아멘호텝 3세 Amenhotep III: BC 1391-1353년 △ 투탕카멘 황금마스크 Tutankhamen: BC 1333-1323년
그리고 1922 년 자신의 무덤이 도굴되지 않고 완벽하게 유지된 상태로 발굴되면서 가장 유명한 파라오의 반열에 오른 소년왕 투탕카멘 (Tutankhamen: BC 1333-1323년), 그리고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파라오 중의 파라오” 람세스 2세 (Rameses II: BC 1290-1224년) 등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유명한 파라오들이 모두 이 시기에 배출되었다.
△ 투탕카멘의 관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신왕국 시대는 무려 500여 년 가까이 지속되었는데, 현명한 성군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이집트의 국력과 부는 그 정점을 찍었고, 아부심벨이나 카르낙 대신전 등 우리가 아는 유명 한 고대 이집트의 신전이나 건축물들 대부분이 이때 지어졌다.
화려한 신왕국 시대도 왕권의 약화와 함께 종언을 고하고 이집트는 다시 한번 남북으로 분열되면서 혼란기로 접어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제 3중간기 (Third Intermediate Period)이다.
내분과 함께 이집트는 또한번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되는 데 신왕국 시대 후기부터 하이집트 지역에 집단 거주하기 시작한 리비아 인들과 남쪽 누비아에서 발흥한 쿠쉬 (Kush) 왕조 등이 번갈아 가며 이집트를 지배하게 된다. 이어 나일 삼각주에 위치한 사이스 (Sais)에 근거지를 둔 제 26왕조 시대에 이르러 이집트는 정치, 경제, 외교,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부문에서 마지막 번영의 시대를 구가하지만 페르시아의 침입을 받으며 이 번영의 시대는 갑작스레 막을 내리고 만다.
제 30왕조 (기원전 380-343년)의 왕들이 이집트 왕가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지만 BC 343년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완전히 정복하면서 제 3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넥타네보 2세 (Nectanebo II: BC 360-343년)를 끝으로 이집트인 파라오가 다스리는 왕조시대는 마침내 종언을 고하고 만다.
카르낙 신전 (Karnak Temple)
카르낙 신전은 룩소르 신전 북쪽 3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 신전은 현존하는 신전 가운 데 최대 규모의 신전이다. 카르낙은 옛 테베의 북쪽 절반을 지칭하는 지명으로, 그곳에 아몬 대신전을 중심으로 몬트, 무트 신전의 세 신전으로 구성된 신전군을 통틀어 카르낙 신전이라 한다. 다만 현재 몬트 신전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무트 신전 역시 일부만 잔존한다. 원래 카르낙은 ‘요새화된’ 이란 의미인 아랍어 쿠르낙 خورنق 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당시 지명은 ‘아문의 집이란 뜻인 페르아문 (신왕국 시기) 혹은 ‘제일 선택받은 곳’이란 의미인 이브트 수트 (중왕국 시기)로 불렸다.
카르낙 신전은 중왕국 시대부터 프롤레마이오스 왕조까지 2000년에 걸쳐 세워진 신전으로 유명하지만, 대부분의 건축물은 신왕국 때 세워졌다. 중왕국 시대에는 테베의 주신인 아문을 모시는 작은 신전만 있었다가, 신왕국 시대에 들어서 아몬이 주신이 됨으로 대대적으로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신왕국의 첫 왕조인 제 18왕조 시대에 카르낙 신전은 크게 증축 작업을 거듭했는데, 아멘호텝 1세는 방주의 사원과 탑문을 봉헌했으며 투트모세 1세는 신전 주변에 거대한 벽을 둘렀다. 하트셉수트 여왕은 14개의 파피루스 모양의 기둥들과 오벨리스크를 건설했고 투트모세 3세는 주위에 벽을 쳐 이를 가렸다.
특히 투트모세 3세는 카르낙 신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유명한데, 거대한 탑들을 세우고 근처에 신성한 호수를 넓게 파서 만들었다. 투트모세 3세는 카르낙 신전의 확장에 열심을 내어 많은 건물들을 연이어 세우고 신전의 크기는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또한 신전의 중심부를 구성하는 ‘투트모세 3세의 연회장’이 이때 지어졌다.
△ 아몬 대신전의 열주 △ 카르낙 신전 입구의 스핑크스의 거리
그러나 아톤을 유일신으로 섬기려는 ‘종교개혁’ 군주 아멘호텝 4세에 의해 얼마간 파괴되었 으나 후계자인 투탕카멘 때부터 다시 복원되었고, 람세스 2세 시대에 다시 대대적으로 증 축되었다.
신왕국 시대의 전성기인 제 19왕조에 들어 카르낙 신전은 폭발적인 확장 작업에 들어갔다. 특히 제 18왕조 시대에 착공에 들어간 대열주실이 이때 완공되었다. 세티 1세와 건축왕 람세스 2세가 연달아 즉위하면서 카르낙 신전에 대해 많은 관심을 쏟았고 특히 람세스 2세는 자신의 승리와 업적들을 새긴 기념비와 벽화들을 수도 없이 많이 남겼다.
람세스 2 세의 후계자 메르넵타 역시 바다 민족들과 싸운 자신의 공로를 카르낙에 새겨 놓아 포로와 전리품들을 싣고 테베로 귀환하는 왕의 모습을 새겼다. 메르넵타의 아들 세티 2세도 자신의 업적을 카르낙에 남기는 데에 열심이었다.
△ 왼쪽 하트셉수트의 오벨리스크 (29.6m/325톤) / 오른쪽 투트모세 1세의 오벨리스크. (23,2m/143톤)
물론 람세스 2세 시절의 전성기만큼의 국력이 아니었기에 이전처럼 거대한 건축물들을 따로 세우거나 확장 작업을 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새긴 2개의 작은 오벨리스크 들을 두 번째 탑문 바로 뒤에 세우거나 방주의 신전을 따로 건립하기도 했다. 최전성기에는 카르낙 신전이 관리하는 도시는 무려 65 개나 되었고, 인구도 8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뿐만 아니라 이때 이미 조선소까지 가지고 있었다.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은 모두 카르낙 신전에서 즉위식을 하였다.
룩소르 신전 (Luxor Temple)
룩소르 신전의 위치는 현재 이집트 룩소르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테베의 동쪽 뱅크에 자리잡고 있다. 룩소르 신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대략 신왕국시대인 아멘호텝 3 세의 재위기간인 BC 1400년쯤에 건설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람세스 2세는 룩소르 신전 건축에 크게 기여하여 추가적인 구조와 장식을 추가했다.
룩소르 신전은 원래는 ‘남쪽 성소’라는 뜻의 ‘이페트 레시트’라고 불렀다. 카르낙 신전과의 차이점이라면 신에 대한 숭배가 중심인 카르낙 신전과 달리 룩소르 신전은 파라오의 왕권 강화적인 목적이 더 강했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파라오들이 룩소르 신전에서 대관식을 치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멘호텝 3세는 룩소르 신전을 처음 건설하여 지성소와 내부 광장, 다열주홀을 세웠고, 후대인 람세스 2세는 추가로 탑문과 입구 쪽 광장을 건설했다. 그 후 람세스 2세 외에도 수많은 파라오들이 공사를 진행했는데,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도 룩소르 신전에 조금씩 건물들을 덧붙였다.
△ 룩소르 신전의 외부 전경 모습 △ 람세스 2세를 상징하는 석상
룩소르 신전의 주요용도는 테베의 신인 아몬 (Amun)의 축제, 특히 오페트 축제를 기리기 위한 장소로 주로 사용되었다.
오페트 축제는 고대 이집트에서 매우 중요한 종교적 행사 중 하나였다. 이 축제는 룩소르 신전에서 시작되어, 테베의 카르낙 신전까지 진행되었다. 행사의 주요 부분은 아몬, 무트, 그리고 쿤수와 같은 주요 신들의 신상들을 룩소르 신전에서 이동시켜 카르낙 신전까지 행진하는 것이었다. 이 행진은 신들의 신성함과 그들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의식이었으며, 또한 이 행사는 신들이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이 행진은 신들의 재탄생과 세계의 순환을 상징하기도 했다. 룩소르와 카르낙의 두 신전은 룩소르 도시의 중심부에서 대략 3km 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이 두 신전을 연결하는 대로에서는 당시 많은 종교적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후 룩소르 신전은 알렉산더 대왕 시절을 거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사원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멸망과 함께 고대 이집트 종교의 쇠퇴, 그리고 이집트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룩소르 신전은 점차 사람들에게 멀어졌고, 중기 로마시대에는 작은 콥트 교회가 사원 안에 들어서기까지 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가 들어서고 이슬람교가 새롭게 유입되자 룩소르 신전 유적 위에 모스크가 세워졌지만 거대한 규모는 아니었다. 그 후 룩소르 신전은 점차 모래 속에 덮여가는 유적 정도로 취급되었다.
△ 이집트의 여성 파라오인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그러다가 1800년대에 이르러 무너진 잔해들과 그 위에 쌓인 모래들이 겹치고 겹쳐져서 유적 전체에 높이가 15m에 달하는 거대한 언덕을 이루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룩소르 신전은 유적 전체의 4분의 3정도가 모래언덕에 묻혔다.
이렇게 언덕 아래에 묻혀 있던 룩소르 신전을 1884년 가스통 마스페로 교수가 이집트 당국의 허가를 받아 발굴하기 시작했고, 이후 1960년대까지 꾸준하게 발굴이 이루어지며 룩소르 신전은 예전의 위용을 보여주며 다시 지상 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 이르자 이집트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꼽히면서 국가적인 보호 관리에 들어갔고, 1975년에는 바로 옆에 룩소르 박물관이 세워졌다. 현재는 카르낙 신전과 함께 유네스코 (UNESC)의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고대 이집트의 건축과 예술, 그리고 종교적 신앙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지로 손꼽히고 있다.
주경식 교수 (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호주기독교대학 ACT 신학부 교수)
전) 웨슬리대학 · 시드니신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