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년 7월 22일 / 7월 12일,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초대 차르 미하일 표도로비치 미하일 1세 (Michael I of Russia, 1596 ~ 1645) 출생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 (Michael I of Russia, 러: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 1596년 7월 22일,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 1645년 7월 23일 <49세>,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 1596년 7월 12일 ~ 1645년 7월 13일)는 루스 차르국 제7대 차르 (재위: 1613년 2월 21일 ~ 1645년 7월 23일 / 7월 12일)이다.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개창자로, 표트르 대제의 할아버지이다.

–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 (Michael I of Russia,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
.출생: 1596년 7월 22일 / 7월 12일,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사망: 1645년 7월 23일 / 7월 13일 (49세),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부모: 표도르 니키티치 로마노프, 크세니야 이바노브나 셰스토바
.형제: 타티아나
.배우자: 마리아 블라디미로브나 돌고루코바 (1624년 결혼 / 1625년 사망), 예브도키야 스트레시네바 (1626년 결혼)
.자녀: 이리나, 펠라기아, 알렉세이, 안나, 마르파, 이반, 소피아, 타티아나, 예브도키야, 바실리
.종교: 기독교 (동방 정교회)
*루스 차르국의 차르
.재위: 1613년 2월 21일 ~ 1645년 7월 23일 / 7월 12일
현재 러시아 영토의 80%정도를 완성시킨 차르이며 아들과 손자도 영토확장을 많이 했다.

○ 생애 및 활동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 (Michael I of Russia, 러: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는 1596년 7월 22일 / 7월 12일,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에서 출생했다.
이반 4세 사후 동란 시대를 거쳐 젬스키 소보르 (전국 회의)에서 루스 차르국의 새 차르를 선출했는데, 그는 공포의 이반 4세의 첫 번째 왕비였던 아나스타샤의 오빠인 ‘니키타 로마노프’의 손자였다.
이런 일이 생긴 이유는, 혼란 시대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몰아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보야르, ‘드미트리 포자르스키’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대 보야르들과 정교회 고위 사제들이 자신만의 세력이 없는 허수아비를 찾다가 발탁 되어 차르가 되었다.

겨우 16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으며 보리스 고두노프 시절 때 수녀 되기를 강요당했던 어머니를 따라 수도원에 살았던지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주변 친척들이 대부분 정치를 담당했다.
시작 배경이 이러다 보니 손자, 표트르 1세의 시절까지 로마노프 왕조의 차르들은 대 보야르, 정교회의 집중 견제를 받아 황권이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즉위 초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스웨덴과 정전 협정을 맺었으나 그 대가로 발트해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인 잉그리아를 할양했으며 덤으로 카렐리야 일부 지역까지 할양했다.
또한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3세와도 휴전협정을 맺어 스몰렌스크 등을 양도했다.
1619년부터는 정교회 수도사였다가 폴란드로 잡혀갔던 그의 부친 ‘표도르 니키티치 로마노프’가 귀국하여 러시아 정교회의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되었고 동시에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1633년 아버지가 죽은 이후 다시 단독 통치자가 되었으나 심약하여 외척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지그문트 3세가 죽자 즉위 초 빼앗겼던 스몰렌스크를 되찾기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선전포고를 감행했으나 브와디스와프 4세에게 패하며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넘어간 영토 할양을 최종 인정하고 러시아군의 무능함만 드러내는 굴욕을 당했다.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는 1645년 7월 23일 / 7월 13일 (49세),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에서 타계했다.

○ 미하일의 정부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했던 관청들 (프리카즈)는 포솔스키 프리카즈 (외무부)와 라즈리야드니 프리카즈 (두마의 관청이자 군사 명령을 포함한 중앙적과 지방적 둘다의 행정부를 위한 인사부)였다. 그 관청들은 보야르 파벌 간의 투쟁에서 중추적일 수 있어 보야르가 아닌 디야크 (전문적 사무원)에 의하여 전통적으로 이끌어졌다.
미하일 아래 포솔스키 프리카즈의 첫 우두머리는 1618년 자신의 사망까지 표트르 트레티야코프였으며 그는 폴란드에 대항하는 데 스웨덴과 제휴하는 정책을 수행하였다. 다음의 이반 그라모틴은 친폴란드적 평판을 가졌으며 이 임명은 4번째 의 포로에서 석방을 가져오는 데 필요하였다. 1620년대 중반에 필라레트는 폴란드와 전쟁을 위하여 준비들을 시작하였으며 그라모틴은 자신의 불신에 빠져 해고를 당하고 1626년 망명하였다. 같은 운명은 에핌 텔레프네프 (1630년)과 표도르 리하초프 (1631년)에 의하여 나누어졌으며 그들도 필라레트의 호전적인 접근을 진정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1632년에 임명된 이반 그리야제프는 필라레트의 명령들을 이행하는 데 관료제의 두번째 계급으로부터 승진되었다. 필라레트와 그리야제프의 사망 후에 직위는 다시 한번 1634년 그라모틴에 의하여, 그리고 이듬해 그의 퇴직 후에 일반적인 진정 과정과 함께 리하초프에 의하여 가정되었다.
라즈리야드니 프리카즈는 처음에 시다브니 바실리예프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며 필라레트는 그의 갇힌 동료 토밀로 루고프스코이에 의하여 그를 대체하였으나 그러나 후자는 어떻게 든 그의 분노를 일으켰고 추방되었다. 1623년 표도르 리하노프는 포솔스키 프리카즈로 자신의 교대까지 프리카즈의 우두머리로 만들어졌고, 1630년 라즈리야드니는 이 직위를 30년간 차지한 뛰어난 행정가 이반 가브레네프에게 주어졌다.
3개의 다른 주요 관청들은 스트렐레츠키 프리카즈 (모스크바의 주둔군으로 지낸 스트렐치 연대들의 담당), 프리카즈 볼쇼이 카즈니 (재무장관)과 아프테카르시키 프리카즈 (사실상 보건부 “약국 사무실”로 가장 특히 차르의 건강)였다. 필라레트의 도착 후에 그들의 전직 우두머리들은 모스크바로부터 멀리 보내졌고 전체의 3개는 유능하고 자격있는 행정가로 증명하고 1642년까지 사실상 수상이었던 필라레트의 조카 이반 체르카스스키에게 주어졌다. 에르카스스키의 전체 직위들로 계승한 표도르 셰레메테프는 꽤 약한 인물이었으며 실제의 권력은 법정 알렉세이 르보프의 손에 있었다.
차르 미하일이 권력을 잡았을 때 지옥의 산물로서 지정한 키릴 토우로프스키 주교로부터 12세기의 법령 때문에 가난한 마을 사람들의 민요를 제외한 국가에서 음악이 크게 죽었으나 그는 곧 하프시코드 연주자들과 서방의 다른 악기 연주자들과 더불어 프랑스와 독일의 가수들을 초청하였고 서방의 음악이 러시아에서 유지하기 시작하였다.

○ 가족
에우독시아 스트레시네바에게 자신의 결혼 생활로부터 미하일은 10명의 자녀들을 두었다.
이리나 (1627년 4월 22일 ~ 1679년 4월 8일)
펠라기아 (1628년 8월 17일 ~ 1629년 1월 25일)
알렉세이 (1629년 3월 19일 ~ 1676년 1월 29일)
안나 (1630년 7월 14일 ~ 1692년 9월 21일)
이반 (1633년 6월 2일 ~ 1639년 1월 10일)
소피아 (1634년 9월 30일 ~ 1636년 6월 23일)
타티야나 (1636년 1월 5일 ~ 1706년 8월 24일)
에우독시아 (1637년 2월 10일; 같은날 사망)
바실리 (1639년 3월 14일; 11일 후 사망)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