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두문동 일흔 두 분
최권흥 / 다운샘 / 1999.4.30
고려말에 나라를 근심하다가 나라가 바뀐 뒤에도 절개를 지키며 새 조정의 회유에도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선비 72명을 소개한 책. 성여완, 이색, 길재, 김승길,임선미, 서견 등 72명의 생애와 문학적 업적, 사상 등을 간략하게 들려준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의 충신 72명은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면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이성계는 불을 놓았다. 제아무리 충신이라 해도 타오르는 불길 앞에선 뛰쳐나오겠거니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아무도 나오는 이 없이 모두 타죽고 말았다. 혹은 딱 한 사람만 나왔는데 그가 바로 훗날 명재상이라 일컬어진 황희였으며, 원래 73명이던 것이 그래서 72명이 되었다고도 한다. 새 왕조에 출사하기를 거부한 두문동 72현의 이 고사는 오늘날까지 꿋꿋한 절의와 충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이들로부터 두문불출(杜門不出), 즉 “문을 닫아걸고 밖에 나다니지 않는다”는 고사성어가 생겼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두문동에서 두문불출이란 말이 나온 것이 아니라, 두문불출에서 두문동이란 이름이 나온 것이다. 두문불출이란 말은 두문동 72현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널리 쓰이고 있었다.
두문동(杜門洞)은 조선 시대 송도 성거산 서쪽에 고려가 멸망하자 과거 고려의 신하 72명이 살던 곳이다. 두문불출한다하여 두문동이라고 불리었다. 간의대부 차원부가 죽은 후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성사제 등의 13명은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가시덤불을 쌓고 불을 질러 죽었다. 이들 중 맹호성, 조의생, 임선미를 두문삼절(杜門三絶)이라 부른다.

○ ‘두문동록’의 72현
‘두문동록(杜門洞錄)’ (김진근(金振根) 지음, 1928년 발행,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여조병절신칠십이인록(麗朝秉節臣七十二人錄)’에는 고려 말기 충절을 지킨 신하 72명의 이름을 적고 있다. 물론, 이들 중에는 두문동에 은거하지 않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박문수(朴門壽)
성사재(成思齋)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고천상(高天祥)
전귀생(田貴生)
이숭인(李崇仁)
전조생(田祖生)
구 홍(具 鴻). 좌시중
이맹예(李孟藝)
유 순(柳 珣)
우현보(禹賢寶)
조승숙(趙承肅)
채귀하(蔡貴河)
서중보(徐仲輔)
변 숙(邊 肅)
박 령(朴 寧)
박 심(朴 諶)
신 안(申 晏)
고천우(高天祐)
조안경(趙安卿)
정몽주(鄭夢周)
박태검(朴泰儉)
이 색(李 穡)
길 재(吉 再)
이 유(李 裕)
조 견(趙 狷)
원 보(元 寶)
이수인(李守仁)
정희량(鄭熙良)
김충한(金沖漢)
이종학(李種學)
최 해(崔 瀣)
원천석(元天錫)
김진양(金震陽)
이반계(李攀桂)
김 주(金 澍)
최 양(崔 瀁)
전오륜(全五倫)
김약시(金若時).직제학
김자수(金自粹)
이사경(李思敬)
이수생(李遂生)
조 공(趙 珙)
남을진(南乙珍). 참지문하부사
이 행(李 行). 대제학
서 견(徐 甄)
임 탁(林 卓)
이양중(李養中). 형조참의
김영비(金英庇)
송 주(宋 柱)
변귀수(邊龜壽)
윤 규(尹 珪)
김 준(金 俊)
안종약(安從約)
허 금(許 錦). 전리판서
박 침(朴 忱)
배상지(裵尙志)
국 유(鞠 襦)
이유인(李惟仁)
민보문(閔普文)
성(成)(이름 결락)
이 륜(李 倫)
차(車)(이름 결락)
엄(嚴)(이름 결락)
민안부(閔安富)
장(張)(이름 결락)
김 엽(金 燁)
설 응(薛 凝)
박 익(朴 翊)
함부열(咸傅說) 공양왕2년 예부상서
악은 심원부(岳隱 沈元符). 전리판서

○ 두문동 (杜門洞)
- 개관
두문동 (杜門洞)은 조선 시대 송도 성거산 서쪽에 고려가 멸망하자 과거 고려의 신하 72명이 살던 곳이다. 두문불출한다하여 두문동이라고 불리었다. 간의대부 차원부가 죽은 후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성사제 등의 13명은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가시덤불을 쌓고 불을 질러 죽었다. 이들 중 맹호성, 조의생, 임선미를 두문삼절 (杜門三絶)이라 부른다.
- 내용
고려 말기의 유신 (遺臣)들이 새 조정인 조선에 반대하여 벼슬살이를 거부하고 은거하여 살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려의 유신인 신규 (申珪)ㆍ조의생 (曺義生)ㆍ임선미 (林先味)ㆍ이경 (李瓊)ㆍ맹호성 (孟好誠)ㆍ고천상 (高天祥)ㆍ서중보 (徐仲輔) 등 72인이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 (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을 벗어던지고 이곳에 들어와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이 때 조선왕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고려 충신 72인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또 일설에는 동두문동과 서두문동이 있어서 동두문동에는 고려의 무신 48인이 은거하였는데 이들도 모두 산을 불태울 때 죽었다고 한다. 정조 때 조정에서 그 자리에 표절사 (表節祠)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조선 순조 때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 (成思齊)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 (杜門洞實記)』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두문불출 (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그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이를 두문동이라고 부르는 곳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