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은퇴목사 주일예배설교 (38)
주제 : <죽음 – 제 3의 이민>
오늘의 본문 : 사도행전 9장 36절 – 43절
오늘의 제목 : (38) 다비다(도르가)의 죽음 – 死而不忘者壽(사이불망자수)
다비다 (도르가)의 죽음 : 死而不忘者壽 사이불망자수 (사도행전 9장 36절 – 43절)
본문에는 다비다, 혹은 도르가라고 불리우는 한 여제자가 등장합니다. <다비다>란 유대인들의 히브리식 본명이고, <도르가>란 당시 국제적 통용어인 헬라식 이름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다비다>란 <암사슴>을 이르는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전통에 따라 예쁘고 아름다운 여성, 마음이 착하고 선한 여인, 훌륭한 일을 많이 한 여성들을 흔히 <암사슴>으로 비유하곤 했습니다. 잠언이나 아가서에는 아름다운 여인을 암사슴이나 들사슴 혹은 노루에 비유하는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도르가란 헬라어에서 <아름답다, Beautiful>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그 두 이름을 합하면 <아름다운 암사슴>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 아주 특별한 호칭이 하나 나옵니다. <여제자>란 단어입니다. 다비다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여제자>라고 불리운 여성입니다. 여기서 쓰인 이 <여제자>란 단어는 예수 부활 후 교회가 생겨나기 시작 한 다음 여성도에게는 처음으로 붙여진 호칭입니다. 이는 당시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속에서는 감히 생각도 할수 없었던 타이틀입니다.
다비다가 살고 있던 욥바라는 마을은 지중해를 바라보는 팔레스타인 남부의 해안도시로써 당시 이스라엘 남부지역에서는 가장 큰 항구도시였습니다. 요즘 지도에서는 <자파>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욥바에서 북쪽 가이사랴 까지는 <샤론 평야>라고 불리우는 제법 큰 평원이 펼치어지는데 그 중간 쯤에는 <룻다>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후 초대교회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환란과 박해를 피해 이곳 저곳으로 흩어졌는데 마침 베드로는 이방으로 나가지 않고 팔레스타인 땅 이곳 저곳으로 순회전도를 다니던 중 룻다에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룻다에서 남쪽으로 약 20km쯤 떠러진 욥바에서 사람들이 베드로를 찿아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급히 좀 욥바로 와 주십시요. 다비다가 죽었습니다” 이 말만 읽으면 다비다가 죽었으니 빨리 오셔서 좀 살려달라는 말인지, 아니면 그녀의 장례식을 치루어달라는 요청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쨌든간에 베드로는 즉시 그들과 함께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도르가의 시신이 안치되어있던 다락으로 올라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그녀의 시신을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하면서 그녀를 살려낸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다비다의 일생을 오늘 성경 36절은 한 마디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여인>이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39절에서는 죽은 다비다를 찿아온 베드로 앞에서 여러 지인들과 과부들이 <서서 울며 도르가가 살아있을 때에 지어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주었다>고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살아있을 때 잘해야하는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죽은 나를 보면서 무슨 말을 할까?”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평소, 그가 살아있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홍목사님, 참 설교 는 잘했지! 참 목회는 열심히 하셨지! 나 그이에게서 세례를 받았어! 우리 아이들 결혼식 주례도 해 주셨어! 우리 부모님 장례식도 치뤄주셨어!” 아마도 그런식의 비슷한 말은 할 것입니다. 그러나 “홍목사님, 참 사랑이 많으셨어! 참 어려운 사람들, 없는 사람들 말없이 많이 도와 주셨지!” 그런 말을 들을수 있을까? – 생각해 보면 자신이 없습니다.
도르가가 죽었을 때, 그녀와 함께 평생, 신앙과 인생을 나누어 왔던 친구와 이웃들이, 앉지도 못하고, 서서, 울고 불며, 속옷과 겉옷을 들어내 보이면서, 진정으로 그녀의 죽음을 아쉬어하며,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그녀가 살아 생전에 베푼 선행, 착한 일들, 그녀의 나누는 삶이 그립고 자꾸만 생각이 나서 그런 것이지요! 주석을 보면 특히 해안가 갯마을이었던 욥바에는 다른 어촌들과 마찬가지로 과부들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남편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 잡으며 일하다가 풍랑에 휘쓰려 죽고 혼자서 가난하게 사는 여인들이 아주 많았다는 것입니다. 도르가는 바로 이런 인생 밑바닥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과부들과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나누고 베풀며 <함께 살아가는 선한 이웃>이었기에 그들은 도르가가 죽었을 때, 부르짖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이 여자는 데려가시면 않됩니다. 정말로 다비다 같은 여자는 죽으면 않되요! 이 여자는 더 살아야 할 여자예요! 없으면 않될 사람이예요!> 겉옷이란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낮에는 외출복이었고, 밤에는 이불로 덮고 자는 생활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는 가난하여 겉옷을 저당잡힌 사람에게는 해가 지기 전에 꼭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도르가가 그 누구에겐가 겉옷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그들의 생활을 책임져 주고 보살펴 주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아시다싶이 옛날 어려운 시대엔 아무나 다 속옷을 입지 못했고, 보통 남자들은 속옷이 없었습니다. 그냥 것옷을 벗어던지면 그대로 알몸이 나왔습니다. 여자들만 속옷을 입었는데, 특히 순결을 지킨다는 뜻에서 여성들은 직접 자기 속옷은 자기가 만들어서 입었습니다. 요즘은 세월이 좋아져서 속옷을 거이 다 사서 입습니다만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사리마다는 엄마들이 직접 집에서 만들어서 입혀주시곤 했습니다. 다비다가 속옷을 만들어서 같은 여자들 끼리 서로 나누어 입도록했다는 것은, 그게 바로 다비다란 여자는 엄마와 같은 여자요, 한 자매, 한 가족 끼리만 할수 있는 일을 했다는 뜻입니다. 도르가는 이름만 사슴과 같이 고상하고 외모만 암사슴 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도르가는 그녀의 신앙, 그리고 그 신앙을 증거하는 사랑, 나눔, 베픔이 진정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도르가는 마음이 고운 여자였습니다. 신앙과 인격이 빛나는 여인이었습니다. <얼굴만 예쁘다고 여잔가? 마음이 고아야지 여자지!> 우리는 모두 나름 아름답고 좋은 뜻을 지닌 이름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 부모님들이 좋은 이름들을 지어주신 이유는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서 좋은 사람이 되라고 그런 이름들을 지어주셨을 텐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린 <이름 값도 하나 못하는> 얼간이들이 된것이 아니가 싶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성도>라는 이름이 공통적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영어로는 <Saints>, 그리스어로는 <하기우스>, 우리말로는 <성도> – 모두가 <거룩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진정 나는 이 이름에 걸맞게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저는 도르가의 죽음 앞에서 숙연해지고, 부끄러워집니다. “과연 내가 죽었을 때 사람들 중에는 도르가가 죽었을 때 처럼 서서, 울며, 속옷과 겉읏을 내어 보이며 눈물지을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자신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옳바로 섬기는 것은 지금 우리 눈 앞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하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 25:40>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태 25:45> 인간이 최종적으로 구원을 완성하여 <하나님 앞에 서느냐, 못 서느냐> 하는 것은 주님 영접해 드리고 신앙고백을 한 후, 그 고백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성화된 삶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그날 욥바에서 주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이미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려주신 것은 나눔과 베품, 선행과 구제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나타낸 사람만이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증해 주신 상징적 사건입니다. 다비다의 부활사건은 예수 부활 후 최초로, 유일무이하게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기적>입니다.
이 사건은 과연 <어떤 사람이 부활하게 되는 것일까>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입으로만 믿습니다>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아,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는 사람이구나! 정말 저런 사람은 죽으면 않되지! 저런 사람은 꼭 다시 살아나야 돼!> 하는 사람이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상징화한 사건이랄수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의 출발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않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니 그가 가신 길을 따라가며,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고, 몸으로 보여주는 데 까지 나가야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8>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경건은 환란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니라. 약 1:27>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동정하는 자가 되어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딤전 6:18-19>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 5:29>
정말 우리 예수님 처럼 십자가를 지고 죽을 수는 없어도, 다비다처럼 나누고, 베풀고, 겉옷과 속옷을 지어주면서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해 가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자본주의, 물질주의와 결탁되어버린 많은 교회들과 성도들은 점점 더 세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비 콕스는 <시장이 된 기독교> <하나님이 되어버린 시장, The Market as God>에 대하여 준엄한 경고를 합니다. 목사인 우리 자신과 성실하다고 하는 많은 크리스챤들 조차도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모여서 나누는 이야기들은 주로 부동산 시세, 주가 상승, 더 좋은 집, 더 비싼 동네, 더 고급스런 옷과 가구와 명품, 고급 레스또랑과 맛집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와같이 여자들도 제발 좀 소박하고 정숙하고 단정하게 옷차림을 하십시오. 지나치게 머리를 꾸미지 말고, 금붙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지 말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에게 어울리게, 착한 행실로 치장하시오. 딤전 2:9-10>
설교 준비를 하면서 구글을 검색하다보니 고급 화장품회사 가운데 <주식회사 다비다>가 나왔습니다. 최고의 화장품, 명품 화장품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떠오르는 회사라고 선전합니다. 다비다의 이름을 팔아서 장사를 하다니, 하늘나라에 있는 다비다가 통곡할 노릇입니다. 화장품이 여인을 아름답게 만들지 않습니다. 사랑과 나눔, 구제와 베품이 교회와 성도들을 정말로 우아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가하면 미국에는 <국제 도르가 선교협회, Dorcas Society>라는 세계적인 여성 봉사단체도 있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해마다 수백만이 넘는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과 음식을 나누어 주는 자선-구제-선교 단체였습니다. 똑같은 이름 <도르가>를 가지고서도 이를 어떻게 배우고,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다른 세상이 될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식회사 다비다>가 만들어서 판매하는 제품에 현혹될 것이 아니라 <국제 다비다 선교회>를 응원하고 지원하며 그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들짐승들은 본능적으로 무엇인가 먹을 것을 발견하게 되면 전투적으로 변합니다. 쏜살 같이 달려가 그 먹거리를 움켜쥐고, 물고 도망을 칩니다. 그래서 혼자서 먹거나 은밀한 곳에 숨겨둡니다. 탈취성, 독식성, 저장성이 동물들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모든 동물 중 유독 사슴만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사슴은 참 유별난 동물입니다. 사슴은 어디선가 먹을 것이 발견되면 소리 높여 울면서 다른 사슴들을 부른답니다. 자기가 발견한 먹이를 다른 사슴들과 나누어 먹기 위해서 부르짖는 겁니다 이것을 <鹿鳴, 녹명 – 사슴의 울음>이라고 이름합니다. 시경에서는 진정 좋은 지도자란, 무엇인가 먹을 것이 생겼을 때는 사슴 처럼 크게 녹명을 내어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먹고 마시며 자비를 베푸는 자라 하였습니다. 사슴처럼 아름다운 도르가, 암사슴처럼 고귀한 도르가는 그 이름처럼 <사슴의 소리>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근세 초기,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을 3가지 유형으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개미같은 인간>입니다. 열심히 사는 인간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한 유익을 주지도 않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거미같은 인간>입니다. 오직 자기 만을 위해서 사는 인간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그물을 쳐서 잡아먹고 괴롭히고 해치는 인간입니다. 세번째로는 <꿀벌같은 인간>입니다. 한시도 쉬지않고 부지런히 날아다니며 꿀을 채집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꿀을 모으는 것은 자기가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주기 위합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꿀을 공급해 주고, 꽃과 꽃 사이를 날아다니면서 수정을 돕고 열매를 맺게해 주는 것이 꿀벌이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라는 것입니다. 도르가가 바로 그랬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자세하게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을 그냥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주인공이요, 오스카상에서 여우 주연상을 받은 정도로만 아는데, 뜻있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오드리 햅번은 다릅니다. 그녀는 매말라 갈라진 땅 아프리카의 사막을 찿아 물지개를 지고 갈라진 땅 아프리카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녀의 남은 생애를 바친 <우리시대의 도르가>요, 사슴의 울음 소리인 녹명이요, 꿀벌같이 타자를 위해서 산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정말 우린 예수님 처럼 살수도 없고, 예수님 처럼 죽을수도 없습니다. 또 현실적으로 우린 오드리 햅번 처럼 아프리카로 달려 갈수도 없고, 나이팅게일이나, 슈바이쳐나, 이태석신부님 처럼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받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우린 마음만 먹으면 어느 정도는 도르가 처럼 겉옷과 속옷을 지어 나누어 주면서 우리 주변에서 아주 작은 선행이라고 베풀면서 살수는 있지 않을까요? 월드 비전이나 굿 네이버스, 오스트랄리아 케어나 컴패션, 유니세프나 푸드 뱅크를 비롯하여 가끔은 우리 동네 쇼핑쎈터 앞에 세워진 구세군 자선냄비에 2불, 5불 10불 정도는 넣을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우리 목사님들께서도 말씀을 안하셔서 그렇지 이곳 저곳에서 <보이지 아니하는 도르가>의 손길들을 나누고 계신 것을 잘 압니다. 저희 부부도 주일 아침에는 식탁 앞에 준비해 놓은 그릇 속에 2불 짜리 동전을 하나씩 넣으며 기도합니다. 1년이 쉰두주일이니까 52개, 약 100불이 되니까 저희 둘이서는 200불이 됩니다. 얼마 않되는 작은 돈이지만 저희는 해마다 그 돈을 북한선교단체에 보태고 있습니다.
도르가는 사실 삯바느질하는 평범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사회적 유명인사나 사업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무슨 준비된 돈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돌보아 준 것이 아닙니다. 그져 자기가 할수 있는 일, 여인들이 제일 익숙하게 할수 있는 바느질을 통해서, 욥바 해안가 마을에서 남편도 없고 아빠도 없이 힘들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과부와 고아와들에게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옷가지들을 만들어 입혔을 뿐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하여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모세는 대답했습니다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들고 있던 그 양치기 지팡이를 가지고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르가에게도 똑같이 물으신 것입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바늘입니다> <그럼 됐다. 그걸 가지고 돕고 나누고 함께 쓰고 베풀거라> 그런데 그런 바늘 하나 가지고 보잘 것 없이 보이던 겉옷과 속옷을 만들어 주며, 사랑을 베풀었던 그 도르가가 죽게 되자 사람들은 베드로 앞에 나아와 자기들이 받았던 그 겉옷과 속옷을 내보이면서 <선생님, 이것도 도르가 해 준 거예요, 이것도 그 여자가 만들어 준 것이예요>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선생님, 정말 이런 사람은 죽으면 않되요! 이런 여인은 다시 살려놓으셔야해요!> 죽은 후에 좋은 소리를 들을수 있는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 제목 <다비다의 죽음>에다가 줄을 긋고,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死而不忘者壽라, 사이불망자수 – 죽은 후에 잊혀지지 아니하는 사람이 진정 천수를 누리는 사람이니라!> 전도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입으로 전하는 것과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예수를 전하고 삶으로는 예수를 가리운다면 그것은 복음을 부끄럽게 만드는 결과가 됩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가 맞다트리고 있는 가장 아픈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그동안 말로만 복음을 전하고 입으로만 설교해온 반쪽 짜리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성경에서 만난 도르가는 저처럼 말 잘하는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입으로만 전도하는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역 앞이나 탑골공원에 가서 <예수–천당>을 외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도르가는 단 한번도 입으로, 말로 전도한 기록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그져 가난한 이웃들과 과부와 고아들에게 겉옷과 속옷을 지어서 입혀주며, 몸으로, 생활속에서, 말씀 따라 삶으로, 복음을 전한 진정한 예수의 여제자였습니다. 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 함께 거룩한 고민과 진실된 기도의 세계로 한걸음씩 발을 옮겨보십시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