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대변혁 1, 2, 3 : 19세기의 역사풍경
위르겐 오스터함멜 / 한길사 / 2021.10.5
위르겐 오스터함멜 (Jürgen Osterhammel, 1952 ~ )은 『대변혁: 19세기의 역사풍경』에서 세계사의 한 세기를 ‘완벽’하게 다룬 것처럼 가장하지 않는다. 오스터함멜은 서론에서 19세의 중점 연대를 통해 이 책을 서술했음을 밝힌다.
중점 연대는 대략 19세기 60년대에서 80년대 사이를 가리킨다. 이 시기에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여러 가지 혁신과 발명이 나타났고 개별적ㆍ독립적으로 진행되던 역사과정이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32쪽)했기 때문이다.

○ 목차
- 1권
서론·27
제1부 근경 近景
제1장 기억과 자기관찰 19세기의 영구화·45
- 시각과 청각·75
- 기억의 보관소, 지식의 보고, 보존매체·81
- 관찰, 묘사, 사실주의·101
- 통계학·119
- 신문·127
- 사진·147
제2장 시간 19세기는 언제인가?·167
- 시대구분과 시대의 특징·193
- 역법과 시대구분·203
- 전환과 과도기·211
- 혁명의 시대, 빅토리아주의, 세기말 (Fin de si?cle)·221
- 시계와 속도·241
제3장 공간 19세기는 어디인가?·267
- 시간과 공간·289
- 문화지리학 공간의 명칭·293
- 심리적 지도 공간관념의 상대성
- 상호작용의 공간 대륙과 해양·327
- 지역구획 권력과 공간·347
- 영토권, 디아스포라, 경계·355
제2부 전경 全景
제4장 정주와 이주 유동성·379
- 규모와 추세·403
- 인구재난과 인구전환·417
- 근대초기 원거리 이민의 유산 크레올과 노예·425
- 징벌과 유배지·435
- 인종청소·447
- 내부이민과 노예무역의 형태전환·457
- 인구이동과 자본주의·477
- 이민의 동기·497
제5장 생활수준 물질적 생존의 안전과 위험·513
- 생활수준과 생명의 질·533
- 기대수명과 건강인(Homo hygienicus)·539
- 전염병의 공포와 예방·555
- 이동하는 위험, 어제와 오늘·569
- 자연재해·593
- 기근·601
- 농업혁명·621
- 빈곤과 부·631
- 소비의 지구화·649
찾아보기·695

- 2권
제6장 도시 유럽 모형과 세계적 특색·743
- 도시의 정상 형태와 특수 형태·757
- 도시화와 도시체계·773
- 탈도시화와 초성장 사이에서·787
- 특수한 도시와 보편적인 도시·803
- 항구도시의 황금시대·825
- 식민도시 통상항과 제국도시·841
- 내부 공간과 지하 공간·867
- 상징, 미학, 계획·895
제7장 프런티어 공간의 정복, 유목생활에 대한 침입·933
- 침략과 프런티어 과정·945
- 북아메리카의 서부·963
- 남아메리카와 남아프리카·993
- 유라시아대륙·1011
- 이민 식민주의·1033
- 자연의 정복 생물권에 대한 침입·1047
제8장 제국과 민족국가 제국의 지구력·1095
- 추세 강대국 정치와 제국의 확장·1097
- 민족국가로 가는 길·1117
- 제국 응집력의 유래·1149
- 제국 유형과 비교·1167
- 제국 중심유형과 변형·1179
- 팍스 브리타니카·1213
- 제국 생활상황·1235
제9 장 강대국체제, 전쟁, 국제주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1265
- 국제체제로 가는 험난한 길·1281
- 질서의 공간·1293
- 전쟁 평화로운 유럽, 전쟁에 찢긴 아시아와 아프리카·1307
- 외교 정치적 도구, 문화의 경계를 넘는 예술·1327
- 국제주의와 보편규범의 등장·1349
제10장 혁명
필라델피아로부터 난징시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1377
- 혁명 아래로부터, 위로부터,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부터·1389
- 혁명적인 대서양지역·1405
- 세기 중반의 혼란·1445
- 1990년 이후의 유라시아 혁명·1475
찾아보기·1515

- 3권
제11장 국가 최소정부, 통치자의 업적, 미래의 철창·267
- 질서와 교류 국가와 정치·533
- 군주제의 재발명·533
- 민주주의·533
- 행정·533
- 동원과 처벌·533
- 자강 변경방어정책·533
- 국가와 민족주의·533
제3부 주제
제12장 에너지와 공업
누가, 언제, 어디서 프로메테우스를 풀어놨는가?·267 - 공업화·533
- 에너지 체계: 석탄의 세기·533
- 경제발전과 비발전의 경로·533
- 자본주의·533
제13장 노동 문화의 물질적 기초·267 - 농업노동의 비중·533
- 작업장소 공장, 공사장, 사무실·533
- 해방의 길: 노예, 농노, 농민·533
- 임금노동의 비대칭성·533
제14장 네트워크 범위, 밀도, 틈·267 - 교통과 통신·533
- 무역·533
- 화폐와 금융·533
제15장 등급제도 사회적 공간의 수직적 배열·267 - 세계사회사?·533
- 귀족의 완만한 쇠락·533
- 부르주아와 유사 부르주아·533
제16장 지식 증가, 농축, 분포·267 - 세계어 소통의 대(大) 공간·533
- 문해력과 학교교육·533
- 유럽의 문화수출상품: 대학·533
- 지식의 유동성과 번역·533
- 자아와 타자에 관한 인문과학·533
제17장 문명화와 배제·267 - “문명세계,” “문명포교”·533
- 노예해방과 “백인의 통치지위”·533
- 배외주의와 “인종전쟁”·533
- 반유대주의·533
제18장 종교·267 - 종교의 개념과 조건·533
- 세속화·533
- 종교와 제국·533
- 개혁과 혁신·533
맺는 말 19세기의 역사적 지위·267 - 자기진단·533
- 현대성·533
- 다시 묻는 질문 세기의 시작 또는 종결·533
- 다섯 가지 표지·533
역자 후기·533

○ 저자소개 : 위르겐 오스터함멜 (Jürgen Osterhammel, 1952 ~ )
오스터함멜은 1980년 독일에 있는 카셀대학에서 현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학, 하겐대학, 콘스탄츠대학에서 가르쳤으며, 스위스의 ‘국제연구 대학원’ (Graduate Institute of International Studies),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연구소’ (Netherlands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in the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런던에 있는 ‘독일 역사연구소 런던’ (German Historical Institute London)에서 연구했다.
현재 독일 콘스탄츠대학의 명예교수이며 2010년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 관련 상인 라이프니츠상을 수상했다. 또한 세계사 연구의 업적을 인정받아 2017년에는 사회과학 분야의 최고상인 토인비상, 2018년에는 발찬 (Balzan)상을 받았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식민주의: 식민주의의 역사를 다시 해부한다』(2006), 『글로벌화의 역사』(2013, 공저)가 있으며 이번에 한길사에서 총 세 권으로 출간하는 『대변혁: 19세기의 역사풍경』이 있다.
– 역자: 박종일 (朴鍾一)
1950년에 태어났으며 1975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기업에서 30여 년간 일한 뒤 은퇴하여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주요 번역서로는 『벌거벗은 제국주의』(2008), 『중국통사 上, 下』(2009), 『다윈주의와 지적 설계론』(2009), 『생태혁명』(2010), 『라과디아』(2010), 『학살의 정치학』(2011),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2013), 『근세 백년 중국문물유실사』(2014), 『중국의 형상 1, 2』(2016)가 있으며 이번에 한길사에서 총 세 권으로 출간하는 『대변혁: 19세기의 역사풍경』이 있다.

○ 책 속으로
첫문장
모든 역사는 세계사가 되는 경향이 있다. 사회학의 ‘세계사회’ 이론에 따르면 세계는 ‘모든 환경의 환경’이며, 모든 역사적 사건과 그 서술이 궁극적인 배경이다. 역사 발전의 기나긴 과정에서 지역을 넘으려는 추세는 끊임없이 강화되어왔다.
P.29
역사의 전문화는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그 결과 역사는 크게 보아 사회과학의 범주 안에 자리 잡았다. 시간의 깊이와 공간의 광대함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회학자와 정치 이론가들이 역사 연구의 주류를 떠맡았다. 역사가들에게는 훈련을 통해 습득한 직업적 특성 때문에 거친 일반화나, 단선적인 인과론적 설명이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멋진 공식을 달갑게 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의 영향을 받아 일부에서는 ‘거대서사’ 또는 장기 과정에 대한 해석은 가능하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사 서술은 전문분야의 상세한 연구를 대중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설명하는 권위와 능력을 전문가들로부터 회수해 오려는 시도이다.
P.36 “유라시아의 서쪽 반도가 자신보다 훨씬 넓은 지구의 나머지 지역을 지배하고 착취한 적은 이전에는 없었다. 유럽에서 시작된 변화가 나머지 세계에 그처럼 충격을 준적도 이전에는 없었다. 유럽의 문화가 유럽 식민지를 훨씬 벗어난 지역에서까지 열정적으로 받아들여진 적은 이전에는 없었다. 19세기는 나머지 대륙이 유럽을 자신들의 척도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유럽의 세기였다”
P.72
19세기는 더 이상 주관적 추억의 대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서술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 되었다. 19세기 이전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명의 표현방식의 역사에서 19세기는 이미 18세기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자리를 차지했다. 그 표현방식과 메커니즘은 대부분의 19세기 자신이 발명한 것들로부터 나왔다. 우리에게 19세기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자료들을 제공해주는 박물과, 국가기록보관소, 국가도서관, 촬영기술, 사획통계학, 영화 등은 19세기의 발명품이다. 19세기는 기억이 체계화된 시대이고 기억이 자기관찰로 승화된 시대이다.
P.155 “각종 기술과 문화적 혁신은 서방에서 일어났고 서방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중 일부 (예컨대 전보)는 제국주의 무력과 자본의 지원을 받았다. 다른 일부 (예컨대 신문, 오페라)는 비제국주의적 ‘취향수출’이나 관련국의 자발적 도입이란 복잡한 과정을 통해 퍼져나갔다. 이집트인에게 신문을 발행하라고 강제한 사람은 없었고 일본인에게 베르디를 들으라고 강요한 사람도 없었다.”
P.155 19세기는 과거의 역사와 모순으로 가득 찬 관계를 형성했다. 그런 관계는 오늘날의 인류의 입장에서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미래에 대한 낙관의 개방성, 혁신에 대한 호감, 기술적 도덕적 진보에 대한 믿음이 19세기만큼 높았던 때는 없었다. 19세기는 동시에 역사주의가 성행한 시대였다. 역사주의의 조류가 모방과 재현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수장과 보존을 중시한 시대였다. 19세기는 박물관과 기록보관소의 시대이자 고고학과 고증학의 시대였다. 100년 동안에 인류의 초기 역사에 관한 기록된 지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그 속도도 과거의 어떤 세기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빨랐다. 엄격하게 말하면 위에서 서술한 특징은 서방에만 해당된다.
P.197
모든 역사적 변화는 특수한 시간구조, 특수한 속도, 특수한 전환점, 특수한 공간 차이와 일정 정도의 지역적 특색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간구조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목적이다.
P.201
19세기는 파편화된 세기, 무명의 세기, 쉽게 정의할 수 있는 두 시대 사이에 끼어 있는 긴 과도기라고 부를수 있다. 어쩌면 난감한 세기일지도 모른다.
P.208
연대의 상대성은 역사 시기를 묘사할 때 채용된 각양각색의 명칭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역사 시기를 고대, 중세, 근대로 나누는 3단론 유럽에서는 1680년대 이후 점차적으로 채택되었다은 풍부한 사료를 통해 그 연속성이 증명되는 다른 문명권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는 이론이다. 다른 문명권에도 이른바 혁신이나 부흥이란 논법은 있었다. 그러나 유럽과 접촉하기 전에 사람들은 자신이 과거보다 우월한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P.221
여러 가지 증거가 보여주듯이, 앞으로 확장된 ‘긴‘ 18세기와 뒤로 확장된 긴19세기 사이의 시간적 중첩기에 시대적 특징을 부여하고 이를 ‘안장형 시기‘란 이름을 붙여 개념화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안장형 시기 (Sattelzeit, 鞍裝形 時期)는시대구분과는 관련이 많지 않은 맥락에서 독일의 역사학자 코젤렉 (Reinhard Kosellek)이 제시한 개념이다. 이 시기는 대략 1750년에서 1850년 사이 (때로는1770 ~ 1830년)를가리키는데, 이 시기 이후에 중간기로 진입한다. 오늘날 되돌아보면 이 중간기에 응축되어 나타난 여러 가지의 문화현상은 최소한 유럽의 범주에서 보자면 전형적인 19세기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이 물결‘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그래서 우리는 이 10년 동안을 한 역사시기의 특수한 분파라고 하지 않을 수없다. 우리는 당시에 통용되던 한 개념을 빌려서 이 시기를 세기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세기의 분기점이 아니라 세기의 유일무이한 마지막이었다.
P.230
모든 것을 종합할 때 ‘진정한 19세기 또는 ‘빅토리아시대의 19세기를 ‘몸통시기‘ (Rumpfperiode) — 독일사를 논할 때 쓰는 표현인데, ˝1830년대와 1890년대 사이의 상대적으로 짧고 역동적인 과도기˝ 이다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P.239
타나고 (코젤렉이 말한 ‘중복적 구조‘) 어떤 과정은 독특한 가변성보인다.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변화의과정을 근거로 하여) 역사학자들이 나누어 놓은 학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예컨대, 환경요인이 사회구조에 미치는향, 환경요인이 경제행위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 등이 그런 것이다.만약 변화의 과정들이 병렬로 일어난다면 그들 사이의 관계는 흔히 ‘비동시적‘이다. 우리는 통일된 자연의 시간질서 속에서 시간질서이외의 시대구분 방식을 기준으로 하여 역사 발전과정의 위치와 의미를 판정하려 한다. 미세한 시간구조를 밝혀내야 하는 과제에 비한다면 역사를 세기‘로 나누는 일은 필요악에 불과하다.
P.242
반복되는 ‘원주형 (圓周形) 운동이란 사상을 전근대적 사고방식의표현이라 매도할 수는 없다. 또한 전혀 가치 없는 분석도 아니다. 기제사학자들이 연구한 다양한 시간 폭을 가진 생산과 경기순환 모델은 19세기 경제학의 중요한 성과이다. 제국주의의 지배와 패권의긴 물결 (long waves) 이론‘은 세계의 군사력 대비에 관한 연구에서계몽적 방식이었다. 역사운동의 선형 모델과 주기형 모델은 둘 다서방에 알려져 있었지만 18세기 이후 서방은 점차 미래개방적 역사발전관을 받아들였다 (‘진보‘ 도중에 정체하거나 우연한 후퇴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유럽에서 시작된 진보사관은 그 후 점차 다른 문명에서도 받아들여졌다. 어떤 문명(예컨대 이슬람문명)에서는 이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비연속적 선형 역사관 — 역사를 연속적발전과정이 아니라 수많은 단절된 순간의 연속적 배열로 본다을버리지 않았다. 현대 역사과학 영역에서 이처럼 본토화 된 역사관과 시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 역사적 실체를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되는지 최소한 고려해볼 가치는 있다.
P.253
우리가 특별히 주의를기울여야 할 문제는, 사회적 시간을 한 시대의 주기로 보았을 때 사회의 집단인식과 부합하는지, 어떤 조건 아래서 그렇게 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복잡한 외피를 뚫고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일은 역사주의 인류학과 사회학의 중대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P.254 “19세기는 속도혁명의 시대였다. 20세기에 들어와 항공 산업이 등장하고 도로망이 완비되면서 운송 속도가 크게 향상되기는 했지만, 철도와 전보의 발명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P.294
19세기는 지리학이 과학으로 전환해가던 첫 번째 단계이자 지리발견의 마지막 시대였다. 유럽인의 발길이 닿은 적이 없는 곳, 지도 위에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공백으로 남아 있는 곳, 고도의 위험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곳을 찾아가는 영웅적인 여행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P.313
기독교도라는 종교적 자기인식을 넘어선 보편적인 유럽인의 의식‘은 계몽주의 시대에엘리트들 사이에서 점진적이며 산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유럽 전체에서 보편적인 유럽인의 인식이 완성된 것은 아무리 늦어도 나폴레옹 시대의 일이었다.
P.320
공간을 묘사하는 모든 개념은 역사를 통해 자리 잡아야 한다. 근대 사회지리학의 연구 성과는 공간, 자연형태, 지역을 선천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역사학자들의 믿음이 옳은 것임을 증명해준다. 역사를 연구하는 (혹은 ‘해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학술적 저서와 학교 교과서, 세계정치에 관한 언론의 보도, 동시대의 현실이나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지도를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지도는 지리학 개념을 표출하는 효과적인 매체일 뿐만 아니라 공간인식의 수단이자 도구이다.
19세기에 지도의 정확성을 요구했던 배경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있었다. 오랫동안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던 실용적 목적 – 교통, 전쟁, 식민통치 – 이외에 19세기 초부터 지도제작에는 새로운 목적, 즉 지도를 통한 국가영토의 시각화가 추가되었다. 최근까지 국가의식과 지도를 통한 표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깊은 연구가 있었고 연구성과물도 풍부하다. 영토가 비교적 완전한 민족국가와 비교했을때 영토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방대한 제국은 시각정보를 끊임없이 갱신해야 할 필요가 컸다. 1830년대 이후 제국의 영토를 유명한붉은색으로 표시한 세계지도가 보급되면서 영국 대중에게 제국의식이 생겨났다는 해석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P.325
19세기 후반에 상호 연관된 두 가지 역사 발전과정이 병행하여어났다. 첫째, 유럽의 직업적 또는 비직업적 지리학자들이 전례 없대규모 ‘탐험’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가적 후원을 배경으로 하여 서로 경쟁을 펼쳤다. 세계지도 위에 표된 적이 없거나 측량된 적이 없는 ‘공백지역‘이 하나씩 채워졌다.
행자와 지리학자들도 식민 제국주의가 이용할 수 있는 통치지식을갈수록 더 많이 만들어냈다. 이와 함께 지역 지도의 정확성도 끊임이 높아졌다. 그러나 1780년대가 되어서야 파리의 모든 건물을 표시한 도시 지도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지도의 제작목적은 관광 안나용이 아니라 재산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자료용이었다. 이 지도의 등장으로 인류는 마침내 관찰 각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정확한 측량 수치를 근거로 하여 세계의 모습을 그린, 관점에 따라서 결정되는 심리적 지도가 아니라 지표면 형태를 과학적으로 묘사한 지도를 갖게 되었다.
세계지도를 제작하는 일은 1차 대전 이전에 이미 완성되었고 이 때문에 유럽과 미국 지리학계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지도는 동시에 군사 지휘관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청일전쟁 (1894 ~ 95)과 러일전쟁 (1904 ~ 1905)에서 일본군이 이길 수 있었던 핵심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본군 지휘관들이 갖고 있던 지도가 적이 갖고 있던 지도보다 더 정확했기 때문이다.
P.326
둘째, 공간에 대한 주관적 인식이 세계 각지에서 재정비됨에 따라객관화가 크게 확대되었다. 인류의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오래된 중심은 점차 해체되었고 많은 지역이 어느 순간에 자신이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새로 발전하고 있는 더 넓은 공간범주 국제적인 국가질서 또는 국제적인 교역망과 금융망의 변두리에 있다는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새로운 중심과 좌표가 끊임없이 생겨났다. 예컨대, 1868년 이후 일본은 자신이 참조해야 할 대상은 더 이상 중국이 아니라 군사·경제적으로 더 친근한 ‘서방‘ 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다시 30년이 지나자 일본은 또 한 번 시각을 바꾸어 아시아대륙을 자신의 제국주의적 확장의 대상 공간으로 보았다. 지금까지 시선을 내륙으로 향하던 국가들은 전대미문의 각종 위험이 대양으로부터 자신에게 밀려오고 있는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위험이 찾아오자 같은 방향에서 새로운 기회도 찾아왔다. 일부 오래된 제국의 중심은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예컨대, 오스만제국은 발칸반도로부터 서서히 밀려나면서 아라비아에서 미래의 가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P.352
공간획정은 크게는 광범위한 지역의 정치적 재편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부터 작게는 철도건설을 위한 지역계획과 농촌 토지소유권 문제를 둘러싼 미세한 조정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에서 진행되었다. 공유지 (Allmende)의 해체와 사유화 과정은 때로는 정부의 통제가 없는 상태에서 혼란스럽게 진행되었다.
다른 경우에는 정부의 엄격한 지도와 계획 아래서 진행되었다. 국가가 토지를 기준으로 하여 세금을 징수하자 누가 무엇을 부담해야하는지, 토지 소유자와 점유자 중에서 누가 부담해야 하는지 — 촌락공동체는 더 이상 과세대상이 아니었다 — 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P.353
세계 어느 곳에서든 이것은 정부활동이 지방에까지 확산되는 가장 중요한 동기였다. 이후 복잡한 토지 소유관계를 정리하여 합리적인 방식으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세기 혹은 20세기에 시행된 거의 모든 토지개혁은 이런 부분에 대한 대비책을소홀히 하지 않았다. 토지의 계획적인 운용은 현대사회의 기본행위 가운데 하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20세기 소련, 동유럽, 중국의 대규모 집단화였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기울이지 않았다. 하나의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 토지등기제도와토지의 자유로운 처분권이 없는 국가는 ‘현대‘ 국가라고 할 수 없다.
P.362
상이한 국경 관념이 충돌하는 곳은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국경을 획정하는 현장이었다. 마지막 승자는 대부분 현지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쪽이었다.
P.365
국경은 부분적으로는 영토로서의 깊은 뿌리가 없는 행정구획이었고, 부분적으로는 (특히 ‘간접통치‘ 상황일 때) 식민지가 되기 전 통치구역의확인 표지였다. 제국 사이의 국경은 온전한 연속선으로 표시되는 기우는 드물었고, 유럽의 국경처럼 면밀하게 지키기도 어려웠다.
모든 제국에는 열려져 있는 측면이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 그것은알제리 사하라였고, 영국의 경우는 인도 서북 국경이었고, 제정러시아의 경우는 카프카스였다. 그러므로 국가적 경계의 역사적 순간은식민지가 해체되고 새로운 주권국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1945년이후 시기에 찾아왔다. 이때 ‘철의 장막과 함께 유럽과 한국이 분단되었다. 국경은 유사 이래 최고도로 군사화 되었다. 국경의 불가침성을 확인하기 위해 핵무기와 철조망이 동원되었다. 국경에 대한 19세 기적 강박관념이 20세기 60년대에 극치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P.551
전 세계의 공중위생 사업의 학문적 기반은 루이 파스퇴르의 미생물 이론이었다. 19세기 80년대 그의 이론은 유럽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파스퇴르의 이론은 존 스노 등 실천가들의 관찰 작업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해주었고 또한 위생 정책의 수립이 정당정치의 정략에 이용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초기의 공중위생 사업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학문적 기초 때문에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생물 이론이 등장하면서 청결이 최고의 준칙으로 공인되었다. 세균학의 산물인 ‘건강인’이란 개념은 이렇게 탄생했고 루이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의 지위는 과학자를 뛰어넘어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이론가로 상승했다. 질병은 이때부터 이전의 생태, 사회, 정치, 종교적 맥락과 결별했고 건강이 최고의 가치로 숭상되었다.
P.558
세계사적 시각에서 볼 때 19세기에는 질병의 보다 용이한 전파와 질병에 대한 보다 성공적인 대응이라는 긴장관계가 발전했다. 한편으로는 교류와 이주의 증가가 전염병의 전 지구적 전파의 편리한 통로가 되었다.
P.589
19세기에는 의학적 구시대의 종말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좌절과 난관이 있어도 진보란 이름은 부정될 수 없다. 이 과도기는 세 방면, 혹은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하자면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 제너가 발명한 백신 접종술이 지구상에서 천연두 발병률을 대폭 낮추어 놓았고, 신코나 나무껍질에서 추출한 알칼로이드가 말라리아 예방과 치료효과를 극적으로 높여놓았다. 두 번째 단계. 파스퇴르와 코흐로 대표되는 실험의학의 탄생. 실험 의학은 이 시대의 중요한 발명이었으며, 19세기 70년대에 처음 위력을 드러냈고 10년 이내에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했다.
P.590
세 번째 단계. 제너와 파스퇴르가 세운 의학사의 두 가지 새로운 이정표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기가 세 번째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승리자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실천이란 19세기 중엽에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시작했고 얼마 후 세계 기타 지역에서 최소한 국부적으로라도 영향을 미친 위생운동을 가리킨다.
P.592
한편으로 많은 중요한 의학적 발견이 식민지에서 탄생했고, 다른 한편으로 유럽에서는 배척당하던 의료와 약물 시험이 식민지에서 완성되었다. 식민지에서 의료와 위생 관련 직업의 첫 번째 목표는 식민자의 생존조건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많은 식민지에서 사람들은 의학적 수단의 도움을 받아 피식민자의 노동 능력을 높임으로써 식민통치의 합법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유럽이 발원지가 아니지만 지구 전체를 감염시킬 수 있는 질병에 맞섰다는 것은 전통적인 봉쇄와 격리 전략의 한계를 보완하는 새로운 접근방식이었다. 19세기에 질병에 맞서는 싸움은 국제적인 임무로 인식되었다.
P.632
발달된 공업사회와 비교할 때 현대 이전 사회는 문명의 정도에 관계없이 모두가 빈궁한 사회였다. 그러나 경제의 현대화가 빈곤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이것이 인류가 ‘현대성’의 성취를 스스로 자랑스러워 할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심지어 21세기에 진입한 뒤에도 아프리카와 아시아에는 여전히 기근이 존재하고 기근 때문에 수시로 폭동이 발생한다. 현재 지구상에서 살고 있는 인류 가운데서 여섯에 하나는 상시적인 영양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19세기의 생산력 증가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물질적 생존기회를 보다 평등하게 바꾸어 놓지 못했다.
P.649
근대 초기의 전 지구적 식물 이동현상의 대상은 소수의 희귀 사치식물에 한정되지 않았으며, 농업경제와 조경업 경제를 바꾸어놓았고,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생산성과 소비행태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P.674
전 지구적 시각에서 19세기를 살펴보면 인류 대부분의 삶의 물질적 조건이 의심의 여지 없이 개선된 시대였다. 계몽시대 이후 대서양 양안 세계의 문화의 기본 이념인 진보에 대해 의문을 품을 이유는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념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각에서 말하자면, 이런 막연한 판단은 깊이가 없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좀더 깊이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모든 변화의 추세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변화의 추세가 상호 모순적인 경우가 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8세기를 1840년대까지 이어지는 ‘긴’ 18세기로 본다면 유럽의 18세기는 여전히 기아의 세기였다. 그런데 19세기 중엽부터 유럽에서는 분명한 기아의 ‘탈지역화’ 현상이 나타났다.
P.675
그러나 경제발전 수준이 낮은 식량생산 지역의 입장에서는 식량 유통범위의 확대는 오히려 재난의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발전의 피해자는 혁신에서 ‘뒤쳐진’ 나라나 혁신이 비켜간 나라만이 아니었다. 쉼없는 ‘현대화’의 침입도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 출판사 서평
“19세기는 오늘날의 선사시대다.”
“『대변혁: 19세기의 역사풍경』은 메르켈 총리의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준 역사서다. 특히 ‘세계화’ ‘이민’ ‘과학기술’ 같은 주제를 심층적으로 인식하고 그의 구체적인 정책을 펼치는 데 중요한 지혜를 주었을 것이다.” _『가디언』, 2016년 12월 29일
19세기가 개인적인 추억의 지평 너머로 사라지는 사건이 2000년대에 일어났다.
1835년에 청년 과학자였던 찰스 다윈이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처음 만났던 바다거북이 해리엇 (Harriet)이 2006년 6월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동물원에서 수명을 다하고 죽었다. 2007년 11월에는 타이타닉호 재난의 마지막 생존자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12년 4월 14일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때 강보에 싸인 아기였다.
2008년 5월에는 독일의 마지막 제1차 세계대전 참전병사도 이승을 떠났다. 이제 지상에 남아 있는 사람 가운데 1900년 여름 중국의 의화단운동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없고, 1899-1902년에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보어전쟁이나 1901년 1월에 잇달아 세상을 떠난 주세페 베르디와 빅토리아 여왕의 장엄한 장례식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이제 19세기에 관한 추억은 미디어가 전해주는 소식, 읽어야 알 수 있는 흔적이 되었다. 물론 19세기 이전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19세기는 그전 세기와는 확연하게 다른 지위를 획득했다. 인류는 19세기가 되어서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는 기억이 체계화된 시대고 자기관찰로 승화된 시대다.” (72쪽)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기록하는 방식과 생각 등은 모두 19세기에 등장-박물관, 국가기록보관소, 영화, 사진, 이데올로기-했고, 오늘날 누리는 찬란한 과학기술 문명도 19세기에 시작되다.
- 『대변혁: 19세기의 역사풍경』개괄
위르겐 오스터함멜 (J?rgen Osterhammel, 1952- )은 『대변혁: 19세기의 역사풍경』에서 세계사의 한 세기를 ‘완벽’하게 다룬 것처럼 가장하지 않는다. 오스터함멜은 서론에서 19세의 중점 연대를 통해 이 책을 서술했음을 밝힌다.
중점 연대는 대략 19세기 60년대에서 80년대 사이를 가리킨다. 이 시기에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여러 가지 혁신과 발명이 나타났고 개별적ㆍ독립적으로 진행되던 역사과정이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 (32쪽)했기 때문이다.
.제1부 근경 (近景)
제1부 ‘근경’에서는 19세기의 기억, 시간, 공간을 설명한다. 그중 제1장인 「기억과 자기관찰」은 제도로서의 문서보관소, 도서관, 박물관, 전시회, 백과전서 그리고 탐사보도와 여행기, 지도제작, 신문, 사진의 보급과 확산을 살펴본다.
다음으로 오스터함멜은 시공간의 관념을 탐구한다. 빅토리아시대에 형성된 현대라는 시간관념이 인간의 생활과 세계 각지의 문화와 충돌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과학과 민족국가라는 개념을 기초로 19세기의 공간관념이 지구 전체로 확장해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또한, 새로운 관념을 사용하여 공간의 거리를 측정하고 공간을 민족, 영토, 제국, 해양, 소유권 등으로 분할하는 과정과 마지막으로 이런 관념들이 새로운 권력체계 아래에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지 분석한다.
.제2부 전경 (全景)
제2부 ‘전경’에서는 인구이동, 생활수준, 도시생활이란 주제를 통해 다시 한번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 파악한다. 여기서 19세기에 나타난 생활수준의 질적 변화, 질병, 자연재해, 기아, 빈곤, 소비문화의 세계화 등이 상호 연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징벌과 유배지, 인종청소, 자본주의, 노예무역의 변형을 언급한다.
오스터함멜은 19세기의 도시를 조명하면서 전 세계에서 도시와 전통의 충돌과 통합, 항구도시의 흥기,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관계, 도시의 지하 공간, 도시의 상징과 미학의 문제를 분석한다. 또한 북아메리카의 서부개척, 유럽인들의 사하라사막 이남지역 개발, 빅토리아시대의 자연정복 관념이 생태환경을 약탈한 현상을 분석하면서 프런티어란 관념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제국주의와 민족, 국제주의와 강대국 체제, 혁명과 국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등의 문제를 탐색한다.
.제3부 주제
제3부 ‘주제’에서는 경제, 문화, 기술, 사회적 이슈에 주목한다. 에너지와 공업화, 자본주의, 다양한 노동형태와 노동의 의미변화, 새로운 작업장의 출현, 노동자 해방운동의 대두, 고용관계의 불균형을 다루고 뒤이어 교통과 통신의 네트워크, 사회등급제도의 발전, 지식의 변화, 문명 관념의 형성과 배제, 종교의 세속화와 제국의 관계, 종교내부의 개혁운동 등의 주제를 다룬다.

- 오스터함멜의 세계사와 19세기 유럽 : 빅토리아 시대의 ‘진보’관념에서 벗어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수없이 많이 출간된 세계사 저작들과는 달리 오스터함멜의 저작 『대변혁: 19세기의 역사풍경』은 빅토리아시대의 ‘진보’ 관념을 벗어났다.
그동안 세계사 서술은 ‘현대화’ ‘진보’ ‘대국의 흥망성쇠’ ‘민족의 부흥’ 등의 관념을 주로 다뤘다. 이러한 분석의 틀은 사실은 19세기 유럽의 민족국가를 기반으로 한 ‘진보’ 관념에서 나왔다. 이는 문명, 계급, 국가 또는 민족을 빠짐없이 유기체로 보았고 세계사는 이러한 상상 속의 유기체 사이의 상호경쟁, 상호충돌의 역사가 되어왔다. 자원과 패권을 둘러싼 민족과 국가의 경쟁을 제외한 개인의 경험은 다루지 않았다.
빅토리아시대의 진보 관념은 당시에 유행하던 다윈주의 (Darwinism)와 결합하면서 20세기까지도 줄곧 영향을 미친 사회적 다윈주의 (Social Darwinism)를 낳았다. 그러므로 19세기의 세계사를 서술한다고 했을 때 누구든 쉽게 민족과 제국이 전 세계에서 자원, 영토, 패권의 쟁탈전을 벌이는 “사회적 다윈주의의 역사”를 쓰려 했겠지만 오스터함멜은 그런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오스터함멜은 오히려 역사 속의 평범한 인물들과 그들의 일상생활을 주목하고 구체적인 개인이 어떻게 질병에 대처했는지, 어디서 책을 보았는지, 오페라를 보기 위해 어느 극장을 갔는지, 어떻게 배를 타고 여행했는지를 묘사했다. 바로 이러한 일상생활과 문화적 경험을 통해 『대변혁: 19세기의 역사풍경』은 19세기 전체에 관한 역사, 민족과 제국의 상호경쟁에 함몰되지 않은 역사, ‘중요하지 않거나’ ‘낙후한’ 민족이 생략되지 않은 역사를 기술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스터함멜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이전의 ‘계몽주의자’다. 그의 시선은 역사 속의 생생한 개인을 떠난 적이 없다” (2394쪽).
- 19세기와 유럽
오스터함멜의 『대변혁: 19세기의 역사풍경』은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과 영국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베일리, 에릭 홉스봄과 비교된다.
하지만 오스터함멜이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그가 동방의 역사 (특히 중국 역사)를 깊이 있게 연구했기 때문에 유럽 중심론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또한, 오스터함멜은 특정 시대와 사회에 대한 선입견을 의도적으로 멀리 했다.
원칙적으로 분석방법에 있어서는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났다고 해도 이 책은 상당 부분 유럽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오스터함멜도 “모든 세기 가운데 특히 19세기는 유럽중심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고서는 서술할 수 없다” (36쪽)고 밝힌다. 19세기만큼 유럽의 세기였던 세기는 없기 때문이다.
유럽은 나머지 대륙을 삼중으로 위협했다.
첫째, 유럽은 세력을 갖고 있었다. 그 세력은 대부분 잔인함과 폭력으로 표출되었다.
둘째, 유럽은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 영향력을 자본주의라는 통로를 통해 전파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셋째, 유럽은 실제로 보여줄 수 있는 사례를 갖고 있었다. 그 사례의 힘은 대부분의 희생자들조차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런 복합적 우위는 유럽이 확장을 시작하던 근대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이든, 스페인이든, 네덜란드이든, 영국이든 대략 1760년 이전에는 그들의 세력을 세상의 먼 곳까지 확산시키는 데 있어서 19세기의 영국과 프랑스만큼 강력한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지 못했다. 19세기사는 유럽에서, 유럽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앞의 18세기나 그 뒤의 20세기도 이런 양상을 보여주지 못했고 더 앞선 세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일찍이 유럽이 이처럼 폭발적인 혁신과 주도권-정복력과 교만함-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 그렇다면 ‘왜 유럽인가?’
이 질문을 두고 계몽시대부터 막스 베버 (Max Weber)를 시작으로 수많은 역사학자가 답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오스터함멜은 『대변혁: 19세기의 역사풍경』에서 해답을 찾고자 하는 질문은 이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학계에서는 ‘유럽의 특수한 길’을 기조로 한 세계근대사를 썼지만, 오늘날 역사가들은 유럽의 오만을 회피하려 노력하고 있고 보편화와 상대화를 통해 ‘특수한 길’이란 독침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오스터함멜은 최근 비교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근대 초기의 유럽과 세계의 다른 지역 사이의 사회적ㆍ경제적 차이가 앞 세대 학자들이 생각해왔던 것만큼 그렇게 극적이지 않았다는 강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고 이런 맥락에서 19세기는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 19세기의 성격
오스터함멜은 “이 책의 내용을 몇 줄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도 없고 대체로 정확하게 서술한 그 시대의 주요한 발전추세의 핵심 개념-공업화, 도시화, 민족국가의 형성, 식민주의, 세계화 개념-을 반복한다고 해서 우리의 지식이 쌓이지도 않는다” (2367쪽)라고 말하면서, 19세기를 톺아볼 수 있는 다섯 가지 시각을 제시한다.
1) 생산효율이 ‘비대칭적으로 상승한’ 시대
첫째, 공업화다. 주요 특징은 고도의 분업노동, 공장방식의 생산조직, 석탄을 동력으로 하는 기계의 사용이었다. 특히 공업화의 발전은 지역별 편차가 심했는데, 대륙 간 편차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 내부에서도 차이가 심했다.
둘째, 모든 대륙의 프런티어에 개척된 새로운 토지에서 생산효율이 폭발했다. 프런티어 개발은 공업화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지만 미국의 중서부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카자흐스탄에서 버마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륙의 프런티어에 토지가 개척되었다.
프런티어 지역의 생산품은 현지 소비자를 위해서만 생산되지 않았다. 대륙을 넘나드는 상업유통 영역에 진입했다. “공업기술의 화신인 증기선과 철도가 운수부문에 도입됨으로써 운송비용이 빠르게 하락했고 이에 따라 밀, 쌀, 면화, 커피 등 전통적인 프런티어 상품의 무역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2036쪽).
셋째, 군사영역이다. 19세기에는 개별 병사의 살상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병기 기술의 혁신 이외에도 군사조직을 운용할 수 있는 지식과 전략전술의 발전도 군사적 효율이 증가하게 된 독특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 밖에도 국가자원을 군사영역에 집중하겠다는 정치적 의지가 강했던 시기다.
넷째, 국가기관이 민중을 체계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행정적 규제는 증가했고 지방 행정기관의 직권범위는 확대되었다. 인구 조사를 철저히 하면서 부동산 보유를 파악하고 납세능력의 등급을 나눴다. 징세는 보다 공정해졌지만 규칙적으로 행해졌고 세목 (稅目)은 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세기에는 지방통치의 새로운 기법이 등장했다. 그 바탕 위에서 국민개병제 (國民皆兵制), 의무교육, 복지국가 정책이 시행되었다. “국가는 새로운 리바이어던 (Leviathan)으로 변하기 시작했으나 반드시 괴물이 될 필요는 없었다” (2037쪽).
2) 유동성의 증가
첫째, 19세기에는 인구 이동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19세기처럼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시베리아와 만주 지역으로의 대규모 이동은 없었다. 1870-1930년 사이에 일어났던 인구 이동의 강도는 그 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그 시대가 특히 주목받는 전 지구적 특징이었다.
상품의 유통도 새로운 수준에 올랐다. 비단, 향료, 차, 설탕, 담배 등 사치품 교역이 식량과 공산품 원료 교역으로 대체되었다. 생산량 증가를 크게 초월하는 세계무역 확대를 나타내는 수치가 이런 상황을 설명해준다.
둘째, 증기선과 철도 등 기술혁신이 모든 형태의 이동 속도를 높여놓았다. 속도의 증가가 시대의 특징이라는 얘기는 전혀 새로울 게 없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셋째, 마지막으로 이제 유동성은 사회 기반시설에 의존하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철도망의 건설, 세계적 해운회사의 등장, 지구 전체를 연결하는 해저케이블 건설은 기술의 응용과 조직의 안정화 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동생활은 조직화된 사회생활의 새로운 차원, 즉 좁은 범위에서 일상을 유지하던 리듬과는 전혀 다른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작업장 근처에 살지 않아도 되었다. ‘출퇴근’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이 추세는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세계화’를 국가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가속화되고 공간적으로 확장된 자원의 유통이라고 정의한다면 이때 비로소 ‘세계화’가 시작되었다.
3) 상호관계 강화의 비대칭성
19세기에 들어와 관념, 특히 문화의 유동성이 더 높아졌다.
대륙과 인종 간에 사상과 예술을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생긴 현상이다.
1900년 무렵 서방의 대형 도서관은 아시아의 전통을 알 수 있는 기본 문헌의 번역본을 독자들에게 제공했다. 한편으로는 유럽의 몇몇 학문분야의 교과서와 철학, 법률, 경제이론 책이 일본어, 중국어, 터키어로 번역되었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일부 교육받은 동방의 문화엘리트들은 서방의 관념과 사상을 직접 체험했다.
이를 통해 19세기에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하나는 외부지향형이 양적으로 늘어난 것이었다. 세계 인구의 절대다수가 다른 국가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모호한 개념만 갖고 있을 때 문화엘리트들은 유례없는 관심을 가지고 외부세계를 관찰했다.
다른 하나는 문화의 ‘교류’가 비대칭화되어 일종의 ‘표준’이 생긴 것이다. 문화적 표본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서방이 ‘표준 문화’로 등장했다. 그러나 ‘표준 문화’는 유럽국가 전부를 가리키지 않았다. 미국도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독자적인 문명의 모형으로서 인정받았다. 1870년 또는 1880년 무렵의 중국, 일본, 멕시코 또는 이집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서방’은 우선 영국을 의미했고 다음으로 프랑스를 가리켰다. 메이지시기의 일본은 비스마르크 정부의 군사와 과학의 효율성을 흠모했다. 그러므로 일본에게는 독일이라는 표본이 하나 더 있었다.
4) 평등과 등급제도의 대립
법률적 평등의 추세는 사회적 지위와 신분상승의 가능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이전보다 가족배경의 중요성이 낮아졌다. 19세기부터는 경제적 요인의 결정력이 높아졌다.
독립전쟁 과정에서 노예제를 폐지하여 유럽보다 등급질서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옅어진 미국은 ‘보편적인’ 평등의 길로 나아갔다.
사회적 평등은 순전히 유럽의 사상은 아니었다. 수평주의, 박애주의, 지배자가 없는 사회 등 유토피아적 희망은 여러 문화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근대 유럽에서 기독교 박애주의를 기반으로 한 것이든, 자연법 정신을 기반으로 한 것이든, 공리주의나 사회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것이든 관계없이 평등사상은 국내정치에서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보수 세력의 저항은 피할 수 없었고 현대주의자와 전통주의자 사이의 문화적 투쟁은 불문율이 되었다.
반면 미국을 제외한 비유럽국가는 모두 등급질서의 가장 아래쪽에 자리 잡았다. 유럽 유대인에게 평등한 시민권을 부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대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뒤따랐다. 미국에서 노예제 폐지는 매우 빠르게 새로운 인종분리 제도를 발전시켰다. 새로운 사회적 차별은 처음에는 성숙한 문명과 열등한 문명의 대립으로 표현되었고 뒤에 가서는 서방에서는 거의 의심받아본 적 없는 인종주의적 관용어로 표현되었다. 평등의 원칙을 무시한 인종주의적 정책과 행위가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은 온전히 한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인권, 반인종주의, 국가주권에 관한 보다 확고한 원칙, 민족자결권의 강화 등 국제규범에 관한 의식에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나서야, 즉 20세기 6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19세기의 ‘야만’과 결별했다.
5) 해방의 세기
19세기에 해방은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
첫째, “자기해방 또는 사회 내부의 집단을 지적·법적·사회적·정치적 감독이나 차별 또는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지배형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 (2381쪽)을 의미했다.
둘째, 민족의 해방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였다. 19세기에 세계를 발전시킨 동력 가운데 하나를 ‘자유’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스터함멜은 ‘그렇다’라고 말한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의 평등’을 쟁취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더 많은 자유와 평등한 권리를 가져온 해방이 세계 곳곳에서 발생했다. 합법적인 제도로서 노예제는 서방국가와 식민지에서 사라졌다.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은 유사 이래 가장 좋은 법률적·사회적 지위를 획득했다. 유럽에서 농민은 봉건적 의무와 부담에서 벗어났다. 노동자는 투쟁을 통해 결사의 자유를 획득했고 몇몇 유럽 국가에서는 선거권까지 쟁취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야 공개적인 화두가 된 여성해방 문제에 대해 포괄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여성의 정치적 권리와 기회의 확대라는 면에서 영국제국의 자치령과 미국은 선두에 속했다. 여성이 배우자로서의 지위와 가정에서의 생활이 개선되었는지의 여부는 유럽에서조차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중산계급 가정은 그 자신의 고유한 속박 형식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의 혁명이 모두 해방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이 실패보다 더 흥미를 끈다. 그런데 모호한 경우도 있다. 프랑스대혁명이 그런 경우다. 대혁명 초기의 목표인 대의민주제는 몇 번의 제도변화를 경험한 후 제3공화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현되었다. 자코뱅 독재시대의 직접 민주주의 방식은 1871년 파리코뮌 시대에 잠시 부활했다가 사라졌다. 1848-89년 혁명의 영향과 작용은 명확하지 않다. 완벽하게 실패한 혁명인 페루의 투팍 아마루 (Tupac-Amaru) 봉기나 중국의 태평천국운동과 비교했을 때 이 혁명은 분명히 철저한 실패는 아니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