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그리스·터키, 한국 방문기 (7)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19년 10월 22일~11월 1일 (그리스·터키, 10박 12일), 11월 2일~4일 (한국 강진 다산 유배지와 안동 퇴계 유적지, 2박 3일)에 ‘2019 인문학여행’을 26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이에 방문지인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한국 일정중의 단상을 나누고자 한다. _ 편집자 주.
터키의 에베소와 밀레토스
우리 일행은 어제까지 그리스 일정을 마치고 밤에 터키에 도착, 다르다넬스 해협 (차낙칼레 보아즈)을 건너 아이발릭에서 일박했다.
터키에서의 첫날은 트로이 인근 아이발릭에서 묵었다. 트로이 유적은 호메로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의 저자)의 전승을 믿은 하인리히 슐리만의 발굴로 그 모급이 드러난 고대 도시다. 10월 29일, 아침 일찍 숙소인근을 산책하며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헬레네, 목마, 오데세우스 등을 생각했다.
트로이 유적은 시대순 9개로 나뉘는데 1도시 (BC3000-청동기), 2도시 (BC2800-최초 번영기), 3-4도시 (BC2200-이민족 침입), 5도시 (BC1800-미케네 교류기), 6도시 (BC1280-BC1200), 7도시 (BC1200-폐허 방치기), 8도시 (BC700-알렉산더기), 9도시 (BC85-5C말)이다. 슐리만은 트로이네 이어 미케네도 발굴해 호메로스의 세계를 입증했다.
10월 29일, 오늘 일정은 아이발릭 숙소에서 조식 후 이즈미르를 지나 에베소로 이동, 중식 후 에베소 유적지 입구에 누가의 무덤, 하드리아누스 신전, 셀수스 도서관, 원형대극장, 아카디아대로 등 방문, 이어 밀레투스로 이동해 이오니아의 스토아, 원형경기장, 아폴론 신전 등을 방문 후 파묵칼레 숙소에서 묵는 일정이다. 오늘 일정도 빼곡하다.

이즈미르 (Izmir)
우리 일행은 본격적인 터키 일정으로 에베소를 향하며 이즈미르를 지났다. 성경에는 서머나로 알려졌다.
.이즈미르 개관
‘이즈미르’ (İzmir)는 터키의 3대 도시이며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이스탄불 다음으로 큰 항구이다. 역사적으로는 ‘스미르나’라고 불렸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스미르나’의 현대식 이름).
이즈미르는 에게 해의 이즈미르 만에 위치하며 이즈미르 주의 주도이다. 터키 제1의 수출 무역항으로 활기를 띠고 있으며, 도시에는 2개의 철도역이 있으며 북쪽과 남동쪽으로부터의 철도 종점이 되고 있다. 이스탄불과는 국내선 항공편이 통하고 있으며 그리스 아테네로 가는 항공 노선도 운행하고 있다.
도시는 11개의 구로 나뉜다 (발초바, 보르노바, 부자, 힐랄, 가지에미르, 귀젤바흐체, 카르시야카, 코나크, 날르데레). 2018년 전체 인구가 4,320,519명이며 그중 2,947,000명이 도시에 거주한다. 전체 면적은 855km²이다.

.계시록과 이즈미르
성경 요한묵시록에도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중 하나 (스미르나 교회)가 소재했던 유서깊은 도시이다.
성경 시대에 ‘이즈미르’는 ‘서머나’로 알려졌고, 초기 로마 황제들의 시대에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중 하나였다. 이 시기에 이즈미르는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로 계시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계1:11, 2:8). 서머나, 에베소 그리고 버가모 등 초대교회의 유적들이 많이 있는 곳이다.
과거 고대 그리스가 건설한 대표적인 ‘이오니아 식민시’로서 세워진 이후 계속해서 그리스인의 도시로 있었으며 튀르크 세력이 아나톨리아를 석권할 당시에도 아나톨리아의 그리스 세력이 최후까지 항전한 거점 중 하나였다. 수백년에 달하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이어졌으며 오스만 제국이 망국에 다다른 제1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도시 인구의 절반인 15만 명이 그리스인이었다. 이는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그리스 왕국의 수도 아테네보다 더 많은 인구였으며 이즈미르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 이어 그리스인이 두번째로 많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그 영향 때문인지 오스만 제국 시절 이 도시의 별칭은 바로 이교도 이즈미르 (Gavur İzmir)였다.
주변에 페르가몬 유적이 있고, 남쪽에 에페소스 (셀축), 북쪽에 트로이 (차낙칼레)가 있지만 정작 이곳에는 남아 있는 사적지나 유물이 거의 없다고 한다. 이즈미르 대화재로 대다수 문화유적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에베소
한참을 달려 우리 일행은 에베소 입구에 이르렀다. 우리 일행은 아르테미스 신전터에서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나눴다. 에베소 현지에서 나는 야채로 쌈을 나눴다.
터키에서 가장 큰 고대도시 에베소는 과거에는 실크로드의 종착지요, 거대한 무역항이 발달한 항구도시였다. 에베소는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에 황금기를 누리면서 많은 역사적 변환기에도 부를 축적했던 도시였다. 기원전 1세기에 에베소는 로마제국에 속하게 된다. 이후 많은 로마식의 건축물이 세워졌고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물인 도미티아누스 신전은 지금도 유명하다.
에베소 번성기에는 바닷가에서 근처에 자리 잡은 도시의 원형극장까지 대리석으로 된 도로가 이어졌을 정도였다. 이렇게 번성하던 도시가 260년쯤 유럽에서 이주해 온 고트족들의 약탈과 방화, 말라리아와 때마침 일어난 대지진으로 폐허의 도시가 되었다. 특히 7세기부터 강에서 유입된 토사가 바다를 메우면서 에베소는 항구의 기능을 잃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지진으로 에베소는 폐허가 되어 땅속에 잠겼지만 근대에 와서 유적이 발굴되어 과거의 위용을 일부나마 드러내고 있다.
성경에 보면 에베소는 사도 바울과 인연이 깊은 도시다. 바울 사도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에베소에 교회를 세웠다. 그가 에베소에서 선교할 때 은으로 아르테미스 신전 모형을 만드는 사람과 이를 파는 상인들과 갈등을 겪었다. 그들은 신전 모형을 팔아 엄청난 부를 챙기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우상숭배 금지에 대해 힘주어 설교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교인의 신전 모형을 더 이상 사지 않았으니 소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행 19:19-40).
훗날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에베소 신자들에게 두 통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에 얼마나 많은 사랑을 쏟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로마에서 바울 사도가 순교하자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를 이끌었다. 요한은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주님의 십자가 아래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끝까지 보살펴 드리는 제자였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 19:27).

.에베소 (에페소스) 개관
에페소스 (Ephesus, Έφεσος, Efes,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에페소, 한글 개역판에서는 에베소로 표기)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위치한 (현재의 터키 Selçuk Efes),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9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에페소스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얼룩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제국 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물인 도미티아누스 신전 (기원후 1세기)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에페소스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가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울로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페소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이 전도와 목회한 교회중 하나가 에베소 교회였다. 또한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중 하나가 에베소 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 성공회의 존 폭스 신부가 쓴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바울의 제자인 디모데가 목회한 교회가 에베소 교회라고 한다.

.누가 무덤
에베소에 도착해 주차장에 내리니 누가의 묘지가 보였다. 이 무덤은 본래 의료의 신이라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이었던 것을 로마가 기독교국가가 된 후 누가의 무덤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누가의 유해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가져와 묻었다가 그 후 이곳에 안장을 했었는데, 이제는 콘스탄티노플 (현 이스탄불)로 이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머리는 로마 베드로 성당에 안치하고 몸은 파도바 시에 있는 성 기우시티나 교회에 보관 중이라 한다.
누가는 ‘빛을 준다’는 뜻으로 성경에 소개된 그에 관한 기록과 교회사가들의 증언 및 전승을 토대로 종합해보면, 그는 수리아의 안디옥 출신이며 이방인 (그리스 사람) 개종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에서 수리아의 안디옥에 관한 기사가 유난히 많고 상세하게 기록한데서 알 수 있다 (행 11:22-30; 13:1-3; 14:24-28; 15:30-41 등).
수리아 안디옥 사람 누가는 (골 4:14) 알렉산드리아에서 의술을 배웠습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네압볼리로 가던 바울을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바울의 개인 의사로 함께 하면서 2차 선교 여행을 동행한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임에도 요한과 바울을 만나 그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단편적으로 기록한 것들을 모아서 (눅 1:1-2) 누가복음을 기록하였고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하면서 사도행전까지 기록한다. 혹자는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바울이 유럽 (네압볼리)에 첫발을 내딛게 된 데는 누가의 조력이 컸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바울의 동역자가 된 누가는 바울과 함께 빌립보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타지에서 복음 사역을 할 때도 계속해서 빌립보에 머물며 사역했고, 후에 3차 선교여행에 나선 바울이 다시 빌립보를 방문할 때 합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 20:5-6).
그후 바울의 1차 로마 투옥 때에도 함께 동행하여 거의 2년 정도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 후반부 바울의 로마 여행 기록이 매우 생생하고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행 28:8-9). 심지어 바울이 순교 직전 2차 로마 투옥 때는 누가만이 바울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딤후 4:11).
터키 에베소 고대 유적지 입구 부근에 있는 ‘누가의 무덤’은 이오니아식 건축양식을 따라 16개의 기둥을 세워 16m의 길이로 건축되었으나 현재는 일부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860년 영국 고고학자 T. J. Wood가 오데이온을 발굴하던 중 이 건물에서 십자가와 황소 모양이 새겨진 비석을 보고 누가 복음사가의 무덤으로 판명했다고 한다. 황소는 누가 복음사가의 상징이다.
그러나 학자에 따라서는 누가 복음사가의 무덤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에베소 유적지 입구의 ‘누가의 무덤’은 생각지 못했다.
이 무덤은 본래 의료의 신이라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이었던 것을 로마가 기독교국가가 된 후 누가의 무덤으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누가의 유해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가져와 묻었다가 그 후 이곳에 안장을 했었는데, 현재의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로 이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후 머리는 로마 베드로 성당에, 몸은 파도바 시에 있는 성 기우시티나 교회에 안치 중이라고 한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Asklepios) 신전 옆에는 막대를 휘감고 도는 뱀들의 형상인 카두시어스 (The caduceus) 부조가 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반신반인으로 의술에 뛰어나고 온갖 질병의 치료를 주재하였다. 그는 뱀이 휘감겨 있는 지팡이를 지니고 있는데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의료직종을 상징하는 기호로 쓰인다.

.셀수스 도서관
에페소 유적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로 손꼽히는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소 유적가운데 전면이 원형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에는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여러차례 많이 훼손되었으나 최근에 재건되었고 높은 초석 위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넓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셀수스 도서관은 서기 135년, C. Aquila에 의해 아시아 지역의 통치자였던 그의 아버지,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 (Celsus Polemaeanus)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이 도서관에는 세개의 문이 있는데 각각의 상단은 지혜, 운명, 지식을 상징하는 정결한 여성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셀수스의 무덤은 중앙 적소 아래 지하에 위치해있다.
도서관 터에 남겨져 있는 비문에 의하면 도서관을 지으라고 명한 C.Aquila는 이 건축물이 완성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고 이에 그의 후계자에 의해 건축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Aquila는 도서관에 소장될 서적 구입비로 2만5천 디나르를 남겨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더불어 에페소는 바울이 서기 53년 부터 이곳에서 2년간 전도활동을 하며 강론을 펼쳤다는 사실로도 유명하다.
바울의 방문 이후 ,이곳에는 교회가 부흥하였고,
이것이 성경상에 나타나 있는데 바로 바울이 로마에 투옥돼 에페소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 바로 ‘에베소서’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행 19:9-10)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을 펼친것으로 나와있어 이 셀수스 도서관이 바로 성경상의 두란노 서원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또는 공공연하게 사람들은 이곳이 두란노 서원이라고 단언하기도 하지만 역사상으로 이 셀수스 도서관은 바울이 에페소를 방문한 시기보다 늦게 완성되어 신빙성이 없는 추측일 뿐이며, 바울이 셀수스 도서관과 같이 도시 중심에 위치한 화려한 곳이 아닌 변두리에서 두란노라는 사람의 개인 서원에서 강론했을 것이라는 것이 좀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에페소는 이곳에 바울이 복음을 전했고, 교회가 세워져 부흥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셀수스도서관은 에베소에서 가장 훌륭한 유산으로 꼽힌다. 폐허가 된 에베소 유적 가운데 유일하게 전면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훼손과 재건을 반복해 왔지만 원형 그대로인 전면부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셀수스 도서관은 서기 135년 줄리어스 아킬라가 아버지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를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도서관에 문 세 개가 있는데 각각 상단에는 지혜와 운명, 지식을 상징하는 여성상이 장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도서관 앞 광장에서는 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한다. 셀수스 도서관 앞에는 지혜, 운명, 학문, 미덕을 상징하는 여신들로 지혜의 신 (Wisdom, Sophia), 미덕의 여신 (Virtue, Arete), 지성의 여신 (Intelligence, Ennoia), 지식의 여신 (Knowledge, Episteme) 상이다.
셀소스 도서관 옆에는 메제우스와 미트리아테스 문이 보인다. 셀수스는 로마에서 파견된 통치자로 11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당시에 12000권의 장서를 소장했다고 한다. 도서관 지하통로로 유곽과 연결되었다고 한다.

.로마제국 제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 신전
하드리아누스신전 (Temple of hadrian)은 서기 138년경에 지어졌으며, 신전입구에는 코린트식 기둥 남아있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제14대 황제이다. 네르바 – 안토니누스 조 (朝)의 제3대 황제이다. 제국령을 두루 시찰하여 제국 각지의 실정을 파악하는 데 주력한 한편 트라야누스 황제의 팽창주의 노선을 폐기하고 현실적인 판단을 토대로 변경 안정화로 전환하였다.
로마 제국 최전성기로 알려진 로마의 평화와 제국의 영원 (Pax romana et Aeternitas imperii)시대 중 세 번째 황제이자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세 번째 황제이다. 본명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즉위 후 제호로 취한 정식 명칭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Traianus Hadrianus Augustus).
당대 로마인들과 후대 로마제국 사람들에게는 전쟁보다는 교양과 예술에 뛰어난 황제로 인식됐다. 하지만 오늘날 금석문, 기록 등을 통해 가능한 전쟁을 피하고 제국의 내정 개선에 힘을 기울인 실용적인 명군으로 평가되며, 트라야누스가 최대로 확장한 로마 제국을 안정적으로 관리하여 반석 위에 올려놓은 황제이다.
그는 그리스 문화에 심취해 있었고, 양성애자였으며, 까탈스럽고 뛰어난 미적 감각으로도 유명했다. 사생활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트라야누스에 비해 하드리아누스는 한 인간으로서도 흥미로운 면모들을 많이 갖고 있었고, 이 때문에 그는 늘 후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에 이루어진 특기할 만한 사실들은 ▷속주 메소포타니아와 아르메니아의 포기와 동부 변경 안정화, 방벽(防壁) 건조 등을 통한 제국 주변 지역 방어책의 정비 ▷로마 제국 전체의 통합과 평준화 ▷두 차례에 걸치는 장기간의 순찰 여행 ▷관료 제도의 확립과 행정제도의 정비 ▷법 제도 개혁 등이 있다.
에베소의 도미티아누스신전 (Temlpe of Domitian)은 에베소 사람들이 도미티아누스황제의 아버지 베스파시안을 신으로 모셔 황제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만든 신전이라고 한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플라비안 왕조를 연 베스파시아누스 (Vespasianus) 황제의 아들이다. 그는 속주 통치와 영토 방위 등에서 많은 치적을 쌓았지만, 자신을 신으로 부르게 하는 등 전제적 공포정치를 자행하였다. 또한, 원로원을 무시하고 많은 반대자를 추방 혹은 사형시켰으며 무자비하게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여 많은 지탄과 원성을 들었는데, 결국, 기원후 96년 근위대장과 결탁한 황후 도미티아 (Domitia)의 음모로 살해된다. 신전은 둥근 기초위에 50m×100m 크기의 넓고 높은 테라스가 있었으며, 테라스의 북쪽은 높은 이층이어서 계단으로 오르내렸는데, 그 계단은 현재도 볼 수 있다.

.바리우스의 목욕탕
바리우스의 목욕탕은 BC 2세기 경에 건립된 에베소에서 가장 큰 목욕탕이며 로마시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유적으로 1926년에 발굴되었는데 냉탕과 열탕, 탈의실, 사우나로 나뉘어져 있으며, 지금은 욕장의 벽과 문 그리고 바닥의 잔해만 일부 볼 수 있다. 목욕탕의 난방은 하이퍼코스트 (hypocaust) 방식으로 바닥을 데웠다고 하는데, 이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그 열기를 바닥과 벽체내에 뚫린 통기로를 통해서 배기하는 난방방식으로 로마시대 때 저택이나 목욕장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목욕탕 주변을 보면 땅에 묻힌 황토색 관이 보이는데, 물을 끌어들여 도시에 공급한 수로이다. 물은 생존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에 상하수도를 제대로 만들지 않고는 도시를 건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중화장실
공중화장실은 쿠레테스 거리 끝에 이르면 있는데 경사지의 가장 아래에 화장실이 있는 셈이다. 이곳은 쿠레테스 거리와 대리석 거리가 만나는 지점으로 도시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며 벽을 따라 좌변기가 놓여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하수도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수세식 화장실을 만든 것이다. 좌변기 형태의 대리석 바닥에 구멍을 내서 소변과 대변이 아래로 떨어지도록 했다. 이렇게 떨어진 오물은 바로 물에 씻겨 내려가도록 한 구조로 아래 하수도가 경사졌기 때문에 위생 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했다. 발치 앞의 파여있는 홈에는 물이 흘러, 용변을 본 후에 허리를 굽혀 손을 씻었다고 한다. 재미있은 것은 위쪽에 있는 변기가 아래쪽에 있는 변기보다 이용료가 더 비쌌다고 한다. 아무래도 냄새와 청결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런거 같다. 또 변기 앞에는 분수시설을 만들어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수 있도록 했는데, 용변을 보면서 느끼는 쑥스러움을 줄이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한겨울에는 변기가 차가워 노예를 먼저 앉혀 데운 후, 주인이 사용했다고 한다. 때론 고관들이 비밀스런 이야기를 할 때 이곳에서 음악 연주를 하게하여 남이 듣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바실리카의 열주
바실리카 (Basilica)의 열주는 길이 160m의 전형적인 로마양식 건축물로 본당과 세개의 통로가 있는 구조이며 바리우스 목욕장과 연결된 문이 있었다고 한다. 바실리카는 고대 로마에서 재판소나 상업거래소 등으로 사용된 직사각형의 공공건축물로 지금은 기둥만이 남아있다.
바실리카의 유적으로 현재는 기단과 기둥 일부만 남아있다. 바실리카라고 하는 것은 고대 로마에서 재판소나 상업 회의소 등으로 사용되었던, 직사각형의 집회소라고 한다.
.플라타네이온
플라타네이온 (Prytaneion)은 바실리카 뒤편에 위치해 있는 공회당으로 사용된 건축물이며, 주로 고관들의 회의 및 종교 의식ㆍ공식 리셉션ㆍ연회가 개최된 곳이다. 이 건물은 본래 마케도니아의 리시마코스 (Lysimachos)가 3세기경에 지었으나, 지금 흔적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재건한 복합적인 건물 유적이라고 한다. 중앙에는 에베소의 정신을 상징하는 여신 헤스타의 신성한 성화가 항상 타올랐으며, 이 불은 단 한번도 꺼진적이 없었다고 한다. 사방 6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물 뒤쪽으로는 나무지붕이 덮였던 넓은 지역으로 현재는 제단의 기초부분만 확인되고 있다.
프리타네이온 (Prytaneion)은 당시 자치시의 시청사로서 모든 시정의 중심지 였다고 한다. 폴리타네이온은 시의회당, 고관 귀족들의 회의와 리셉션장소 이었으며, 로마총독이 거주하던곳이자 디모데가 순교한 곳이라 한다.
.헤라클레스의 문
헤라클레스의 문 (Heracles Gate)은 크레테스 거리에 세운 헤라클레스의 조각을 새긴 문으로 그 맞은 편에 니케 부조가 있는데 이것은 헤라클레스 문의 아치형에 있었다고 한다. 6개의 기둥을 가진 2층으로 된 개선문 형태였으나 현재는 기둥 2개만 남아있으며, 기둥에는 미케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 (Eurysteus)가 헤라클레스에게 명한 12가지 과업 중 첫번째 임무로 수행한 네메아 (Nemea)의 사자를 처치한 후 그 가죽을 지닌 모습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기둥 사이를 좁게 만들어 진 것은 마차의 통행을 막았다고 보며 이는 크레테스 거리가 보행자 전용도로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힘이 세고 가장 유명한 영웅 중의 하나이다. 제우스와 암피트리온의 아내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제우스의 부인 헤라는 인간을 어머니로 해서 태어난 남편의 자식이면 누구나 미워했다. 헤라클레스가 태어났을 때도 헤라는 두 마리 독사를 보내어 요람에서 자고 있는 헤라클레스를 죽이려 했지만, 독사를 한 손에 한 마리씩 잡아 목졸라 죽여 버리는 바람에 헤라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세 때 암피트리온의 소를 습격한 키타이론산(山)에 사는 사자를 퇴치한 것이 그의 첫 모험이었다. 그 후 이 사자의 가죽을 몸에 걸치고 그 머리를 헬멧으로 삼았다. 뒷날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간계에 말려 에우뤼스테우스의 부하가 되었다. 에우뤼스테우스는 목숨을 내놓고 해도 해내기 어려운 임무를 차례로 헤라클레스에게 맡겼으니 이것이 이른바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공적이다. ① 네메아의 사자 퇴치, ② 레르네에 사는 히드라(물뱀) 퇴치, ③ 케리네이아의 산중에 사는 사슴을 산 채로 잡는 일, ④ 에리만토스산의 멧돼지를 산 채로 잡는 일, ⑤ 아우게이아스 왕의 가축 우리를 청소하는 일, ⑥ 스팀팔로스 호반의 사나운 새 퇴치, ⑦ 크레타의 황소를 산 채로 잡는 일, ⑧ 디오메데스왕 소유의 사람 잡아먹는 4마리의 말을 산 채로 잡는 일, ⑨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의 띠를 탈취하는 일, ⑩ 괴물 게리온이 가지고 있는 소를 산 채로 잡는 일, ⑪ 님프 (妖精) 헤스페리데스가 지키는 동산의 황금 사과를 따 오는 일, ⑫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를 산 채로 잡는 일 등이다.

.니케 여신의 이부조판
니케 여신이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관을 왼손에 들고 있는 이부조판은 원래 헤라클레스 문의
아치 장식였다고 한다. 그리고 니케여신의 치마폭에서 나이키가 심볼을 따왔다고 한다.
.오데이온 음악당
오데이온 (Odeon)은 언덕 한쪽 면에 반원형으로 세워진 1400명 정도 수용이 가능한 음악당으로 마이크 없이도 맨 뒤까지 소리가 전달되도록 구성되었으며, 이러한 형태는 대형 원형극장이나 히에라폴리스의 원형극장에서도 보여진다. 당시에는 나무로 된 지붕이 있었으며, 회의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AD 150년경 에베소의 부자인 푸블리우스 베디우스 안토니우스와 아내 플라비오 파피아나에 의해 건립되었다. 소리나 음을 뜻하는 오디오 (Audio)의 어원이 바로 오데온에서 나왔다고 한다.
.의회
에베소에는 두 개의 의회가 있었는데 시민 전체가 참여하는 의회는 대극장에서 열렸고, 도시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논의와 결정을 하는 평의회는 작은 극장인 이곳에서 열렸으며 평의회 구성은 귀족 중에서 선발하였다고 한다.
.폴리오의 우물
폴리오 (Pollio)의 우물은 국영 아고라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우스(Asklepios)에게 치료를 받은 후, 샘물에서 목욕을 하면 치료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스클레피온 (Asklepion) 병원 근처에 있다. 정면에 있는 높은 아치는에는 많은 동상들로 장식되었는데, 그들 동상중에 하나는 제우스 신의 머리로, 지금은에페소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메미우스의 비 (Memmius Monument)
로마 공화정 당시 에페소는 과중한 세금 문제로 로마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는데, BC 88년 폰토스 (Potos)의 왕인 미트리다테스 (Mithridates) 6세가 로마에 대항하자 그를 지지하였으며 당시 미트리다테스는 하루만에 무려 이 지역 로마시민 8만여 명을 무차별 학살하였다고 한다. 이에, 로마는 BC 88S년 최초의 종신 독재관이며 개혁가인 술라 (Sulla), 술라의 후계자 루쿨루스 그리고 BC 65년 폼페이우스 (Pompeius)가 3차에 걸쳐 미트라다테스를 완전히 제압하였다.
그 후 에페소인들은 미트리다테스가 자행한 대학살에 동조한 댓가로 막대한 세금을 로마에 내어야만 했다.
이 멤미우스 기념비는 당시에 학살당한 로마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BC 86년에 술라의 사위 ‘가이우스 메미우스 (Gaius Memmius)’에 의해 세워진 것인데 무차별 학살을 당한 로마인의 넋을 애도하고 폰토스의 난에서 에베소를 평정한 로마의 독재관 술라의 공적을 칭송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트라야누스의 샘은 2c초 트라야누스황제에게 바친 샘으로 9m정도의 높이였다고 한다.

.에베소 원형 대극장
아카디아 (Acadia)의 끝에 위치한 이 원형대극장은 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 시대에 지어졌으며 로마 제국 시대에 확장되어 연극과 격투로 사용되었다. 이 장소는 또한 포소 축제의 주요 장소이자 대규모 공연의 주요 장소이기도하다. 전체 극장은 공연 무대를 중심으로 언덕을 따라 지어졌으며 반원형 모양으로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건축 양식을 완벽하게 조화 시켰다. 극장은 66행의 지름이 154미터, 최대 2만5천 명 수용이 가능하다. 웅장한 규모 외에도 극장의 시청각 효과 그리고 무대의 시작부터, 좌석의 각 행은 앞 행보다 더 가파르고, 위쪽 주변 관객들이 무대 중앙에서 들을 수 있도록 에코를 사용하여 잘들리도록 했다.
원형대극장은 피론산 비탈을 이용해 헬레니즘 시대인 BC 3세기경 마케도니아의 라시마코스 (Lysimachos)에 의해서 건립되었는데, 로마 시대에 지금의 모습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지름이 154m, 높이가 38m인 반원형 구조로 무대끝에 서서 무대에 있는 성인을 보면 작은 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한 스케일이다. 2만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반원형로 그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극장으로, 좌석은 총 66줄로 세 개의 단으로 나눠져 있고,
각 단은 동심원 통로인 디오지마 (diazoma)로 분리되어 있다. 무대는 18m 높이의 3층으로 만들어져 있다. 제일 아래 단은 대리석으로 장식된 황제의 자리가 있었고, 그 뒤쪽으로 주요 인사들의 자리가 있었으며, 극장은 연극을 비롯한 각종 예술공연 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ㆍ정치ㆍ토론 및 검투사와 동물과의 격투를 위해 사용되었다.

.아카디안 대로
아르카디안 대로는 원형 대극장과 연결된다. 원형 대극장 무대는 서쪽방향이다. 무대 뒤편 아르카디안 (항구) 거리가 보이고 멀리 에게해도 보인다. 사도 바울 당시 에베소는 유명한 항구도시였고, 도로양옆에는 많은 상가들이 있었고 그래서 이 거리 이름에서 아케이드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현재는 퇴적작용으로 인해 항구로서의 기능은 상실되어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푸른 나무사이로 난 길로 가면 북측 출구가 나오고 ‘성모 마리아 (집) 교회’가 나온다.
.마리아의 집
바울이 순교하자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를 이끌었다. 요한은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주님의 십자가 아래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끝까지 보살펴 드리는 제자였다.
전승에 따르면 에베소에 도착한 요한과 마리아를 위해 에베소 신자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에베소 언덕 위에 있는 마리아의 집은 순례자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마리아의 집이 발견된 과정도 신비롭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마리아의 집의 존재는 잊혀 갔다. 그러다 1878년 한 번도 에베소를 와보지 않은 독일의 가타리나 에머리히 (1774 ~ 1824) 수녀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1891년 나자렛의 신부가 탐사반을 데리고 오늘날의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발견하게 됐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그 집에서 정기적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을 허락했고,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이곳을 찾았다. 이후 많은 순례자들이 마리아의 집을 찾고 있다.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임종했고, 565년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의 무덤 위에 교회를 건축하였다. 훗날 동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에베소에서 공의회를 개최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요한 이후에는 바울의 제자였던 디모데가 지도자로 활동했다.

.아르테미스 신전
에베소를 나오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는 아르테미스 신전 (Temple of Artemis, 또는 Artemision) 터를 버스 창밖으로 보았다. 당대 최대였다는 신전은 무너지고, 127개였던 기둥들 중 하나만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고 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는 아르테미스 신전은 세 번째 지어진 신전이며, BC 356년 7월 20일, 헤로스트라투스 (Herostratus)라는 미치광이의 방화 (放火)에 의해 무너진 아르테미스 신전은 두 번째 지어진 신전이다.
방화범 헤로스트라투스의 신분에 관해 알려진 게 없다. 방화범은 에페수스인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며, 노예였다는 설이 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이름이 길이 남을 방법을 찾다가 아르테미스 신전을 불태우기로 했다. 신전의 지붕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그는 불을 질러 신전을 태우고 붕괴시켰다. 즉시 에페소스 당국에 체포되어 형틀에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재판관들은 허명심에 불탄 그를 저주하기 위해 아무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말라고 명했다.
하지만 테오폼푸스 (Theopompus)라는 역사가가 자신의 역사서에 그의 이름을 기록했고, 그후에도 사가들이 그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페로스트라투스는 자신의 뜻대로 이름을 길이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 이로부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현상을 일컬어 헤로스트라투스 명성 (herostratic fame)이라는 용어가 생기게 되었다.
두 번째 신전에 관해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스 시인 안티파트로스 (Antipatros)는 7대 불가사의를 서술하면서 아르테미스 신전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전차 (戰車)를 위한 길이 있는 바빌론의 높이 치솟은 성벽을 보았고, 알페우스가 세운 제우스 신상 (神像), 공중정원, 태양의 거상과 수많은 노동력으로 지은 높은 피라미드와 거대한 마우솔로스의 묘를 봤었다. 그러나 내가 구름 위에 치솟은 아르테미스의 집을 보았을 때, 그들 다른 불가사의들은 그 빛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보라, 올림푸스를 빼면, 어떤 장대한 것에도 태양이 비추지 아니하였구나.’”
두 번째 신전이 방화로 붕괴된 날은 BC 356년 7월 21일이었고, 그날은 우연하게도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탄생한 날이었다고 한다.
한편 아르테미스 신전은 드물게는 디아나의 신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이 신전은 2번이나 완전히 새로 세워졌는데, 첫 번째로는 거대한 홍수로, 두 번째로는 방화로 인한 재건이었고, 3번째로 지어진 아르테미스 신전이 바로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기원후 401년에 최종적으로 파괴되었고, 현재는 신전의 토대와 조각 파편만이 남아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파괴된 뒤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대영박물관이 후원하고 존 터틀 우드가 이끄는 탐사대가 6년의 탐색 끝에 1869년 재발견하였다.

밀레토스
에베소 일정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밀레토스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마치 인류학자들이 인류문명의 기원을 열망하며 찾듯 철학의 기원지 밀레토스를 찾았다. 밀레토스에서는 이오니아의 스토아, 원형경기장, 아폴론 신전 등을 방문했다.

.밀레토스 개관
밀레토스는 기원전 8세기까지 이오니아의 중심지로서 해외 무역이 번성하였고, 기원전 7세기 동지중해, 흑해 연안에 70여 곳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기원전 6세기 중엽 페르시아 지배 아래에서 번영을 누렸으나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 반란의 중심이 된 것이 원인이 되어,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인에게 함락당하고 주민들은 노예가 되었다.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미칼레 전투 뒤, 히포다모스의 도시 계획으로 재건되어 델로스 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현재 대규모의 야외 극장을 비롯하여 이오니아식 상점 터, 신전 터, 로마 목욕탕, 아고라 등이 남아 있다.
이곳은 오리엔트의 풍부한 경험적 지식 정보를 받아들임으로써 밀레토스 학파 철학자를 배출하며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를 이루기도 했다. 세상의 기원을 최초로 탐구한 철학자 탈레스를 비롯해 만물의 기원을 탐구한 학자들을 밀레토스 학파 또는 이오니아 학파라고 한다. 밀레토스는 결과적으로 ‘이오니아 자연철학’을 탄생시켰고, 아울러 밀레토스 학파 철학자를 배출해 문화의 중심지를 이뤘었다. 호메로스는 이곳을 ‘갈리아인의 도시’라고 하였다.
밀레토스 학파는 BC 6세기에 성립된 그리스 최초의 철학 학파이다. 밀레토스 출신의 ‘탈레스’가 창시했다.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로 학풍이 이어졌다. 이들은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 자연 현상을 전적으로 의인화된 신들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당시의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관점에 반하여 새로운 견해들을 제시했다. 이들은 밀레토스의 자연에 경탄했으며, 그 자연의 바탕에 있는 만물의 근원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래서 자연 철학으로 분류된다.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들은 모든 것들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르케’라고 부른) 본질적인 물질로 정의하였다. 세계는 이 본질적 물질로부터 형성되었고, 이 본질적 물질은 모든 것의 원료이다. 탈레스는 이것을 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불과 같은 몇몇의 것들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보이지 않는, 정의되지 않은 원소를 선택했는데 그는 이를 아페이론 (“한계를 가지지 않음”이라는 의미)이라고 불렀다. 그는 전통적인 네 개의 원소 (물, 공기, 불, 흙)가 각각 다른 것과 대립한다면, 그리고 그것들이 대립하여 서로를 없애버린다면, 그것들은 물질의 안정적인 원천적 형태가 될 수 없다고 추론하였다. 결과적으로 다른 것들이 생성되고 진정으로 모든 것들의 원소인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세속적인 무한함의 개념은 불멸에 관한 종교적인 개념에서 그리스인의 심리에 친숙한 것이었으며, 아낙시만드로스의 묘사는 이러한 개념에 부합하였다. 이 아르케는 “영원하며 불로한 것”으로 불린다. 아페이론의 특정되지 않은 성질은 비판을 받아, 아낙시메네스는 이를 더욱 명확하지만 여전히 애매한 원소인 공기로 정의하였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는 다른 원소나 물질로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에너지에 대한 현대적 개념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과 더욱 비슷하다.
세 철학자의 차이는 물질의 성질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우주에 대해서도 다르게 상상하였다. 탈레스는 땅이 물에 떠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땅을 속이 빈 불로 채워지고, 태양과 별로 나타나는 구멍이 뚫린 동심원의 바퀴로 구성된 우주의 중심에 놓았다. 아낙시메네스에게 태양과 달은 별들이 고정되어 있는 하늘의 덮개를 순회하는 평평한 원판이었다.
한편 성경에서 밀레토스는 사도 바울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 날에 베드로의 설교를 경청했던 사람들 가운데 크레타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크레타 섬에서 선교 활동의 새로운 장을 펼쳤던 것이다. 그리고 디도에게 크레타 섬 선교 임무를 맡기고, 그곳을 떠나 자신의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그곳에서 그는 고린도로 갔으며, 고린도에 에라스도를 남겨놓았다. 그 후 밀레토스로 갔다. 그곳에는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앓아누워 있었다. “에라스도는 코린토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드로비모는 병이 나서 내가 밀레토스에 남겨 두었습니다” (딤후 4:20).
바울의 3차 선교 여행이 끝나갈 무렵인 58년쯤, 바울은 에베소에서 마케도니아로 향했다. 밀레토스에 도착한 후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을 불러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라며 눈물의 작별을 했던 곳이다. 바울 사도가 왜 에베소에 다시 가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중요한 일을 할 장소로 선택한 곳은 에베소가 아니라, 밀레토스였다. 이곳에서의 설교는 바울 사도의 15년 가까운 선교 여행의 최종 보고 같은 형식을 띠고 있다.
“이제 나는 하나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이와 함께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여러분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행 20:32). 설교를 들은 신자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울 사도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췄다.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울 사도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신자들은 아쉬움을 안고 바울 사도를 배 안까지 배웅했다 (행 20:1-38).

.밀레토스 디디마에 아폴론 신전의 충격적인 규모
후기 청동기 시대인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시대 밀레토스에 사람이 살던 것으로 보이며, 이 시대에는 히타이트와도 경쟁하였다. 이후 그리스 암흑기 시대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가 기원전 6세기 중반에 이오니아 인들이 건너가 도시를 세웠다. 당시 그리스 동쪽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나중에 뤼디아와 경쟁하였고 결국 뤼디아에 굴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키루스 2세의 페르시아 제국이 성립한 이후에는 페르시아에 복속되었고, 기원전 502년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났을 때 반란의 중심 도시였다. 페르시아가 무자비하게 반란을 진압하자 그리스인들은 모두 밀레토스의 함락을 슬퍼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후 밀레토스는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에 속해 있었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완전히 페르시아에서 벗어났다.
밀레토스는 이오니아 지방의 상업적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밀레토스 학파는 기원전 6세기에 성립된 그리스 최초의 철학 학파이다. 아나톨리아의 에게 해 연안의 이오니아의 도시 밀레토스 출신의 탈레스가 창시했다.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로 학풍이 이어졌다. 이들의 활약 시기는 소크라테스, 플라톤보다 백 년 이상 앞선다. 이들은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 자연 현상을 전적으로 의인화된 신들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당시의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관점에 반하여 새로운 견해들을 제시했다. 이들은 밀레토스의 자연에 경탄했으며, 그 자연의 바탕에 있는 만물의 근원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래서 자연 철학으로 분류된다.
한편 아폴론 신전 (Temple of Apollo)은 지중해의 여러 곳에 세워졌으며, 역사적으로 문헌을 통해 유명한 것은 그리스 델포이이지만 델로스섬이나 고대 리키아의 크산토스, 로마 폼페이, 코린토스 등지에도 아폴론 신전들이 세워졌다.
특히 밀레토스 남쪽 20km, 디디마 (Didymia)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의 규모는 거대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이 곳은 그리스 델포이 아폴론 신전과 더불어 2대 신탁 신전으로 꼽히던 곳이다. 헬레니즘기에 재건된 현재 아폴론 신전 (길이 100m, 폭 51m)은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사모스 섬의 헤라 신전에 이어 세 번재로 큰 규모였다고 한다 (아르테미스 신전 석주 127개인데 이곳은 122개). 디디마 신전은 아르테미스 신전과 길이에서 2미터가 작을 정도로 규모가 거의 같은데다 현재도 비교적 온전한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20km 떨어진 밀레토스로부터 포석이 깔린 참배로가 이어져 있어, 1년에 한 번 참배 대열이 4일간을 꼬박 걸어서 디디마에 도착해 아폴론의 제사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밀레토스 원형 극장
인근의 밀레토스 원형 극장은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 식으로 1만 5000석으로 지었다가, 로마 트라이아누스 황제 시절에 2만 5000석 규모로 증축한 대극장이다. 높이만 해도 30m가 넘는다. 예전에는 커다란 배들이 극장 바로 앞에서 닻을 내렸다고 한다.
‘에게해의 두 개의 장미’로 극찬 받았던 버가모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에베소에서는 유적입구에 누가의 무덤, 에베소 거리, 헬레니즘 시대 건축물 원형 대극장, 셀수스 도서관, 아카디아거리, 마리아의 집 등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었다. 에베소에 이어 밀레토스로 이동해 이오니아의 스토아 흔적, 대 원형경기장, 대규모의 아폴론 신전 등을 볼 수 있었다.
에베소와 밀레토스를 둘러보고 우리 일행은 다음행선지인 파묵칼레로 향하다 파묵칼레 인근에 예약된 호텔에서 일박했다. 숙소 침대에서 오늘 하루를 돌이켜 본다.
에베소에서는 참으로 유적과 유물의 보고였다. 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며 사역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거대한 아르테미스신전을 비롯, 규모는 제각각이지만 참으로 많은 신전이 있었다.
에베소와 관련해 성경관련 인물로 바울, 요한과 마리아 만을 떠올렸는데 유적 입구 옆에 누가의 무덤이 있어 놀랐다. 이번 인문학여행에 개인적인 주제는 ‘나를 찾기’와 다른 주제는 ‘죽음 자리’ 그리고 ‘문학’이다.
그리스의 크레타에서는 디도와 조르바의 죽음을, 파트라스에서는 안드레의 죽음을 생각했다. 터키의 에베소에서는 누가, 요한, 마리아, 디모데를, 히에라 폴리스에서는 필립을, 이스탄불에서는 알렉산더석관 (현재는 알렉산더 부하의 석관으로 판명)을 통해 죽음을 생각하려 한다.
한편 밀레토스는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의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의 도시로 이곳의 소피스트들의 활약 시기는 소크라테스, 플라톤보다 백 년 이상 앞선다. 그리고 소피스트들의 역사 만큼이나 밀레토스의 경기장이나 아폴론신전의 규모는 거대했다. 유적의 규모로 보아 학문과 문화 중심지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밀레토스 남쪽 20km, 디디마 (Didymia)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의 규모는 참으로 거대했다. 그리스에서 본 파로테논을 능가하는 듯했다. 헬레니즘기에 재건된 현재 아폴론 신전 (길이 100m, 폭 51m)은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사모스 섬의 헤라 신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였다고 한다 (아르테미스 신전 석주 127개인데 이곳은 122개). 디디마 신전은 아르테미스 신전과 길이에서 2미터가 작을 정도로 규모가 거의 같은데다 현재도 비교적 온전한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놀라웠다.
밀레토스 원형 극장은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 식으로 1만 5000석으로 지었다가, 로마 트라이아누스 항제 시절에 2만 5000석 규모로 증축한 대극장으로, 높이만 해도 30m가 넘는다. 예전에는 커다란 배들이 극장 바로 앞에서 닻을 내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해안에서 많이 들어와 있어 세월의 위력을 실감했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