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수량화 혁명 : 유럽의 패권을 가져온 세계관의 탄생
앨프리드 W. 크로스비 / 심산문화(심산) / 2005.5.25
『수량화 혁명』은 저자가 평생 동안 연구한 유럽 제국주의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유럽인의 실재라는 것을 수량화된 개념으로 정리하는 사고방식이 혁명적 변화의 원동력이라고 강조한다.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은 높은 효율성을 가지고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를 정복해 나갔다. 보통 그 원동력을 높은 과학과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9세기 이전 유럽 제국주의가 시작될 무렵에는 과학이나 기술 같은 것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에 저자는 유럽인의 진정한 장점은 과학과 기술이 아니라 특정한 사고방식이라고 한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유럽인의 사고방식은 중요한 행정, 상업, 항해, 제조, 군사와 관련된 기술을 개발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처럼 훌륭한 표준을 차례로 만들어간 기술자들, 새로 접한 땅의 해안선을 그리는 지도제작자들, 새로운 제국과 동인도, 서인도 회사를 운영한 관료와 기업가들… 이들은 모두 어느 누구보다 더 실재라는 것을 수량화된 개념으로 사고하고 정리해 나갔다.

○ 목차
머리말
1부 수량화라는 혁명
1장 보편 측량술
2장 유서 깊은 모델
3장 수량화의 가속
4장 시간
5장 공간
6장 수학
2부 시각화 혁명의 충분조건
7장 시각화
8장 음악
9장 회화
10장 회계(부기)
3부 에필로그
11장 새로운 모델
옮긴이의 말
주
연표
찾아보기

○ 저자소개 : 앨프리드 W. 크로스비 (Alfred W. Crosby)
1931년 보스턴 출생. 1961년 보스턴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워싱턴 주립대학과 텍사스 대학을 비롯하여 예일 대학, 하와이 대학, 핀란드의 헬싱키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텍사스 대학에서 역사학, 지리학, 미국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인권운동 현장에서 월남전을 반대하는 반전 운동의 리더 역할을 하면서 정통 역사학과는 다른 시각의 지적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유럽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노예로 착취당하고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주목하면서 인구학과 유행(전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유럽 제국주의를 색다른 시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이후 출간된 그의 저서들은 이러한 그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교역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본 선구적 도서 『콜럼버스가 바꾼 세계』 (1972년 초판)와 신대륙을 향한 유럽 제국주의의 역사는 생태계 정복의 역사임을 밝힌 『생태 제국주의』(1986), 유럽 제국주의의 성공을 질의 세계관에서 양의 세계관으로의 변화로 풀어낸 『수량화 혁명』(1996), 1918년 미국을 온통 공포로 몰아넣었던 스페인 인플루엔자에 대한 숨겨진 연구 『미국의 잊혀진 유행병』(1999), 에너지를 향한 인간 욕망의 역사를 재구성한 『태양의 아이들』(2006) 등의 저서를 통해 크로스비는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며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 연구를 지속적으로 했다.
– 역자 : 김병화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공화국의 몰락』, 『쇼스타코비치의 증언』, 『첼리스트 카잘스 : 나의 기쁨과 슬픔』, 『카루소』등이 있다.
○ 책 속으로
1577년 커다란 혜성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이는 이후 50년 동안 수없이 나타나게 되는 ‘불붙은 운석’의 첫 사례였다. 위계질서가 있는 전통적 우주 모델에 타당성이 있다면 높은 곳에 있는 모든 물체 중에서도 가장 불안정한 혜성은 반드시 요동치는 지구 대기의 상층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브라혜는 언제나처럼 빈틈없이 관측하여, 그것이 달의 구체가 아니라 훨씬 먼 곳, 달보다 대력 여섯 배는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곳에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뿐만 아니라 그 혜성은 완벽한 원이 아니라 타원형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이는 결국 행성의 구체를 뚫고 지나간다는 이야기가 된다. 유럽의 천문학이 수천 년간 전제해 온 수정 구체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 본문 141~142쪽에서
만물에서 숫자를 제거해 보라, 그러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세계에서 계산을 제거해 보라, 그러면 모든 것은 캄캄한 무지로 휩싸일 것이고, 더듬어 나갈 길도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은 아마 다른 동물들과 구별될 수도 없을 것이다. – 세비야의 성 이시도루스 (St. Isidorus of Sevilla, 600?)
그래도 그들, 과거 나라의 새로운 사람들은 무게를 달고 측정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게 사랑받는 그러한 나라로 여전히 온다. – 오든 (W. H. Auden, 1935)

○ 출판사 서평
– 근대인들이 열광했던 것들
푸코가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설명하기 위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로부터 『말과 사물』을 시작하듯, 크로스비는 16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브뢰헬이 그린 <절제>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 작품에 근대인들이 열광했던 것들이 매우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달과 별 사이의 각거리를 재는 천문학자와 온갖 측량 도구를 동원해 무언가에 열중인 기술자들, 성서로 보이는 커다란 책을 둘러싸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사람들, 저마다 계산에 열중인 상인․회계사․농민, 원근법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악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합창단 따위가 등장한다. 그리고 절제를 상징하는 여성이 그림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녀의 머리에는 시계가 얹혀 있다.
화가는 당대인들이 환호할 만한 모습들을 이 판화에 담은 것일 터인데, 일견 잡다하기만 해 보이는 이 다양한 행동들에 사실은 중세를 넘어선 근대 서구의 핵심이라 할 그 무엇이 관통해 있다. 세계를 균질적 단위의 집합체로 설명하려는 사고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맹아적 형태가 1250년에서 1350년 사이의 서유럽에서 나타났다고 보는데, 이는 시계와 항해도, 정량적 기보법, 원근법, 복식부기 등에 대한 폭넓은 고찰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 고전적 세계관 : 유서 깊은 모델
그리스 로마적인 것이든 아니면 기독교적인 것이든 고전적 세계관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질적으로 상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주는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어 있고, 달 아래의 세계가 가변적인 그래서 불완전한 곳이었던 데 비해 제5원소를 갖는 그 바깥 공간은 질적으로 완벽한 곳이었다. 지구 위의 공간 역시 모두 질적으로 구분된다. 예컨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지상의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모든 곳은 이로부터 상대적인 위치를 할당받는다. 시간 역시 그저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의미가 부여되는 것으로, 예수의 십자가형 이전과 이후는 질적으로 구분된다. 결국 고전적 세계관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어떠한 단위로 환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금과 과거는, 이곳과 저곳은 고상하든 저속하든 저마다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가 살던 시대의 한 시간이나 지금의 한 시간이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수량화·시각화라는 세계관의 혁명
수천 년 지속되던 고전적 세계관은 14세기 무렵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시계의 발명으로 인해 시간이 무수히 작은 단위로 나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무심히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모든 시간의 질적 차이를 집어삼켜 버린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 영향 받은 유럽인들은 경도와 위도라는 그물망을 지구 위에 덮어씌워 모든 공간을 단순히 좌표값을 가지는 균질적 공간으로 정리했다. 또한 인도-아리비아 숫자의 도입, 연산 기호의 사용 등으로 대수학이 가능해져 모든 사고의 수식화가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균질적 단위의 수량화는 세계의 시각화라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는데 정량적 기보법, 원근법, 복식부기 기법 등이 그러한 사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음의 높낮이와 길이가 일정치 않은 데다 사람의 기억력에 전적으로 의지하던 단선율 그레고리안 성가는, 기보법의 발명으로 인해 하나의 음표가 어떤 높이와 지속 시간을 갖는지 (눈으로) 확인이 가능해져 복잡한 폴리포니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중요도에 따라 대상의 크기와 위치가 결정되던 이전의 회화 양식은 투시도법을 활용해 어느 한 순간에 포착된 3차원적 세계를 2차원적 평면에 사실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게 된다. 대차대조표에 의한 복식부기 역시 복잡한 자본의 흐름을 특정 시점에서 간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 근대성, 그 근원을 탐사하다
시간과 공간을 선험적 객관형식으로 지목한 칸트의 논의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시공간은 우리의 의식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이 시공간에 대한 인식이 어느 순간에 변화했고 그것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면 이는 근대를 설명하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시공간 인식의 변화를 예술과 사상, 자연과학 및 과학기술, 상업 활동 등 여러 분야를 통해 다룬 이 책이야말로 근대성 논의에 깊이 있는 시사점을 던져 준다고 하겠다.
또한 스콜라 철학의 사상사·문화사적 역할, 인쇄술로 인한 읽기 문화의 변화,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고 좌절하는 예술가들의 생애 등이 발랄한 문체로 그려져 있어 읽는 재미 역시 남다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