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복음서에 나타난 비유공부 (3)

본문 : 누가복음서 10장 30-37절
제목 : (3) 물어볼께요? 우리는 착하고 그들은 악한가요?
물어볼게요. 우리는 착하고 그들은 악한가요? (누가복음서 10장 30~37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알려져온 이 비유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지체 높은 자리에서 존경을 받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를 당해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쳐다보고도 피하여 지나가 버렸는데 오히려 그 사회에서 개처럼 취급을 받던 한 사마리아 사람은 위난에 쳐하여 있던 불쌍한 사람을 구출해 주었다고 하는 스토리입니다. 이 비유를 다시 읽고난 후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솔직한 질문 중 하나입니다. 교인들은 착한 일을하고 교인아닌 사람들은 악한 일을하는가? 종교인들, 기독교교인들, 지식인들, 우리 사회의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 – 그들은 착한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 사람들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편이고 그 반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악하고 따라서 나쁜 일을 더 많이 하는가? 목사와 장로, 권사와 집사들은 어려운 일 당한 사람들을 잘 돌보아주고 않믿는 사람들은 불행한 이웃을 잘 돌아보질 않는가? 사회나 교회에서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으며 돈도 많고 배움과 학식도 높고 권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일반 서민들이나 사회-경제적 하층계급에 속한 사람들 보다 월등히 도덕적인가? 목사나 교수는 교인들이나 학생들 보다 신앙과 인격이 더 고상하고 고결하다고 말 할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 교회는 우리 사회의 여러 NGO 보다 세상을 더 잘 섬기고 맡겨진 재정을 옳바로 쓰고 있는가?
만일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아니요’ 라고 대답을 하거나 좀 완만하게 표현하여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요’ 라고 말을 하게 된다면 그럼 그 다음에 뒤 따라오는 여러가지 질문과 도전으로 인하여 우리는 무척 곤혹스런 입장에 처해지게 될 것 입니다. ‘그럼 그렇다면 왜 우리는 교회에 다녀야 하는가? 교인이 된다고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신앙생활의 본질은 무엇인가? 믿는 것과 사는 것은 하나인가 아니면 각기 다른 문제인가?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제사나 예배, 교회생활이나 봉사 보다 더 앞서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정직하게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질문은 퍽 오랫동안 우리들이 무비판적으로 지녀왔던 생각과 사고방식, 이럴테면 ‘그래도 믿는 사람이 않믿는 사람들 보다야 낫지’ 라는 말에 대하여 심각하게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비유는 굉장히 도발적 입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 혹은 별일없이 그냥 평안하게 살아가면서 행복하게 교회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붙여 싸움을 걸어볼려고합니다. 이 비유는 우리를 많이 불편하게 만들어 주는 이야기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누가의 신학적 성격을 반영하고있습니다. 공관복음서의 다른 편집자들인 마가나 마태에 비하여 누가는 아주 확실하고 분명하게 ‘복음의 우주적 성격’ 위에 굳게 서있습니다. 즉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어떠한 차별도 없다는 입장입니다. 남자나 여자, 유대인이나 이방인, 어른들이나 어린이들, 부자나 가난한 이들, 종교인이나 비종교인, 제사장이나 사마리아인, 레위인이나 죄인, 바리새인이나 창기 등등, 모든 인종과 국가, 남녀와 노소, 사상과 종교, 빈부와 유무식, 신분과 직업을 초월하여 인류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과 은총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누가의 신학적 입장이고 이 복음서가 지닌 독특한 내용들중 하나입니다. 선택된 종교지도자인 제사장이며 역사상 우월한 유대 민족이라 할찌라도 그래도 인간을 불쌍히 여길 줄 모르고 그냥 그 비극적 현장을 비켜가버리는 사람은 사실 개보다도 더 못한 개자식 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한 것이 이 복음서의 일차적 핵심입니다. 실로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누가가 말하는 ‘온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소식’ 이라는 전체적 구도속에서 팔레스타인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유대교의 울타리를 넘어서며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지닌 기득권에 대항하며 일체의 차별을 깨뜨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새 종교를 선포합니다. 누가는 오직 누가만이 갖은 그의 자료들을 통하여 이렇듯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참 많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서는 모두 1149절인데 그 중 5분지 2에 해당되는 460절이 마리아의 송가, 목자들의 경배, 안나와 시므온의 노래, 아담까지 올라가는 우주적 족보 스토리,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 주님을 섬겨온 여제자들의 명단, 마리아와 마르다,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 이야기, 지혜로운 청지기, 부자와 거지 나사로, 감사할줄 아는 한 사마리아인,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세리장이지만 주님을 영접해 드리는 삭게오 등 참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누가는 이와같은 일련의 초인종적, 초민족적, 초문화적, 초지역적, 초종교적 스토리들은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교회만 다닌다고해서 다 착한 사람은 아니다. 목사라고 해서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다. 종교인들은 선하고 비종교인들은 악한 것이 아니다. 제발 정신 똑똑히 차리고 사람답게 살도록 하거라!>
이 비유의 발단은 앞선 25절에서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핵심 단어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영생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고 영원한 삶을 얻고자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최종적이며 궁극적 소원 입니다. 인간이 종교적 동물이라는 증거는 이 관심과 질문 속에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오늘도 우리는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주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영원한 나라에 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둘째는 그 동안 우리가 쉽게 생각했던 것과는 각도가 많이 다릅니다. 그 영생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어야 할 것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 ‘무엇을 믿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믿어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行해야 구원을 얻는 다는 것입니다. 이는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그 율법교사는 예수님에게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라고 묻지않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퍽 오랫동안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의 현장에서 강조해 왔던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많이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이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영생에 이르는 길을 교정해 주시고 계십니다. ‘옳바로 살아야한다’ ‘어려움에 쳐한 사람은 불쌍히 여겨서 도와 주어야한다’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지말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것인가를 질문해라’ 그리고 ‘너도 가서 이와같이 하거라’
이 말씀은 오늘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대단히 심각한 도전장이 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4영리’적 교리에만 안주해 왔습니다. ‘이신득의’ 신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들 입니다. 각종 부흥 집회와 주일 설교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예수믿고 구원 받으라’ 데만 촟점을 맞추어왔습니다. ‘주여 믿습니다’하고 따라서 하도록 영접 기도를 훈련해 왔습니다. ‘할렐루야’만 크게 외치면 천당 문앞에 도착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할렐루야’ 너무 함부로 부르지 마십시요. 할렐루야 식의 이런 거룩한 부르짖음이란 그져 일생에 몇번 해야 할 것이지 시도 때도 없이 남발 할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승마를 좋아하신 어떤 교인이 계셨답니다. 그이는 새로 산 말을 타고 다니면서 훈련을 시켰는데 말등에서 ‘할렐루야’라고 외치면 말이 전력을 다하여 앞으로 달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스톱을 시킬려면 ‘아멘’하면 멈추게 했답니다. 몇주일 동안 훈련을 잘시켰습니다. 진짜로 ‘할렐루야 할렐루야’ 라고 외치면 말이 전력을 다하여 앞으로 질주를 하고 ‘아멘 아멘’ 하면 금새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말을 타고 ‘할렐루야 할렐루야’ 외치면서 신나게 앞으로 달리다가 갑자기 전방에 낭떨어지가 나타나서 깜짝놀라 ‘아멘 아멘’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말이 바로 절벽 앞에서 딱 스톱을 했습니다. 그 분은 가숨이 철렁했습니다.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니 한 발만앞으로 더 나갔어도 절벽 밑으로 떨어져서 죽을 뻔 했습니다. 감격한 그 성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지않고 살게되었다 싶어서 그만 자기도 모르게 ‘할렐루야’ 하고 크게 외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 충성스런 말은 그 성도를 등에 태운채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습니다.
우리가 보통 교회에서 습관적으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사용해오는 ‘믿으면 된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도 오늘같은 본문을 읽을 때는 다시 한번 더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인 야고보서에는 이런 말씀들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저 하느냐’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그동안 ‘울어도 않되고 참아도 않되고 힘써도 않되고 믿으면 되겠네’ 라는 노래가 우리를 너무 지나치게 쇄뇌시켜왔습니다. 우리는 믿기만 하면 모든 죄는 다 면죄가 된다고 여겨왔습니다. 믿는 것과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양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활이 믿음의 증인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오늘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우리 주변에서 가난하고 억울하고 억눌려있고 인권이 짖밟히며 남몰래 눈물흘리는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않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삶으로 그리스인의 모습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21세기, 또하나의 제사장과 레위인이 될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7절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절대로 자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무입니다. Good Samaritan Law가 규정하고 있는대로 위험에 쳐해있는 사람을 도와주지않고 그대로 방치해두는 행위는 ‘구조 불이행죄’ – Failure to Rescue-에 해당됩니다. 세상법은 어수룩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심판 날에 우리를 피고석에 앉히고 공소장을 낭독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아니한 것이니라’
이제 저는 여기서 조금 더 나가려고 합니다. 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 내용을 좀더 유의하여 깊이 들여다보면 사실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도덕적 행위에 대한 교훈을 훨씬 넘어서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는 물론 여기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은 대단히 좋은 사람입니다. 인간의 기본이 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는 분명히 ‘착한 사람’ 입니다. 그러나 사실 오늘의 본문에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그를 ‘착한’ 사람이라고 부른 귀절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끼리 성경에도 없는 단어를 덧보태서 그를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라고 하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니고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제 아무리 선하고 착하고 훌륭한 일을 했고 또 강도만난 사람을 위하여 온갖 선행을 베풀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근본이 ‘천하고’ 바탕이 ‘더러운 피’를 지닌 사람이기에 죽었다 깨도 도저히 ‘착한 사람’이 될래야 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남북이 갈라진 후 북왕국 이스라엘은 먼저 앗시리아에 의해서 망했습니다. 주전 722년입니다. 사람들은 이방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땅에서 죽지않고 살려다보니 자연히 통혼도 하고 이방인들의 문화를 좇아 혼합주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 이민자들 처럼 국제결혼도 하고 피가 섞인 아이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때 앗수르와 이스라엘 민족사이에서 혼혈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사마리아인들입니다. 순수한 피의 혈통을 생명처럼 여겼던 남쪽 유대인들은 그때부터 북쪽 이스라엘을 배타시하고 이민족으로 여기며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려던 주님 일행을 사마리아사람들이 용납하지 않자 제자들 중에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 사마리아사람들을 멸하게 하자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사마리아인들에게 ‘착하다’고 하는 말을 붙이는 것은 마치 ‘착한 강도’ ‘거룩한 창기’ ‘깨끗한 사깃꾼’ ‘선한 악인’ ‘추한 미녀’ ‘거짓된 진실’과 같은 말이어서 도저히 앞의 형용사와 뒤의 명사가 연결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이런 형용모순어법을 ‘문화적 역설’ a cultural paradox 이니 혹은 ‘사회적 모순’ a social contradiction 이라고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란 도저히 실제로는 존재 할 수 없고 그냥 말로만 있는 것으로써 ‘네모난 삼각형’ 이니 ‘동그란 사각형’ 이니 하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 비유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존경받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 즉 고위직 성직자와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을 등장 시키더니 그자들은 인정도 없고 피도 없는 인간으로써 오직 자기 밖에는 모르는 못된 사람의 모습으로 그려놓으셨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현장에서 ‘어서 가자 걸음아 나 살려라’ 허둥대며 도망치는 치사하고 더럽고 진짜 사람 실망 시키는 악한 인간이 먼저 전면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곧 이어서 보통 사람들이 인간 같게 여기지도 않고 사람측에도 끼지 못하는 개같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천하디 천한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 시키더니 그만 그 사람이 위난에 처한 사람을 위하여 현장에 뛰어들어 구조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대했고 당연히 그런 사람은 그러리라고 여겼던 사람들은 오히려 착한 일을 않하고, 그 반대로 ‘그 사람은 아닐 거야, 어떻게 그런 사람이 착한 일을 다 하겠어?’ 하며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사람이 진짜로 ‘선한 일을 하는 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기존의 선입관일랑 완전히 버려라! 너희 생각은 틀렸다. 너희 생각에는 목사님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할 것 같이 보이지? 아니다! 교인들이 목사들 보다는 낫다. 너희 생각으로는 교회 다니며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 많이하는 친구들이 좋은 일 더 많이 할 것 같이 보이지? 아니다! 교회 않다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바르게 살고 사람답게 처신한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생각을 바꾸거라. 지금까지 믿고 기대했던 것과는 모든 것이 반대다! 훗 날 천당에 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꼭 오리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은 하나도 못 볼 것이다. 오히려 전혀 상상도 못했던 개같은 사람들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될 것이다>
처음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기독교인들, 종교인들, 지식인들, 우리 사회의 상류층과 성직자들은 착한 사람들이고 그 반대에 있는 이들은 나쁜 사람들 일까요?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은 그래도 나은 사람들이고 좋은 일 많이하는 편이고 무명의 평신도나 비기독교인들은 이들보다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욥이란 사람은 어디 출신인지 한번 알아보셨나요? 그가 유대인 이었나요? 우리가 그렇게도 칭찬하는 룻기의 주인공 룻은 그의 고향이 어디였나요? 오늘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지닌 그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 그의 종교적 위치와 학벌이 그 사람의 행위를 결정해 주리라고 믿어온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우쳐 주십니다. <모든 고정관념일랑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생각과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제발 좀 행함이 있는 믿음을 지니십시오! 그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