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37)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 요엘서<7>
예언서의 전쟁들의 이해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예언서의 내용들을 꼼꼼하게 상호 비교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요엘에 나타나는 전쟁을 계시록 및 에스겔서의 전쟁과 이미 약간 비교해 보았다. 필자는 요엘서의 전쟁을, 마지막 때에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이방나라들이 포위, 공격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또 교회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 성도들)를 멸하려고 세상의 우상숭배하는 자들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하였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은 문자적인 이스라엘에게서도 일어나고, 또 영적으로 적용하면 교회 (유대인 성도+이방 성도)에서도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세대주의나 대체신학 모두를 조금씩 인정하는 것인데 (양쪽 모두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음), 사실 역사를 통해서 성취된 사건들을 보면 이것은 더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BC 6세기의 다니엘 선지자의 ‘작은 뿔’에 관한 예언 (8:9-14, 11:28-39)은 누구에게서 성취되었는가. 이 예언은 BC 2세기의 시리아 (셀류코스 왕조)의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게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이 예언에 사용된 표상은 다시 9:27과 7:25에 사용되는데, 이는 BC 2세기 보다는 먼 후일 곧, AD 70년의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도륙함으로 2차적 성취를 보인다고 할 것이다 (참고. 마 24:15). 그러나 여기서 이 예언의 성취가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사도 바울은 이 표상을 살후 2:3-8에서 다시 끝날의 적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데 이런 형편은 사도 요한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되며 (계 13:5-8), 이 적그리스도의 핍박은 단지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유다인에 대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교회 (유대인 성도+이방인 성도)에게 적용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예언의 상징성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예를 들어 창세기 15:13-21의 예언은 상징적 의미만을 가지는가. 이 예언은 아브라함으로부터 430년 후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여호수아-다윗이 가나안 땅을 정복함으로 문자적으로 구체적으로 역사선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나는 또 예언의 문자적 의미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예레미야 33:15-18을 문자적으로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유다가 구원을 얻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내 앞에서 번제를 드리며 소제를 …드릴 레위 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고 해서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과 구약 제사장들로 성취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단번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약 제사가 폐지되었는데 이것을 문자적으로 적용시켜 구약제사의 부활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이것은 신약의 교회와 신약적 예배에 적용시킬 수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극단적 문자주의와 극단적 상징주의 때문에 성경의 예언이 편파적으로 해석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계시록 13:1에 나타나는 짐승 곧 적스리스도를 상징주의자들처럼 아주 모호하게 ‘교회의 적대 세력’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나 문자주의자들처럼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이 인물에 대하여 너무 서둘러서 현시대의 특정인물에 적용시키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나타나는 반성경적, 반그리스도적 단체와 인물들을 적그리스도 세력과 적그리스도 자신으로 의심해 보는 것은 늘 필요하다.
요엘서의 전쟁과 스가랴서의 전쟁
스가랴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차후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필자는 여기서 요엘서의 전쟁을 다루면서 스가랴서의 전쟁과 비교해서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전쟁들은 비슷한 측면들을 지니기 때문이다. 스가랴서에서는 7-9장과 10-14장이 크게 보아 병행을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 여기서, 9:11-17, 10:3-7, 12:1-9, 14:1-21 등이 전쟁관련 예언들이다. 먼저 우리는 9:9 이하에 보이는 ‘왕’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13절의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하며 너로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는 어떤 전쟁을 가리키는가. 이는 마카비 형제들이 헬라계통의 시리아 왕들에 대항하여 용맹을 발휘한 내용을 가리키는 듯하고, 또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의 우상숭배자들을 제압하는 내용을 가리키는 듯 하기도 하다. 다만 이 시간이 9:9의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왕의 사건 다음에 일어나는 것이라면 후자가 더 맞을 것이다.
스가랴의 전쟁 예언들 중에 요엘서 3장의 예언과 아주 유사한 것은 스가랴 12장과 14장의 내용들이다. 12장을 보면, 열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것, 그 열국을 여호와께서 치실 것,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서 큰 힘을 발휘할 것 등을 말하는데 눈에 띄는 것은, 이들이 회개하게 된다는 내용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예수님 재림과 연결됨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12:10) 때문인데 이 구절은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예수님 재림을 바라보면서 언급하는 내용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계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따라서 12장은 예수님 재림 어간에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큰 회개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그들이 메시야를 인정하게 되는 것으로, 혹은 확대하여,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많은 수가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으로 볼 수 있고, 전자로 본다면 이러한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열방의 우상숭배자들의 이스라엘 공격이, 후자로 본다면 이러한 교회를 미워하는 열국의 음녀의 아들들의 교회를 대적하는 전쟁으로 볼 수있을 것이다. 슥 14장은, 이러한 마지막 때의 전쟁을 시사하는 언급들로 가득하다. 14장의 전쟁 관련 모티프들을 보면, ‘열국이 예루살렘을 침’ (2, 13절), ‘여호와께서 열국을 치심’ (3, 12절), ‘여호와께서 에루살렘에 서심’ (4절), ‘지형의 변화’ (4-5, 10절), ‘빛이 없음’ (6절),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남’ (8절), ‘유다가 싸움’ (14절), ‘열국의 보화가 모임’ (14절), ‘열국의 남은 자가 여호와께 돌아옴’ (16절), ‘초막절’ (16, 18-19절), ‘예루살렘과 유다가 거룩하게 됨, 여호와께 성결,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없음’ (20-21절) 등이다. 이것들 중에 요엘서에 있는 것들과 서로 비교해 보자. 요엘서 3장에는 이미 보았듯이 ‘사면의 열국이 모임’ (2, 11-12절), ‘여호와께서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심판하심’ (2, 12절),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둠’ (15절), ‘예루살렘이 거룩하게 되어 이방 사람이 통행하지 못함’ (17절),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 싯딤 골짜기에 댐’ (18절), ‘땅의 변화’ (18-19절) 등의 모티프들이 있다.
필자는 요엘 3:9 이하와 슥 12 및 14장의 전쟁이 예수님의 재림의 시점과 관련해서 볼 때 아마겟돈 전쟁에 가장 가깝다고 본다. 물론 아마겟돈 전쟁 전에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혹은 유대인 성도들)에 대적하는 주변 국가들의 전쟁으로도, 아마겟돈 후 곧 재림 예수님의 천년 통치 후의 곡과 마곡의 전쟁 (에스겔서의 내용과 비교에 의해서)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지난주에 살펴봄; 뒤에서 좀더 언급).
요엘, 스가랴의 전쟁과 아마겟돈 전쟁
그러나 이 텍스트의 내용들이 아마겟돈 전쟁과 더 가까운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로 여호사밧 골짜기 (히브리어. ‘에메크 예호솨파트’)에 대한 언급 때문이다. 많은 유대교인들이나 모슬렘들이 이 지명을 기드론 골짜기로 이해하여 지금 예루살렘에 가면 여기에 많은 묘지들이 있다. 이 기드론 골짜기는 사실 히브리어로는 ‘나할 키드론’ 곧 와디 키드론으로 번역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기 (雨期)에 물이 흐르는 골짜기이기 때문이다. 이 기드론 골짜기에서 기슭으로 올라가면 감람산인데 현재 예루살렘 성 안에서 사해쪽을 향하여 보면 감람산이 보이고 돌관 모양의 무덤들이 즐비하다. 필자는 이곳을 여호사밧 골짜기로 보지 않는다. 물론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감람산에 서신다고 슥 14:4에 되어 있기 때문에 재림 직전에 성도들이 부활하여 먼저 공중에 올라가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은 옳은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의 유대교인들은 메시야가 오실 때 부활을 하게 된다고 믿고 있는데 그들이 믿는 메시야는 사실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안믿는 그들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묘를 써서 부활을 기다린다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감람산이 어떻게 갈라지는가. 슥 14:4에 따르면 감람산 (올리브산)은 예루살렘 앞편 곧 동쪽에 위치해 있다. 예수님의 발이 감람산에 서시면 중간이 갈라지게 되는데 동으로부터 서로 갈라지고 중간에는 매우 큰 골짜기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산의 한 쪽은 북쪽으로, 다른 한 쪽은 남쪽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이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치게 된다고 5절 상반절에 나타나는데 이 ‘아셀’을 12지파의 하나인 아셀이 살던 지역으로 생각하면 오해다. 히브리어 음으로 이 단어는 ‘아제르’이다. 즉, 현재 어디 지명인지는 모르나 이 골짜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연결될 마을 혹은 지명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요엘서의 ‘여호사밧 골짜기=판결골짜기’가 곧 이 큰 골짜기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여호사밧 골짜기를 지칭할 때 사용한 히브리어는 ‘에메크’인데 이는 두 산악지역의 보다 넓은 평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상 17:1-3에 보면 엘라 골짜기가 나타나는데 이는 지금 가보면 넓은 밭들이 있는 평지다. 양쪽에 산이 있는데 이쪽에는 이스라엘의 사울 군이 있었고, 소고와 아세가 사이에 있는 저쪽 에베스 담밈에는 블레셋 군이 있었다 (어린 다윗도 이쪽 산에 이스라엘 군인들과 함께 있었을텐데, 필자가 재작년 가본 곳이다. 엘라 골짜기를 내려다보기 위해 텔 아세가로 오르는 길가에 돌을 반듯하게 깎아 사무엘서의 다윗 관련 구절들을 새겨놓은 것이 있었다!). 엘라 골짜기처럼 비교적 이런 평평한 지역을 ‘에메크’라 부르는 것이다. 반면, 슥 14:4의 골짜기는 히브리어로 음역하면 ‘가이 (gay)’인데, 연계형으로 ‘게’가 쓰였고 뒤에 ‘게돌라 메오드’가 붙어 ‘매우 큰 골짜기’를 의미하는데 정확한 우리말을 찾자면 매우 큰 혹은 깊은 협곡(峽谷)이 맞다 (겔 39:11 바다 동편, 통행자들의 ‘골짜기’도 ‘게’). 그러면 슥 14:4의 매우 큰 골짜기와 욜 3:12의 여호사밧 골짜기가 서로 다르다면, 여호사밧 골짜기는 어디이며, 요엘서 및 스가랴서의 내용이 아마겟돈 전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먼저 여호사밧 골짜기를 므깃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여호사밧’은 히브리어로 ‘여호와께서는 심판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에 어떤 지명에 대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별칭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엘서에서도 여호사밧 골짜기를 ‘판결 골짜기 (‘결정’ decision의 골짜기; 히브리어로 에메크 헤하루츠)’라고 다시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므깃도를 ‘골짜기’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바로 슥 14:11-14에 이 표현이 나타난다. “그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 Hadad Rimmon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이 구절의 배경은 왕하 23장과 대하 35장의 요시야 왕의 죽음과 관계 있다. 애굽왕 바로느고가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오자 요시야는 므깃도 ‘골짜기’ (대하 35:22, 골짜기는 히브리어로 ‘비크아’ 곧 ‘평원 plain’의 뜻)에 이르러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예레미야는 슬픈 노래를 지었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였다. 왜냐하면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하 23:25). 스가랴는 경건한 왕이요 이스라엘의 목자였던 요시야의 죽음을 유대인의 왕이요 목자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오버랩시키면서, 이스라엘이 완악하여 오신 메시야를 은 30에 팔아먹고 (슥 11:12), ‘그’ (슥 12:10, 그들이 찔렀던 ‘나’를 바라볼 것이고 그들이 ‘그’를 위해 울 것이다. ‘나’ 곧 여호와와 ‘그’가 호환으로 쓰임. 장세훈, 396, SFC)를 찔러 죽였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요시야의 죽음을 슬퍼한 것 같이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죄를 회개하며 슬퍼하게 될 것을 말하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스가랴 선지자는, 그 옛날 므깃도는 주의 사랑하는 자 (요시야)의 죽음의 장소, 이스라엘의 패배의 장소였으나, 이제는 반대로 이스라엘을 치는 열국을 징벌하시는, 죽었던 주의 아들을 그 예루살렘의 감람산에 서게 하시사 예루살렘은 지형을 변화시켜 보호하시고 예루살렘을 에워싸 달려드는 열국은 심판하시는 장소로서 므깃도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 므깃도 골짜기를 언급한 것 같다. 므깃도는 valley로도 plain으로도 번역된다. 골짜기인 것은 갈릴리 산지와 사마리아 산지 사이이기 때문이고, 평원인 것은 너무 넓고 평평한 골짜기이기에 더이상 골짜기가 아니고 평원이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그 지역이 이스르엘 ‘골짜기’ (호세아 1:4에 골짜기는 ‘에메크’)에 속한 곳인지는 알았지만 ‘에메크’나 ‘비크아’가 평원인지는 몰랐고 골짜기는 늘 생각해 온대로 협곡으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 므깃도에서는 협곡을 볼 수 없었다. 간혹 아마겟돈 (원래 계 16:16의 ‘아마겟돈’은 ‘아마겟돈’이 아니라 히브리어에서 바로 음역하여 헬라어로 ‘하르-마겟돈’으로 표기되어 있다. 곧 ‘므깃도 산’이라고 되어 있는 것임)의 ‘하르’를 ‘골짜기’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골짜기가 아니라 ‘산’이다. 실제로 므깃도에 가보니 그곳은 언덕 (옛날에 요새가 있었음)쯤 되나 산으로 까지는 볼 수 없는, 낮은 ‘동산’ 정도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면 기름진 평야인데 큰 그림에서 보면 갈릴리산지와 사마리아 산지 사이의 평원이기에 그 지역을 골짜기로도 부른 것이다. 종합하면, 아마겟돈 전쟁은 열국이 예수님의 은혜로 회심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집결한 장소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그 열국에 대한 심판과 결정의 장소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데, 므깃도는 애굽왕 느고가 요시야를 죽인 장소, 경건한 왕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소로 영적으로 과거에 경건한 왕이신 예수님이 죽으신 장소 (이곳은 영적으로 ‘애굽’이나 ‘소돔’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 뿐만 아니라 예수 증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계 11:8), 그러나 이제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온 땅의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장소이다.
둘째는 ‘초막절’에 대한 언급 때문이다. <다음호에 계속>
최영헌 교수(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