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큰 줄거리 중국사 1 : 고대와 중세 (‘비화하족’과 왕조 교체 중심으로)
안녕하세요. 여러분. ‘중국사’로 다시 뵙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전 역사가 학부 전공이긴 하지만 역사가도 아니고 중국사를 전공하지 않았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이 강연의 많은 부분은 [동이 한국사], [동북 공정 이전 중국이 쓴 한국사] 등등의 저자인 이기훈 박사의 주장을 참조했다는 점도 밝힙니다.
2번의 걸친 강연에서 방대한 ‘중국역사’의 미시사 혹은 다양한 측면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 왕조의 중요한 사건들과 인물들만 다루어도 한 학기 이상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크게 왕조로 시대구분하고 지금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하는 곳의 역사의 큰 줄거리를 짚어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학자에 따라 차이가 약간 있습니다만, 고대는 하 (夏) 나라에서 후한 (後漢)의 멸망까지고, 중세를 위진남북조시대에서 수. 당나라까지로 봅니다. 이 시간은 당까지 보시고 다음에 중국의 근세라고 하는 오대 십국에서부터 명왕조까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원래 청왕조까지이나 주교수님이 청왕조를 다뤘다고 귀뜸해 주셔서 수고가 줄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역사와 관련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세 가지 점을 먼저 언급하고 본론으로 가겠습니다. 먼저 역사는 사관 (史觀)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관으로 보느냐에 따라 한 시대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조선을 왕조사관으로 보면 지속된 한 왕조의 흥망성쇠 (興亡盛衰)로 볼 수도 있지만, 유물사관으로 보면 같은 민족의 고혈을 빤 중세왕조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역사가 베네데토 크로체 (Benedetto Croce 1866 – 1952)도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고 했습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역사가의 관점, 즉 사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음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때 전세계 강타한 포스트 모더니즘 (postmodernism)을 들어보셨나요? Keith Jenkins (탈근대주의 관점을 가진 역사가)는 [On What is history]에서 ‘역사는 소설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영.정조 시대의 조선 왕조 실록과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과 차이는 없다는 이야기죠. 이렇게 관점이 중요합니다. 이런 관점에 동의하시는 분도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시겠죠?
둘째로 역사를 볼 때 지속되는 것과 단절되는 것에 대한 염두를 해야한다는 점 입니다. 시드니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Ann Curthoys 교수는 [Creating Australia]란 책에서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란 개념을 이야기 했습니다. 호주의 예를 들면서 백인들의 정착의 서사는 반복적으로 확대 재생산되며 연속성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원주민들 혹은 다른 이민자들의 초국가적인 서사들은 단절되는 것을 인지하고 그로써 기존의 연속적인 서사에 대한 도전과 저항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국가의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경쟁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나라의 역사에 이러한 점이 적용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국민국가의 입장을 버릴 수는 없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가치판단하지 않으면서 열린 마음을 갖고 새롭게 나오는 증거들을 바라 볼 수 있는 자세로 역사를 접근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역사를 보면 나름의 ‘객관성’(?)을 가지고 과거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본론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기존의 널리 알려진 그리고 중국이 주장하는 역사와 다르게 중국사는 소위 중국사에서 이민족으로 구분되어오던 사람들이 건설한 왕조들의 교체사이다. 그리고 그 중에 큰 부분은 현재의 한국인 (韓國人)과도 관계가 있는 혹은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동이족 (東夷族)’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건설한 왕조들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한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 점을 다시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역사가들의 현재 관점이 들어가 있습니다. 중국사는 새로 발견되는 유물과 사료들을 중국사로 왜곡(?)하며 자신들이 연속적으로 보고 싶은 부분만을 중국이라는 입장에서 부각시켜 화하족의 거대 서사를 만들어 오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여러 단계의 공정들 (동북 공정, 탐원공정, 하상주 단대공정 등등 국가 차원의 역사정리 사업)을 해 온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한국사로 알고 있는 부여사, 고구려사, 백제사, 발해사도 중국사로 편입시켜 중국의 자라나는 세대들을 교육시켜 온 사실은 관심있는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다양한 민족이 살고있는 중국의 관점에서는 통합을 위해서라도 이민족으로 묘사되었던 민족들의 역사를 ‘중국사’로 포섭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저의 관점에서는 얼토당토않은 ‘멍멍이 소리’(?)를 국가가 나서서 하며, 역사 왜곡을 하고 있는데 한국은 뭐하고 있냐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라를 보기 전에 몇 가지 단어들의 정의를 내리고 가겠습니다. 우선, 비화하족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말일까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동이 (東夷), 남만 (南蠻), 서융 (西戎), 북적 (北狄)이 오랑캐를 지칭한다고 배웠습니다. 황하 중심의 화하족이 다스리는 중화 지역을 제외한 네 곳의 이민족을 지칭한다고 말이죠.

대략 이런 정도로 이해해 보실 수 있겠습니다. 황하 지역이 ‘중심이자 꽃이고 나머지 지역은 잡풀이다’고 말하는 것이 ‘중화 (中華)’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 (周) 왕조 시절 주변국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멸칭으로 칭하던 개념이 후세에 더 확장되어 고착화 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동이 (東夷)는 무슨 뜻일까요? 예전에는 한동안 동쪽의 큰 활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후한의 허신이 지은 설문해자에는 夷 【東方之人也 從大從弓】라고 되어있습니다. (동방의 사람이다. 큰대 (大)와 활궁 (弓)에서 왔다.) 이기훈 박사는 이 말의 원뜻은 ‘해뜨는 쪽의 큰 사람이다’ 라고 동이를 풀이합니다.
‘东夷在考古上是指距今 8300 年前的后李文化起, 历经北辛文化, 大汶口文化, 龙山文化, 岳石文化的承载者。称呼上是对黄河流域下游包羲, 太昊, 蚩尤, 伏羲氏后裔, 风夷, 畎夷, 阳夷和少昊后裔, 鸟夷, 白夷等夷人方国的总称或是对东方各民族的泛称。早期东夷是华夏族的族源之一’ (Baidu 동이 검색에서인용) (한글번역: ‘동이족은 이룩하고 북신문화, 대문구문화, 고고학에서 8300 용산문화, 월석문화를 거쳐 온 년전 후리문화를 사람들을 일컫는다. 황하하류의 보희 (寶熙), 태호 (太昊), 치우 (蚩尤), 복희 (伏羲)의 후손들과 풍이 (風夷), 정이 (畎夷), 양이 (陽夷), 소호 (少昊)의 후손들, 조이 (鳥夷), 백이 (白夷)와 같은 이족과 국가를 통칭하는 총칭이거나 동방의 모든 민족을 통칭하는 총칭이다. 동이족은 초창기에 화하족의 민족적 기원중 하나였다.’) 중국이 최근에 동이족을 어떻게 정의하는 지도 보여드렸습니다.
왕조교체란 무슨 뜻일까요? 문자 그대로 왕의 성이 다른 성을 가진 사람에 의해 대체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진나라의 시황제는 성은 영 (嬴)이고 이름은 정(政)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 (漢) 나라가 되면 황제의 성이 유씨로 바뀝니다. 그리고 지배자가 여러 명인 기간도 등장합니다. 5호 16국, 삼국 시대, 5대 10국 등등 말이죠.
어째든, 들어가 보겠습니다. 전설상의 중국 최초의 왕조 하 (夏) 나라 (기원전 2070 년경 – 기원전 1600년경)는 하상주단대공정 (夏商周斷代工程) (1995년 가을부터 시작해 2000년 11월 10일에 발표)과 2001년에서 2003년 예비 연구를 시행하고 2004년부터 2015년에 걸쳐 중화문명 탐원공정이란 국가 주도 과학기술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공식적인 역사상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이전에는 이름은 존재했지만 실재하는 역사로 인정받지는 않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 말에 이리두 (二里頭) 문화의 발견으로 상나라 이전 왕조의 고고학적인 증거를 찾았는데 이것이 하나라 인지는 중국 내외 학계의 논쟁이 있었고 아직도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정부는 앞서 말씀드린 공정을 통해 이 유적을 하나라라고 정리했다 하겠습니다. 중국 정부의 통제를 받는 중국의 네이버 Baidu (百度)에 ‘허난 (河南) 성뤄양 (洛陽) 시 연석 (燕石)에서 얼리투 유적이 발견되면서 고대 “하 (夏) 수도”의 신비가 밝혀졌고, 얼리투 유적이 하 (夏) 왕조 수도의 유적’이다’ (각주1 참조)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리두 문화는 현재 하남성에 속하는 황하 중.하류 지역입니다.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초기의문화라고 여겨집니다. 유적지 혹은 유지 (遺址)라고 하는 곳들이 많이 발견이 되면 그 지역을 묶어 문화라고 명명합니다. 그런 문화라고 하는 곳들이 많이 모이게 되면 문명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붉은 점선 부분위에 Yangshao Culture라고 한 부분은 양샤오 문화 (仰韶文化: 기원전 5000년에서 – 기원전 2700년)라고 하는 지역의 표시입니다. 황하 문명의 문화지들이 보다 다양하게 발견되고 년도도 더 올라가는 모습입니다. 초기에 알려진 양샤오 문화의 채도 (彩陶) 문화는 타지역에서의 많은 채도 유적 발견으로 특징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고 있습니다.
황하문명이란 명칭은 량치차오 (양계초)가 [20 세기 태평양가]에서 주장하고, 고고학자 에가미나미오 (江上波夫)가 차용해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주창했을 당시에 이리두나양샤오 문화는 발견 전 입니다. 한 민족이 한 국가를 만들어야 하고 근대화는 무조건이었던 시절이고, 제국주의 서양국가들(?)의 역사관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시절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황하 문명의 기원을 기원전 2000년경으로 배웠습니다. 그 이후로 발견된 많은유적지들 예를 들면 이리두 문화, 용산 문화, 대문구 문화, 페이리강 문화, 츠산 문화, 난좡터우문화, 양샤오 문화 등도 황하 문명에 다 포함시키고 황하 이외의 지역에서 나오는 문화들도포함해 중국 문명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항공대의 우실하 교수는 이 모든 문명보다 오래된 유적들이 1970년대 초부터 요녕성 적봉시 부근에서 많이 발견되었고 그들을 시기 별로 묶어 소하서 문화, 흥륭와 문화, 조보구 문화, 홍산문화 등으로 구분하고 이들을 황하 문명과 구분해 요하문명이라 하자하고 고조선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고조선 문명의 기원과 요하문명, 지식산업사, 2018]

하나라와 관련해서는 우 (禹) 임금의 치수사업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 입니다. 순 (舜) 임금에게 추천받는 형태로 황하의 치수사업을 맡았고 공적을 인정받아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 입니다. 혈통 계승이 아닌 이러한 권력 이양 방식을 선양이라 합니다. 유교에서 칭송받는 권략의 이양방식이기도 합니다. 덕이 있는 자에게 군주의 자리를 물려 주는 것이죠.
이 우를 중국에서는 황제와 염제의 후손으로 봅니다. 중국인은 염황지손 (炎黃之孫)이다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황제의 황은 임금 황 (皇)이 아니라 누를 황 (黃)입니다. 성은 공손 혹은 희고 이름은 헌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염제 (炎帝)의 한자를 보면 불과 관련된 임금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죠. 별칭은 신농 (神農)입니다. 농사의 신!
2002년 월드컵 때의 붉은 악마 응원단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미지 원형은 역사 속의 치우라는 전설상 혹은 실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중국 역사의 바이블처럼 받들어 지는 사마천의 사기에 황제 헌원이 임금의 명이 소용없어 제후들과 함께 치우를 탁록에서 잡아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蚩尤作亂不用帝命於是黃帝乃徵師諸侯與蚩尤戰於涿鹿擒殺蚩尤)

이 치우는 중국에서 오랜 세월 동안 동이족의 수령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화하족의 승리로 해석되 온 이 사마천의 ‘탁록대전’ 기록은 1990년대 이후 수정됩니다. 중국은 중화삼조당 (中華三祖堂)’을 만들어 치우 끌어안기 작업을 해 왔습니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홍산 문화를 포함한 동북방 지역의 문화 끌어안기 작업이지 않을까요?
‘화하족은 한족의 전신이 되는 고대민족으로, 화하족 또는 화, 제화, 하, 제하, 중하 등으로도 불렸습니다. 중원 지역에 거주하던 한족의 선조들이 자신들을 주변 이민족 (동이, 남만, 서융, 북적)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자칭이었습니다. 또한, 중화라고도 불렸습니다. 황제는 화하족의시조로 여겨지며, 하, 상, 주 왕조는 황제의 후손입니다.’ (Baidu 화하족 구글 번역) (각주 2 참조)


하나라 다음의 나라는 상(商)나라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경) 입니다. 황제의 후손인 탕 (湯)이 하나라의 마지막 포군 (暴君) 걸 (桀) 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열었고 30대 주(紂)왕까지 지속되다 서주의 무왕에게 멸망당한 왕조라고 이야기로만 전해져 오다가 20세기 초에 은허 (殷墟)가 발견이 되어서 실재했던 왕조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한자 (漢字)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는 갑골문 (甲骨文)의 발견은 은나라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동이족이 세운 은나라의 갑골문자가 한자의 기원이 되기 때문에 한국의 어떤 학자들은 한자가 중국의 문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고대의 한자는 다양한 북방의 유목민족들도 사용했다 주장합니다.
예전에 배울 때는 상나라가 동이족이 세운 나라였고 화하족이 세운 하나라를 무너뜨리고 화하족의 후신인 주나라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화하족의 왕조를 다시 열었다고 배웠습니다. 여러분의 기억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두 나라의 지도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조상들의 영토가 커서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 모르겠습니다만.
상나라는 점복의 나라였습니다. 거북이 복갑 (腹甲)과 큰 동물들의 견갑 (肩胛)들로 점을 치고 그 위에 기록을 남겨서 이것이 청조 말기에 발견된 것이 갑골문 입니다. 이에 대한 해석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 계급이 지배한 것으로 추측을 합니다. 즉 신권정치가 행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축을 기른 흔적도 양잠을 한 자취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특이한 점은 인신공양의 풍습인데 인간을 제물로 삼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물들은노예 혹은 이민족을 잡아 바친 것으로 보여지는데 신분제 사회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순장의 풍습도 있었습니다. 이유는 왕족이나 귀족이 죽으면 다음 생에도 노비와 하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보통 설명하는데 저는 다르게 봅니다. 다음의 표가 흥미롭습니다.

상나라 시절에 이미 다민족 도시국가를 형성했던 것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입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도 사용 되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순장이나 인신공양을 했다고 해서 야만적으로 생각하실 수도 있겠으나 이 당시에는 세계 어디에서도 흔하게 발생하던 일입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잣대를 고대에 들이대면 안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상나라도 500여년 이상 지속되다가 주 (紂) 왕이 발 (發)에게 ‘목야대전’에서 패하면서 스스로 왕궁에 불을 지르고 멸망한 것으로 사마천은 기록했습니다. 발은 제후인 희창의 아들입니다. 그가 주의 무왕이 되면서 주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상의 세력이 약해지고 주나라 세력이 강해지면서 전쟁을 하게 된 결과 지역 패권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주 (紂) 왕의 폭정은 여러분도 많이 들어보셨을 것 입니다. 주지육림 (酒池肉林)으로 흥청망청하고포락지형 (炮烙之刑)이라고 하는 극악한 형벌로 불만을 표하거나 직언한 신하들을 죽인 것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갑골문에 의하면 인신공양을 폐지해 칭송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으니, ‘가짜뉴스’ 혹은 비방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
전에 한 주역 강의에서 등장한 주나라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가 바로 상나라 다음에 오는 나라입니다. 주나라는 서주 (西周)와 동주 (東周)로 그 시기를 구분합니다. 수도를 호경에서 낙읍으로 천도해서 그렇죠. 호경 (鎬京)은 현재 중국 섬서성 (陝西省) 시안 (西安)이고 낙읍은 한국에서는 낙양 (洛陽)으로 불리는 곳 입니다. 현재 중국어 명칭은 허난성에 있는 뤄양시 입니다.

주나라도 고고학적 연구 성과와 갑골문의 해독으로 더욱더 실체가 드러난 왕조입니다. 종족의 기원이 유목민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고, 사기에서 사마천은 주나라의 역사는 제대로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유적에 의한 추정은 대략 기원전 1040년대에 해당하는 지층에서 상나라 및 주나라의 유물들의 발견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중국정부는 앞서 말씀드린 하상주단대공정에서 주나라 건국을 1046년으로 정했습니다. 중국인학자 서양의 중국학 학자들이 이에 다 동의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주나라는 봉건제도를실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왕족 혹은 공신을 제후로 임명하고 혈연관계에 기반을 둔 종법질서를 세웠다고 들어 보신 적이 있을 줄로 압니다.
황하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정착하는 이유는 먹고 사는 것이중요하다는 점에서 이해가 쉽습니다. 특히, 농경의 관점에서는 더욱더 그렇죠. 그러나 유목을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해당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사육하는 동물들이 먹을 수 있는 풀들이 없는 혹독한 겨울이 오면 어떻게 했을까요? 죽은 사람들도 있겠고, 기르는 짐승들을 잡아먹으며 버틴 사람들도 있겠습니다.
식량을 비축해 놓고 있던 농경민들을 습격하지는 않았을까요? 전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주나라가 천도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유목민족인 견융 (犬戎)의 습격을 받아서 입니다. 기록이 남지 않은 침략과 약탈까지 포함한다면 살기 좋은 이 곳을 놓고 끊임없는 다툼을 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견융은 서융을 더욱 폄하해서 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천도한 주나라 왕실은 권위가 떨어지고 제후들의 태도도 예전과 달랐습니다. 주나라는 봉건제를 외부적으로도 실시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 데 이것이 책봉-조공체계의 근간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유목민 약탈을 완화 혹은 저지하기위해 물물교환과 벼슬칭호를 주고 ‘가오’를 살리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동주의 시대를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릅니다. 기원전 403년을 기준으로 나누어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쪼그라든 주의 영토처럼 주왕의 권력은 제후들을 통제하기는역부족이었고 제후들 가운데 질서 유지를 자임한 제후가 등장합니다. 권위가 떨어진 천자를대신하여 조공을 바쳐야 하는 제후들을 감독,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합니다.
백가쟁명, 춘추오패, 전국칠웅 등등을 배운 것이 기억나시죠? 이 시기에 군주의 체면을 세운진문공, 제환공의 천토회맹 (踐土會盟)도 관용어로 들어보신 분도 있을 것 입니다. MSG를 뿌려 ‘회맹’이지, 서로 마시며 초나라 두들겨 패기위해 천토란 곳에 모여서 산 짐승을 잡아 제사 지내고 피를 ‘배신하면 뒤진다’ 뭐 이런 것이 아니였을까 상상해 보게 됩니다.
전국시대가 되면 형식적인 대의명분과 ‘가오’도 다 집어던지고 노골적인 욕망의 충돌이 표면화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극상이 난무하고 힘이 있는 국가만 살아남아 (지금이 그런 시절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나라들이 바로 전국 칠웅이 된 것이죠. 봉건제를 하며 힘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지를 잘 알기에, 이들은 중앙집권제 지향하게 됩니다.
이야기를 잠깐 돌려 보겠습니다. 춘추전국시대까지는 한족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입니다. 황하강 유역의 평원지역의 서쪽을 화하족 동쪽을 동이족, 장강이남의 묘만족이 있는 데 (위에 지도 떠올리세요.) 이런 분류도 현재 중국의 모든 곳을 포함하거나 종족들을 다 포함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개념을 춘추 전국 시대의 나라들에 적용해볼까요?
연, 제, 조나라는 동이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고 위, 한, 초는 화하족, 진나라는 황하 유역에포함 된다고 볼 수도 없겠습니다. 오와 월은 묘만 지역에 포함 된다고 할 수 있겠구요. 그런데 위의 중국 측의 백과사전에서 화하족은 동이족에서 기원했다고 했습니다. 그럼 춘추전국시대까지는 동이족의 역사였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어째든, 하은주시대가 도시국가에 가까웠다면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다른 도시 국가들 간의교류와 다툼이 공통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어 지는 통합의 기간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황하를 둘러싼 지역에서 벗어나 장강 이남과 현재의 감숙성과 닝샤 회족 자치구 등을 포함하는지역들도 역사에 포함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도 지금까지 수많은 역사가들이 이렇게 묶어서 서사를 만들어 ‘집단 기억’ (Maurice Halbwachs란 사회학자의 ‘Collective Memory’의 개념)을 만들어 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활동범위가 이렇게 넓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이 넓어진 지역을 하나로 묶어탄생하게 되는 왕조가 진 (秦)나라입니다.
기원전 221년에 변방에 있던 (당시 질서 기준으로) 제후국 중의 하나인 진이 법가 주창자상앙의 개혁에 힘입어 강성해 지면서, 한나라를 굴복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조나라, 위나라, 초나라, 연나라를 차례로 정복하고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정복하면서 무질서를 정리하고 하나의 통일 왕조를 열게 됩니다.
짧은 기간이었던 것에 비해 진나라에 대해 이런 저런 내용들을 배운 기억이 나실 겁니다. 분서갱유를 통해 과거에 집착하던 자들과 담론을 일소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흉노와같은 유목민의 침략을 두려워해 만리장성을 쌓고, 호화로운 아방궁을 짓고 병마용갱과 같은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여 고용(?)을 창출하고 사회 시설을 정비시켰을 것으로 저는 봅니다.
이러다보니 적들도 많이 만들고 반란세력의 진압도 해야 하는 상황 속에 법가의 사상에 의거해 중앙 집권적 통치를 하다보니 백성들의 반감도 샀을 것 입니다. 그러나 변방에서 주나라 평왕을 천도 할 때 호위해 제후가 되고 후손 중의 하나가 새로운 왕조를 열고 황제란 최고의 자리에 이르렀으니 자수성가의 최고 경지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황제란 표현이 진대에 처음 쓰여 진시황제가 되었다지요. 이렇게 보면 짧지만 나름 의미있는 왕조였다고 저는 평하겠습니다. 대만의 주학연이라는 학자는 본인의 저서 [진시황은 몽골어를하는 여진족이었다] 라는 책에서 상고시대 중원의 언어가 북방민족 언어인 알타이계 언어였다는 전제하에 언어정보들과 족명과 혈연관계를 분석해 파격적인 주장을 했습니다.
바로 진시황이 여진족이었다는 주장인데요. 여진족은 동이족이고 나중에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우는 종족입니다. 한국인과는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는 재야 사학자들도 많습니다. 다른 기록에도 진나라는 제후로 작위를 받기 전에도 후에도 풍속이 중원의 제국 (諸國)과 달라 업신여김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진나라 사람들을 소호족의 후손들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는 데, 소호금천씨의 소호입니다. 중국의 삼황오제 전설에 등장하는 그 소호인데요. 전설에 의하면 황제 헌원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여러 설이 있지만, 삼황은 복희, 여와, 신농, 혹은 여와 대신 황제를 넣은 설로 보면 화하족과 동이족이 시조에 들어가 있고 염제 신농까지 들어 있으니 남방도 포함된 형세입니다.
오제도 몇 가지 ‘썰’이 있는데요. 소호, 전욱, 고신, 당요, 우순 ‘썰’을 보면 소호는 한국의 신라와도 연결되어 흥미롭습니다. 당나라에 살던 신라인 김씨 부인의 묘지명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신라 김씨의 조상이 소호금천씨에서 시작하고 투후 김일제를 거쳐신라 김씨로 이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김일제는 흉노 휴도왕의 아들로 서한에 투항한 뒤 황제의 고문인 시중에 올랐다고 중국측 문헌에도 나와 있는 데 문무왕 (삼국 통일을 이워낸 바로 그 왕) 비문에도 투후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흉노도 중국사에 등장하는 이 민족 중 하나입니다. 중원지역의 북쪽을 무대로 활동하던 종족이었습니다.

이 흉노가 활동했던 시기에 존재했던 중국의 왕조가 한 (漢) 나라입니다. 시황제가 죽자 진승, 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전 지역이 혼란에 빠지고, 두각을 나타내던 한나라의 유방과 초나라의 항우가 최후의 결전을 한 역사적 사실을 소설화한 초한지 (楚漢志)는 중학생때 매우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싸움의 결과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유방의 승리로 끝나고 한나라가 시작이 됩니다. 한나라는 기원전 202년 부터 기원후 220년까지 지속된 나라입니다. 전한과 후한으로 나누기도 하고 전한은 서한 후한을 동한이라고도 합니다. 중간에 잠깐 왕망이 세운 신나라로 맥이 끊기기도 했죠. 중국의 역사 서사에서 한나라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합니다.
한족 (漢族)이라 할 때 한 (漢)은 이 한나라에서 왔습니다. 통일 왕조이고 ‘중국’(?)이라 할만한 문화적 정체성도 이 때에 생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천천히 쌓여 온 부분도 있겠으나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 지배자가 누구로 바뀌든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으면 관심이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새로 생긴 왕조의 입장에서는 전 왕조의 업적과 좋은 점들을 지우기 위한 노력도 많이 하는 것은 잘 알려진 바 입니다. 오히려, 근대에 들어서 서양과 같은 국민국가 중국을 만들려 했던 지식인들이 ‘상상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집단기억’을 적극적으로 담론화한 비중이 더 크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의 전한 시대의 지도를 보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서북방 쪽으로 영토가 삐죽이 뻗어 있습니다. 이 곳이 서역도호부입니다. 도호부는 변방경비와 이민족 통치를 위해 설치한 군사시설을 의미합니다. 한나라는 직접통치를 원칙으로 13개의 군을 두고 군현제를 실시 했는데, 이렇게 도호부도 있었고 동쪽으로는 10개의 제후국도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양자강 이남 지역까지 한의 영향력이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보시겠지만 송나라 이후에야 이곳은 중국이라는 서사에 들어오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전의 진나라와 비교해도 훨씬 더 큰 지역을 지배하게 된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한나라 북쪽에 강력하게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흉노에 대항하기 위해서 대월지란 나라에 협력을 얻기 위해 파견된 인물이 잘 알려진 장건입니다. 그는 대월지로 가는 길에 흉노에게 잡혀 1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고 탈출해 대완이란 곳에 이르게 됩니다. 대완은 헬레니즘 도시국가인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가 지배했던 그리스 페르가나 도시국가라고 합니다. 현재는 타지키스탄의 쿠잔드입니다.

대월지에 도착해 동맹을 설명하지만 월지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흉노에게 붙잡혀 1년 남짓 고생을 하고 기원전 126년에 귀환합니다. 장건이 긴 세월 습득한 서역에 대한 지식들은 이전에 없던 것이었고 흉노에 대한 새로운 전략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렇게 ‘오랑캐’와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으로 저는 한나라의 역사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다양한 담론을 접하게 되니 이런 모습도 하나의 담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나라를 새운 유방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유방이 발흥하는 곳은 춘추시대 송나라의 영토였습니다.
상나라의 시기 동안에는 구이족 중에 만이 족이 살던 곳입니다. 기원을 따져 이야기 하면 잘알려 진 바와 다르게 만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한나라도 환관과 외척들과의 권력 다툼으로 나락으로 점차 떨어지고 황건적의 난과 오두미도의 난이 일어나고 이들을 진압했던 장군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독자적으로 키우면서 황제는 이름만 남고 위, 촉, 오의 삼국 시대가 되는 것은 많이들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삼국시대는 조조가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세우고 얼마가지 않아 사마염이 진나라를 세우며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 진 (晉)도 북방 유목민의 침략으로 수도를 강남으로 옮기면서 많은 나라 중에 하나가 되는 시기가 오는 데 이때를 5호 16국 시대라고 합니다. 다섯 오에 ‘오랑캐’ 호 (胡)자를 사용합니다.
선비, 흉노, 갈, 저, 강이라는 이민족들이 16개의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입니다. 이 기간은 수나라가 만들어 질 때까지 130여 년을 갑니다. 16국이라는 용어는 6세기 북위의 역사학자 최홍의 십육국춘추에서 따서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한의 멸망 이후부터 수의 통일까지 시기를 위진남북조라고도 합니다.

전량. 서량, 북연을 한족이 세운 왕조다고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만 무의미한 논의라 여겨집니다. 이런 혼란스런 시기를 정리하고 세워진 나라가 바로 수나라 입니다. 북주에서 선양을 받았다고 중국의 전통을 따르는 것으로 묘사가 되는 느낌입니다만 실상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북주는 선비 족의 일족인 우문선비족이 세운 나라입니다.
수나라를 세운 선비는 탁발선비입니다. 또 하나의 선비족은 요하 유역에 거주했던 모용선비가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때로는 동이 때로는 북적으로 표현된 이민족입니다. 특히 모용선비는중국사에서 연 (燕 제비연) 나라라는 이름을 쓰는 나라들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선비는 단씨 성을 쓰는 부족이 유명했었는데 묘용선비가 전연 (前燕)을 세우고 이들을 제압하고 나중에는우문선비를 멸망시키나 후에 탁발선비에게 자리를 내주죠.
탁발선비들은 ‘한족’ 문화를 도입하고 따르려 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양씨, 원씨 등으로 성을 바꿉니다. 그러면서 북주 건국때 수 문제의 아버지 양충은 주국대장군과 수국공이란직을 겸직하며 군권과 정권을 잡고 아들 양견도 수국공을 지위를 이어 받아 수나라를 건국하고 장안을 도읍으로 삼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문씨들은 씨가 말랐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사에서 수문제는 태평성대를 이룬 성군의 한 명으로 평가 받습니다. 자식이 사업을 홀라당 말아 먹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느낌입니다만. 수는 40년도 못 가죠. 지도를 보시면 아직도 현재 중국의 영토를 확보 못했습니다. 그러니 한족이 90% 이상이란 말을 저는 아직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중국 역사에 관심없는 분들도 많이 들어 본 당 (唐) 나라입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면 당 고조 이연은 선비족 출신의 수 나라 장수였습니다. 수 나라 어린 황제 공유에게 형식상 선양을 받아 당나라를 개국했습니다. 그러니 당나라도 선비족이 세운 나라입니다. 사실 다른 모든 왕조들도 한족이 세운 왕조도 없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저도 예전엔 한나라와 송나라 정도는 한족이 세웠다는 생각이었는데, 최근의 정보들을 보면 한나라는 만이족 출신의 유씨 가문, 송나라도 이민족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 말들이 흔합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런데 당연한 것이 무기와 전투기술을 가진 쪽이 전쟁에 유리했기에 국민국가 건설 이전까지는 활과 기병을 가지고 있던 북방 유목민이 남방 농경민들 보다 전쟁에 뛰어났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당나라도 이런 상황이다 보니 서울대의 중국 중세사 전문가 박한제 교수는 [대당제국과 그 유산]에서 당은 다민족 다문화의 제국이었다고 했습니다. 자세하게 볼 시간은 없으니까 종교 하나만 예로 보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모였다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정도입니다.
‘네스토리우스교라 불리는 외래종교가 있었다. 태종정관 9년 대진국 아라본이 이끄는 전도단이 왔다는 기록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 현종 때에 이르러서 경교 (景敎)라는 중국적 이름으로 확정되었다.’(78 쪽)

이렇게 수박 겉핧기 식으로나마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왕조들의 변천을 짚어보고 이민족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 지도 살펴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은 이어서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으로 근세를 같이 보시겠습니다. 혹시 질문 있으시면 아는 한도내에서 최대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각주
1 ttps://baike.baidu.com/item/%E5%A4%8F%E6%9C%9D/22101?fromtitle=%E5%A4%8F
2 华夏民族,或称华夏族,是汉族的前身,华夏又称“华”、“诸华”、“夏”、“诸夏”、“中夏”。是古代居住于中原地区的汉民族的先人为区别四夷(东夷、南蛮、西戎、北狄)的自称,又称中华。黄帝是华夏人文初祖,夏商周是黄帝后代.

김대근 (명리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