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년 6월 11일,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Klemens Wenzel Lothar Fürst von Metternich-Winneburg zu Beilstein, 1773 ~ 1859) 별세
클레멘스 벤첼 로타어 폰 메테르니히비네부르크 추 바일슈타인 후작 (독: Klemens Wenzel Lothar Fürst von Metternich-Winneburg zu Beilstein, 1773년 5월 15일 ~ 1859년 6월 11일)은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당대의 가장 중요한 외교가였다.

–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Klemens von Metternich)
.본명: 클레멘스 벤첼 로타어 폰 메테르니히 (Klemens Wenzel Lothar von Metternich)
.출생: 1773년 5월 15일, 신성 로마 제국 트리어 선제후국 코블렌츠
.사망: 1859년 6월 11일 (86세), 오스트리아 제국 빈
.국적: 오스트리아 제국
.학력: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마인츠 대학교
.정당: 무소속
.본관: 메테르니히가
.부모: 프란츠 게오르크 카를 폰 메테르니히비네부르크 백작, 베아트릭스 폰 카게네크 백작부인
.배우자: 엘레오노르 폰 카우니츠 후작영애 (m. 1795년–1825년 사별), 앙투아네트 레이캄 남작영애 (m. 1827년–1829년 사별), 멜라니 치히페라리스 백작영애 (m. 1831년–1854년 사별)
*오스트리아 제국 외무장관
.재임: 1809년 10월 8일 ~ 184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제국 재상(Staatskanzler)
.재임: 1821년 5월 25일 ~ 1848년 3월 13일
1809년에 오스트리아의 수상으로 취임한 후 프로이센, 영국, 러시아, 스페인 등과 동맹을 주도하여 나폴레옹 1세을 굴복시키는데 앞장섰다.
나폴레옹 몰락후 유럽의 사회질서를 이끄는 빈체제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했다.

○ 생애 및 활동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Klemens von Metternich)은 1773년 5월 15일, 신성 로마 제국 트리어 선제후국 코블렌츠에서 태어났다.
명문 귀족 출신으로 프랑크푸르트, 마인츠에서 공부하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네덜란드 총독으로 있는 아버지 프란츠 게오르크 카를 폰 메테르니히비네부르크를 도와 혁명을 막는 데 힘썼다.
1803년 드레스덴 주재 공사를 거쳐, 프랑스 대사가 되었다.
1809년 오스트리아·프랑스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하였다.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자 유럽 문제를 논의하는 빈 회의의 의장이 되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정통주의를 제창하고, 나폴레옹이 파괴한 유럽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주로 논의했다.
이때 능숙한 외교 정책으로 오스트리아의 위신을 회복시켰다.
빈 체제의 목적은 프랑스 혁명 즉, 나폴레옹의 전성기 이전의 상태로 유럽을 되돌리는 것이었다.
그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극력 반대하여 철저한 보수 정치에 의한 질서 유지를 지향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영내에 다수의 이민족이 사는 복합국가였다.
따라서 메테르니히는 자유주의의 침투와 제휴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국내에 대두할 때 국내의 분열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독일의 통일을 열망하는 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통일 운동의 지도권을 프로이센에 빼앗기지 않고 오스트리아 중심의 통일을 실현하고자 독일 연방을 조직, 이를 주도하려 했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는 루이 18세가 복위했으며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러시아 4국의 동맹을 결성했다.
동시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했다.
그는 보수적이어서 프랑스 혁명이나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동시에, 독일 및 이탈리아의 국민적 통일을 두려워했으며, 신성 동맹을 이용하여 제국의 자유와 통일 운동에 무력적인 간섭을 하였다.
1848년 프랑스에 2월 혁명이 일어나 빈 체제가 붕괴되며 그는 의장 자리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영국에 망명하였다.
1851년 귀국하여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정치적 상담 역할을 하였다.
이후 1859년 6월 11일 빈에서 노환으로 8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한 셈이었다.
그 덕분에 말년인 1850년대에 사진을 2장 남길 수 있었다.
“안정이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 기타
합스부르크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교관, 정치가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등장 이전에 프랑스 왕국의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와 함께 19세기 전반기 유럽의 국제 질서를 정립한 주인공이자 백년 평화를 이룩하게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는 복고적, 반자유주의적인 빈 체제를 구상해 낸 인물이지만, 국제정치학에서는 수많은 전쟁으로 점철된 나폴레옹 시대 이후, 국가 간 ‘협력’과 ‘세력 균형’을 통해 보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유럽 질서를 창출하여 외교사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인물로 뽑히는 등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혁명이라는 사상과 그 이념의 확산을 막기 위해 빈 회의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구(舊) 체제로 되돌리는 것으로 결정하였고 그리하여 빈 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빈 체제의 성립에도 이미 유럽 각 지역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랑스 혁명의 이념들이 퍼져 있었다. 결국 메테르니히는 빈에서 일어난 3월 혁명에 의해 재상 자리에서 실각하여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되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에서 미국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 소련과의 군비 경쟁 제한 등 데탕트를 실현해낸 20세기 세계 외교계의 거목 헨리 키신저는 메테르니히를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열렬히 칭송했다. 본인의 하버드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가 메테르니히의 빈 체제였고, 이후 자신의 여러 저작들에서도 존경심을 자주 드러냈을 정도였다.
반면 영국의 역사학자 앨런 존 퍼시벌 테일러는 “메테르니히의 소위 ‘업적’이란 건 일반인들이 면도하면서도 이룰 수 있는 일들이다.”라면서 온갖 음험한 정치공작에는 능해도 장기적인 비전이 부재한 전형적인 협잡꾼으로 폄하했다. 이와 비슷하게 현대의 역사학자였던 토니 주트 (1948년 ~ 2010년)[12]는 헨리 키신저를 욕하면서 그가 메테르니히를 숭상했다는 점을 꼽아내며 “키신저와 같이 자칭 ‘현실주의자’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정국을 말아 먹는 근시안적 바보들의 원형이다.”라 키신저와 덩달아 깐 바도 있다.
나폴레옹 시대를 종결짓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사람답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유일한 적자 나폴레옹 2세가 훗날 오스트리아 제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해 그를 견제했다. 물론 나폴레옹 2세는 나폴레옹의 아들이지만 자신들의 황제인 프란츠 2세의 외손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큰 제재를 가하지는 못 했지만 그가 철저히 독일식 교육을 받도록 했고 프랑스어를 배우거나 프랑스 책을 읽는 것을 엄금했다. 이 조치가 지나쳤는지 나폴레옹 2세는 어릴 때부터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독일에는 메테르니히의 이름을 딴 질좋은 보급형 젝트인 퓌르스트 폰 메테르니히 (Fürst von Metternich)가 있다. 양조장은 헤센 주의 주도인 비스바덴에 있으며 헨켈 (Henkell)의 자회사이다. 리슬링 품종으로 만든 것과 샤르도네 품종으로 만든 것, 그리고 로제 버전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특산 디저트인 자허토르테의 탄생과 관계가 있다. 메테르니히가 어느 날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직속 요리사에게 디저트를 준비할 것을 명령했는데, 그 요리사가 몸이 좋지 않아서 도제마냥 밑에서 일하던 요리사의 아들인 프란츠 자허 (Franz Sacher)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초콜릿 스펀지 케이크를 만들었다. 메테르니히는 “중요한 손님이 입맛을 버려 자신의 명성이 떨어지는 사태가 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단단히 경고했는데, 단단히 긴장한 자허가 내놓은 초콜릿 케이크는 다행히 손님으로부터 호평을 받아 메테르니히도 자허를 칭찬했다고 하며 이후 이 케이크는 그의 성씨를 따서 ‘자허토르테’ (자허의 케이크)라고 불리게 되었다. 프란츠 자허는 훗날 빈에 ‘카페 자허’를 열어서 정식으로 자허토르테를 만들어서 팔기 시작해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자허토르테를 제조 및 판매하고 있다.
성인 Metternich의 독일어 실제 발음( ˈmɛtɐniç)을 보면 알 수 있듯 메테르니히는 현지 발음과 완전히 동떨어진 표기이다. 사실 이는 일본식 표기 メッテルニヒ (멧테루니히)가 넘어온 것이다. 일본인들은 과거에 흔히 독일어 er를 え단+ル로 처리했는데, 한국어에도 여전히 이런 흔적이 남아 있다. 메레르니히 외에 ネアンデルタール (네안데루타루)와 ドーベルマン (도베루만)의 영향을 받은 네안데르탈(Neandertal)과 도베르만(Dobermann)이 대표 사례이다. 독일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각각 메터니히, 네안더탈, 도버만으로 옮겨야 하지만, 국립국어원은 관용을 우선하여 메테르니히, 네안데르탈, 도베르만을 규범 표기로 확정했다.

○ 가족
메테르니히는 세 번 결혼했다.
1795년 9월 27일, 그는 카우니츠-리트베르크 백작 부인 엘레오노레 폰 카우니츠-리트베르크 (1775 ~ 1825)와 결혼했다. 그녀는 전 오스트리아 총리 벤첼 안톤 카우니츠-리트베르크의 손녀였다. 이 결혼은 메테르니히를 비엔나 사회에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메테르니히가 엘레오노레에게 느끼는 애정보다 엘레오노레가 그에게 느끼는 애정이 더 컸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엘레오노레의 아버지 카우니츠 공작은 메테르니히에게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는데, 첫째는 젊은 엘레오노레가 계속 집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공작이 살아있는 동안 메테르니히가 외교관으로 일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엘레오노레가 사망한 후, 메테르니히는 남작부인 마리아 안토니에트 폰 (1806년 8월 15일 ~ 1829년 1월 17일)과 재혼했다. 그녀는 크리스토프 암브로스 자작 폰 레이캄 (1781 ~ 1830)의 딸이었다. 이 결혼으로 아들 리하르트 클레멘스 요제프 로타르 헤르만 (1829년 1월 7일 ~ 1895년 3월 1일)을 낳았다. 리하르트는 1856년 6월 13일 조카인 폴린 샨도르 드 슬라브니차와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다.
메테르니히는 세 번째로 지키-페라리스 드 지히 에트 바쇼니케 백작부인 멜라니아 마리아 안토니아 (지키-페라리스 드 지히 에트 바쇼니케 백작가, 1805년 1월 18일 ~ 1854년 3월 3일)와 결혼했다. 그녀는 페렌츠 프란츠 지키 드 지히 에트 바쇼니케 백작 (1777 ~ 1839)의 딸이었다.

○ 평가
메테르니히는 보수주의를 옹호하고 유럽의 안정을 추구한 노련한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외교 정책은 강대국 중심의 세력 균형을 통해 국제 질서를 유지하려는 현실주의적 접근이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고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19세기 후반,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와 중앙 유럽이 자유주의적이고 헌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그가 “진보”를 막지 않았다면 오스트리아가 개혁을 이루고 국민성 문제를 더 잘 처리했을 것이며, 제1차 세계 대전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검열과 스파이 네트워크 등 다양한 탄압적 국가 도구를 사용했다.
반면, 20세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메테르니히의 정책이 유럽의 세력 균형을 달성하려는 합리적인 시도였다는 옹호론이 등장했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가들은 그가 유럽에서 러시아의 지배를 예측하고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는 130년 후 그의 후계자들이 실패한 부분에서 성공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인리히 폰 즈르빅과 같은 전기 작가들은 메테르니히가 법치, 협력, 대화를 추구하여 30년간의 평화, 즉 “메테르니히 시대”를 보장하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A. J. P. 테일러와 같은 비판적인 역사가들은 메테르니히가 실제로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로빈 오키는 그가 외교 영역에서조차 자신의 설득력에만 의존해야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영향력이 저하되었다고 지적한다.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메테르니히가 유럽을 호의적으로 형성할 능력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선택했다고 본다. 테일러는 메테르니히를 “유럽 역사상 가장 지루한 인물”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앨런 스케드는 메테르니히의 외교적 “연막”이 상대적으로 일관된 일련의 원칙을 증진하는 데 목적을 달성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