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48)
바위 틈, 높은 곳에 사는 자여: 오바댜(2)
왜 교만이 패망의 선봉인가
오바댜서는 에서의 멸망과 종말론적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내용이다. 필자는 여기서 깊은 교훈을 배우는데 그것은 우리가 늘상 듣던 말씀 곧 “교만은 패망의 선봉” (잠 16:18, 18:10-12)이라는 말씀의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인가?” 교만과 관련해서 오바댜서는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것은 첫째로, 교만한 자에게서는 지혜가 사라진다는 것, 둘째는 교만한 자는 의지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게 된다는 것, 교만한 자의 땅과 재산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교만으로 지혜가 없어진다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는 자기를 높이는 사람이다. 에서는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꾸몄고” “별들 사이에 둥지를 틀었다” (4절). 이 사람들은 마음이 높아져서 그 마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마음이 없었다. 육의 정욕대로, 욕심이 이끌리는대로 살아갔다. 그것이 겉으로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외적의 침입을 받아 망하던 날에 당하는 재앙을 방관했으며 더욱이 그들이 패망하는 날에 그들의 재산에 손을 대었다. 형제국 이스라엘을 돕기는 커녕 이스라엘의 재산에 마음이 갔다 (13절). 이것의 속내를 읽으면 이렇다. 먼저 하나님을 무시했다. 그 하나님이 세우신 백성을 무시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을 유린하고도 아무런 마음의 가책을 받지 아니했다. 언약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유린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유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의 한계를 넘어 그분의 백성을 괴롭하는 것은 죄다. 11절의 내용은, 이방인들이 야곱의 재물을 늑탈할 때, 예루살렘을 제비뽑기하여 나누어 가질 때, 에돔도 그들과 한가지로 행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교만은 욕심에 이끌리는 삶으로 그 열매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이 욕심에 이끌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없기에, 하나님의 뜻이 그의 마음에 자리할 곳이 없고 온통 욕심으로 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지식이 사라진다. 교만한 자의 마음에는 더이상 하나님의 지혜가 없게 된다. 또 그 사람 주위에는 그 사람과 똑같이 욕심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꼬이게 되므로 그들은 그에게 아첨은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제공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지혜가 사라지고 그의 주위에는 지혜자도 없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8절을 히브리 본문에서 직역하면,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자들을, 에서의 산에서 명철을 멸망시키지 않겠느냐?” 여기서 하반절의 ‘명철’은 히브리어로 ‘테부나’인데 이것은 지혜서들에 빈번히 나타나는 표현이다. 히브리 평행법의 원리를 따라보면 하반절의 ‘명철’은 사실 상반절과 호응을 시켜 ‘명철한 자’로 번역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래야 상하반절이 짝이 맞는다. 명철한 자 (히브리어로는 ‘이쉬 테부나’)의 예는 잠언 10:23, 15:21, 17:27에 보이는데 BDB 사전은 오바댜의 이 구절에서 서기관의 필사 오류, 즉 ‘이쉬’가 누락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더 정확한 동의병행법을 만들자면, 두 단어 모두 복수형을 써서 ‘아나쉼 테부노트’ 곧 ‘명철한 자들’ (men of understanding)로 했어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생략이나 필사자의 오류가 없다고 볼 때, 이 구절은 지혜로운 사람들과 명철, 곧 교만한 자의 주위에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라질 것 뿐 아니라 그 교만한 자 자신의 마음에서도 ‘명철’이 사라질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실상, 그렇지 않은가. 내가 신앙생활할 때 교만하면 내 자랑, 내 욕심이 많아지니 나는 우둔해지고, 내 주위에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하나둘 발길을 돌리고 똑같이 교만한 사람들이 꼬이지 않는가. 교만한 헤롯 아그립바 1세를 보라. 그는 12사도 중 하나인 야고보를 칼로 죽였고 (행 12:1),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다 (행 12:4). 즉 하나님의 지혜로운 자들에게 해를 저질렀다. 그의 마음이 교만하니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자에게 아첨을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꼬였다. “헤롯 아그립바가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 (연설)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행12:21-22). 이 교만한 사람은 이 소리를 듣고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었다 (행 12:23). 신기한 것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 대왕, 예수님이 ‘여우’라고 지칭하셨던 헤롯 안티파스 (눅 13:32, 헤롯대왕의 아들들 중 하나, 세례자 요한을 죽임), 그리고 헤롯대왕의 아들 아리스토블루스에게서 난 이 헤롯 아그립바 1세, 또 이 사람에게서 나서 총독 베스도와 함께 사도 바울을 심문한 사람 헤롯 아그립바 2세 모두 에서 곧 에돔의 후예들이었다는 것이다! 오바댜가 정죄하는 에돔 나라의 후손이 예수님과 사도들을 괴롭히고 죽인 왕들이었다는 것이다. 교만한 자들에게서는 지혜가 떠나가고 지혜의 충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는 멸망에 이르게 된다. 오늘의 대통령들 수상들에게 이런 예를 자주 보지 않는가. 나의 삶의 현장에서 이런 예를 너무 자주 접하지 않는가.
교만으로 동맹자에게 배신을 당한다
교만한 자는 이렇게 지혜가 없어지니 (어리석은 자가 되니) 인생에서 손해를 보게 된다. 그는 자기와 동맹을 맺었던 자에게 배신을 당한다. 7절을 의역하면, “너와 약조를 맺은 자들이 너를 국경으로 몰아부칠 것이며, 너와 화친하던 자들 (평화롭게 지내던 자들)이 너를 속여 너를 휘두르며, 너의 음식을 같이 먹는 자들이 네 아래에 함정을 팔 것이다”. 겉으로는 이 사람을 칭찬하며 추켜주는 것 같아도 이 교만한 사람 주위에 꼬인 자들은 아첨하는 악한 자들이므로 이 사람에게 틈이 생기면 즉시로 공격하여 곤경에 빠뜨리고 심하면 죽이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와 언약 (베리트)을 맺으신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나, 교만한 자와 동맹한 자들 (‘베리트’라는 단어가 쓰임, confederates)은 근본적으로 불신실하므로 틈이 나면 교만한 자에게서 등을 돌린다. 이 동맹한 자들은 누구인가? Barnes’ notes를 보면, 렘 27:3에 근거하여 ‘모압, 암몬, 두로와 시돈’ 등으로 본다. 원래 모압, 암몬, 두로와 시돈은 에돔과 더불어 유다왕 시드기야를 선동하여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반기를 들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 중에 모압, 암몬은 에돔과 합쳐서 오히려 유다를 배신한다 (참조. 습 2:8; 겔 25장, 에스겔서가 비교적 상세히 설명). 즉, 이 세 나라는 유다가 바벨론의 공격을 받을 때 바벨론 편에서 유다를 조롱하고 노략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형제국 유다를 괴롭힌 에돔에 대하여 모압, 암몬과 두로와 시돈은 속임수를 쓰고 에돔을 배신하여 결국 에돔을 변경에까지 몰아부쳐 쫓아내는 것이다. 반즈의 설명은 오바댜서 외에 다른 선지서들에 나타난 역사적 기사와 예언등을 종합한 설명이므로 신빙성이 크다. 간추려 말하자면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형제국 유다를 배신한 교만한 에돔을 그가 의지했던 동맹국들에게 오히려 배신 당하게 하셨다는 말이다. 본문은 이렇게 약조를 맺은 자들을 화친한 자들 혹은 음식을 같이 먹는 자들로 병행하여 설명한다. 겸상한다는 것은 결국 뜻을 같이한다는 말인데 이 겸상을 하던 자들이 발꿈치를 들었다는 것이다 (참고. 시편 41:9). 그러니 교만한 자는 어리석음을 범하여 의지하던 자들에게 속아 패망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잠언은 더 간추려 그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라고 ‘마샬’ (지혜 격언)로 표현하는 것이다.
결국 교만으로 땅을 빼앗긴다
19절을 보면, “남방 사람은 에서의 산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이 나타난다. 이 예언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이스라엘의 남쪽에 살던 사람들 곧 유다 지파의 사람들이 에서의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잠언의 ‘교만한 자가 패망한다’는 것은 곧 18절의 내용 곧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불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며 또한 그 땅을 종말적 이스라엘 곧 겸손한 자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교만자의 패망과 함께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요 (벧전 5:5-6),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 37:11; 마 5:5).
이렇게 오바댜서의 에돔의 교만과 그로 인한 패망, 이스라엘의 회복의 대조는 구원론적이며 종말론적인 지반에서 다시 해석된다. 육을 따르는 에돔의 교만이 그를 어리석음과 배신당함과 땅을 잃음으로 이끌었다면, 멸망으로 이끌었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을 따르는 새 이스라엘의 겸손은 그를 지혜와 하나님의 신실하신 보살핌과 하나님 나라의 기업의 상속으로, 곧 구원으로 이끌 것이라는 말이다.
오바댜에서 배우는 깊은 교훈
결국, 오바댜에서 배우는 깊은 교훈은 겸손이다. 일부러 겸손한 척하는 것은 겸손의 모습을 띄지만 참된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육적 욕망과 교만한 나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오직 그분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내가 선을 바라지만,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한다. 교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음이 추리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생명의 영의 법의 지배를 받게 되니 악을, 교만을 이길 수 있다. 예수님 안에서만 겸손해질 수 있다. 오직 성령 충만을 받아야 낮아질 수 있다. 예수님 안에서만 소망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만 한다. 교만한 나를 탄식하며 바라보며 오래도록 엎드러져 있어야 한다.
최영헌 교수(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yunghun.choi@ac.edu.a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