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단(3)
기독교 선교적 관점에서 본 G2국가로서 중국에 관한 연구
세계 지도자 역할에 관하여
목 차
I. 서론
II. 중국의 역사적 배경 연구
1. 중화민족 사상적의 역사적 배경
2. 중화민족 사상의 근원
3. 중국의 사회주의 정체성
III. G2국가로서 중국
IV. G2국가 중국민족의 세계관
V. 100년간 G1 국가의 역할을 수행한 미국의 청교도 정신
VI. 중국의 G2 역할과 수행 능력
VII. G2국가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
VIII. G2 중국의 기독교 선교와 역사적 교훈
IX. 결론
II. 중국의 역사적 배경연구
2. 중화민족 사상의 근원
중국민족의 사상적 근원에는 공자의 유교사상이 깔려 있다(BC 1027-771 周나라 건국). 이전부터 중국문화에서는 이미 글자를 발명하여 사용하여 왔으며 이 문자에 의하여 인간의 교육이 시작되었고, 서로의 생각과 의사를 문자에 의하여 전달하고 기록하면서 사회생활이라는 조직에서 문화와 인간의 사상체계와 문자가 책으로 집필하여 보관하고 후세에 남기면서 역사속에 중화민족의 사상과 문화가 발전하고 전수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책으로 중화민족의 사상을 배울 수 있는 책은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인데 이것은 주 나라 때 이미 국민의 교양서적으로 유명했다. 주 왕조는 통치이념으로 황제는 하늘이 정하여 준 천자(天子 이며,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주인(主人)이라는 사상을 처음으로 나라의 통치이념으로 정착하여 사용해 왔다. 그는 천하의 모든 토지의 최고 소유주는 왕에게 있다는 통치사상으로 “만천하의 땅은 모두 왕의 땅”이라는 사상으로 나라의 토지와 재산과 사람까지도 왕의 권한안에 있다는 통치사상을 정착시켰다. 중국역사에서는 주 나라시대에 이미 중국대륙을 통치할 수 있는 통치능력은 문자와 문서체계를 국민들에게 보급하여 글자를 사용함으로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문자적 제도의 정책과 사회적 질서와 중화사상의 문화를 건설했던 사례가 중국인의 사상적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중화민족의 사상속에 이미 주 나라 시대의 주 왕조는 모든 토지와 국토의 소유권과 백성까지도 국가의 상징인 왕권에 있는 사상의 통치제도를 만들어 주 왕조는 국가와 백성들을 통치했다. 이 정책은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이론으로 모든 국토는 국가가 소유권이 있다는 공산주의 국가 정치체제와 비슷한 제도를 주 나라시대에 시행하여 왕권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중국역사에서 중원의 중국대륙을 처음으로 통일하여 통일된 중원의 제국을 건국한 나라가 주 왕조이다. 중국의 대륙은 문자를 보급하여 국민들이 함께 사용하면서 국가를 통치하는 능력을 가진 주 나라가 처음으로 중국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던 사상의 근원은 동일한 문자를 사용함으로써 동일한 사상적 문화를 공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21세기 중국이 하나의 대륙국가로서 G2의 중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저력에는 3천년전 그들의 선조들이 하나의 통일된 대륙적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중국인의 사상적 근원의 시작에서 맺어진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의 사상적 근원은 시대마다 영웅들이 일어나 중국대륙을 통일하여 대륙을 통치하고자 했던 사상적 근원이 중국인의 역사속에 꿈틀거리고 있어왔다. 그것이 중국인의 사상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천년 중국의 유구한 역사에서 넓은 대륙을 통일한 그들의 선조는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BC 771년 주 나라가 멸망하고 중국대륙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면서 봉건왕조로서의 찬란한 문명과 문화의 유산들을 후세에 남겨 주었다. 중국의 역사적 사상의 근원이 되는 동일한 문자와 문화가 언제나 중국대륙을 통일할 수 있는 여건을 잠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주 나라와 진 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일했던 위대한 역사적 사상이 중국인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으로 역사속에 이어져 올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49년 모택동 주석이 대다수 중국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통일된 중화인민 공화국을 건국할 수 있었던 사상적 승리는 통일된 중국대륙을 갈망했던 중국국민들의 국가를 사랑하는 사상적 근원의 중국국민의 민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중화인민공화국은 후진국 국민이라는 국민적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오직 한 가지 통일된 넓은 영토와 13억의 중국국민이 함께 노력하여, 약육강식의 국제적 자본주의 경쟁의 현장에서 이제 21세기 G2 중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주 나라와 진 나라와 송 나라들이 중원의 중국대륙을 통일하지 못했다면 중국대륙도 유럽 대륙처럼 여러 개의 국가들이 함께 공존하는 대륙이 되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의 나라들은 좋은 기후조건과 기름진 국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은 베트남(VIETNAM), 라오스(LAOS), 캄보디아(CAMBODIA), 타이(THAILAND), 미얀마 (MYANMA), 말레이시아(MALAYSIA)의 국민들은 약소국가의 민족으로서 서구의 국가들로부터 식민지의 수탈과정을 거치면서 살아남아야 했다.
역사속에 중국대륙이 인도차이나 반도처럼 분할하여,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이 분할하여 여러 나라들이 건국되었다면 아시아 대륙에서는 오늘날 G2국가로서 통일된 중국대륙은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사상의 근원은 주 왕조의 통일시대와 공자의 춘추말기의 공자의 사상에 근거하여 중국의 유교사상이 중국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중국대륙을 통일한 주 왕조는 넓은 중국대륙을 모두 직접 관리할 수 없었다. 주 왕조는 “봉건친척 이번병주”(封建親戚 以番屛周)라는 정책을 취하였다. 즉 주 나라의 천자는 넓은 국토를 왕실의 종친들과 귀족들과 국가 공신들에게 분봉하여 주고 그들이 각 지방을 관리하고 주 왕실을 받들어 섬기며 곡물과 세금을 바치는 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주의 왕은 분봉을 받는 사람들에게 책명(冊名)을 내려주면서 국토와 백성을 통제하고 분봉을 받은 제후들은 군대를 양성하여 국토를 지키고 치안을 담당하는 일들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군사력의 권한이 각 지방 제후들에게 있게 되자, 서부지역의 제후 견융(犬戎)이 일어나 주 나라의 왕실을 점령하고 주 나라 유와(幽王)왕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의(의구)가 왕으로 추대되었으며, 그가 주 나라의 마지막 주평왕이었다. 그러나 주평왕은 견융족의 세력에 밀려 동부지역의 성주로 천도함으로 주나라는(BC 771) 중국대륙에서의 통치권을 상실하고 중국대륙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또는 선사시대(先秦時代)가 시작되었으며, 이 시대를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한다. 진(秦), 초(楚), 제(齊), 연(燕), 조(趙), 위(魏), 한(韓)이 서로 대립하는 나라들이 되었다. 주 나라 황실과 귀족들이 독점하던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지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제후들의 나라들은 유능한 인재들이 요구됨으로 인하여 중국 대륙에서는 전국적으로 모든 인재들이 골고루 각 지방의 나라에 등용됨으로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게 됨으로써 중국의 국토와 행정이 전국적으로 균형있게 고루 발전하는 기회가 되어 갔다. 춘추전국시대의 인물들이 공자, 맹자, 순자, 노자, 장자, 묵자, 그들이 중화민족의 사상적 근원의 뿌리들이다. 특히 유가(儒家)로서 공자, 맹자, 순자 등은 유교(儒敎)의 시상적 학문으로 효제(孝悌), 인의(仁義), 예(禮)를 근본으로 사회와 국가로서 중국정치사상의 근원이 되었다. 그리고 도가(道家)의 사상으로 노자, 장자, 묵자의 부국강병(富國强兵) 사상들이 중화사상(中華思想)의 근원(根源)이며 뿌리로써 오늘날까지 중국대륙을 하나의 국토로 뭉치는 중국인 사상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유학이 철학화한 것은 송나라 이학(理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송나라(1130-1200년) 이학은 선진 유학과 다르며, 또 경학화한 유학과도 달랐다. 학문은 이미 고도로 추상화했으며, 사변철학의 색깔을 짙게 띠고 있었다. 송 나라 이학은 우주의 본질과 인식론, 즉 두 가지 문제를 탐구하면서 철학으로 발전했다. 이학은 우주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철학적으로 다루는 것을 “본체론”이라 한다. 본체론적인 측면에서 이학 또는 유학은 다른 종교와 크게 다른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같은 인격신을 부정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우주의 본질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다. 장재는 기(氣)가 만물의 본체이며, 세상의 모든 것은 기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기(氣)는 늘 변화하며 쉬지 않고 움직인다. 그는 여기에서 출발하여 세계가 물질적인 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추론했다.
이학의 인식론은 인식의 근원과 인식 방법에 대한 탐구이다. 송나라의 이학 가들은 이 문제에 깊이 매달렸다. 장재는 듣거나 보고서 아는 것과 덕으로 아는 것 두 가지를 제시했다. 그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긍정했고, 세상 만물을 인간이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추론은 다음과 같다. 감각은 외계 물체의 자극을 필요로 한다. 외계 물체의 자극이 있어야만 느낄 수 있다. 그런 자극이 없다면 어떻게 인간의 느낌이 생겨날 수가 있겠는가? 듣거나 보고서 아는 것은 인간의 감정적 인식으로 이성적 인식의 기초가 된다. 감각적 인식이 생긴 다음에야 비로소 덕을 아는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교는 BC 6세경에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중동지역에서는 유일신 유대교는 하나님의 선지자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직접 십계명을 받음으로 율법주의 신정국가가 건국되면서 유대주의 종교가 탄생하였다. 유럽에서는 알렉산드리아대왕의 헬라문명이 유럽을 지배하게 되였으며, 남부 아시아지역의 인도에서 불교와 힌두교가 일어나 지구상에는 종교와 함께 인류 문명에 서막이 시작되었다. 그후 유대지방 베들레헴 이스라엘에서 탄생한 예수 그리스도교는 AD 기원 원년으로 근대 문명의 시작에서부터 현대 문명사회의 새로운 세기의 열매를 맺어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에게 주신 새로운 세기의 기원이 시작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류에게 주신 축복의 기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의 인류 구원의 십자가의 비밀인 복음의 소식인 성경이 전해지는 민족과 나라들은 인류 보편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건국이념으로 삼는 국가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의 세상을 향한 사랑이 성경 말씀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진리와 사상이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기원과 근원이 되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은혜이다. 중국의 공자가 BC 551년에 춘추전국시대 노 나라에서 출생하였지만, 그는 주 나라에 멸망한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다. 은나라 멸망과 함께 공자의 증조부가 노 나라로 피신해온 후손이다. 공자의 학문과 사상이 증자와 순자와 맹자로 계승되어 유교의 학문과 철학적 사상이 중국대륙을 유교적 진리로 통일하고 지켜주는 중화민족의 사상의 버팀목이 되었다. 중화민족의 역사에서 유교가 중국역사에서 때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통치이념에 순응하지 못하여 시련의 시대가 있기도 하여 왔다.
천하를 통일한(BC 221년) 진(秦)나라 시황제는 한때 유학의 정치적 사상가와 법가들을 다수 등용하였으나 자신의 통치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함으로 그는 법가 서적과 기술서적을 제외한 모든 유교서적들을 불태우고(BC 213년) 유학자들과 유학을 따른 관리들과 병사들 460여명을 함양에서 생매장하였다. 이러한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으로 인하여 진나라 시대에는 유교가 크게 위축되기도 했다. 진 나라 멸망 후 세위진 한(漢)나라에서는 경학(經學)이라는 명칭으로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유학자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공자의 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용하였다. 또한 유교를 존중하는 정책으로 유학자들로 하여금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 등의 경전을 재구성하고 그 서적들을 공부하는 학풍과 경학의 연구가 자유로 왔다. 수(隨)나라에서는 나라의 안정을 위하여 유교를 존중하고. 처음으로 학교를 지방에까지 세워서 유교경전을 가르침으로 유교가 진흥하게 되어 갔다. 수 나라는 천하를 통일였으나 3대째 39년만에 멸망했다. 수 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당(唐)나라는 당나라 말년시대에는 유교적 통치이념에서 외래종교를 극심하게 탄압하면서 유교를 장려하였다. 당 태종 (2대)은 공영달(孔嶺達)을 총재로 임명하여 유교학자들과 함께 ‘오경정의’의 주석서를 만들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편찬된 오경정의는 학교의 교과서로 채택되었으며, 여기에서 국가에서 과거시험문제를 출제함으로써 그 후 중국민족의 사상적 근원이 유교의 영향을 받게 되기도 했다. 송(宋)나라에서는 유교 원칙의 시대로 유교의 학문이 융성하게 성숙하게 발전하였다. 중국대륙에는 당나라 쇠퇴 후 생겨난 오대 십개국 시대에 지방 곳곳에는 도적떼들과 탈영병, 부랑자, 빈민한 농민, 거지 도둑 하적(河賊)들로 혼란의 시대로 정국은 불안했다. 송 왕조는 960년에 지배권을 잡았으나 당시의 지정학적 상황에서 송나라는 주변국들을 모두 제압할 수가 없음을 인정해야 했으며, 인접 나라들과의 역학관계에서도 타협적인 태도를 가지고 때를 기다려야 했다. 북동쪽에는 거란 대요제국이, 북서쪽에는 탕구트 서하왕국이 있었다. 남서쪽에는 남조가, 서남쪽에는 안남왕(베트남)국이 송 왕조가 수립되기 훨씬 전부터 정권을 확립하고 있었다. 서쪽 변경을 따라서는 티베트 토번왕국이 있었으며, 중국 본토 내에서 조차, 오대 왕조중 세 왕조의 왕실은 돌궐계 사타족이었다. 교화되지 않은 이방민족들은 문자도 없는 문화로써 야만족으로 유목생활방식의 오랑캐들의 민족들이라고 생각했다. 송 나라는 아직도 미개한 민족들에게 둘러싸여 있기에 외교적 협상보다는 무력을 길러서 통일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방침을 세워야 했다. 송 나라가 독립국가의 왕으로 등극하기까지 이어졌던 전쟁, 습격, 유혈 사태, 배신, 학살 등을 거쳐서 송나라를 창건할 수 있었다. 아직도 상당수의 지방 권력자들은 송 나라의 건국을 부정하는 지방 군벌들의 세력들을 제거해야 했다. 군대의 서열 조직에서 1위로 권좌에 올랐고 그의 군대가 유교의 가르침에서 그를 천자(天子)로 하늘이 정하여 준 권위로 그를 옹립한 자리에서 그는 장군들에게 자신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맹세하라고 요구한 것은 앞으로 송 제국이 중국대륙을 통일될 때까지는 바로 그들의 힘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력한 장군들은 신생 왕조에 큰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송 태조 자신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송 태조는 거의 20년에 걸쳐 중국대륙에 남아 있던 지방 독립왕국들을 정복할 수 있었다. 오늘 통일된 중화 인민공화국을 후손들에게 물러줄 수 있는 영광은 중국의 선조들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대륙을 통일한 위대한 중화 민족의 사상에 평생을 바쳐서 노력한 결과이다. 송 태조는 963년 양자강 중류의 형남왕국(荊南王國), 965년에는 사천성 지역의 후촉왕국(後蜀王國), 968년에는 강력한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한왕국(北漢王國), 971년에는 광동성과 광서성 지역의 남한왕국(南韓王國), 975년에는 남경수도의 강소성국(江蘇省國)과 남당국(南唐國)과 강서성국(江西省國)등 3왕국을 점령했다, 978년에는 절강의 오월왕국(吳越王國), 979년에는 정월에는 산서성의 산서왕국(山西王國)을 굴복시킴으로 송나라는 중국대륙을 통을 완수했다.
2송 태조는 송 나라의 마지막 통일하기 전 976년 11월 14일 49세 사망하고 동생이 왕위를 계승했다. 태조에게 장성한 두 아들이 있었지만 큰아들은 29세의 나이로 자결했고, 형이 죽고 얼마 안되어 23세에 분명치 않은 이유로 죽어 있었다. 979년경에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국가 권위와 중앙집중행정을 가지고 통치하게 되었다. 중국의 송 나라시대에 인쇄기술의 발명으로 서적의 출판의 역사에서 10세기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980년에는 인쇄기술을 발명하여 유교 경전서들을 출판하여 백성들에게 보급하였다. 그리고 학자들로 하여금 관찬(官撰)유서(類書)의 편찬도 추진하였으며 그 종류가 21종류로 편찬되었다.
송 나라에서는 서적 편찬작업이 황제와 학자와 관리들 사이에 업무상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고 중국의 문화와 지성인들의 사상에서 태종자신의 국가통치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것도 기정사실로 봐야 한다. 태종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자신이 수많은 지방 왕국들을 통일하여 중국대륙을 찬탈한 황제가 아니라 새로운 문명과 학문을 장려하여 중국대륙의 학자들에게 유교적 군신의 도리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유교적 학문에서 질서를 찾고자 노력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송 나라시대는 중국철학의 황금기였으며 공자 유학의 전성기 시대였으며 처음으로 가장 넓은 중국대륙을 통일한 송나라 조정에서는 유학의 학자들과 사대부들이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경서들의 원본에서 근본적인 원리 들을 검토하고 여기에서 자신들의 해석을 더하여 내용이 풍부하게 하며 자신들의 결론을 이끌어내기 시작하면서, 중국인들의 유교적 윤리와 사상은 체계적인 철학사상으로 발전하여 중화민족의 민족사상에 기여하게 되었다.
유교가 중국의 역사에서 중국인 사상의 근원적 역사이었다면 이제 G2의 중국은 중국인의 사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G2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인이 원하는 G2의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직도 중국이 그들만의 중국적 사상으로 G2의 역할을 고집한다면 세계는 또 다시 냉전체제를 답습할 수밖에 없다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서로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시작된 국제적 냉전체제는 때로는 세계가 극단적 위기까지 몰고 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인류역사에서 G1과 G2의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쿠바의 미사일 위기에서 그 교훈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서방진영과 공산국가와의 국제적 냉전시대였던 1962년 10월 14일, 미국측의 첩보기 록히드 U-2에 의해 쿠바에서 건설중이던 소련 미사일기지의 사진과, 건설현장으로 미사일 부품을 운반하던 소련 선박의 사진이 촬영되면서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었다. 흐루시쇼프는 소련 공산당 서기는 쿠바의 신생 공산정권인 카스트로 정권을 보호한다는 명분과 서방 세계와의 협상 카드로 쓰기 위해 쿠바에 소련의 장거리 미사일 기지 설치를 비밀리에 추진중이었다.
미국정부는 소련의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은 미국에 대한 무력시위라고 주장하여, 미사일 기지의 완공을 강행한다면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일 것이며 재3차 세계대전도 불사하겠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전 세계는 케네디 대통령의 과격한 발언에 의해 또다시 전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고, 학교와 가정에서 대피 훈련과 방공호를 파는 작업이 실시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가기에 이르렀다. 미국과 소련의 필사적인 외교에 의하여 소련측의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이 중지되고 그에 대한 협상으로 터키에 있던 미국측의 대륙간 탄도탄(ICBM) 미사일 기지를 철수시키는 조건하에 사태가 종결됨으로써, 세계는 전면 핵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는 냉전 상태의 심각성을 교훈하여 주는 하나의 경험이다.
냉전(冷戰)의 시작은 자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서방의 국가들과 ‘북대서양 조약기구’와 칼 마르크스 레닌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들과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소련위성 국가들의 세력이 세계의 지배권을 가지려고 투쟁하던 세계적 반목과 대립의 시대였다. 1991년 양대세력인 소련의 해체로 냉전은 종식되어 세계화의 시대로 21세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냉전의 뿌리는 1917년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하면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소련 공산주의 지도자로써,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세계는 ‘자본주의의 일시적인 안정’ 상태에 있으나 결국은 무너질 것이며 공산주의가 승리한다는 이론으로, 소련 공산주의에 성공했던 볼셰비키 혁명의 사상이 냉전의 뿌리라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G2 중국의 경제가 G1 미국의 경제능력을 추월할 수 있다는 경제 전문가들과 중국 자신들의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정치이념에는 볼세비키 혁명의 사상이 내제하고 있기에 진정으로 인류의 평화와 자유민주주의에서 또 다른 냉전의 근원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 마르크스 레닌 공산주의의 정치사상으로 건국한 북한과 아직도 방위조약을 맺고 있는 중화민족이다.
그러나 중국민족의 오만함과 도도함이 중화민족의 역사적 사상의 근원속에 잠재해 있다. 중국 민족들이 오랑캐로 불려왔던 몽골민족이 원 나라를 건국하여 자금성의 주인이 되었으며, 그들이 무서워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미개했던 거란 민족의 후손인 만주족이 찾아와 청나라의 이름으로 자금성의 안방 주인이 되었다. 통치기반이 빈약했던 청 나라의 만주족은 수많은 한족의 엘리트와 지식인들을 처형해야 했으며 때로는 관직을 하사하고 불안해하면서 철저한 쇄국정책을 중국대륙을 통치하여 와야 했다.
당대의 동양의 문명국이던 송 나라의 문화의 유산과 한없는 중국대륙의 잠재력을 활용하지 못한 열등감 만주족의 정신사상 문화인 청나라는 산업혁명과 과학문명으로 앞서가는 서구의 문명을 외면한 결과는 두 번의 아편전쟁은 중국역사에서 치욕의 역사를 교훈으로 남기고, 후손들에게 후진국이라는 서러움만 남기고 청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오늘날의 중국은 G2라는 경제강대국이다. 제 5세대 시진핑 주석은 중국몽의 꿈으로 새로운 중화민족의 사상을 심어가고 있으며 중국의 굴기로 일어나고 있다. 또 다른 세계의 국민들은 자유민주의 사상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온 국민들이 같은 지구촌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기에 G2 국가의 책임은 서로가 공존하는 국제질서와 평화에 중국 국민도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강호생 선교사
(Grace Theological Seminary 박사논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