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연구
룻기서에 나타난 신학적 성찰과 사회적 적용(1)
연재되는 룻기에 나타난 신학적인 연구는 한 제목을 가지고 있는 논문이다. 본지에서는 두 차례로 나눠 연재하게 된다. 1부에서는 룻기의 신학적 성찰, 그리고 2부에서는 룻기의 신학적 성찰과 사회적 적용이 될 것이다_편집자 주
1. 서론: 룻의 이야기
룻이란 여성 이야기를 다룬 룻기서는 상식을 뒤엎는 책이다. 주요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등장인물부터가 그렇다. 주인공 룻은 모압 여자이고 시모 나오미는 이스라엘 여인이다.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선민사상 탓에 두 민족은 절대 결혼을 안 했는데, 두 여성이 가족이 됐다는 데서부터 예사롭지 않다. 게다가 이방 여인 룻은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갖지 못했던 신앙과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룻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유다 다윗의 혈통인 보아스와 결혼하여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꼽히는 다윗왕의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이야기는 만남에서 시작된다. 그 만남부터가 우연이 아니다. 모압과 베들레헴이란 다른 지역에 살던 나오미와 룻이 가족으로 맺어진 건 당시 이스라엘 지역을 휩쓴 기근 탓이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양식을 얻으러 인근 지역 모압으로 떠나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이들 가운데 에리멜렉과 나오미 부부가 있었다. 그들이 기근을 피해 모압 지역으로 이주하여 한동안 살았지만 남편도 세상을 떠났고 두 아들이 모압 여인과 각각 결혼하였지만 두 아들마저 죽게 되었다. 과부 시어머니가 과부된 모암 며느리를 데리고 고향땅 베들레헴으로 되돌아온다. 사회적으로 가장 불행하게 된 여인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룻기서가 세 명의 주인공, 나오미, 룻, 그리고 보아스의 이야기를 빌려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숨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적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인간의 행복과 비극 전체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기근과 죽음, 고독과 스스로 택한 객지 생활, 이민과 나그네의 삶의 역사, 곧 사회적 약자가 된 이 모든 역사과정중에 하나님은 그의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그들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은 룻이다. 특히 그녀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나오미를 따라 나섰다는 점은 놀랍다.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빈털터리가 된 나오미는 형편이 좋지 못했을 것이다. 룻에게 친정으로 돌아 가라라고 권했던 이유를 봐도 그렇다. 하지만 룻은 “어머니가 유숙하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며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간다.
선민사상을 부여잡고 살아온 유대민족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나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의미를 룻기서 주인공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2. 본론: 룻기의 신학적 성찰
2-1. 유대주의를 넘어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와 사랑
먼저 유대주의가 형성된 배경을 살펴보자. 바벨론 포로 이후,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70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허물어진 조국을 건축하는 동시에 유대주의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느헤미야는 이방 여인과 결혼을 금지하고(스 10:6-44, 느 13:23-27), 철저하게 안식일을 준수하게 하여 민족적 결속을 다졌으며, 선택 받은 선민의식을 고취하여 흩어진 유대인들을 단결하게 하였다. 에스라는 유대 공동체를 재건하려고 율법도 정경화하였다(느 8:7-8).
유대주의가 이데올로기 성격을 지닌 신념체계로 형성되면서, 이스라엘 이외 국가를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국가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율법주의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편협한 신관을 가지게 되었다. 사마리아인들을 ‘개’라고 비하하며 적대화한 것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신명기 법전에 따르면, 암몬과 모압족속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신 23:3-6). 모압국가가 바로 룻기의 배경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지나면서 율법학자, 바리새인, 사두개파 그리고 제사장들은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재건하려는 율법 체계를 통해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을 율법의 노예가 되게 하였다. 예수님은 유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기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있지 사람이 안식을 위해 있지 않다”고 도전한 이유이다(막 2:23-28).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율법 체계 속에 가둬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법률적 하나님이 되게 하였다. 이러한 신앙체계는 그들이 기다린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처형하기에 이른다. 예수의 복음은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었으며,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었다(마 5:38-48).
룻기는 이러한 유대주의 전통과 대립되고 있다. 학자들은 특별히 브루그만 교수는 룻기의 기록 연대를 4세기 이후 편협한 유대주의를 강화한 에스라, 느헤미야의 종교개혁 이후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지적하기를 “유대 선민의 기득권과 정통성를 가지고 있던 보아스가, 이방 여인 그것도 모압 여인 룻과 결혼하므로 이방여인과의 결혼금지법에 도전하게 하므로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universal)을 드러내게 한 것이다”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방 모압 여인도 용납하시는 하나님이다. 나오미의 하나님은 모압 여인 룻의 하나님도 되신다. 다윗 왕국은 이방인도 용납되는 보편적 왕국이다. 다윗의 족보에는 이방 모압여인도 함께하는 왕국이다(룻 4:18-22).
유대주의 사상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메세지와 유대주의 사상의 계승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제사장 그룹들과 끊임없이 충돌한다. 유대주의 옹호자들은 하나님을 죄인을 용납지 않으시고 벌하시며 율법을 통해 드러내시는 분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사랑은 죄인과 의인들에게도 똑같이 내리는 태양의 빛과 같으시다(마 5:45).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회적 변두리 인간들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마 9:13).
2-2. 유대주의 응보사상을 수정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룻기에서 보여주는 깨어진 인간들의 모습은 율법학자들의 견해로 보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있다고 정죄한다. 유다를 버리고 이방으로 이주한 것이 죄이고, 이방신을 섬기는 문화권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한 것이 죄이다. 유대율법학자들은 그들을 그렇게 정죄할 것이다. 남편과 자녀들을 잃은 나오미, 과부가 된 룻은 의지할 것조차 남지 않은 가장 불행한 변두리 인간, 불행한 인간들이 되었다. 유대주의 시각에서는 축복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룻기는 이런 시각을 수정한다. 숨어계신 하나님은 깨어진 이들의 삶을 회복하고 계셨다. 사사기의 하나님은 뛰어난 사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용맹을 드러내신다. 그러나 숨어계신 하나님은 룻기에서는 연약한 여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나오미는 욥기서에 나오는 욥과 같은 고난 중에 있는 모습이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응보사상에 의거하여 해석하여, 하나님은 의인을 축복하고 죄인을 벌하시는 분이시라고 한다. 물론 하나님은 이런 면이 있으시다. 그러나 착하면 축복하고 의롭지 않으면 벌하시는 차가운 하나님은 아니시다. 욥은 고난 중에서 응보 사상을 넘어서 고난 받는 자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였다. 룻기는 이러한 고난받는 여성들을 등장시켜 하나님은 약자를 보호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룻기에서 하나님은 숨어 계시나 오히려 이방 여인 룻을 등장시켜 나오미를 위로하신다. 며느리 룻은 가장 외로운 시어머니가 된 나오미와 함께 하겠다고 믿음으로 고백한다. 외로운 자와 함께 하며 길동무가 되어 주겠다고 말한다. 나오미가 절망하며 믿음에 있어서 좌절하였을 때, ‘어머님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 될 것’(룻 1:16)이라고 말하며, 신앙을 회복할 수 있게 용기를 북돋아준다.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와 격려가 되었을까? 룻기에서 보여준 하나님, 곧 이스라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고난받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엠마오 도상에서 지치고 슬픔 가운데 있던 제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그리스도의 모습과도 같으시다. 숨어계신 하나님은 오히려 룻기의 주인공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행동을 통해 말씀하신다.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약자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라고 질문하게 된다. 여전히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삶을 통하여 말씀하고 그들과 함께 계시였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는 이방인을 용납하지 아니하였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직면한 고민은 유대주의를 극복하고 예수 공동체가 이방인을 받아드릴 수 있는가였다. 이 대답을 보여 준 것이 사도행전 10장과 11장이다. 이 장들에서 고넬료가 이방인으로서 첫 기독교인이 될 때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신다. 유대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금지하고 있는 동물들을 잡아먹으라는 환상이 보여 베드로가 말하기를 “저는 유대인으로서 추한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고 말할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내가 깨끗게 한 것을 네가 더럽다 말고 용납하여 먹으라”하신다(행 10:15).
인간의 편견과 오만, 용납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용납하여, 기독교 공동체에 받아드리라 하신다. 마음에서 수용하고 용납하라 하신다. 이 환상 사건 이후에 고넬료가 첫 이방인으로서 세례를 받게 되며, 기독교가 이방인들을 위하여 문을 열게 된다. 사회적으로 여인들이 용납되고 상하귀천 없이 민중과 양반이 함께 성찬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될 수 있다.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며, 남편과 아내가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여 사랑하고 돌봐주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인격을 존중하는 사랑의 관계로 한 가정에서 살아간다. 곧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으니 잡아먹으라 하신다.
룻은 이방 모압 여인 하나님의 회중에 들어올 수 없는 깨끗지 않은 여인이며(신 23:3), 남편이 일찍 죽은 팔자가 매우 드센 여인이다. 유다 순수 족보 계열을 보존하고 있는 가문과 베들레헴에서 부호이며 기득권자였던 보아스가, 이 천하고 율법으로 금지된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유대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한 것은 유대공동체에 엄청난 도전이요, 변화를 예견하고 있다. 이런 결단에 보아스는 고민과 갈등을 하였을 것이다. 친척들은 모두 용납할 수 없어, 기업 무를 자가 되기를(4:1-6) 포기하며, 룻을 책임지기를 거절하였다. “기업 무를 자”란 구약에서 가난한 혈족의 땅을 사줄 자(레 25:25-26), 혹은 가까운 친척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과부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주어 기업을 상속케 하며(신 25:5-10), 친척이 노예가 되면 돈을 지불하고 해방시켜 주는 책임(레 25:47-49)도 있는 제도이다.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며 경제적 책임을 보여주는 제도일 수 있다.
기업 무를 자의 제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룻기서에서 룻의 죽은 남편의 친족들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보아스는 기꺼이 기업 무를 자가 되기를 자처하였다. 비록 룻이 이방여인이지만 사랑의 깃으로 그녀를 덮을 것을 결심하였다(룻 2:15). 하나님이 깨끗게 하셨으니 용납하고 사랑해야 하며,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수용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보아스의 역할은 유대 전통을 지키면서 율법주의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은혜의 포용성을 가지고 새 공동체를 창조하는 선구자로 바뀐다. 이 과정에서 숨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더 이상 유대 국수주의를 변호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분의 은혜와 사랑의 무한함은 사회적으로 율법적으로 버려진 모압여인 룻까지도 포용하시는 무한한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나오미의 역할도 시어머니의 역할에서 중매자의 역할로 바뀌어 이방인을 과감히 다윗의 반열로 이끌어 올려 세우는 일에 하나님과 동참한다. 슬픔과 상처를 씻겨 주시고, 그녀를 정당한 선민의 일원으로 살아가도록 세우고 계신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여성신학자들은 가부장사회에서 스스로 미래를 창조하는 여성들의 용기를 보게 된다고 찬사를 보낸다.
2-3.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숨어계신 하나님은 나오미를 통하여 새 역사의 지평을 열고 계셨다. 다윗의 왕국 메시야의 왕국에서는 기득권자도, 천인도, 유대인도 이방인도, 고난받는 이도, 의인도, 여인도 남자도, 과부도 시어머니도 모두가 메시야의 왕국 건설에 참여할 자들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룻기서가 사기와 왕국사의 시작인 사무엘상의 중간 사이에 배치된 이유는 이처럼 새로운 역사의 장를 열고 있어서이다.
불행한 사람들을 통하여, 타작마당에서 이삭줍는 여인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회 계층을 넘어 다윗의 역사를 창조하시고 계셨다. 이런 하나님의 이해는 배타적인 유대주의 전통의 시각을 뒤어넘어 사랑의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칠칠절기(맥추절 혹은 오순절이라고 함)에 룻기 이야기 읽기를 즐겨하였다. 유월절 후 7일이 일곱 번 지난 후에 온다는 의미로 칠칠절이라 하지만 추수감사절에 해당된다.
신명기에 의하면(신 16:9-11) 이 명절은 노비와 이방인들, 과부와 고아들, 사회적으로 소외자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함께 나누며 즐거워하는 명절이다. 유대 민중들은 칠칠절기에 이방여인 룻을 구원하시고 높이시여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상기하며, 사회적 소외자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웠으며 이방 땅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 룻을 돌보시듯 그들을 돌봐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룻기에서 보아스는 더 이상 기득권과 배타적 유대주의를 옹호하는 속좁은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의 기득권을 불행한 이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는 새로운 이념을 행동하는 사상가로 묘사하고 있다. 야곱의 축복인 유다혈통의 축복까지도 이방여인과 나눌 수 있는 희생적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보아스의 희생적 사랑에서 배타적 유대주의는 무너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새롭게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세워져야 한다고 행동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는 희생은 새 이스라엘의 가능성을 앞당겨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성을 가진 희생적 사랑과 모성을 가진 희생적 사랑의 근원이 되는 사랑이시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다”(요한1서 4:8)라고 하였다. 부성도 모성도 사랑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존할 때 참된 사랑이 된다. 율법주의에서 소외된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함께 누리는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시는 숨어 역사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다음호 계속)
이은하 겸임교수(아이오나콜럼바대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