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제19강 ‘아는 것이 힘일까?’ ‘모르는 것이 약일까?’
서양 근세 철학에서의 인식론 이야기
들어가는 말
오늘은 2018년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 제가 진행하는 강의로는 마지막 모임입니다. 오는 11월 15일에는 김동숙 선생님의 ‘인문학과 책’으로 금년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2017년 2월에 시작한 우리 모임은 1년에 16번씩, 모두 32번이나 모였습니다. 함께 공부해온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서양철학은 역사적으로나 내용상으로 볼 때 크게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存在論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이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현대의 하이덱거와 가다머에 이르기까지 철학사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 제 1주제는 존재론입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무엇이고 무엇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와 비존재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런 형이상학적 이론이 철학의 첫 주제였습니다. 그 다음은 認識論입니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대륙의 합리론자들과 로크를 중심한 영국의 경험론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칸트의 관념론을 지나 훗설에 이르는 또 하나의 커다란 물줄기는 존재하는 것에 대한 앎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써 인식론입니다. 여기에서는 주로 ‘앎’이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 앎에 이르게 되고 또 아는 데는 어떤 한계가 있는지를 연구하게 됩니다. 마지막 셋째는 일종의 實踐哲學이라는 틀로 묶어 볼 수 있는 것들인데 도덕 철학, 예술 철학, 종교 철학, 역사 철학, 정치 철학을 포함하여 요즈음 많이 화두에 오르는 공공 철학과 환경 철학에 이르기까지 넓은 의미에서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 문제를 취급하는 분야를 총칭합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를 지나 서양철학사에서 16세기 이후에 크게 대두된 인식론에 대하여 공부하려고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지식의 확장사일까? 아니면 축소사일까? 역사는 무지에서 출발하여 지식의 폭을 넓혀온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로 인간이란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점점 더 어리석어지고 무지해진 것은 아닐까? 여기에는 늘 양론이 있어 왔습니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無知의 認識’ 즉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이 참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고 있습니다’(I know only one thing that is that I know nothing).
비슷한 시대 동양에서도 公子께서 그의 제자 子路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子曰 由誨汝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이들의 가르침처럼 자신이 아는 것은 무엇이고 또 모르는 것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더 알 수가 있을까요? 진정으로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고 또 모르는 것은 무엇인지 지식과 무지 사이에서 그 분별력을 기르는 것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물은 차고 넘치지만 마실 수 있는 물은 없어서 기갈을 느끼는 난파선에 있는 선원들처럼 우리는 이 정보와 지식의 홍수시대 속에서 오히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알지 못하고 지식에 목말라하는 비극과 희극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습니다.
유발 하리리가 그의 ‘사피엔스’에서 한 정직한 고백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과학의 가장 큰 공로는 우주의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대답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겸손이란 이제 한 개인의 인격이나 성품의 영역을 지나 학문이나 이론을 포함하여 종교나 정치 등 모든 부분에서 요구되고 있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말씀 중에는 ‘모름지기’에 대한 특별한 해석이 있습니다. “무릇 ‘모름지기’란 ‘모름’을 ‘지켜가는 것’이다. ‘모름’을 잘 지켜가야 ‘앎’이 가능해 진다.” 우리가 어떤 말 앞에다 ‘모름지기’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자신의 인식이란 불확실하고 자신은 지금 온전히 알지 못한채 이 말을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정확한 지식이 없이 인생과 인식의 문제를 논하고 있습니다.
인식론을 화두로 삼는 이유
첫째는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인류는 이 지구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 끊임없이 그 무엇인가를 알려고 해 왔습니다. 앎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네이쳐(nature) 중 하나입니다. 자연의 변화에 대한 경이, 궁금증, 의심, 질문으로 부터 시작하여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인간 자신과 그를 둘러쌓고 있는 자연과 환경, 가정과 사회에 대한 탐구 혹은 믿음 같은 것들이 인류의 정신세계를 이끌어왔습니다. 인식에 대한 논의와 탐구는 우리가 인간인 이상은 피해 갈수 없는 원초적 욕구 중 하나입니다.
둘째로 ‘무엇을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에 비하여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가를 찿아보려는 데 있습니다. 오늘 교안의 제목에서 물은대로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말과 ‘모르는 것이 약이다. 알고 나면 골치 아프고 마음만 아프다’라는 두 명제 사이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지지하는 편입니까?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일인가? 아닌가? 우리 개인을 보다 더 행복하게 해 주는가? 아닌가? 인간의 역사를 보다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아닌가? 인식론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해 줍니다.
셋째는 인간의 인식[그것이 그 무엇에 대한 앎의 문제이던 아니면 그 어떤 것에 대한 신념이나 믿음의 문제이던]을 보다 더 명확하고 분명하게(clear and distinct) 하려는 데 있습니다. ‘나는 사실은 모르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사실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전체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사실은 조금만 알고 있으면서도 많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사실은 잘못(틀리게) 알고 있으면서도 똑바로(제대로)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제일 심각한 경우에는 ‘나는 사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알고 있다고 착각을 하거나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물음들에 대하여 자신과 우리 시대를 검증해 봄으로 우리 개인과 인간 공동체를 좀 더 행복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보 시켜 나가자는 데 인식론을 공부하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認識의 의미
認識論이란 ‘앎’의 문제를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입니다. 영어로 인식론을 Epistemology라고 하는 데 이 개념은 본래 그리스어의 ‘지식’ 혹은 ‘그 지식의 의미를 깨달아 아는 認識’을 뜻하는 것으로 ‘episteme’라는 개념과 논리 혹은 이론을 뜻하는 ‘logos’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인식론을 흔히는 ‘지식학’ 혹은 ‘지식론’ The Theory of Knowledge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앎은 인식이고’ ‘인식은 의식이다’라는 기저 위에서 지식의 체계를 만들어 온 학문이 인식론의 역사입니다.
먼저 ‘앎’이란 무엇일까요? 서양철학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과 ‘믿는다’는 것을 철저하게 구분해 왔습니다.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은 ‘믿는 것’이며, 이 둘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아는 것’은 철저하게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인식이고 ‘믿는 것’은 철저하게 주관적 판단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 객관적 인식은 없이, 주관적으로만 ‘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고 그런 경우에는 ‘믿는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 서양철학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철학에서의 인식론은 종교적 신앙과는 달리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철학은 객관적 이론 위에 서 있고 종교는 개인적 체험에 근거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은 옳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라는 식의 표현들은 모두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믿는 것’으로 주관적 인식이지만 ‘1+1=2다’라든가 ‘불은 뜨겁고 얼음은 차다’ 같은 표현들은 객관적 인식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1+1은 2라고 믿습니다’라든가 ‘나는 불은 뜨겁고 어름은 차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모든 경우에 있어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확정적으로 대답을 못합니다. 예컨데 우리가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주적 객관성을 지닌 이론이 아니라 지구라고 하는 하나의 행성을 중심한 사실일 뿐이기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객관적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이론이 ‘객관적이란 말은 사실에 근거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들 사이에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라는 설명입니다. 우리 사회가, 인간 상호 간에 합의나 약속을 통하여 ‘객관성’을 담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아는 것은 ‘해석하는 것’이 됩니다. 대부분의 인간 지식은 ‘그 지식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데 ‘1948년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해이다’와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만들어진 해이다’하는 논쟁도 객관적 사실에 대한 역사적 지식을 달리 해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참 알기 어렵네’라고 말하는 것은 이렇게 객관적 사실에 대한 다른 해석들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누가 보느냐? 지배 계급? 역사학자? 민중? 남성? 여성? 남한? 북한? 결코 똑같지가 않습니다. 이런 것은 자유, 평화, 종교, 사랑, 문화, 스포츠 등등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 해석이 거의 다 달라지게 됩니다. 여기서 나온 명제가 ‘인식은 해석이다’입니다.
그 다음 인식론에서 ‘아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고 ‘認識하는 것’은 ‘意識하는 것’입니다. ‘앎’이란 어떤 대상(자기를 포함한 어떤 목적물)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의 형태와 본질과 그 둘 사이의 관계와 그 의미 및 가치까지를 파악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그 대상을 ‘의식하게’ 됩니다. 인식하면 의식이 생기고, 의식이 생겨났다면 그것은 이미 인식을 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앎=인식=의식’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체계가 바로 지식학입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책상이 있습니다. 분석적인 서구철학에서는 제일 먼저 이 책상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를 묻습니다. 나무, 플라스틱, 못, 페인트 같이 책상을 만드는 데 들어간 재료들을 찾아냅니다. 그 다음은 이 책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질문합니다. 어떤 공장에서, 어떤 목수가, 언제 어디서 얼마나 시간을 드려서 만들었는가? 책상의 제작 과정을 묻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이 책상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이 자리에 놓여지게 되었는가를 질문합니다. 어떤 판매회사, 구입 가격, 재원, delivery를 한 사람, 그리고 이 책상을 이 자리에 놓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설치 과정 전체, 즉 앞에서 말씀드린 세 개를 모두 다 알아야, 그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김마리아 선생이 있습니다. 우리는 김마리아를 ‘안다’고 말 할 때 그분에 대해서 무엇을 알 경우에 ‘나는 그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얼굴과 이름? 주소와 가족관계? 생년월일과 고향? 출생과 성장 과정? 공부와 결혼? 친구들과 지인들? 그의 취미와 성격? 그의 생각과 신념? 그의 신앙과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렇게 계속하여 질문을 던지게 되면 우리 중 김마리아 선생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남순이나 강지영이나 김용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식론에서 ‘안다’는 것은 이렇게 책상이든, 꽃이든, 자동차이든, 사람이든, 우리가 인식하고저 하는 대상의 본질과 형성과정, 역사와 현실, 관계와 경험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고는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다른 한편 우리말인 한글에서 ‘알다’와 ‘앎’에 대해서는 특별한 해석이 있습니다. 한글에서의 ‘알다’와 ‘앎’은 ‘알맹이’ 혹은 ‘알짬에서 파생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앎의 대상에 대해서 그 ‘알맹이’가 되는 ‘핵심적인 것’을 알아야지 ‘안다’고 여긴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에서는 알려고 하는 주체보다는 알아야 할 대상에 대한 중요성이 더 많이 강조됩니다. 앎의 대상을 존중하고 신뢰하고 교감함으로 그 대상의 깊은 마음, 본심, 핵심, 숨겨진 속내 까지 알아야 마침내 안 것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서구에서의 앎이란 항상 알려고 하는 주체가 중심입니다. 인식의 주체인 내가 인식의 대상인 그것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부리고 분석하는 것을 인식이라고 여기는 것과는 대조가 됩니다. 영어로 ‘나는 안다’를 ‘I know’라고 하고 ‘나는 모른다’를 ‘I don’t know’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I don’t know’를 직역하면 ‘나는 모른다’ 아니라 ‘나는 안 안다’입니다. 이는 자기중심적 표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말에서는 ‘안다’의 반대말이 ‘안 안다’ 아니라 ‘모른다’입니다. ‘모른다’는 말은 ‘내가 [안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능력이 미치지 못해서 당신을 알 수 없다. 그래서 몰라서 미안하다’는 뜻이 담겨 있는 표현이라고 해석합니다. 인식의 대상에 대한 존중이 깔려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식의 한계
19세기 이후 서양 철학에서의 인식론은 인식의 주체인 ‘내가’ 혹은 ‘우리가’ 인식의 대상을 알아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근세 이전까지 우리는 상대방은 나를 전혀 모르는 데도 불구하고 나만 그를 알면, 그럼 그것은 ‘안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김마리아는 나를 몰라도 내가 일방적으로 김마리아를 알면 그것은 ‘아는 것’이 되어버리는 맹점이 있습니다. 문재인은 나를 모르는데 내가 문재인을 알면 ‘안다’고 말하게 되는 단점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책상은 나를 전혀 모르는 데 내가 책상을 알면 그럼 그것은 ‘인식이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서양철학에서 인식론이 지닌 한계입니다. 꽃은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데도 나는 꽃을 다 알고 있는 양 꽃을 찬양하고 노래합니다.
한편 경험주의자들은 개인적 경험에 따라 인식의 한계는 불가피하다고 보았습니다. 예컨데 ‘홍길복은 어머니를 아는가? 알 수 있는가? 모른다. 절대로 알 수 없다’고 봅니다. 물론 관념론적으로는 압니다. ‘어머니란 여자이다. 어머니란 애기를 낳아 본 경험이 있는 여자이다’라고하는 식입니다. 그렇다면 홍길복은 여자도 아니고 애기를 낳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가 없는데 어떻게 어머니라는 존재를 이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식의 또다른 한계입니다.
칸트는 이 점에서 최초로 인식론의 한계를 발견해 낸 철학자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식의 대상 자체는 결코 알 수가 없다’ ‘Ding an sich 사물 그 자체는 우리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설명입니다. 예컨데 나는 ‘책상이란 이러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를 했을 경우 ‘당신이 책상한테 물어 본 적이 있느냐? 당신이 책상에 대해서 한 말에 대해서 책상도 동의를 했는냐?’라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말 못하는 책상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이나 심지어는 대화가 통하는 인간에 대해서도 우리는 늘 ‘일방적 인식’을 인식이라고 하지 ‘상호인식’은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 자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타난 현상만 인식할 뿐이지 사물의 본질은 인식할 수가 없다’ 이미 2백년도 더 되는 오래 전에 칸트가 이렇게 인간 인식의 한계를 분명하게 일러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모든 것의 본질, Ding an sich를 다 알고 있는 양 말하고 행동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낳은 자식이나 평생을 함께 살아온 배우자에 대해서도 그들의 본질, 그 Ding an sich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남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채 일생을 지나게 됩니다. 우리는 모르면서 결정하고, 모르면서 투표하고, 모르면서 찬성하고, 모르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동양철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인식이란 모든 것의 상호관계로 이해했습니다. 나도 당신을 알고, 당신도 나를 알 때, 그것이 진정한 ‘앎’이라고 보았습니다. 나도 김마리아를 알고 김마리아도 나를 알 때, 나도 문재인을 알고 문재인도 나를 알 때, 나도 책상을 알고 책상도 내가 누구인지를 알 때, 나도 꽃을 알고 꽃도 나를 알아 볼 때, 그 때 비로서 진정한 상호인식이 이루어진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우리는 흔히 인간 상호관계, 즉 나도 김마리아를 알고 김마리아도 나를 아는 경우는 이해를 하겠는데, 책상이라는 물건이나 꽃이라고 하는 식물이 어떻게 나라고 하는 인간을 이해하겠느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하지만 노장철학에서는 소도 말도 개도 나를 알아보고, 해도 달도 별도 나를 알아보고 웃으면서 교감하는 경지, 즉 인식의 주체와 대상은 피차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이나 자연이나 혹은 실재하지 않는 그 어떤 추상적이고 환상적인 것들 사이에서 까지도 ‘서로’를 알아보고 인정하고 교감 할 때, 드디어 참된 ‘앎’ 참된 ‘인식’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인간과 자연, 너와 나를 하나로 보고 인식의 주체와 대상을 하나로 파악하여 ‘내 속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또한 내가 있는’ ‘일치의 철학’ ‘관계의 철학’이 서양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동양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집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인식은 상위의 주체가 하위의 대상을 인식 하거나 최소한 동등한 주체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위의 물체는 자기보다 상위의 대상을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아주 드문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사람과 사람 사이, 개와 개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 피차에 가능하고 또 사람이 개미를 이해하거나 개미가 풀이나 흙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들 사이에서의 상호 이해나 상위에 있는 것이 하위에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들은 모두 다 가능한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는 불가능한 것으로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예컨데 인간보다 상위에 있는 하느님은 당신보다 하위에 있는 인간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지만, 하느님보다 하위에 자리한 인간은 자기보다 상위에 있는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 논리입니다. 사람은 개미를 알 수 있지만 개미는 사람을 연구하거나 알 수 없고, 동물인 개미는 식물이나 무생물인 풀과 흙은 알 수 있지만 흙과 풀은 개미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상위개념은 하위개념을 이해할 수 있지만 하위의 물체는 상위의 물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논리가 또다른 인식의 한계로 지적되곤 합니다.
인식의 종류
서양철학사에서는 인간 인식의 종류를 다음과 같은 4가지로 구분했습니다.
(1) 첫째는 先驗的 知識입니다. 칸트식으로는 a priori knowledge입니다. 인간에게는 배우거나 경험한 적이 없이도 태어 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아는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데 ‘살인은 나쁜 것이다’ ‘거짓말은 결국은 자신을 파멸시킨다’ ‘인간에게는 지정의가 함께 있다’ 라는 것들은 공부해서 배우거나 살아가면서 겪어보지 않아도 이미 태어날 때부터 선험적으로, 혹은 천부적으로 알려진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살인이 나쁜 것이라는 것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하거나 직접 살인을 한번 해 보지 않아도 그냥 선험적으로 아는 지식이라는 겁니다.
(2) 둘째는 觀念的 知識입니다. 이성적으로, 머리로, 생각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알게 되는 지식입니다. Speculative knowledge, 혹은 Ideological knowledge입니다. 생각해 보고 이리 저리 따져보고 궁리해 보아서 아는 지식들은 모두 관념적 지식들입니다. 예컨데 ‘아무래도 법과 질서는 있어야 하겠다’ ‘사람에게는 일정한 도덕과 상식이 필요하다’ ‘양심이 최후의 보루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해 보고 자각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알아내게 된 지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3) 셋째는 經驗的 知識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직접 체험을 통해서 습득하게 된 지식들을 말합니다. Experiential knowledge입니다. ‘밥은 뜸을 드린 후에 먹어야 맛이 있다’ ‘정치인이란 믿을 수가 없는 존재다’ ‘난로는 뜨겁고 얼음은 차다’ ‘인간이란 모두 자기 밖에는 모른다’ ‘사람의 오감이란 역시 불완전한 것이다’ 이런 식의 지식들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만나고 부딪쳐가면서 경험을 통하여 얻게 된 지식들입니다.
(4) 마지막 넷째는 學習的 知識입니다. 독서와 학교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학습을 통하여 얻게 된 지식들을 말합니다. TV에서 방영하는 ‘무엇이든지 물어 보세요’ ‘동물의 세계’ ‘내셔날 지오그래픽’ ‘인문학 여행’ 같은 프로그램들이나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인문학교실이나 어떤 경우에는 친구들끼리 함께 나누는 카톡방 같은 것들도 학습적 지식이 됩니다. 칸트는 이를 가르쳐 a posteriori knowledge이라고 했습니다. a priori knowledge를 ‘선험적 지식’이라고 번역한 것과 대비해서 ‘후험적 지식’이라고 번역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씀드린 이런 어려운 철학적 개념들을 좀 쉬운 언어로 다시 설명해 볼까합니다. 우리가(내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데는 어떤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을까요? ‘앎’에도 여러가지 형태의 다양한 ‘앎’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나는 내 아내(남편)와 자녀들을 잘 안다. (2) 나는 서울에서 제일 잘하는 냉면집이 어딘지를 안다. (3) 나는 내가 다니는 성당의 사목회장님을 안다. (4) 나는 운전을 할 줄 안다. (5) 나는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까운 Woolworth로 가는 길을 안다. (6) 나는 물건을 산 다음 50불을 내면 얼마를 돌려받아야 하는지를 안다. (7) 나는 건강한 사람이지만 설탕과 기름기는 당뇨의 수치를 급격하게 높인다는 것을 안다. (8) 나는 지구는 둥글고 또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것을 안다. (9) 나는 박세리는 한국이 낳은 자랑스런 골퍼라는 것을 안다.
위에서 든 예문들에는 공통적으로 ‘안다’는 말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식론에서는 이 똑같이 쓰여진 ‘안다’라는 개념을 이렇게 분석합니다. 위의 (1) (2) (3)에서 ‘안다’는 것은 내가 직접 살아가면서 만나 보거나 ‘경험해 보아서 아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딸과는 ‘살아보아서 아는 것’이고 냉면집은 자주 ‘가 보아서 아는 것’이고 사목회장님은 나와 같은 성당생활을 ‘해 보아서 아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경험적 인식에 속합니다.
그 다음 (4) (5) (6)에서 ‘안다’는 것은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거나 최소한 그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운전은 내가 ‘직접 하니까 아는 것이고’ 울워스에는 자주 ‘가니까 아는 것이고’ 거스럼으로 돌려받아야 할 돈은 내가 바보가 아니라 그 정도의 ‘계산능력은 있으니까 아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것은 위에서 본 경험적 지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경험의 축적을 통한 습관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7) (8) (9)에서 ‘안다’는 것은 내가 직접 해본 일도 아니고 또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책이나 컴퓨터나 방송이나 혹은 학교에서 배워서 습득한 것들로써 ‘지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당뇨병에는 설탕이나 기름기가 나쁘다는 것은 방송에서 자주 들어서 아는 것이고 지구가 둥글고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 배워서 아는 것이고 박세리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TV에서 자주 보아서 아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신문, TV, Google, Smart Phone, 컴퓨터, 책 등등 어디에선가 듣고 보고 읽는 등 학습과 정보를 통해서 얻어드린 지식들입니다.
처음 3개는 경험적 인식이라고 하고 그 다음 3개는 습관적 인식이라고 하며 마지막 3개는 학습적 인식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경우에 다 들어맞거나 구분이 확실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보통 사람에 대한 인식은 상호간에 만남, 대화, 교제, 삶의 공유 같은 경험을 통하여 형성되고, 물건에 대한 인식은 인식의 주체가 그 대상을 일방적으로 접촉하여 사용함으로 발생하게 되고, 정보와 지식에 대한 인식은 독서, 학습, 사유 같은 통로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부분의 형이상학적 지식들, 예컨데 하느님이나 진리, 사랑이나 영원 같은 개념들은 개인적 경험과 그 경험이 만들어준, 혹은 만들어 주었다고 믿는 어떤 신념의 결과물들로써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유형의 인식과는 구별이 됩니다. 그래서 철학에서는 이를 인식론에서 취급하기 보다는 주로 존재론이나 가치론에서 다루게 됩니다.
인식의 종류를 분류하는 다른 시각들
위에서 살펴 본 전통적인 인식 분류의 방법 외에도 현대 인식론에서는 다른 기준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1) 인간적 인식 – 즉 사람이 인식 할 수 있는 인식의 세계입니다. (2) 비인간적 인식 – 사람이 도저히 인식 할 수 없는 인식의 영역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당신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고 말하지 말아라. 세상에는 인식되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 또한 사람이 알 수 있는 ‘인간적 인식’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1) 첫째는 인간의 ‘언어적 앎’입니다. 즉 말이나 글이나 동작이나 그림, 소리 등으로 설명이 가능한 인식이 있다는 주장과 (2) 둘째는 ‘비언어적 인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말, 글, 동작, 소리, 그림 같은 것으로는 인식도 않되고 또 인식된 것을 전달하거나 표현도 할 수 없는 느낌, 감각, 잠재의식 같은 인식의 영역이 실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식의 방법
‘우리는 어떻게 지식을 얻게 되는가?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앎을 알게 되는가?’하는 인식의 방법론 문제에 있어서 근대 유럽철학은 2가지 서로 상반되는 인식의 방법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첫째는 ‘모든 인식은 이성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확인되고 또 완성된다’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가리켜 흔히 ‘합리론자들’ 혹은 ‘이성주의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성적 인식론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세 초기 서유럽에서는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Rene Descartes(1596-1650)와 네덜란드 암스텔담 출신의 Benedictus de Spinoza(1632-1677)와 독일에서 최초로 미적분법을 개발했던 수학자요, 철학자였던 Gottfried Leibniz(1646-1716)를 ‘대륙의 합리주의자 3인방’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모든 인식은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확인되고 또 완성된다’는 주장입니다. 이성적 인식은 오직 관념적인 것이요, 머리에서 출발하여 머리에서 끝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오직 경험을 통하여 인식된 지식만이 참되고 확실하고 실제적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경험주의적 인식론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펼친 사람들은 대부분이 유럽대륙의 바다 건너편에 있던 영국 쪽 사람들이었습니다. John Locke(1632-1704), George Berkley(1685-1753), David Hume(1711-1776)이 대표자들인데 우리는 이들을 ‘영국의 경험론자 3인방’이라고 합니다. 마치 한국과 일본이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서로 다른 생각과 다른 국민성을 지닌 것처럼 구라파에서도 해양을 사이에 두고 철학적 인식론에 있어서 ‘이성적 인식’과 ‘경험적 인식’이라는 두 가지 다른 주장이 팽팽하게 대결을 했습니다(대부분의 사상이나 철학, 종교,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예술 등은 ‘삶의 정황’[Sitz im Leben]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본래 이 개념은 성서비평학에서 처음 사용해온 것으로써 구약학자 궁켈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삶의 자리, 곧 역사적 상황과 지리적 위치와 문화나 전통 등을 함께 읽지 않고는 성서의 해석이나 철학적 사상이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그 어떠한 것도 그것이 의미하는 본래의 뜻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는 주장입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도 환경에 의한 문명과 문화의 발전을 이야기합니다). 이하에서 저는 저 자신의 힘에 부치기도 하고 또 우리 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나친 깊이나 전문성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이 되어 합리적 인식론자 중에서는 데카르트를, 경험적 인식론자 중에서는 로크, 이 두 사람의 주장만 간단히 개관함으로 근세 서양철학에서의 ‘인식의 방법’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1) 데카르트를 중심한 합리적 인식론
데카르트는 프랑스 투르(Tours) 지방에서 태어나 Counter Reformation 후 설립된 예수회(Jesuit)에서 세운 꼴레주 루아얄(College Royale)에서 공부했는데 수학과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30년 전쟁에서 돌아온 후에는 주로 네덜란드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만년에는 스웨덴에 가서 크리스티나 여왕의 가정교사로써 철학을 가르치다가 그 곳에서 병사했습니다. 합리주의 철학의 창시자요 대표자입니다. 주요 저서로는 ‘방법론 서설’(Discours de la Methode, 1637)과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1644)을 비롯하여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 1644)와 ‘인간론’(De Humine Fuguris 1662)이 있습니다.
데카르트 철학의 중심사상 – 그에 의하면 인간이 어떤 지식을 습득하는 데는 3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고, 둘째는 이성, 곧 생각함으로 알 수 있고, 셋째는 태어나기 전부터 본유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이 셋 중에서 이성을 통하여 습득하게 되는 지식이 가장 확실하고 정확하고 분명하다고 여겼습니다. 이성적 지식만이 clear and distinct하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5관을 통한 경험적 지식이나 태어나기 전에 주어진 본유적이며 선험적 지식도 최종적으로는 생각과 머리를 통하여, 즉 이성적 사유를 통하여 다듬어지고 조직되고 걸러짐으로 하나의 확실한 지식으로 정립이 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데카르트는 오직 이성적 지식만이 참되고 완전하고 명확한 지식이라고 본 것입니다. 특히 그는 모든 감각적 인식은 거부했습니다. ‘감각은 믿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썩은 새끼줄을 뱀으로 오인하고 기다렸던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었습니다. 평행선의 착시현상을 상기 시켰습니다. 배고플 때 먹는 밥과 배부를 때 먹는 밥맛은 왜 다른가? 낮에 보는 여인과 술취한 저녁에 보는 여인은 왜 다른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상황에 따라 달리 인식되는 것은 참된 인식도 아니고 옳바른 진리도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그 다음 데카르트는 이 이성적 지식을 얻는 길은 ‘방법론적 회의’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지적 독단론이나 광신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과정은 철저한 회의, 의심이라고 했습니다. 데카르트의 생각을 제 식으로 표현해봅니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확신을 갖고 철저하게 믿는 것을 보니 곧 독단론에 빠져 확신범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당신이 점점 의심하고 질문을 하고 자꾸 따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머지않아 진리에 이를 것이라고 봅니다’(믿지마라. 순종하지마라. 의심해라. 설마, 설마 하면서 의심없이 믿었던 것들이 인류의 역사를 불행과 비극으로 만들어왔다. 설마 이승만 대통령이… 설마 박정희 대통령이… 설마 이명박 대통령이…. 설마 박근혜 대통령이… 설마 문재인 대통령이… 설마 그 큰 교회 목사님이… 설마 그 거룩한 신부님이…. 설마 서울대학 교수님이…. 우리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다고 여겼던 것들까지도 반드시 의심해야 합니다). 데카르트는 일체 모든 대상에 대하여, 예외를 두지말고 의심하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1+1=2라고 하는 수학적으로 확실하다고 여기는 공리나 공식까지도 다 의심해보라고 말합니다. ‘혹시 장난꾸러기 신이 1+1=2가 아니라 1이나 3일지도 모르는데 우리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여 마치 2인 것처럼 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수학적 사실 까지도 의심해 보라고 했으니 다른 종교적, 경험적, 이론적 진리라고 여겨왔던 것들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모든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들도 다시 다시 의심해 보고 생각해 보는 것이 공부의 목표요, 지성인의 사명이요, 지식과 진리(앎과 인식)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자명하다고 여겨지던 것들 까지도 다 의심을 하다보면 제일 마지막으로 남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의심하기’라는 이 방법론을 통하여 확실하게 확인된 것은 바로 ‘아 지금 나는 그 무엇인가를 의심하고 있구나!’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아 지금 나는 그 무엇인가를 의심하고 있구나!’하는 이 사실은 ‘아 지금 나는 그 무엇을 생각하고 있구나!’하는 것으로 직결이 됩니다. 의심은 생각입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사유하는 존재요,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의심과 회의는 사유와 생각, 곧 이성적 통찰력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이요, 생각하는 사람은 이성적 존재입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오직 의심하는 사람만이 참된 진리에 이르게 됩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는 이런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데카르트 철학의 제 1명제인 이 말은 더 이상 설명이나 증명이 필요하지 않은 확실한 진리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cogito, 즉 ‘나는 생각한다’입니다. Ergo sum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은 뒤 따라오는 종속 개념입니다. 우리 인문학교실의 목표 중 하나도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 되기’입니다.
그 다음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과 연결이 될까요? 생각하는 것은 의심하고 궁금해 하고 그래서 질문을 던지고 더 나아가 비판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우리들은 흔히 ‘세상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일들에 대해서 자기의 입장이나 주장 등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혹은 주어진 어떤 견해를 전부터 가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각 하는 것’은 의심, 질문, 비판을 내포합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 생각하는 이성적 능력에다 회의와 질문과 비판을 포함하여 이것들이 사물을 인식하는 제일 확실하고 분명한 방법이라고 확신했던 사람입니다.
2) 로크를 중심한 경험적 인식론
존 로크는 웨스트민스터와 옥스포드에서 공부한 영국의 경험론적 인식론의 대표자입니다. 그는 아주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고 다양한 경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한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된 후 당시 영향력 있었던 정치인 샤프츠버리(Sir Shaftesbury) 백작의 주치의였으며 그의 정치적 고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사유재산에 대한 자연권 개념을 다룬 사회계약론을 만듦으로 근대 시민사회의 문을 연 정치사상가로도 유명합니다. 주요 저서로는 ‘인간 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90)과 ‘정부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90)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근대적 ‘시민 정부론’을 근간으로 하는 자연권과 정치사상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하고 인간 오성론을 중심하여 경험론적 인식론만을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지식을 얻게 되는가?’ 인식의 방법론이 여전히 문제의 촛점입니다. 로크는 데카르트를 중심으로 하는 대륙의 합리론자들이 주장했던 인간의 이성, 인간의 사유와 생각하는 능력이 지식을 얻는 방법이라는 주장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에 의하면 모든 갖난 애기들은 그 어떠한 지식도 가지지 않은채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애기들에게는 본유관념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애기들은 하얀 백지와 같은 상태로 태어난다. 그들은 마치 아무 것도 쓴 것이 없는 하얀 서판과 같다. Tabla Rasa다. 애기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경험을 통하여 지식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얀 서판에다는 그림을 그리고 글자를 쓰는 대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인간이란 백지와 같은 존재로써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모든 인식의 그림과 글씨가 그려진다고 본 것입니다. ‘짜다, 달다, 쓰다, 시다’는 맛은 먹어보아야 알 수 있고 그런 경험을 반복함으로 ‘이것은 달고 저것은 쓰다’는 지식이 형성된다는 주장입니다. ‘밝다, 어둡다, 검다, 희다, 딱딱하다, 부드럽다’고 하는 지식도 이런 감각적 경험의 축적을 통하여 주어지는 지식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처음부터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동일하게 발견되는 보편적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지닌 지식이란 개별적 경험을 통하여 하나씩 하나씩 쌓여지고 만들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지식이란 경험을 통하여 습득되는 것이지 이성적 사유를 통하여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그의 입장이었습니다. ‘맞지 않으면 절대로 아프다는 것을 모른다. 데지 않으면 절대로 뜨거운 것을 모른다. 아파 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로크의 경험론입니다. 그러나 로크는 이런 ‘감각적 경험’이 지식으로 가는 첫 발이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반성을 통한’ 지식의 형성을 이야기합니다. 경험은 어떤 대상에 대한 표면적 지식은 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반성적 지식’이란 ‘감각적이며 단순한 지식’을 넘어서서 ‘대상을 종합적으로 보고 전체적으로 인식하고 구별해서 판단’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단순한 감각적 인식은 ‘달고 쓰고 짜고 맵고 밝고 어둡고 검고 흰 것’을 개별적으로는 인식하게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 사이에서는 왜, 어떻게 각각 다른 차이들이 생겨나게 되는지는 개별지식을 넘어서는 복합적 지식이 필요하고 그것은 오직 ‘반성’(회상, Reflection)을 통해서 알려진다는 것입니다. 로크에게 있어서 반성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개별적 경험들을 비교하는 것이며, 그것이 쓴 맛이 나고 단 맛이 나고, 또 희게 보이고 검게 보이는 원인과 이유를 생각하는 것이며 사유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는 데카르트가 말한 이성과 성찰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로크의 경험론적 인식론을 요약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1)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어떠한 지식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생득적 지식이란 없다. (2) 이성적 지식이나 관념적 지식은 받아드려서는 않된다. 그런 것들은 지식이 아니라 상상, 꿈, 이상이라고 불러야한다. (3) 모든 인간의 지식은 습득관념이고 학습된 지식이다. 인간의 지식과 인식은 추상적 사유나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경험을 통해서 생겨난다. 경험을 넘어서는 지식이란 없다. (4) 그러나 인간의 단순한 경험적 지식은 결국 반성적이며 사유적인 ‘복합적 지식’과 함께 이루어진다.
3) 칸트를 중심한 비판적 인식론
이상에서 본대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치를 중심으로 하는 대륙의 합리론자들은 ‘이성을 통한 인간 지식과 인식’을 펼쳐나갔고, 로크와 버클리와 흄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경험을 통한 인간 지식과 인식’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피차 상반되는 두 가지 인식의 방법론에는 제각기 한계와 단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후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 둘을 모두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선험적 관념론’을 제시하게 됩니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같은 명저를 통하여 칸트는 인식에 대한 그의 ‘비판철학’을 세우게 됩니다. 우리는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온 칸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별도로 공부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나가는 말
역사는 다른 생각과 주장과 입장이 있음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늘 독단론을 경계합니다. ‘통일된 하나의 생각이나 주장’이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또 무엇이든지 ‘독점하려고’ 해서는 않됩니다. 철없는 갓난 애기들이 엄마를 독점하려고 하듯이 철없는 종교인들이 하느님이나 진리를 독점하려고 하면 세상은 자꾸만 더 불행해 집니다. 앎의 한계, 지식의 상대성은 물론이고 그것을 얻는 방법에서도 이성론과 경험론은 우리 모두를 늘 겸손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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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