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서에 나타난 신학적 성찰과 사회적 적용
본서는 룻기에 나타난 신학적인 연구는 한 제목을 가지고 있는 논문이다. 1부에서는 룻기의 신학적 성찰, 그리고 2부에서는 룻기의 신학적 성찰과 사회적 적용이 될 것이다_편집자 주
1. 서론: 룻의 이야기
룻이란 여성 이야기를 다룬 룻기서는 상식을 뒤엎는 책이다. 주요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등장인물부터가 그렇다. 주인공 룻은 모압 여자이고 시모 나오미는 이스라엘 여인이다.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선민사상 탓에 두 민족은 절대 결혼을 안 했는데, 두 여성이 가족이 됐다는 데서부터 예사롭지 않다. 게다가 이방 여인 룻은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갖지 못했던 신앙과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룻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유다 다윗의 혈통인 보아스와 결혼하여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꼽히는 다윗왕의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이야기는 만남에서 시작된다. 그 만남부터가 우연이 아니다. 모압과 베들레헴이란 다른 지역에 살던 나오미와 룻이 가족으로 맺어진 건 당시 이스라엘 지역을 휩쓴 기근 탓이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양식을 얻으러 인근 지역 모압으로 떠나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이들 가운데 에리멜렉과 나오미 부부가 있었다. 그들이 기근을 피해 모압 지역으로 이주하여 한동안 살았지만 남편도 세상을 떠났고 두 아들이 모압 여인과 각각 결혼하였지만 두 아들마저 죽게 되었다. 과부 시어머니가 과부된 모암 며느리를 데리고 고향땅 베들레헴으로 되돌아온다. 사회적으로 가장 불행하게 된 여인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룻기서가 세 명의 주인공, 나오미, 룻, 그리고 보아스의 이야기를 빌려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숨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적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인간의 행복과 비극 전체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기근과 죽음, 고독과 스스로 택한 객지 생활, 이민과 나그네의 삶의 역사, 곧 사회적 약자가 된 이 모든 역사과정중에 하나님은 그의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그들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은 룻이다. 특히 그녀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나오미를 따라 나섰다는 점은 놀랍다.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빈털터리가 된 나오미는 형편이 좋지 못했을 것이다. 룻에게 친정으로 돌아 가라라고 권했던 이유를 봐도 그렇다. 하지만 룻은 “어머니가 유숙하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며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간다.
선민사상을 부여잡고 살아온 유대민족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나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의미를 룻기서 주인공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2. 본론: 룻기의 신학적 성찰
2-1. 유대주의를 넘어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와 사랑
먼저 유대주의가 형성된 배경을 살펴보자. 바벨론 포로 이후,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70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허물어진 조국을 건축하는 동시에 유대주의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느헤미야는 이방 여인과 결혼을 금지하고(스 10:6-44, 느 13:23-27), 철저하게 안식일을 준수하게 하여 민족적 결속을 다졌으며, 선택 받은 선민의식을 고취하여 흩어진 유대인들을 단결하게 하였다. 에스라는 유대 공동체를 재건하려고 율법도 정경화하였다(느 8:7-8).
유대주의가 이데올로기 성격을 지닌 신념체계로 형성되면서, 이스라엘 이외 국가를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국가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율법주의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편협한 신관을 가지게 되었다. 사마리아인들을 ‘개’라고 비하하며 적대화한 것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신명기 법전에 따르면, 암몬과 모압족속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신 23:3-6). 모압국가가 바로 룻기의 배경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지나면서 율법학자, 바리새인, 사두개파 그리고 제사장들은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재건하려는 율법 체계를 통해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을 율법의 노예가 되게 하였다. 예수님은 유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기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있지 사람이 안식을 위해 있지 않다”고 도전한 이유이다(막 2:23-28).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율법 체계 속에 가둬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법률적 하나님이 되게 하였다. 이러한 신앙체계는 그들이 기다린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처형하기에 이른다. 예수의 복음은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었으며,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었다(마 5:38-48).
룻기는 이러한 유대주의 전통과 대립되고 있다. 학자들은 특별히 브루그만 교수는 룻기의 기록 연대를 4세기 이후 편협한 유대주의를 강화한 에스라, 느헤미야의 종교개혁 이후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지적하기를 “유대 선민의 기득권과 정통성를 가지고 있던 보아스가, 이방 여인 그것도 모압 여인 룻과 결혼하므로 이방여인과의 결혼금지법에 도전하게 하므로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universal)을 드러내게 한 것이다”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방 모압 여인도 용납하시는 하나님이다. 나오미의 하나님은 모압 여인 룻의 하나님도 되신다. 다윗 왕국은 이방인도 용납되는 보편적 왕국이다. 다윗의 족보에는 이방 모압여인도 함께하는 왕국이다(룻 4:18-22).
유대주의 사상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메세지와 유대주의 사상의 계승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제사장 그룹들과 끊임없이 충돌한다. 유대주의 옹호자들은 하나님을 죄인을 용납지 않으시고 벌하시며 율법을 통해 드러내시는 분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사랑은 죄인과 의인들에게도 똑같이 내리는 태양의 빛과 같으시다(마 5:45).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회적 변두리 인간들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마 9:13).
2-2. 유대주의 응보사상을 수정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룻기에서 보여주는 깨어진 인간들의 모습은 율법학자들의 견해로 보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있다고 정죄한다. 유다를 버리고 이방으로 이주한 것이 죄이고, 이방신을 섬기는 문화권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한 것이 죄이다. 유대율법학자들은 그들을 그렇게 정죄할 것이다. 남편과 자녀들을 잃은 나오미, 과부가 된 룻은 의지할 것조차 남지 않은 가장 불행한 변두리 인간, 불행한 인간들이 되었다. 유대주의 시각에서는 축복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룻기는 이런 시각을 수정한다. 숨어계신 하나님은 깨어진 이들의 삶을 회복하고 계셨다. 사사기의 하나님은 뛰어난 사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용맹을 드러내신다. 그러나 숨어계신 하나님은 룻기에서는 연약한 여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나오미는 욥기서에 나오는 욥과 같은 고난 중에 있는 모습이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응보사상에 의거하여 해석하여, 하나님은 의인을 축복하고 죄인을 벌하시는 분이시라고 한다. 물론 하나님은 이런 면이 있으시다. 그러나 착하면 축복하고 의롭지 않으면 벌하시는 차가운 하나님은 아니시다. 욥은 고난 중에서 응보 사상을 넘어서 고난 받는 자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였다. 룻기는 이러한 고난받는 여성들을 등장시켜 하나님은 약자를 보호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룻기에서 하나님은 숨어 계시나 오히려 이방 여인 룻을 등장시켜 나오미를 위로하신다. 며느리 룻은 가장 외로운 시어머니가 된 나오미와 함께 하겠다고 믿음으로 고백한다. 외로운 자와 함께 하며 길동무가 되어 주겠다고 말한다. 나오미가 절망하며 믿음에 있어서 좌절하였을 때, ‘어머님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 될 것’(룻 1:16)이라고 말하며, 신앙을 회복할 수 있게 용기를 북돋아준다.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와 격려가 되었을까? 룻기에서 보여준 하나님, 곧 이스라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고난받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엠마오 도상에서 지치고 슬픔 가운데 있던 제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그리스도의 모습과도 같으시다. 숨어계신 하나님은 오히려 룻기의 주인공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행동을 통해 말씀하신다.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약자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라고 질문하게 된다. 여전히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삶을 통하여 말씀하고 그들과 함께 계시였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는 이방인을 용납하지 아니하였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직면한 고민은 유대주의를 극복하고 예수 공동체가 이방인을 받아드릴 수 있는가였다. 이 대답을 보여 준 것이 사도행전 10장과 11장이다. 이 장들에서 고넬료가 이방인으로서 첫 기독교인이 될 때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신다. 유대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금지하고 있는 동물들을 잡아먹으라는 환상이 보여 베드로가 말하기를 “저는 유대인으로서 추한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고 말할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내가 깨끗게 한 것을 네가 더럽다 말고 용납하여 먹으라”하신다(행 10:15).
인간의 편견과 오만, 용납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용납하여, 기독교 공동체에 받아드리라 하신다. 마음에서 수용하고 용납하라 하신다. 이 환상 사건 이후에 고넬료가 첫 이방인으로서 세례를 받게 되며, 기독교가 이방인들을 위하여 문을 열게 된다. 사회적으로 여인들이 용납되고 상하귀천 없이 민중과 양반이 함께 성찬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될 수 있다.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며, 남편과 아내가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여 사랑하고 돌봐주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인격을 존중하는 사랑의 관계로 한 가정에서 살아간다. 곧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으니 잡아먹으라 하신다.
룻은 이방 모압 여인 하나님의 회중에 들어올 수 없는 깨끗지 않은 여인이며(신 23:3), 남편이 일찍 죽은 팔자가 매우 드센 여인이다. 유다 순수 족보 계열을 보존하고 있는 가문과 베들레헴에서 부호이며 기득권자였던 보아스가, 이 천하고 율법으로 금지된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유대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한 것은 유대공동체에 엄청난 도전이요, 변화를 예견하고 있다. 이런 결단에 보아스는 고민과 갈등을 하였을 것이다. 친척들은 모두 용납할 수 없어, 기업 무를 자가 되기를(4:1-6) 포기하며, 룻을 책임지기를 거절하였다. “기업 무를 자”란 구약에서 가난한 혈족의 땅을 사줄 자(레 25:25-26), 혹은 가까운 친척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과부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주어 기업을 상속케 하며(신 25:5-10), 친척이 노예가 되면 돈을 지불하고 해방시켜 주는 책임(레 25:47-49)도 있는 제도이다.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며 경제적 책임을 보여주는 제도일 수 있다.
기업 무를 자의 제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룻기서에서 룻의 죽은 남편의 친족들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보아스는 기꺼이 기업 무를 자가 되기를 자처하였다. 비록 룻이 이방여인이지만 사랑의 깃으로 그녀를 덮을 것을 결심하였다(룻 2:15). 하나님이 깨끗게 하셨으니 용납하고 사랑해야 하며,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수용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보아스의 역할은 유대 전통을 지키면서 율법주의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은혜의 포용성을 가지고 새 공동체를 창조하는 선구자로 바뀐다. 이 과정에서 숨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더 이상 유대 국수주의를 변호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분의 은혜와 사랑의 무한함은 사회적으로 율법적으로 버려진 모압여인 룻까지도 포용하시는 무한한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나오미의 역할도 시어머니의 역할에서 중매자의 역할로 바뀌어 이방인을 과감히 다윗의 반열로 이끌어 올려 세우는 일에 하나님과 동참한다. 슬픔과 상처를 씻겨 주시고, 그녀를 정당한 선민의 일원으로 살아가도록 세우고 계신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여성신학자들은 가부장사회에서 스스로 미래를 창조하는 여성들의 용기를 보게 된다고 찬사를 보낸다.
2-3.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숨어계신 하나님은 나오미를 통하여 새 역사의 지평을 열고 계셨다. 다윗의 왕국 메시야의 왕국에서는 기득권자도, 천인도, 유대인도 이방인도, 고난받는 이도, 의인도, 여인도 남자도, 과부도 시어머니도 모두가 메시야의 왕국 건설에 참여할 자들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룻기서가 사기와 왕국사의 시작인 사무엘상의 중간 사이에 배치된 이유는 이처럼 새로운 역사의 장를 열고 있어서이다.
불행한 사람들을 통하여, 타작마당에서 이삭줍는 여인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회 계층을 넘어 다윗의 역사를 창조하시고 계셨다. 이런 하나님의 이해는 배타적인 유대주의 전통의 시각을 뒤어넘어 사랑의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칠칠절기(맥추절 혹은 오순절이라고 함)에 룻기 이야기 읽기를 즐겨하였다. 유월절 후 7일이 일곱 번 지난 후에 온다는 의미로 칠칠절이라 하지만 추수감사절에 해당된다.
신명기에 의하면(신 16:9-11) 이 명절은 노비와 이방인들, 과부와 고아들, 사회적으로 소외자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함께 나누며 즐거워하는 명절이다. 유대 민중들은 칠칠절기에 이방여인 룻을 구원하시고 높이시여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상기하며, 사회적 소외자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웠으며 이방 땅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 룻을 돌보시듯 그들을 돌봐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룻기에서 보아스는 더 이상 기득권과 배타적 유대주의를 옹호하는 속좁은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의 기득권을 불행한 이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는 새로운 이념을 행동하는 사상가로 묘사하고 있다. 야곱의 축복인 유다혈통의 축복까지도 이방여인과 나눌 수 있는 희생적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보아스의 희생적 사랑에서 배타적 유대주의는 무너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새롭게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세워져야 한다고 행동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는 희생은 새 이스라엘의 가능성을 앞당겨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성을 가진 희생적 사랑과 모성을 가진 희생적 사랑의 근원이 되는 사랑이시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다”(요한1서 4:8)라고 하였다. 부성도 모성도 사랑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존할 때 참된 사랑이 된다. 율법주의에서 소외된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함께 누리는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시는 숨어 역사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3. 신학적 성찰과 사회적 적용
3-1. 다문화 수용의 의식전환
룻기서는 여성을 주제로 한 구약성서로써 사사기 다음으로 이어지는 역사서 사무엘서와 연결되어 있다. 이 작은 책은 4장에서 다윗왕의 족보로 마무리되어 있다. 룻은 보아스와의 결혼을 통해 이방여인이 다윗왕의 족보에 들어오게 된다. 숨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깨여진 삶을 경험한 룻을 다시 세워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게 하시었고 그 줄기에서 다윗왕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룻기가 보여주고 있는 기근과 죽음, 고독과 스스로 택한 객지 생활, 이민과 나그네의 삶의 역사, 곧 사회적 약자가 된 이 모든 역사과정 중에 하나님은 그의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룻과 함께 계셨다.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빈털터리가 된 나오미는 과부가 된 며느리 룻에게 친정으로 돌아 가라라고 권했다. 룻은 “어머니가 유숙하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며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간다. 모압여인 룻과 유대인 보아스와의 결혼은 유대전통을 넘어 국제결혼의 신학적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들의 결혼은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며 성공적인 결혼이었고 다윗가문의 혈통을 형성하였다.
2016년 한국통계청에 의하면 한국인이 외국인과의 결혼은 총 20,591건으로 되어있다. 국적으로 보면 베트남, 중국,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 등의 순서로 동남아 지역으로 되어있고, 북미, 유럽국가들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사회는 국제결혼, 그리고 직업을 찾아 한국에 입국하는 많은 근로자들을 통하여 다문화와 이중문화의 정체성을 경험하게 되었고, 다문화의 정책의 절실함을 알게 되었다.
이와같은 사회적 변화는 우리가 단일민족 관념에서 다문화 수용이라는 의식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룻기에서 문화, 전통 타민족을 유대공동체에 수용하는 것은 유대민족의 의식전환의 시작이며 ‘다윗왕국의 새로운 싸인’(a sign of David’s Kingdom)이 된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후에 신약서는 다윗왕국은 예수가 선포한 하늘나라의 모습을 예견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다문화는 하늘나라 싸인(sign)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한국사회와 교회안에 동남아시아인들이 그리고 다문화의 가정들이 존재하는 것은 하늘나라의 모습을 앞당겨 보여주는 싱징 곧 싸인을 앞당겨 경험하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곧 신앙의 공동체는 다양한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이다.
3-2. 기득권자 보아스와 하나님의 사랑
지난 호에서 신학적 고찰을 살펴보았듯이 룻기는 철저하게 사회적 변두리 사람들의 이야기다. 기근에 의한 고향을 등지고 떠난 난민을 등장인물로 시작하여 그들이 모압에서 겪게 되는 비극적인 시련과 고난의 이야기다. 나오미가 말하고 있듯이 나를 이제 비극의 사람 “마라”라고 부르라 한다(룻 1:20).
당시 유대 사회적 배경에서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1) 사회적으로 기근과 국난을 경험하면서 유대에 남아 어려움을 견디며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과, (2) 타국으로 떠났다가 국내경기가 회복되면서 다시 모국으로 되돌아오는 사람들 그리고, (3) 타국에서 외국인과 결혼하여 가족을 이루고 살다가 귀국한 사람들이다. 유대에 남아 기득권을 가지고 있든 이들이 조국으로 역이민(逆移民)하여 되돌아 온 이들을 환영할 리가 없었다. 그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부류에 속했던 사람이 보아스였다. 기득권자의 하나님은 가부장적 하나님이셨다. 남성중심, 가부장적 기득권자의 하나님이셨다. 이스라엘 하나님은 기득권자들의 하나님이셨다.
한국사회에서 이민자, 망명자, 난민들, 조국을 떠난 이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소외자들이다. 타작 뜰에서 보리 이삭을 주워 모아 삶을 영위하듯 본국인들이 하기 싫어하는 “더러운 직업(dirty industry)”에 종사하는 사람들 모두 이들은 룻과 나오미들이다. 사회적 변두리인들이 이들뿐이겠는가? 사회적인 고아들, 과부, 병든 이들, 부양받을 이 없는 노약자들 과 노숙자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모두 사회적 변두리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한국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그리고 종교적 기득권자들은 마음을 열고 이들을 돌볼 책임이 있다.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정의와 인도주의적,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숨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이러한 제도의 개선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기를 원하고 계신다.
한국사회의 유교적 구조속에서 하나님은 가부장적 하나님이 되시었다. 여성은 교회에서 사회에서 소외대상이었다. 목사안수와 장로안수가 제외된 교단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한국교회 구조가 가부장적 권위 중심적인 것은 유교적으로 여성을 소외시킨 가부장적 하나님의 이해 때문이다.
룻기에서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이해를 달리하고 있다. 하나님은 상처난 여성들을 싸매주시고, 이들을 다윗왕국으로 인도하시는 여성의 하나님도 되신다. 룻이 고백하고 있듯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룻 1:16).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룻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룻의 고백은 가부장적 하나님이 아닌 소외된 여성들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다. 모성적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은 경제적 가치를 가난한 여성들과 함께 나누시는 사랑의 보편성을 룻기를 통하여 보여주고 계시다.
3-3. 보아스의 역할로서 한국교회와 조국의 미래
모압은 하나님의 회중에 들어오지 못한다. 신명기적 선언이다(신 23:3-6). 모세는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모압인들을 통하여 아픔을 준 경험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였다. 그러나 룻기에서 근동 제국에 몰고 온 기근이 이런 법령에 숨통을 트고 화해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기근이 나오미 가족으로 하여금 모압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고, 다시 베들레헴의 풍년을 암시하는 “추수를 시작할 때”라는 소식이 나오미로 하여금 고향을 생각하게 하며 조국으로 되돌아오게 한다(룻 1:22).
기근의 역사는 창세기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야곱의 형제들이 요셉을 애굽 상인들에게 종으로 팔아넘기고 아버지 야곱을 속인지 10여년이 지난 후 애굽과 천하에 기근이 든 것이 계기가 되어 양식을 구입하러온 형들과 요셉이 화해하는 실마리를 주게 된다. 하나님은 기근을 야곱가문의 화해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기근의 와중에 양식을 구입하러온 형제들에게 요셉은 양식을 원수갚음의 무기로 사용하지 아니하고 화해의 수단으로 사용하게 하신다.
룻기에서도 가뭄과 기근의 현장에서 양식을 구하러 모압으로 간 후 다시 그후 깨여진 생의 모습으로 양식을 찾아 다시 돌아온 나오미와 룻을 따뜻이 맞이한 보아스가 있었다. 그들에게 자기의 타작마당에서 이삭을 주워 양식을 마련하도록 돕는다. 모압에 대한 배타적 감정을 가지고 있던 당시 사회상황에서 모압여인이었던 룻을 돌보며 아내로 맞이하여 하나님의 회중에 들어오도록 문을 연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으로 양분된 한국 상황에서도 우리는 룻기에서 배울 것이 있다. 북한의 기근, 그리고 남한의 경제적 부흥, 최근에는 유엔의 경제적 제제(economic sanction)로 인한 북한의 극심한 어려움과는 다르게 남한은 세계 경제수준 11위, 국민소득 3만불이 넘는다. 탈북인들이 한국을 찾아 생사를 넘어 한국을 찾아온다. 나오미와 룻처럼 조국을 찾아온다. 한국사회는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고 그들을 우리의 공동체에 받아드려 따듯이 돌봐줘야 한다. 남북이 하나되는 전초적인 경험을 가지게 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남북의 핵무기 경쟁이 세계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듯 양식의 봉쇄가 결코 남북간의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북한의 핵이 남북통일도 주변국가의 공공유익(common good)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처럼 경제를 재제하는 일이 핵무기를 무력화시킬 무기가 되지못하며, 주변국가의 공공유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성서적인 관점에서 기근중에 양식을 찾는 기회는 원수 갚음의 기회가 아닌 화해와 용서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남북통일은 남북간의 어떠한 체제로도 현재는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느 한 체제의 승리가 주변국가의 공공유익(common good)을 가져온다고 중국이나 러시아가 그리고 미국이 각각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통일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가? 미래 통일이 모든 주변국가에 유익하고 또한 남북간에 만족할 만한 통일의 길은 없는가 하는 질문이다.
한국교회는 미래 통일 조국을 위하여 보아스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 적대감을 넘어 사랑으로 품는 일, 그리스도 안에서 인내하며 하나님의 희년이 우리의 조국에 임하도록 기도하며 기다리는 일이다. 기근을 화해의 도구가 되도록 한국교회는 지혜와 믿음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 양식이 결코 원수갚음의 무기가 될 수 없다. 보아스가 없는 베들레헴은 나오미와 룻에게는 공허했을 것이다. 룻없는 보아스도 다윗의 계통를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보아스의 역할을 하며 남북통일이 오기까지 끈질기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꾸준히 노력하여 남북이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길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국에 부흥하는 교회을 세우신 것이다.
4. 결론: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한 용감한 사람들
룻기에서 보여주는 숨어 계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상처를 치료하여 새롭게 인간을 세우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보아스가 그러했고, 나오미가 그리했으며, 룻이 그러했듯이 이 세상에서의 우리 역할은 우리의 삶과 인격, 마음과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이다. 인간의 상처를 치료하며, 사회의 상처를 치료하는 하나님 사랑의 사역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나오미, 룻 그리고 보아스는 사회에서 곧 “나”의 역할이다. 곧 “나(I)”로부터 “가정(family)”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 역할은 문화와 사회, 전통과 인종, 그리고 젠더(남성 여성)를 넘어 인간 공동체에 하나님의 사랑이 투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다윗의 왕국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성된다. 이를 위하여 나오미, 룻 그리고 보아스 같은 헌신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교회는 나오미 처럼, 때로는 룻처럼, 때로는 보아스 처럼 조국의 미래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룻기서는 숨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기 위해 이념, 전통, 문화, 민족을 넘어 위대한 신앙과 대담한 용기를 보여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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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하 겸임교수(아이오나콜럼바대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