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세노폰 (Xenophon, BC 431 ~ BC 354)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크세노폰(고그: Ξενοφῶν, 그:Ξενοφών, Ξενοφώντας, 기원전 430년경 ~ 354년경)은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 및 저술가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써, 플라톤과 동문수학한 사이이다[크세노폰, 이은종 역,”키로파에디아” 2012, p.16]. 크세노폰은 그가 살았던 기원전 4세기에 대한 역사와 소크라테스의 말, 고대 그리스의 생활사에 대한 기록을 남겨 유명하다. 그는 기원전 5세기 말과 4세기 전반에 정계와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스파르타 임금 아게실라오스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과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크세노폰, 천병희 역, “아나바시스” 2001, p.7].

– 크세노폰 (Xenophon)
.Born: 431 BC, Erchia
.Died: 354 BC, Thrace
.Full name: Xenophon of Athens
.Children: Gryllus, son of Xenophon
그의 저서들 가운데는 철학으로도 역사학으로도 분류할 수 있는 저작이 상당한데, 실제로 그는 고대에는 일차적으로 철학자, 그 다음으로는 역사학자로 간주되었다[크세노폰, 천병희 역, “아나바시스” 2001, p.7]. 그는 자신의 조국 아테나이에서 추방되어 스파르타와 가까이 지내며 중간 입장에서 남다른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따라서 자신이 살던 급변의 시대를 직시하는 보기 드문 통찰력을 갖출 수 있었다[크세노폰, 천병희 역, “아나바시스” 2001, p.7].
그 후 소아시아에서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귀국 후 엘리스에서 은퇴하였다. 저작으로는 《헬레니카》, 《아나바시스》, 《소크라테스 회상》, 《키로파에디아》 등이 있다.
○ 생애
– 용병 생활
크세노폰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학자들 대부분은 그가 기원전 430년경 아티케의 도시국가 아테나이 근처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Encyclopedia Brittanica History of Xenophon]. 크세노폰은 상류층 출신이었으면 고대 아티케 귀족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기원전 401년 젊은 시절에 크세노폰은 키루스(Cyrus the Younger)가 자신의 형인 아케메네스 제국 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대항하는 원정길에 떠났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키루스의 원정에 참가해야 할지를 놓고 아테나이 출신의 소크라테스에게 물었는데,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탁에서 신과 의논해 볼 것을 권하였다. 그래서 크세노폰은 그리로 가서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여행을 성공적으로 잘 마치고 목적을 달성한 뒤 무사히 돌아오기 위해서는 어떤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기도드려야 하는지 아폴론 신에게 물었다[크세노폰, 천병희 역, “아나바시스” 2001, p.86]. 그러나 아폴론은 그가 어떤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하는지 알려주었다[크세노폰, 천병희 역, “아나바시스” 2001, p.86]. 크세노폰은 돌아와서 소크라테스에게 예언을 말해주었다[크세노폰, 천병희 역, “아나바시스” 2001, p.86].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듣고, 그가 여행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머무는 것이 좋은지 먼저 묻지 않고 여행하기로 혼자서 결정하고는 어떻게 여행하는 것이 가장 좋겠는지 물었다고 그를 나무랐다[크세노폰, 천병희 역, “아나바시스” 2001, p.86]. 그래서 크세노폰은 아폴론이 알려 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나서 배를 타고 떠나 키루스에게 갔다[크세노폰, 천병희 역, “아나바시스” 2001, p.86].

대왕의 동생인 키루스는 팃사페르네스와 싸운다는 핑계로 페르시아 인 병사로 구성된 거대한 군대를 모았으며, 거기다가 그가 페르시아 병사보다 뛰어난 전사라고 여겼던 헬라스(그리스) 군대도 모았다. 대왕에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키루스는 피시디아 사람들이 전쟁 상대라고 공언하였으며, 헬라스 사람들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어마어마한 군대와 싸우게 될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 타르소스에서 헬라스 병사들은 키루스가 대왕을 몰아내려고 원정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키루스를 따르는 데 거부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 출신의 클레아르코스가 헬라스 사람들을 설득하여 계속 원정대에 남았다. 키루스의 군대는 쿠낙사 전투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헬라스 군대는 선전하였으나, 키루스는 전사하고 만다. 그러자 얼마 안되어 클레아르코스 장군이 네 명의 다른 헬라스 장군과 함께 휴전 회의에 초대받았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이들을 배신하고 장군들을 참수하였다. “일만 인”으로 알려진 이들 헬라스 용병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심장부와 가까운 적대적인 내륙 한가운데서 지휘자도 없이 버려졌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크세노폰을 비롯한 새로운 지휘관을 뽑았으며,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쿠르드를 지나 북쪽으로 흑해 연안의 트라페주스로 진군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용병대는 서쪽으로 가 고국 그리스로 귀환하였다. 그 곳에서 용병대는 스파르타의 티브론 장군의 군대에 들어가 세우테스 2세가 트라케의 임금이 되는데 도왔다.
크세노폰이 쓴 《아나바시스》(‘올라가기’라는 뜻[키루스 2세가 군대를 거느리고 저지대인 소아시아의 해안지대에서 쿠낙사 전투가 벌어진 티그리스 강과 에우프라테스 강 사이의 고지대로 행군한 것을 의미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기원전 3세기 전반)는 그의 크세노폰 저서 목록에서 ‘아나바시스’란 표현을 쓰고 있다. 크세노폰, 천병희 역, ‘아나바시스’, 단국대학교출판부, p.10~11])는 그가 페르시아로 원정을 떠났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여정을 담은 자신이 쓴 기록이다. 이 저서는 후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원정을 떠날 때 지리서로 쓰였다.
– 망명과 죽음
나중에 크세노폰은 아테나이에서 추방되었는데,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 임금 아게실라오스 2세밑에서 아테나이와 싸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페르시아인을 위하여 복무했을 뿐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지지하는 등 다른 이유도 한몫하였을 것이다) 아나바시스에서 그가 쓴 바에 따르면 스파르타 사람들은 엘리스의 올륌피아 근처 스킬루스의 토지를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크세노폰 생전에 아들 그륄로스가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나이를 위해 싸우다 죽자, 추방 조치가 취소되었을 것이다. 크세노폰은 코린토스나 아테나이에서 죽었다. 그의 사망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역사가들은 그가 자신의 후원자 아게실라오스 2세의 찬사를 써서 그를 구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다.
○ 저작

《아나바시스》(페르시아 원정기),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2011
《키로파에디아》(키루스의 교육), 이은종 역, 주영사, 2012.
《헬레니카》(그리스 역사), 최자영, 아카넷, 2012
《소크라테스 회상》, 최혁순 역, 종합출판범우, 2015
○ 부록 : 저작들
-《아나바시스》(페르시아 원정기),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2011
아나바시스(Anabasis)는 고대 그리스의 군인이자 작가인 크세노폰의 저작(전7권)이다.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 다리우스 2세의 아들인 키루스(Cyrus the Younger)는 그의 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 왕위를 다투기 위해 그리스 용병을 고용하였다. 전투에서 키루스가 전사하자 그리스 용병 부대는 크세노폰의 지휘 하에 흑해 연안으로 나와 그리스로 귀환한다. 크세노폰은 이 때의 이야기를 아나바시스에 기록하였다.

-《키로파에디아》(키루스의 교육), 이은종 역, 주영사, 2012.
키루스의 교육(Cyropaedia)은 키루스 2세 대왕의 일대기에 대한 크세노폰의 저술이다. 헤로도토스 등의 기록과는 크게 상반되는 점이 있는 저술로, 크세노폰의 정치철학적 견해가 키루스 2세에 대한 역사 기록과 이 저술의 내용이 상반되는 지점에 드러나 있다.
.체제와 내용
키루스 2세 대왕을 이상적 군주로 그려내기 위해 크세노폰이 키루스 대왕의 일대기를 재구성한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8권으로 이뤄진 이 저술은 크세노폰 전집에서 가장 긴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각 권별 내용
고대 그리스의 저술은 저술이 수록되는 두루말이의 ‘용량’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 권의 구별이 지금 통상적으로 보는 것보다 작은 경우가 많다. 한국어판에서 각 권의 분량은 약 50~60쪽 분량이다. 각 권의 제목은 한국어판에 따랐다.
1권: 키루스의 어린 시절
크세노폰의 동기는 다음과 같이 첫 머리에 서술되어 있다. “그의 출신이 어떠하며 본성적 자질이 어떤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교육을 받아서 사람을 다스리는 데 그토록 탁월했는지 조사했다(1.6).” 여기서는 페르시아인이 일생동안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활동을 하게 되는지를 다룬다. 이는 청년기의 귀족 남성이 밤에 공공건물을 지키는 등 절제와 의무를 강조하는 교육과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스파르타의 엄격한 교육 내용과 흡사하였으나 그처럼 잔혹한 면은 없다. 크세노폰에 의해 이상화된 교육 내용으로 보인다. 이어서 키루스는 12세부터 외가인 아스티아게스의 메디아에서 자랐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가 16세쯤 되었을 때 아시리아의 왕이 그의 아들의 결혼식을 위해 쓸 사냥감들을 구하기 위해 메디아 국경을 넘어 군사행동을 취했고, 그에 대응하여 키루스는 첫 전투를 치렀다고 한다. 전투 이후 페르시아로 돌아온 키루스는 청년반 활동을 하게 될 때까지 페르시아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때 아시리아는 세력 확장을 위해 메디아를 침공하려고 하였다. 메디아에서는 아스티아게스가 죽고 그의 아들이자 키루스의 외삼촌인 키악사레스가 왕이 되어 있었으며, 그는 페르시아에 원군을 청하고 키루스는 그 원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키루스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전쟁에서 귀감이 될 만한 원칙들을 듣는다.
2권: 군대의 재조직
메디아에 도착한 키루스는 평민 병사들에게 귀족 병사들과 동일한 무장을 지급하고 포상 경쟁을 붙였으며 5와 10의 배수로 병졸들을 묶어 편제를 만드는 등의 군사 개혁을 한다. 여기서 키루스는 전공의 보상에 관한 판관이 되어 있을 수 있는 비효율 및 평민 병사가 부당하게 취급되는 상황에 대한 대비를 하게 된다. 한편 여기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무장은 페르시아의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의 것이라고 한다. 인도의 사신이 등장하기도 한다. 곧이어 그는 이전에는 메디아에 공물을 바쳐오던 아르메니아가 그것을 끊어버렸다는 점을 지적하며 아르메니아 침공에 자원한다.
3권: 아르메니아와 스키타이 정복: 첫 번째 위대한 전투
키루스는 아르메니아를 진압하고 그 왕을 재판하게 되었다. 아르메니아 왕의 아들 티그라네스는 아르메니아 왕을 죽이려는 키루스를 말리기 위해 실제적인 힘에 의한 두려움은 가장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처벌이라는 논리를 편다. 이로써 아르메니아는 키루스의 동맹국이 되었다. 곧이어 키루스는 아르메니아인과 갈등 관계에 있던 칼데아인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아르메니아와 칼데아 양측을 중재함으로써 키루스는 칼데아 역시 동맹국으로 삼는다. 이후 진격해온 아시리아 군대와 그 동맹군을 키루스의 주도로 한 차례 격퇴하게 된다.
4권: 아시리아군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진지 점령
패배한 아시리아군은 퇴각하였다. 키루스는 지원자들을 이끌고 추가적인 원정에 나섰다. 아시리아 주변에 있던 기마 민족인 히르카니아인들이 그들에게 내투하였다. 그들의 도움으로 아시리아군을 적의 영토에서 또 다시 격파하였다. 이전까지 대부분 보병이었던 페르시아군을 키루스는 이 승리로 얻은 수많은 말과 기병에 익숙한 히르카니아인 및 메디아인을 활용하여 기병 부대로 변화시킨다. 기병 부대를 창설하는 결정을 위한 논의는 보병에 비교하여 기병의 우월함을 지적하는 글로 유명하다. 한편 키악사레스는 메디아인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키루스를 따라 나서자 메디아인들에게 복귀명령을 내리는데, 키루스는 여전히 키악사레스가 자신의 동맹이며 필요한 전력에서 메디아인의 비중이 크다며 이를 취소하길 요청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시리아의 장군 고브리아스가 현 아시리아 군주의 전횡에 의해 살해당한 아들의 복수를 위해 아시리아를 배신하고 페르시아군에 투항한다.
5권: 고브리아스와 가타다스
첫 머리에서는 키루스의 성적 절제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이어 지원자들이 그들의 뜻에 의해 키루스의 군대에 종군하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하여 결속력을 확실히 하고, 고브리아스의 영지로 진출한다. 5권에서 주된 전장은 아시리아의 영토이며, 주변 지역은 전쟁의 전개에 따라서 자주 약탈당한다. 고브리아스는 역시 아시리아 군주의 전횡에 의해 거세당하고 환관이 되었던 가타다스라는 인물을 포섭할 것을 제안한다. 가타다스는 계략으로 고브리아스가 동맹을 맺을 것을 이야기하였던 사키아 방면의 요새를 함락하여 바쳐 투항 선물로 삼았다. 이후 가타다스는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아시리아 왕의 공격을 받아 위기를 맞지만 키루스의 군대가 때마침 도착해 아시리아 왕의 군대는 퇴각하였다. 이후 키루스와 아시리아 왕은 부분적인 평화 조약을 맺어 농민들에게는 평화를 보장하였다. 이후 키루스는 시리아를 일부 장악하고, 곧이어 키악사레스와 직접 회동한다. 키악사레스는 키루스의 세력이 크며 메디아인마저 키루스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을 보고 침통해하지만, 키루스는 자신의 원정이 자신과 키악사레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고 메디아인들이 이전보다 그를 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어 키악사레스의 마음을 풀어준다.
6권: 대전투를 앞두고
회의를 통해 겨울과 적진 너무 깊숙이 들어온 것 때문에 나타나는 위협으로 인해 제기되었던 군대 해산안은 기각되었다. 한편 아시리아 왕이 바빌론을 버리고 리디아 방면으로 도주하였다고 전해져 왔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와의 결전을 위해 군사장비와 동맹국들의 결속이 강화되었다. 인도는 여기서 다시 등장하여 키루스와 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크로이소스가 키루스의 군대를 압도하는 규모의 군대를 이집트를 비롯한 수많은 동맹국에서 징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군에는 공포 분위기가 퍼진다. 키루스는 연설을 통해 그에 대한 대비책을 제시한다. 양 군은 서로 진격하였고, 크로이소스는 키루스의 군대를 포위하는 방식으로 포진하였다.
7권: 대전투: 사르디스와 바빌론의 함락
크로이소스와의 전투 끝에 키루스가 앞장선 측면이 붕괴되면서 키루스가 승리하게 된다. 곧이어 리디아의 수도인 사르디스를 함락하고, 크로이소스를 복종시킨다. 여기서 키루스는 함락 후 관습적으로 이뤄지던 약탈을 크로이소스의 권유에 의해 중지한다. 키루스는 이후 바빌론으로 향하면서 여러 민족을 복속시켰고, 이 과정 속에서 앞서 아르메니아와 칼데아 양측에 했던 것처럼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곳에서는 판관이 되어 내전을 진정시켰다. 키루스는 바빌론을 포위하여 아시리아군이 굶어죽기를 기다리는 척 하면서 바빌론을 관류하던 유프라테스강 물을 돌릴 준비를 했고, 바빌론의 축제일에 맞춰 물을 돌려 하도를 통해 성 안으로 잠입, 바빌론을 장악하였다. 이후 키루스는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8권: 제국의 건설: 키루스의 죽음
키루스는 거대한 제국의 행정 체계를 정비하였으며, 여기서는 2권에서 군대를 재조직할때 썼던 원리가 다수 전용되었다. 이후에는 키루스가 귀족들을 자신의 친구로 삼고 그들끼리도 친구가 되게끔 만들었던 방법을 서술하였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키루스는 영향력이 큰 시민들에게 자기들끼리 사랑을 나누게 하기보다 키루스 자신을 더 사랑하도록 만들려고 한 것(2.28)”이었다며 부정적 결과가 나타났음을 지적한다. 이어서 키루스의 행차가 신민의 존경을 이끌어내기 위한 기술로서 정리되었다. 또한 제사와 연회에서의 좌석 배정을 변경해나가는 것을 통해 귀족들의 명예를 조절하였다.
이후 키루스는 페르시아로 다시 여행을 떠나고, 메디아에서는 키악사레스의 딸과 혼인하게 되며 그것을 통해 메디아 전체를 상속받는다. 이는 헤로도토스의 기록과 매우 뚜렷하게 다른 부분이며, 이는 메디아의 군주로서도 키루스가 정통성을 얻게 하기 위한 장치다. 곧이어 키루스는 각 지역에 총독을 파견하여 그 지역에서 키루스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다만 성채 주둔군과 수비대의 지휘관은 키루스 수하에 그대로 있었다. 이후 키루스는 원정을 통해 문명세계 전체를 장악하였다고 한다. 그는 맏아들 캄비세스에게 왕좌를 넘겨 주었다. 유언에서는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영원한 신의 평가와 함께 부단히 이어지고 있는 인류의 평가도 중요한 것이라고 언급하여, 이 세계의 평가를 결국 의견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였던 플라톤과 대립되는 사고방식을 크세노폰은 드러내고 있다.
8장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키루스 사후 페르시아인들의 부패를 다룬다. 이 장이 후대에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한국어판에서는 제기하고 있다.
-《헬레니카》(그리스 역사), 최자영, 아카넷, 2012
헬레니카(고그: Ἑλληνικά, Helleniká)는 고대 그리스의 저술가 크세노폰이 쓴 역사서이다. 원저는 전7권으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이어, 기원전 411년부터 기원전 362년까지 약 50년에 걸친 그리스의 각 폴리스의 동향을 다루고 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27년간 계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4년)의 전 기간을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투키디데스의 기록은 기원전 411년까지의 설명에 그쳤기 때문 미완성으로 남았다.
크세노폰은 그 뒤를 이어 《헬레니카》(Hellenica)를 저술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한 설명을 완결하고, 그 다음에 기원전 362년 〈만티네이아 전투〉까지의 역사를 설명했다.
헬레니카는 크세노폰이 스파르타에 몸을 의지하고 있어서 그런지, 스파르타에 대한 설명이 호의적이고 객관성에 문제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스파르타의 적대자에 대한 무시, 경시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레욱트라 전투〉의 기술은 승리의 주역 에파메이논다스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에파메이논다스가 《헬레니카》에 등장하는 것은 그보다 더 이후이다.
-《소크라테스 회상》, 최혁순 역, 종합출판범우, 2015
소크라테스 회상(고그: Ἀπομνημονεύματα, 라: Memorabilia, 기원전 385?)은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에 대한 회상록이다.
메모라빌리아라는 라틴어 제목은 16세기에 붙여진 것이며, 그 이전에는 그리스어로 아폼네모네우마타라고 불리었다. 뜻은 모두가 ‘회상록’이다. 역사적인 소크라테스를 아는 데에 귀중한 문헌이다. 소크라테스는 한 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사실적(史實的) 자료는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소크라테스 회상》밖에는 없다고 하겠다. 그 중 크세노폰은 그가 본 그대로 소크라테스를 전하여 주고 있으나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심오한 경지에까지 파고들지 않은 점에서 플라톤보다 떨어진다.
내용은 전 4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권 최초의 2장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이고, 그 뒷부분은 착하고 아름다운 소크라테스의 인격을 사모하는 기념탑이라 하겠다. 제4권은 전부가 교육론으로서 제3권과 중복되어 있다. 계속해서 집필한 것이 아니라 띄엄띄엄 기록한 듯하다. 4권으로 나누어 장과 절을 매긴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학자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덕(德)은 지(知)라고 하는 근본 원리가 실천에 알맞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 우인(友人)의 가치는 절대적이어서 모든 재보를 능가한다는 우인론(友人論)을 말하고 있다. 효(孝)와 형제애(兄弟愛) 등과 신, 법의 문제, ‘불문(不文)의 법’ 등도 언급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