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그리스·터키 여행공부
제1차 세계대전과 갈리폴리 전투
1.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 대전(World War I, WW1)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전 세계의 경제를 두 편으로 나누는 거대한 강대국 동맹끼리의 충돌이다. 유럽인 6천만 명을 포함한 군인 7천만 명이 전쟁에 가담하면서, 민간인 사망자를 제외하고도 병사 천만여명이 사망한 역사적으로 가장 잔혹한 전쟁이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국인 영국, 프랑스, 세르비아, 러시아 제국(후에 이탈리아, 그리스, 포르투갈, 루마니아, 그리고 미국과 일본이 가세함)과 동맹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후에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가 가세함)가 서로 대항하여 전쟁 하였다.

– 시대 배경
.정치적 배경
프랑스혁명에서부터 자리잡은 민족주의는 점점 여러 가지 위험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대세르비아 계획(the Greater Serbia scheme), 프랑스의 보복운동(the revenge movement in France), 범게르만 운동(the Pan German movement)이었다.
범 슬라브주의는 러시아의 대외정책중 하나이며 슬라브 민족권(언어와 종교)이 단결하여 유럽세력에 맞선다는 정책으로 특히 발칸지역 슬라브민족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슬라브 언어 사용 국가들과 러시아 정교를 믿고 있는 국가간 협력 결속하자는 러시아 정책이다. 이들은 러시아가 서유럽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데 다른 슬라브족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발칸 반도에서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슬라브 민족의 독립을 적극 도와줄 것을 주장하였다. 범 게르만주의는 범 슬라브주의에 대적하는 민족주의로 독일을 중심으로 게르만 민족이 단결해 게르만 민족의 지배 영역을 확대하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제국주의 운동을 말한다.
이로 인해 러시아 정부는 발칸 반도에서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였고 결국 오스트리아와 친선 관계에 있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도와주게 되고,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범슬라브주의는 독일의 범게르만주의와 충돌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불씨가 되었다.
프랑스의 보복운동은 1870년 이래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의 패배를 보복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인 절대다수의 의견은 아니었으며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경제적 배경
19세기 말 국가들 사이에서 가장 첨예하게 경제적으로 대립된 국가는 영국과 독일이었다. 가장 많은 식민지와 해상무역으로 패권을 자랑하던 영국의 경제를 따라잡은 독일은 해군력도 강화하여 강한 독일들 주창하며 적극적인 식민지 정책을 시작하였다. 1880년부터 독일은 소아시아와 중동지방의 팽창 즉 근동지방 확장을 목적으로 베를린(Berlin), 비잔티움( Byzantium), 바그다드(Baghdad)를 연결(철도부설)하는 3B 정책으로 제국주의 확장정책을 벌였다. 이런 확장정책으로 다른 경쟁국들과의 마찰이 시작되고, 18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며 군비경쟁으로까지 확산되어 더욱 첨예화하였다.
독일은 프랑스와도 라이벌 관계였는데 양국은 모로코에서의 광산자원과 무역기회를 가지려는 문제를 놓고 대립하였다. 러시아는 콘스탄티노플과 터키의 몇 지역들을 탐내고 있었는데 독일과 오스트리아도 오스만제국을 그들의 상업구역으로 계획하고 있어서 독일과 러시아의 충돌도 불가피했던 것이다.
.외교적 배경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비스마르크는 보복을 두려워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정책으로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3제동맹을 결성하였으나 러시아가 터키 영토문제로 독일·오스트리아와의 불편한 관계를 가지면서 3제동맹은 무산되었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1882년 이탈리아를 다시 가입시킴으로써 3국동맹(the Triple Allance)을 결성하였다.
러시아가 프랑스와 이중동맹에 영국을 끌어들이면서 3국협상이 이루어지고, 유럽 강대국들은 3국동맹과 3국협상 두 진영으로 나눠 있었으나, 3국동맹은 이탈리아의 이탈로 약화되었고 3국협상도 처음에는 발달하다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병합에 대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간의 다툼으로 틈이 벌어졌다.
– 전쟁 발발동기
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제국주의 때문이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국민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게 최후 통첩을 내리면서 7월 위기가 시작되었고, 지난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국제적 동맹끼리 서로 연결되어 전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속으로 들게 하고 곧 이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 전쟁의 진행 과정*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 :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 암살 사건
7월 5일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의거해 개전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지 천명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
7월 29일 러시아 제국, 세르비아 왕국을 위해 총동원령 발동
8월 1일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
8월 3일 독일 제국, 프랑스에 선전포고, 벨기에 침공. 슐리펜 계획 발동
8월 4일 독일 제국, 영국에 선전포고
8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
8월 23일 독일군, 프랑스 침공 시작
8월 23일 일본 제국, 영일동맹에 근거해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
8월 25일 일본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
8월 26일 러시아군,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참패
9월 6일 마른 전투 개시
9월 14일 마른 전투의 실패로 독일군 총참모장 소 몰트케가 해임되고 에리히 폰 팔켄하인으로 교체.
10월 18일 제1차 이프르 전투
10월 28일 독일 경순양함 SMS 엠덴, 영국령 페낭 항구 습격
10월 29일 오스만 제국이 독일 제국과의 동맹에 의거해 참전. 서부 전선에서는 참호전 양상
11월 2일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 캅카스 방면 공세 시작
11월 6일 영국군이 오토만령 이라크에 상륙.
11월 7일 일본군, 중국 칭다오에 있는 독일군 기지 함락
11월 9일 독일 경순양함 SMS 엠덴, 영국군에 격침
12월 25일 전후 크리스마스 휴전
.1915년
1월 19일 제1차 체펠린 호의 런던 공습
2월 19일 영국군, 다르다넬스에 있는 터키군 요새 폭격
4월 25일 갈리폴리 전투 시작
5월 7일 독일군, U보트로 영국의 루시타니아 호 격침
5월 23일 이탈리아 왕국, 3국 동맹을 깨고 연합국에 참전. 전 동맹국인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
8월 5일 독일군,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의 바르샤바 점령
9월 25일 루스 전투 개시
12월 19일 연합국, 갈리폴리에서 후퇴
.1916년
1월 27일 영국, 징병제 개시 (이전까지 지원병제)
2월 16일 러시아군, 오스만 제국의 에르주룸 점령
2월 21일 베르됭 전투 시작
4월 15일 러시아군, 오토만 제국의 트레비존드 점령
4월 29일 메소포타미아의 영국군, 쿠트에서 오스만군에게 항복
5월 31일 유틀란트 해전
6월 4일 러시아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대해 브루실로프 공세 개시
7월 1일 솜 전투 시작
8월 10일 브루실로프 공세 성공적으로 종결
8월 29일 독일군 총참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해임되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취임.
9월 15일 영국군, 솜에서 세계 최초로 전차를 대량으로 운용
12월 7일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이 됨
.1917년
2월 1일 독일 제국, 무제한 U보트 작전 개시
3월 8일 러시아 제국에서 2월 혁명 발발, 니콜라이 2세 퇴위. 러시아 제정 붕괴, 임시 정부 수립
3월 9일 러시아군의 캅카스 전선 붕괴.
3월 11일 영국군이 오스만 군을 격파하고 바그다드 점령. 오스만 제국은 페르시아 작전을 중단.
4월 6일 영국의 항구로 향하던 미국 수송선들이 U보트에 격침되자 미국,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
4월 9일 아라스 전투 시작
4월 16일 프랑스군, 니벨 공세를 시작하나 실패
7월 1일 러시아 임시 정부, 케렌스키 공세를 실시하나 참패
7월 6일 이프르 부근에서 영국군이 공세를 감행한 메시네 전투 시작
7월 31일 제3차 이프르 전투 시작
10월 24일 카포레토 전투. 이탈리아군, 오스트리아군에 참패
11월 6일 영국군, 서부 전선 공세 개시
11월 7일 러시아 공화국에서 10월 혁명, 임시 정부 붕괴, 볼셰비키 집권
11월 10일 이탈리아군은 베네치아에서 30km떨어진 피아베 강까지 퇴각
11월 20일 캉브레에서 영국군이 전차 380대를 투입하여 승리
12월 5일 러시아-독일 제국, 휴전하고 정전 협상에 들어감
12월 9일 영국군, 오스만 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 점령
.1918년
2월 18일 독일군, 러시아 공격 재개
3월 1일 독일군, 키예프 점령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러시아-독일 정전. 러시아, 연합국에서 공식 탈퇴
3월 21일 독일군, 솜에서 대공세
3월 29일 프랑스, 포슈 원수를 연합국 서부 전선 최고 사령관에 임명
4월 9일 독일군,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역에서 공세 시작
5월 7일 독일 제국-루마니아 왕국의 평화 조약 체결
7월 15일 제2차 마른 전투 개시, 독일군의 전선 붕괴 시작
9월 2일 독일군, 힌덴부르크 선으로 퇴각
9월 19일 영국군, 메기도 전투에서 승리
9월 26일 프랑스군과 미군의 아르곤 공세 시작
9월 29일 불가리아 왕국, 연합국에 항복
10월 4일 독일 제국, 연합국에 휴전 요청
10월 17일 독일군의 힌덴부르크 선 붕괴
10월 24일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개시. 이탈리아, 카포레토 전투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
10월 29일 킬 군항의 반란
10월 30일 오스만 제국, 연합국에 항복
11월 1일 영국군, 모술 점령
11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연합국에 항복
11월 9일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 퇴위
11월 11일 독일, 연합국과 콩피에뉴 휴전협정(Compiegne armistice) 체결. 적대 행위 공식적 종결
.1919년
1월 4일 파리 강화 회의 열림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 체결
7월 21일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
.1920년
1월 첫 국제 연맹 회의가 런던에서 개최(제1차 세계 대전의 공식적 종결)
*독일(2,030,000명 전사), 러시아(1,700,000명 전사), 프랑스(1,400,000명 전사), 영국(900,000명 전사) 순으로 희생자를 많이 냈다. 반대로 일본은 희생자를 가장 적게 냈다(300명 전사).
– 종전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이래, 연합국은 반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동맹국의 군대가 불가리아가,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순으로 항복했다. 오스트리아가 항복한 같은 날, 독일의 킬(Kiel) 군항에서는 해군 수병에 의한 폭동이 일어났다. 파급 효과는 엄청났는데, 곧바로 독일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여 군경과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제위를 포기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으며 독일의 군주제는 공화정으로 전환되고,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과 휴전을 맺었다.
연합국의 주축이었던 러시아도 1917년 초부터 혼란에 빠지면서 제정 러시아 정부가 전쟁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대중혁명인 2월 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으로 황제 니콜라스 2세가 물러났으며, 1917년 10월 24-25일 블라드미르 레닌의 지휘 아래에 있던 볼세비키(좌익 사회주의자)군대가 주요 정부 건물, 겨울궁전, 그리고 당시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신정부 청사를 장악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 결과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많은 영토와 인구를 잃었다. 이로 인해 발칸 반도와 중동 지방에서 많은 독립국들이 생겨났다.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포기하였고, 많은 영토를 잃었다. 또한 장기간 전쟁수행으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실직자가 속출하였다. 더욱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과다한 배상금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미국은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랐으며, 한편,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하였으며, 전쟁의 방지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국제 연맹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로써 국제 연맹이 설립되었으나, 정작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가입에 실패하였지만 신생국가를 포함한 여러 나라들이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민족자결주의로 민족주의가 상승하고 그 원칙에 따라 중앙유럽의 많은 국가는 독립하였으며, 식민지 상태에 있던 많은 나라들이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다(조선, 인도).
이탈리아는 승전국이었으나 연합국으로부터 냉대를 받은 좌절과 배신감으로 결국 1922년에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한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된다. 중국도 연합국임에도 불구하고 산둥 반도에 대한 이권을 돌려받지 못하였으며 이것은 5․4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일본은 영일 동맹을 이유로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참전하여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더 높이고 국제적인 발언권 강화를 얻었으며 전쟁기간 동안에는 경제호황 등 여러 이득을 보았고 오세아니아의 군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남성들이 참전중일 때 일자리로 나오게 된 여성들의 사회적 참여가 전후에 더욱 늘어났고, 사회 구성원간의 평등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높아지게 되었다. 국제 정치에도 변화가 크게 나타나 독일, 러시아 등의 전제 국가들이 무너지거나 해체되었고,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유럽 국가들의 절반에 가까운 국가에서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또한, 이 전쟁으로 인해 과학 기술이 발전했다. 그러나 독가스와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무기들도 개발되어 나왔다. 최초의 독가스는 독일군이 사용하였으며, 연합군도 같은 무기로 대응했다. 참호선을 뚫기 위해 탱크도 개발되었으며, 대포도 점점 대구경화 되었으며 장거리 사격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열차포(독일의 크루프 열차가 유명하다)도 등장하였다.
제국주의 국가들 상호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협상하고 대립하여 일어난 제 1차 세계대전은 궁극적으로는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간에 아무런 득실로 얻지 못한 채 각국의 커다란 경제적 손실과 정신적 피해만 입히는 결과를 초래한 커다란 참극이었던 것이다.
2. 갈리폴리 전투(The Battle of Gallipoi or Gallipoli Campaign, Dardanelles Campaign)
갈리폴리 전투(혹은 갈리폴리 작전)는 제 1차 세계대전 중 1915년 4월에 시작해서 11개월 동안 연합군과 오스만군 모두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연합군의 완패로 끝난 전투이다. 다르다넬네스 작전으로도 불리는 이 전투의 목적은 독일을 지원하는 오스만군을 전쟁으로부터 배재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네스 해협(러시아로 가는 길목이 될 수 있는 곳)을 장악하기 위해 윈스턴 처칠이 제안한 연합군의 작전이었다.

이때, 연합군 지원을 위해 프랑스로 출정 대기하면서 이집트에서 훈련중이던 호주와 뉴질랜드군단(ANZAC)이 계획을 변경하여 연합군 중에서 첫 군단으로 갈리폴리로 떠났는데 불충분한 정보와 지형지식으로 계획과 다른 해안(지금은 ANZAC COVE로 불린다)에 밤에 도착한 ANZAC은 강력한 오스만군의 반격으로 인해 그 첫째 날에 2천여 명의 호주군이 사망하게 된다.
11개월의 전투동안 48만의 연합군이 참전하여 25안의 사상자중 8천7백 명의 호주군 포함 4만6천 명이 전사했다. 오스만군 또한 5만여 명의 희생이 있은 후에 1916년 1월 연합군의 철수로 끝이 났다. 이 전투는 당시의 영국수상과 해군제독 을 물러나게 했으며 작전을 제안했던 윈스턴 처칠 또한 많은 비난과 함께 그의 생애에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출처 : https://kirakirat.tistory.com/34 [세계사 이야기]
https://ko.wikipedia.org/wiki/제 1차 세계대전
천순자, 천옥영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