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주기도문(Lord’s Prayer, 主祈禱文)
주기도문(Lord’s Prayer)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문이다. 성서에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13절과 누가복음 11장 2-4절에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기 전에 잘못된 두 종류의 기도에 대해서 지적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6장 5절), 외식하는 기도와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6장 7절), 중언부언하는 기도이다.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에서는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11:1)라는 요청을 받고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주셨다.
주기도문은 기도인 동시에 모든 기도의 기초가 되는, 기도의 지침이고 모형이다. 주님이 가르쳐준 주기도문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기도의 대상, 둘째 기도의 내용, 셋째 기도의 송영이다.
첫째,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이고, 셋째 기도의 송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영광송’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둘째, 기도의 내용은 6가지인데,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3가지 1) 하나님의 이름, 2) 하나님의 나라, 3) 하나님의 뜻이다. 기도의 우선순위는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 6:33) 사람의 필요를 구하는 3가지 1) 현재의 일용할 양식, 2) 과거의 죄, 3) 미래의 시험이다.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의 필요를 포괄적으로 하나님께 구하였다. 십계명을 대신관계와 대인관계로 나눈 것처럼, 주기도문의 내용도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필요로 나눌 수 있다.
1. 기도의 대상(對象)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무엇을 기도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누구에게 기도하는가는 더욱 중요하다. 기독교 외에 타종교에서도 기도를 강조하고 있다. 본질적인 차이는 기도의 대상이다. 하늘이란 ‘Sky’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뜻한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이다.
한국 기독교는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다. 성서를 한글로 번역할 때 천주교에서는 하나님을 ‘천주님’이라고 하였고, 개신교에서는 ‘하ㄴ.님’이라고 하였다. 1933년 맞춤법 개정안 때 아래아(.)가 없어지면서‘하나님’이라 하였다. 천주교와 개신교 일부 학자가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성서’에서 ‘God’의 명칭을 ‘하느님’이라고 부르기로 합의했다. 이후 천주교(가톨릭)에서는 ‘천주님’ 대신 ‘하느님’이란 용어가 일반화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하느님’보다 ‘하나님’을 선호하여 ‘공동번역성서’가 아닌, 1998년 개역성경을 개정한 ‘개역개정성경’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과 하느님은 같은 의미이지만 굳이 용어의 차이를 설명하자면, 하느님은 ‘하느님의 전능성’(Almighty God)을 강조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유일성’(Only God)을 강조한 용어이다.
2. 기도의 내용(內用)
1)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3가지
(1) 하나님의 이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성경에서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존재의 인격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심으로써 그들에게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부여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을 대변하며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의 기도의 목적이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는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올려드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켜 내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 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는 없다. 무릎 꿇는 순간부터 우리는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나라: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중심 사상이다. 나라(Kingdom)는 헬라어로 ‘바실레이아’이고 히브리어로는 ‘말쿠트’(malkeuth)이다. 하나님의 ‘통치’ 또는 ‘주권’과 ‘왕권’을 지칭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며 미래적이다.(Already, but not yet)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이다. 우리가 먼저 구원 받은 것은, 구원 받은 받지 못한 자를 구원하기 위함이다.(Saved to Save) 개인구원은 공동체 구원으로 완성된다.
(3) 하나님의 뜻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b) 생명을 얻는 다는 ‘구원’이고,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은 구원 받은 자답게 사는‘성결’이다. “너희는 이 세상을 본 받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까지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2) 사람의 필요를 구하는 3가지
(1) 현재의 양식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의 첫 번째 시험은 마시는 물과 먹는 음식이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15장에 마라의 쓴물 단물로 바꾸어 주셨고, 출애굽기 16장에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다. 먹는 것은 1차적인 생리적 욕구이다. 매슬로의 ‘욕구단계설’이 있다. 5단계로 나누는데 1단계인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어야지만 다음 단계인 ‘안전의 요구’로, 안전의 요구가 채워져야, 3단계인 사랑의 욕구, 4단계의 존경의 욕구, 그리고 5단계인 자기완성의 단계까지 갈 수가 있다고 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약2:5-16) 일용한 양식은 현재의 실제적인 문제이다.
(2) 과거의 용서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용서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한다. 상대방을 용서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기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말이다. 햄릿은 아버지를 죽인 삼촌을 죽이려다가, 그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죽이지 않는다. 혹시 기도할 때 죽이면 천국에 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육신적 복수 뿐 아니라, 영적 복수까지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과거에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정말 힘들다. 그러나 주님은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다.(마18:22) 상대방이 용서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격 없는 나를 주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그 용서함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3) 미래의 시험 :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성경에 시험으로 번역된 두 개의 단어가 있는데, Test와 Temptation이다. 일반적으로 Test는 외적 어려움이고, Temptation은 내적 유혹이다(약1:14). Test는 ‘인내’를 만들고, ‘생명’으로 인도하여, 우리를 온전하게 한다. Temptation은 욕심에 기인한 내적 유혹으로 ‘사망’으로 인도한다. 주기도문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의 시험은 Temptation으로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늘 알아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이다.“네가 선줄로 아느냐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3. 기도의 송영(頌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송영(頌榮, Doxology)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의 찬양인 ‘영광송’이다. Doxology는 doxa의 영광과 logos의 말의 합성어이다. Doxology는 문자적으로 ‘영광의 말’이라는 뜻이다. 주님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기도를 마치라고 하셨다. 우리들의 기도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하나님과 하느님의 차이는?
천주교(가톨릭)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천주(天主)님’이라 부르다가, 1971년부터 가톨릭과 개신교 학자들이 함께 번역을 시작한 ‘공동번역성서’에서 ‘God’를 ‘천주’ 대신 ‘하느님’으로 표기했다. 그 후 가톨릭에서는 ‘천주’ 대신 ‘하느님’이란 용어가 일반화 되었다. 드디어 1977년 ‘공동번역성서’가 발간되었지만,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하느님’보다는 ‘하나님’을 선호하여 ‘공동번역성서’를 사용하지 않고, 1998년 개역성경을 수정한 ‘개역개정판’ 성서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과 하느님’의 용어 차이는 1933년 한글 맞춤법 개정안에서 찾을 수 있다. 개정안에서 ‘아와 오’의 발음을 가진 ‘아래아’를 없애고, 첫음절의 ‘아래아’ 는 ‘ㅏ’로, 둘째 음절 이하의 ‘아래아’는 ‘ㅡ’로 바꾸었다. (ㅁ. + o. = 마음) 하나님의 표기는 ‘하ㄴ.ㄹ + 님’에서 ㄹ은 뒤에 ㄴ을 만나면 생략되어 ‘하ㄴ. + 님’이었다. 따라서 맞춤법 표기에 의하면 ‘하느님’이 맞다. 더구나 하나, 둘과 같은 서수 뒤에는 ‘님’을 붙일 수가 없다. ‘하나님과 하느님’은 같은 의미이지만 굳이 차이점을 설명하자면, 하느님은 ‘전능성’(Almighty God)을 강조하고, 하나님은 ‘유일성’(Only God)을 강조한 용어이다.
바로 그 교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교회와 예배당’의 관계는 ‘가정과 집’과 같다. 가정은 집에 사는 가족이고, 교회는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신자들이다. 신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이다. 교회란 단어는 마태복음 16:18절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위에 세워졌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롬8:9) ‘바로 그 교회‘란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교회이다. 성령은 시공간을 초월하지만, 성도는 시공간의 구속을 받는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히브리 민족을 이루셨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은, 오늘날 교회를 통해서 ‘새 역사’를 쓰기 원하신다. ‘바로 그 교회’란 시대적 사명을 깨닫고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는 교회이다. 교회의 선교 방향을 3S로 표현했다.
첫째, 사람을 살리는 교회 (Salvation / Saved to Save)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Salvation)이다. 구원은 헬라어로 ‘소테리아'(Soteria)이다. ‘소테리아’는 ‘영혼구원’을 넘어 ‘전인구원’을 뜻하고, ‘개인구원’을 넘어 ‘사회구원’에도 사용된다. 전인구원이란 ‘영, 혼, 육’ 모두의 구원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사회란 개인이 모여진 공동체이기에,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 분리될 수 없다. 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가진 ‘신앙 공동체’이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했지, ‘교회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지 않았다. 구세군은 개인구원을 넘어 사회구원을 위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는 ‘하나님의 군대’이다. 천국 문에는 이런 문구가 써있다고 한다. “개인입장 불가, 단체입장 환영”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 받았다. (Saved to Save)
둘째, 사람을 세우는 교회 (Sanctification/Saved to Sanctify)
헬라어 ‘하기오스’는 성화(Sanctification) 혹은 ‘성결'(Holiness)라고 번역한다. 성결이란 구원 받은 자가 구원받은 자답게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구원은 완성이 아닌, 성결의 시작이다. 성결은 일회적 사건이 아닌, 점진적 과정이다. 성결에 이르는 길을 성서에는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엡 4:15), ‘그의 마음을 품으라’(빌 2:5),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라’(갈4:19), ‘성령 충만함을 받아라’ (엡 5:18) 등은 성화에 대한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처럼, 성결 역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성결은 인간의 속성이 아닌,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에 그렇다. 기독교는 넘어진 사람을 세워야 하지 서 있는 사람을 넘어트려서는 안된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구원 받았다.(Saved to Sanctify)
셋째, 사람을 보내는 교회(Sending/Saved to Send)
교회는 모이는 교회인 ‘에클레시아’와 흩어지는 교회인 ‘디아스포라’가 있다. ‘에클레시아’가 ‘구원 공동체’라면 ‘디아스포라’는 ‘선교 공동체’이다. 모이는 교회가 ‘방주’ 라면, 흩어지는 교회는 ‘구조선’ 이다. 교회는 모이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흩어지기 위해서 모였다. 교회는 ‘선교 공동체’이다. ‘선교의 전후방’이 사라진 것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다. 지금 땅 끝이 우리에게로 오고 있다. 무슬림이 몰려오고, 불교와 힌두교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새롭게 무장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The Full Armor of God)를 입고 흩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최대의 위임'(The Great Commission)은 ‘선교’이다. ‘위임(Commission)’은 ‘함께(Com) + 선교(Mission)’의 합성어로, 주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교회는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지, ‘선교의 적’이 돼서는 안된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선교하기 위해서 구원 받았다.(Saved to Send)
구세군은 ‘행동하는 교회’이다.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한손에는 빵, 한손에는 성경’을 모토로 교회만을 위한 교회가 아닌 세상을 위한 ‘교회’이다. 구세군 라이드 한인교회는 위의 3가지 핵심 가치를 바탕으로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닌 ‘바로 그 교회’가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