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신약성경의 역사적 배경(2) – 유다의 독립과 로마시대
오늘 우리는 마카비 시대의 독립과 로마시대의 유다에 대해 살피는 시간을 갖겠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안티오커스 4세의 천인공로할 포악을 접하게 되는 유대공동체를 직면했다. 구약의 종교가 완전히 붕괴되는 시기였다. 이로 인해서 신실한 유대인들은 격분했다. 이때 충돌은 시작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의 밀사가 시민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서 모데인이란 마을로 들어간다. 그리고 마타티아스라는 이름의 한 나이 많은 제사장에게 제안을 한다. 만일 신들에게 헌물을 바치면 금과 은을 줄 뿐 아니라 왕의 친구가 될 영예를 주겠다고 회유한다. 마타티아스가 거절한다. 그때 한 유대인이 그에게 돈을 가지고 와서 희생제사를 드리라고 제안했을 때, 마타티아스는 그 유대인과 사절단을 죽인다. 그리고 나서 광야로 도망쳤다. 이것이 유다 저항운동을 촉발시켰다. 이때부터 마카비 시대가 시작되는데 이 명칭은 마타티아스의 세번째 아들 유다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망치라는 뜻의 “마카베우스”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셀레우쿠스왕조에 대항해서 게릴라전술을 쓰는 전쟁을 이끌었다. 비록 유다스가 뛰어난 전술가이자 외교가 였을지라도 마카비의 성공은 시리아가 동쪽의 파르티아 제국과 생긴 문제가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키비의 여세는 유대지역을 안정시키려는 안티오쿠스 4세의 군사적으로 강화된 개입보다 앞섰고 그 결과 안티오쿠스 4세는 토라준수금지 규정은 폐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어서 유다스(유다 마카비)를 따르던 혁명가들은 성전을 재탈환하고 이교도 축출에 힘썼으며 토라에 규정된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도록 성전을 다시 봉헌하였다. 유대를 위해 종교적 자유를 회복하고자 한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된 마카비운동은 유다 형제들이 살아남게 되면서 국가를 되찾는 정치적 독립을 얻기 위해 힘쓰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대제사장들로서 새로운 국가의 수뇌부에 성공적으로 임명되었다. 마카비는 셀레오쿠스왕조로 부터의 자치권을 원했는데 B.C. 163년 유리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 해에 안티오쿠스 4세가 사망하자 제국 전역에 걸친 다툼이 발생했고 이런 시리아의 국내 상황이 유대인의 독립에 도움이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자국내 상황이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유다스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제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다내에도 부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다스가 B.C.160년에 죽자 그의 동생 요나단이 계승했으나 트리포전투에서 잡혀 몸값이 지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B.C.143년에 처형된다. B.C.142년 유다스의 가장 어린 동생이자 유일한 생존자였던 시몬은 계속 저항을 했고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시리아의 최후 요새인 아크라를 함락시켰다. 이것이 이스라엘 자치국가의 시작이었다. 유대국가는 시몬에게 대제사장직을 주었고 군사적, 종교적, 행정적인 특권을 주었다. 시몬이 종교와 행정을 장악한 정부의 수장이 된 것은 이제 이스라엘이 군주국가 체제로 옮겨갔음을 나타낸다. 이 시기부터 마카비 후손들은 독재자들이 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세습이 시작된 왕조를 마카베오 일가의 조상이름을 따서 하스몬왕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로마의 간섭과 헤롯의 왕계가 생겨날 때까지 유대를 통치하게 된다.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B.C.134-104)는 용병들을 잘 활용해서 영토를 확장해 나아갔다. 이어 아리스토불루스(B.C.104-103)는 최초로 헬라군주제를 모방하여 “왕”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다. 물론 그는 대제사장직을 겸하는 하스몬 왕조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 받았기 때문에 왕이면서 동시에 대제사장이었다. 그를 이은 알렉산더 얀네우스(B.C.103-76)는 유다의 영토를 솔로몬 이후 최대로 확장한 군주였으나, 종교적 양심의 가책에 좌우되지 않는 헬라식 독재자였다. 그가 통치할 때 유대인의 큰 민란이었는데 알렉산더 얀네우스는 그 민란이 종료된 후 800명을 한꺼번에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잔인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죽은 뒤 그의 누이이자 아내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제2성전시대의 유일한 여왕으로 등극하여 유대를 통치했다(B.C.76-67). 그러나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죽자 작은 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군대를 일으켜 그 형인 히르카누스 2세를 누르고 왕권과 대제사장직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의 형 히르카누스 2세가 잠시 반란에 성공하는 등 정세가 불안했다. 이 두 형제의 갈등속에 로마가 유다를 장악하게 되면서 하스몬 왕조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는 새로운 지배새력이 등장하게 된다. 로마의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군대를 보내어 그때까지 불안정한 상태로 있던 왕국을 진압했다. 두 형제가 모두 로마의 지원을 간청했지만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누스 2세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그는 히르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할 뿐 왕의 직책은 빼앗았다. 그리고 유대를 시리아에 있는 제국총독의 통치를 받는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독립국가로서의 유대국가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로마가 팔레스틴의 지배자가 되게 된다. 영화롭지 못한 하스몬 왕조의 몰락이었다. 유대인은 이제 국가정체성에 문제가 생기는 네번째 위기를 받게 된다.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된 것이다.
로마공화국의 권력은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시대에 동쪽 지중해에서 점진적으로 시작되었다. 안티오쿠스 3세가 소아시아 해안을 합병하려고 시도했을 때, 로마는 그의 진입을 멈추도록 하고 과중한 조세를 부과했다. 또한 안티오쿠스 4세가 이집트를 침공했을 때 로마는 이를 반대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을 감행하지 않도록 경고했다. 그때 이미 로마는 다른 왕국들의 사안들을 간섭하면서 직접직인 통치의 서막을 열어갔다. 팔레스틴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로마의 폼페아우스는 이전 하스몬왕가의 영토 중 상당부분을 시리아의 로마총독에게 할당하고 하스몬왕조로 대신할 존재를 찾는다. 이때 헤롯왕가가 등장한다. 헤롯의 부친인 에돔출신의 안티파테스는 국제정세에 민감한 외교가였는데 폼페이우스와 줄리어스 시저가 다툴 때 교묘하게 시이저를 지지했다. 결국 폼페이우스가 살해된 뒤 안티파테르는 시이저가 이집트원정을 수행할 때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시저는 승리 후에 안티파테르에게 로마 시민권을 하사하고 그를 유대의 행정관으로 임명한다. 안티파테르는 자신의 아들들인 파사엘은 유대의 관리자로, 헤롯은 갈릴리의 관리자로 세웠다. 파르티안과의 전쟁에서 헤롯이 로마로 피신했지만 로마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를 받고 팔레스틴으로 귀환한다. 전 유대를 장악한 헤롯은 로마가 다시 내전에 들어갔을 때 옥타비아누스편에 서고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을 때 유대지배를 인정받으면서 계속 왕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비록 예수님 탄생 때에 잔악함을 보여준 것처럼 헤롯은 잔인하고 의심이 많았지만 외교력과 행정력을 겸비한 그는 오랫동안 유대를 장악하면서 경제적 번영을 과시했고 많은 건축으로 자신의 권력을 과시했다(B.C.37-A.D.4). 특히 이두매(에돔)출신이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대대적인 성전 증축의 과업을 떠맡는다. 오늘날 관중석을 포함한 축구장 12개를 합칠 정도의 크기로 추정되는 헤롯의 성전은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다(막13:1). 헤롯대왕이 죽은 이후에 유대는 그의 아들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헤롯 아켈라우스는 분봉왕으로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담당했으나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 소요와 탄원이 잦았다(B.C.4-A.D.6). 결국 로마는 통치력에 문제를 보인 그를 고올(Gaul)로 추방했고, 그가 담당한 지역은 로마가 파견한 총독의 직접 통치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는 로마 총독 빌라도가 통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헤롯 대왕의 다른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B.C.4-A.D.39)는 형제들 가운데 능력이 출중해서 오랫동안 갈리리와 베레아의 사분봉왕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렇게 헤롯 왕계가 지속되는 와중에서 큰 사건이 발생한다. 로마를 대상으로 한 유대인의 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A.D.66-73).
이 참혹한 전쟁은 처음에는 가이사랴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등으로 촉발된 유혈충돌에서 시작된다. 이때 총독 플로루스가 성전고에서 17만 달란트를 빼내는 사건이 터지자 대규모 소요가 발생했고, 그 동안 쌓인 불만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오면서 전 유대가 참여하는 전면전쟁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열심당이 지배적으로 활동하면서 주요 궁전들을 불태우며 토지분배를 시도했다. 곧 이어 예루살렘을 수비하는 안토니우스 요새가 점령되고 예루살렘은 반군의 손에 넘어갔다. A.D.68년 가을 시리아 총독 갈루스가 팔레스틴 원정을 감행했다가 사정상 퇴각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지배계층까지 전쟁에 참여하여 민회가 재구성되고 대제사장과 귀족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전면전이 되었다.
그러나 로마장군 티투스가 A.D.70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면서 그 아름답던 성전은 로마군대의 방화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 시기부터 유대 민족은 다섯번째 큰 위기로 빠져들게 된다. 지성소의 파괴로 성전예배와 희생제사가 중단되었다. 그에 대처하기 위한 일환으로 유대랍비들은 얌니아에 토라(구약의 율법들)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이 와중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통치하에서 유대인들은 “바르 코크바 반란”(A.D. 132~135)으로 알려진 반란을 다시 일으켰으나 이 반란 역시 로마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 결과로 1948년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까지 유대 국가는 중단되었던 것이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