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성과 속 : 종교의 본질
미르치아 엘리아데 / 학민사 / 1983.6.1
엘리아데는 인간을 “종교적 인간 (Homo religiosus)”이라 말한다.
혼란 그 자체인 카오스에서 인간은 공간 영역에서 중심을 잡고 방향을 설정하고, 시간 영역에서 주기적으로 회복되는 ‘일련의 영원’을 살아가면서 창조주의 태초의 모범을 재현하는 코스모스를 창조하고, 그 속에서 존재를 인식한다.
비종교적 인간도 좋든 싫든간에 종교적 인간의 산물이다. 영화, 독서, 예술활동도 곧 종교활동이다. 결국 인간은 종교적 인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 목차
옮긴이의 말
머리말
거룩한 것이 스스로를 나타내는 때
세계 속의 두 가지 존재양식
거룩한 것과 역사
제1장 거룩한 공간과 세계의 성화
공간의 균질성과 성현
신의 현현과 징표
카오스와 코스모스
장소의 신성화=우주 창조의 재현
세계의 중심
‘우리의 세계’는 언제나 중심에 위치한다
도시-코스모스
세계 창조의 수행
우주 창조와 건축 공회
사원, 바실리카, 대성당
결론
제2장 거룩한 시간과 신화
세속적인 시간 지속과 거룩한 시간
사원-시간
우주 창조의 해마다의 반복
태초의 시간으로의 회귀를 통한 재생
축제의 시간과 축제의 구조
주기적으로 신들과 동시대인이 되는 것
신화=모범적 모델
신화의 재연
거룩한 역사, 역사, 역사주의
제3장 자연의 거룩함과 우주적 종교
하늘의 거룩함과 천상의 신들
아득한 신
삶의 종교적 체험
하늘의 상징의 지속
물의 상징의 구조
세례의 모범적 역사
상징의 보편성
대지모신
지상의 분만:아기를 땅 위에 눕히는 것
여성, 대지, 그리고 생산력
우주의 나무의 상징과 식물숭배
자연의 탈신성화
그밖의 우주적 성현
제4장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삶
세계를 향하여 열린 실존
삶의 성화
신체-집-우주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
통과제의
입사식의 현상학
남성의 사회와 여성의 사회
죽음과 입사식
‘제2의 탄생’과 정신적 생식
근대세계에 있어서의 성과 속
연대기적 고찰: 지식의 한 갈래로서의 ‘종교사’
참고문헌
부록 – 역사의 지평과 초역사의 지평/ 이동하
- 두개의 차원
2.역사적 지평의 의의와 한계 - 초역사적 지평—암호이론
우리의 현실과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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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미르체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 ~ 1986)
미르치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는 1907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나 부쿠레슈티대학에서 이탈리아 철학 연구로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인도 캘커타대학에서 3년간 산스크리트와 인도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1933년 부쿠레슈티대학으로 돌아와 요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부쿠레슈티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그후 1945년에 파리 소르본대학의 종교학 객원 교수가 되었고, 1956년에 시카고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30년 이상 가르쳤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학자인 이 거인은 그의 필생의 대작이자 위대한 학문적 업적으로 꼽히는 『세계종교사상사』를 3권까지 집필한 후인 1986년 4월 22일에 시카고에서 영면하였다.
주요 저서로 『세계종교사상사』(전3권), 『영원회귀의 신화』, 『종교형태론』, 『성과 속』, 『이미지와 상징』, 『요가』, 『샤머니즘』,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종교의 의미』, 『벵갈의 밤』 등이 있다.
– 역자 : 이동하

○ 출판사 서평
– 루마니아의 사상가 멀치아 엘리아데의 심오하고 독창적인 사상!
루마니아의 사상가 멀치아 엘리아데의 심오하고 독창적인 온축을 가장 간명하게 요약해 놓은 책이다.
공간과 시간, 자연과 우주, 그리고 인간의 삶 중 ‘거룩한 것’이 현현된 모습을 찾음으로써, 영원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성찰하게 해주는 예지를 담고 있다.
또한 오늘의 천박한 문명에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면서, 신성의 감각이 생동하고 있는 세계의 비전을 제시한다.
현대 종교학의 방향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물론, 삶의 본질을 진지하게 따져 묻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 독자의 평 : 요약
- 머리말
신앙자에게 ‘살아 있는 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성한 분노 속에서 나타나는 무서운 위력.
거룩한 것에 대한 최초의 가능한 정의는 그것이 세속적인 것의 반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더 이상 돌이나 나무가 아니라 거룩한 것, 전적으로 다른 것을 보여주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숭배를 받는 것이다.
거룩한 돌은 여전히 하나의 돌이다.
고대사회의 인간은 가능한 한 거룩한 것 안에서, 혹은 거룩한 대상들에 가까이 다가가서 살고자 하는 경향을 지녔었다.
왜냐하면 모든 근대 이전 사회의 사람을 원시인이라고 할 때, 그들에겐 거룩한 것이란 곧 힘에 해당했고, 궁극적으로 현실에 해당하였기 때문이다.
제1장 거룩한 공간과 세계의 성화
공간의 균질성과 성현
종교적 인간에게 있어서 공간은 균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공간 내부의 단절과 균열을 경험한다.
종교적 인간이 언제나 그의 거주지를 ‘세계의 중심’에 고정시키고자 애쓰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만약 세계 가운데서 사는 것이 가능해지도록 하고자 한다면 세계를 창건해야만 한다.
세속적인 삶을 선택한 사람이 제아무리 세계를 탈신성화시킨다고 하더라도, 그는 종교적 행위를 완전히 배제해 버리는 데에는 결단코 성공할 수가 없다.
거룩한 공간의 계시는 고정점을 획득하고, 따라서 균질성의 카오스 속에서 방향성을 확보하며, ‘세계를 창건’하고, 참다운 의미에서 그 속에 거주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반대로 세속적인 경험은 공간의 균질성을, 따라서 그것의 상대성을 유지시킨다.
신의 현현과 징표
문지방, 문은 공간에 있어서의 연속성의 단절을 직접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보여 주며, 여기서 그것이 갖는 커다란 종교적 중요성이 유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는 이행의 상징이자 동시에 매개자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거룩한 공간은 하나의 성현, 즉 거룩한 것이 돌연히 나타나고, 그 결과 어떤 구역을 주위의 우주적 환경으로부터 분리시켜 질적으로 다른 무엇으로 만드는 현상을 함축한다.
하늘의 문. – 창세기, 28:12-19
엘 하멜을 창건한 은자의 지팡이. – 현시, 환기.
성현은 공간의 균질성을 지워버리며, 고정된 지점을 제시한다. 그러나 종교적 인간의 거룩한 것으로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가 아니면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공간을 신성화하는 기술을 수다히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여 마땅하다.
거룩한 것 속에서 살고자 하는 종교적 인간의 욕망은 실제에 있어서 순수히 주관적인 경험의 영속적인 상대성에 의해 마비당하지 않음은 물론 객관적인 실재 속에 거주지를 잡고, 환상이 아닌 현실적이고 유효한 세계 속에 살려는 욕망에 해당한다.
신들의 작업을 재현한다는 관점에서 비로소 유효한 것이다.
카오스와 코스모스
전통적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자신의 거주지역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미지의 불확실한 공간 사이에 대립관계를 상정한다는 점이다.
한쪽에는 코스모스가, 다른 쪽에는 카오스가 있다.
종교적 모멘트가 우주 창생의 모멘트를 포함하는 까닭.
인간은 우주 창조의 제의적인 반복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것을 하나의 코스모스로 전이시킨다. ‘우리의 세계’가 되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창조되어야만’ 하는데, 모든 창조는 하나의 모범적인 모델, 즉 신들에 의한 우주의 창조라는 모델을 갖는 것이다.
고대사회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의 세계’가 아닌 모든 것은 아직도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지역을 우리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새롭게 창조해야만 – 다시 말해서, 그것을 성화하여야만 한다.
장소의 신성화=우주 창조의 재현
인간의 생존은 오로지 이같은 하늘과의 영속적인 교섭의 덕택으로만 가능할 수 있다.
초월에로 향하는 출구가 있음으로써만 삶은 가능해진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카오스에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그것을 ‘창조’함으로써 기꺼이 받아들인다.
신들의 작품인 우주는 인간들에 의해 그들 자신에 어울리는 규모로 반복되고 모방된다.
세계의 중심
우주적 산 (山) – 거룩한 산 (山)
‘우리의 세계’는 천상에 가장 가까운 장소이기 때문에 천상에 도달하는 것은 이곳, 우리의 거주지에서 가능하기 때문에 이곳은 거룩한 대지이다.
(1) 거룩한 장소와 성당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2) 사원들은 우주적 산의 모사이며, 따라서 지장과 천상간의 탁원한 ‘연결’을 이룬다.
(3) 사원의 기반은 하계에 깊이 내려가 있다.
하계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미지의 불모지대와 동일시될 수도 있다. 우리의 코스모스가 굳건히 서 있는 그 아래의 세계는 그 변경에 펼쳐져 있는 카오스에 대응되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언제나 중심에 위치한다
종교적 인간은 가능한 한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기를 추구한다.
전통사회의 인간은 오로지 위를 향하여 열려진 공간, 지평의 돌파가 상징적으로 보증되고, 따라서 다른 세계, 즉 초월적 세계와의 교섭이 제의적으로 가능해지는 공간에서만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창조는 실재의 넘쳐흐름, 달리 말해 거룩한 것의 세계 속으로의 돌입을 함축하는 것이다.
모든 건설 혹은 제작은 우주 창조를 시범적인 모델로 삼는다.
한 지역에 정주하는 일은 하나의 세계를 창건하는 일과 같다.
도시-코스모스
‘우리의 세계’는 코스모스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공격도 그것을 카오스로 바꾸어 버릴 위험성을 갖는다.
신들의 적, 악마, 용, 용왕 (archdragon)
용에 대한 신들의 이같은 승리는 해마다 상징적으로 반복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세계는 해마다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주하는 장소를 요새화하는 것은 마술적인 방어에 의해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요새 – 참호, 미로, 성벽 등등 – 는 인간들보다는 차라리 악마들이나 죽은 자들의 영혼에 의한 공격을 퇴치하기 위해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창조의 수행
자기가 거주하기로 선택한 세계의 창조라는 작업.
신들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바다의 괴물 혹은 원초적 존재를 살해하고 토막내어야만 했기 때문에, 인간 역시 그 자신의 세계, 그의 도시 혹은 그의 집을 세울 때 그것을 모방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피의 희생, 상징적 희생, 건설희생 (Bauopfer).
– 세계의 모형 (imago mundi)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 방법.
(1) 중심점으로부터 네 개의 지편을 투사함으로써(마을의 경우), 혹은 세계 축의 상징적 창건을 행함으로써(집의 경우) 그것을 코스모스와 동일화하는 것,
(2) 바다의 괴물이나 원초적 거인의 신체로부터 세계가 탄생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던 신들의 모범적 행위를, 건설의 제의를 통하여 반복하는 것.
우주 창조와 건축 공희
초석은 정확히 세계의 중심에 있게 되는 것이다.
집은 하나의 대상, ‘들어가서 사는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신들의 모범적 창조, 즉 우주창조를 모방함으로써 그 자신을 위해 건설한 우주인 것이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삶.
거주지는 세계의 모형을 구성하는 것이므로 상징적으로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 세계 중심의 다수성, 심지어는 무한성도 종교적 사고에 있어서는 아무런 어려움을 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하학적인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구조를 지녔고, 무수한 돌파구를 허용하며, 따라서 초월계와 무수한 교섭을 행할 능력을 가진 실존적이고도 거룩한 공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종교적 건축은 원시적인 주거의 구조 속에 이미 나타난 우주론적 상징을 단지 채택하여 발전시켰을 따름이다.
거룩한 공간의 원초적 경험에서 유래하였다.
사원, 바실리카, 대성당
신들의 집으로서 – 따라서 다른 무엇보다도 거룩한 장소로서 – 사원은 계속적으로 세계를 재성화(再聖化)하는데, 그 이유는 사원이 세계를 대표하고 또 포용하기 때문이다. 궁극에 있어서 세계가 그 모든 부분에 있어 재성화되는 것은 사원의 덕택인 것이다. 세계가 제아무리 불순해지더라도 성전의 거룩함은 그것을 지속적으로 순수하게 해줄 수가 있다.
결론
거룩한 것의 출현은 단지 세속적인 공간의 형태없는 유동성에 고정점을 투사하고, 카오스에 중심을 부여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지평의 돌파를 가져온다.
중심은 방향성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그것이 스스로를 거룩한 세계로 계시하는 한에서 세계로, 코스모스로 인식될 수 있다.
종교적 인간은 존재를 갈망한다.
그의 세계 위로 뻗쳐 있는 미지의 공간 – 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코스모스화되지도 않은 공간, 어떠한 방향설정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어떤 구조도 만들어지지 않은 단순한 무정형의 넓이의 세속적인 공간 – 은 종교적 인간에게 있어 절대적인 비존재(非存在)를 나타낸다.
신들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곳에 발을 디디고 서려는 종교적 인간의 의지.
그는 자기의 작은 코스모스를 신들의 세계와 비슷하게 만듦으로써 그것을 성화하기도 하는 것이다. 종교적 인간의 심원한 향수는 ‘신적인 세계’에서 거주하려는 것이요, 자기의 집이 사원이나 성전에서 표현된 바 신들의 집과 닮게 하려는 욕망이다.
태초에 창조주의 손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났을 때 그대로 순수하고 거룩한 코스모스에서 살려는 욕망.

- 제2장 거룩한 시간과 신화
세속적인 시간 지속과 거룩한 시간
종교적인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균질적인 것도 지속적인 것도 아니다. 한편으로 거기에는 거룩한 시간, 축제의 시간(대개는 경우 그것도 주기적이다)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종교적 의미를 배제한 행위가 자기를 차지하는 세속적 시간, 일상적인 시간의 지속이 있는 것이다.
거룩한 시간은 그 본질에 의하여 역전이 가능하다 – 그것은 엄격히 말해서 원초적인 신화의 시간이 나타난 것이다. 모든 종교적 축제, 모든 예배의 시간은 신화적인 과거에, ‘태초’에 일어난 거룩한 사건의 재현을 나타낸다.
어떤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지나가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지속을 형성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 자리에 동일한 상태로 머물러 있고, 변화하지도 소진되지도 아니한다. 주기적인 축제 때마다 참여자들은 동일한 거룩한 시간을 발견한다.
거룩한 시간은 순환적이고 가역적이며 회복가능한 시간이라는 역설적 양상 아래서 나타난다. 영원한 신화적 현재.
사원-시간
요쿠트족이 “세계가 지나갔다”라고 할 때, 그 뜻은 “한 해가 지나갔다”라는 의미다.
코스모스는 태어나고 자라나다가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사망하여 새해 첫날 다시 재생하는 살아있는 단위로 간주된다.
우주가 우주적 시간 (=해[year])과 동일시될 수 있는 이유는 양자가 모두 거룩한 실재, 신적인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고대 문화의 종교적 인간들에게 있어서 세계는 해마다 갱신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새로운 해가 올 때마다 그것은 그것의 원초적인 신성성, 그것이 창조주의 손에서 빚어질 때 가졌던 신성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고대 문화의 종교적 인간들에게 있어서 모든 창조, 모든 경험은 시간 속에서 시작된다. 하나의 사물이 존재하기 이전엔 그것에 고유한 시간도 존재할 수 없다. 코스모스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우주적 시간이란 없었다.
우주 창조의 해마다의 반복
투쟁, 승리, 그리고 천지창조는 그 순간에 여기서 지금(hic et nunc) 일어난다.
새해는 시간을 그 시초에서부터 다시 한번 출발시키는 것.
시간은 인간을, 사회를, 코스모스를 닳게 하였다.
1년 내내 존재하였던 세계가 진정으로 사라진다.
세계의 무화와 재창조에 상징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인간 역시 새롭게 창조된다.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므로 새롭게 태어나는 셈이다.
새해가 올 때마다 인간은 그의 죄와 실패의 짐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더 자유롭고 더 순수해졌다는 느낌을 갖는다.
천지창조는 신적인 것의 최고의 현현이며, 힘, 넘쳐흐름, 창조성의 모범적 행위이다. 종교적 인간은 실재적인 것을 갈망한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는 원초적 실재의 근원 바로 거기에 머무르려 한다. 즉 세계가 생성의 상태에 있던 시간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다.
태초의 시간으로의 회귀를 통한 재생
(1) 우주 창조를 해마다 반복함으로써 시간이 재생된다.
(2) 세계의 종말과 그것의 재창조에 제의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모든 인간은 그 시간과 동시에 놓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는 새롭게 태어나며, 그의 탄생 당시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활력의 저장고를 가지고 다시 삶을 시작하게 된다.
축제의 시간과 축제의 구조
종교적 인간은 주기적으로 신화적이며, 거룩한 시간에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낸다.
영원한 현재.
근원의 시간, 흐르지 않는 시간에로 주기적으로 되돌아간다.
주기적으로 신들과 동시대인이 되는 것
근원을 향한 향수.
태초의 완전성에 대한 향수.
거룩한 것에의 갈망임과 동시에 존재에 대한 향수
신화=모범적 모델
신화를 말하는 것은 태초에 무엇이 일어났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한번 이야기되면, 다시 말해 계시되면 신화는 명백한 진리가 된다.
그것은 언제나 창조의 이야기가 된다. 그것은 어떤 것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가, 어떻게 해서 존재하기 시작했는가를 말해준다.
이런 이유로 해서 신화는 존재론과 결부된다.
인간이 종교적으로 되면 될수록 그는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안내해주는 모범적 모델을 더 많이 지니게 된다.
거룩한 것은 곧 모든 실재의 궁극적 원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속에는 언제나 ‘왜’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신화의 가장 높은 기능은 모든 제의와 모든 의미있는 인간활동 – 식사, 성행위, 노동, 교육 기타 등등 – 을 위한 모범적 모델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신의 모델을 이처럼 충실하게 반복하는 것은 두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1) 신들을 모방함으로써 인간은 거룩한 것 속에, 따라서 실재 속에 머무르게 된다.
(2) 모범적인 신의 태도를 계속적으로 재연함으로써 세계가 성화된다. 인간들의 종교적인 행위는 세계의 신성성을 유지시키는 데 기여한다.
신화의 재연
사람은 오로지 신화의 가르침에 순응함으로써만, 즉 신들을 모방함으로써만 진정으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때에 일어난 것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되었다. 참된 죄는 잊는 일이었다.
암퇘지의 희생, 머리 사냥, 식인(食人)은 상징적으로 구근이나 코코넛의 수확과 동일하다. 식용작물은 자연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해의 산물이며, 그것이 시간의 새벽에 창조된 것도 그렇게 해서였던 것이다.
거룩한 역사, 역사, 역사주의
종교적 인간은 두 가지 종류의 시간, 즉 세속적인 시간과 거룩한 시간을 경험한다. 전자는 덧없는 지속이요, 후자는 거룩한 달력을 구성하는 축제들 가운데서 주기적으로 회복되는 ‘일련의 영원’이다.
종교적 내용을 박탈당한 반복은 필연적으로 생존에 대한 염세적 비전으로 인도된다.
기독교는 역사의 철학이 아니라 역사의 신학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의 신의 개입,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격 속에 그가 수육되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초역사적인 목표 – 인간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어난 그대로 일어나야만 되었던 것이다.

- 제3장 자연의 거룩함과 우주적 종교
종교적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은 결코 단지 ‘자연스러운’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종교적 가치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세계는 존재하며, 거기에 있으며, 하나의 구조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카오스가 아니라 코스모스이며, 따라서 피조물로, 신들의 작품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거룩한 돌은 그것이 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거룩하기 때문에 숭배된다.
하늘의 거룩함과 천상의 신들
하늘의 신은 하나의 인격이며, 하늘의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 살며 천둥, 번개, 폭풍우, 유성 등의 기상현상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아득한 신
천공의 구조를 가진 최고존재는 종교의 실천행위로부터, 예배로부터 사라져가는 경향을 지닌다. 그들은 인간들로부터 떨어져나가 하늘로 퇴각하며, 아득한, 활동하지 않은 신 (dei otiosi)이 된다.
신은 코스모스와 생명과 인간을 창조한 다음, 마치 천지창조의 거대한 사업이 그들의 밑천을 탕진시킨 것처럼, 일종의 권태를 느낀다.
반투족은 이렇게 말한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고 난 뒤에는 다시 그를 돌아보지 않는다.”
삶의 종교적 체험
최고존재의 자리를 대신한 다양한 신들은 가장 구체적이고 현저한 권능, 생명의 권능을 비축해 놓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사실로 인해서 그들은 생식의 ‘전문가’가 되며, 창조자로서의 신이 지녔던 보다 미묘하고, 보다 고귀하고, 보다 영적인 권능을 상실해 버린다.
하늘의 상징의 지속
하늘의 신이 더 이상 종교생활을 지배하지 않을 때에조차도 별들의 영역, 하늘의 상징, 상승의 신화와 제의 등은 거룩한 것의 질서 가운데서 탁월한 위치를 유지한다.
하늘은 예배에서 배제되고 신화 속에서도 다른 테마들에 의해 대치되지만, 그 상징의 덕분으로 종교 생활 가운데에서 여전히 현존하는 것이다.
천상적인 거룩함은 엄격한 의미에서는 종교생활로부터 배제되었지만, 상징을 통하여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종교적 상징은 그것의 모든 부분이 더 이상 의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때에조차도 그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왜냐하면 상징은 지성에 대해서만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인간 존재를 상대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의 상징의 구조
세계가 투명해지고 초월적인 것을 보여줄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은 상징을 통해서인 것이다.
물은 가능성의 우주적인 총계를 상징한다. 그것은 일체의 존재가능성의 원천이며, 저장고이다. 그것은 모든 형태에 선행하며, 모든 창조를 뒷받침한다.
물의 상징은 죽음과 재생을 모두 포함한다.
정화와 재생.
물의 거룩함뿐만 아니라, 물에 의한 우주 창생과 계시의 구조 또한 오로지 물의 상징을 통해서만 완전하게 계시될 수 있다. 그것은 무수한 성현의 개개의 계시를 모두 통합할 능력을 가진 유일한 체계이다.
세례의 모범적 역사
세례에 의하여 인간은 신과의 유사성을 회복한다.
세례는 단지 죄악으로부터의 정화와 신의 아들로 받아들여지는 은총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의 대형 (對型, antiypos)이기도 하다.
상징의 보편성
상징들은 메시지로 가득찬 것이었다. 그것들은 우주의 리듬을 통하여 거룩한 것을 보여주었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계시에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상징의 유효성을 보장하는 것은 역사적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신의 수육(受肉)이다. 그러나 세례의 상징에 대한 역사적(= 유대 – 기독교적) 해석은 보편적인 물의 상징을 폐기하지도, 해체시키지도 않았다.
역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지만 상징의 구조를 파괴하지는 않았다.
대지모신
고향의 대지와 신비로운 결합에 관하여 막연한 감정을 보존하고 있다. 그것은 토착성의 종교적 경험이다. 그 감정은 어떤 장소에 소속해 있다는 감정이며, 가족적 결합이나 조상에 대한 유대를 훨씬 넘어서는, 우주적 구조를 가진 감정이다.
지상의 분만:아기를 땅 위에 눕히는 것
인간의 어머니는 위대한 대지의 어머니를 단순히 대리하는 존재의 불과하다.
새로 태어난 아기나 죽어가는 인간이 대지 위에 누울 때, 대지는 그 출생 혹은 죽음이 정당한가, 그것이 완성되고 정당한 사실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를 말해주어야 한다.
여성, 대지, 그리고 생산력
나는 하늘이고, 그대는 대지이다. – 브리하다라탸카 우파니샤드
신랑과 신부는 하늘 및 대지와 동일시되고 있다.
고대사회의 종교적 인간들은 세계를 그 메시지에 가득찬 존재로 보았다.
때때로 그 메시지는 암호에 싸여 있지만, 그 암호를 해독함에 있어 인간을 도와주는 존재로 신화가 작용하는 것이다.
우주의 나무의 상징과 식물숭배
종교적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삶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단지 인간 생존의 또다른 형태에 불과하다.
나무는 종교적 인간이 탁월하게 실재적이고 거룩하다고 간주하는 모든 것, 신들이 그 본성으로서 지니고 있는 특권을 지닌 개인들, 영웅들, 반신(半神)들만이 드물게 접근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존재가 된다.
자연의 탈신성화
우주의 거룩함에 대한 경험이 어째서 드물어지게 되고, 마침내 순수하게 인간적인 감정 – 예컨대 예술을 위한 예술의 감정 – 으로 되기에 이르렀는가.
그밖의 우주적 성현
생명(life)은 그것이 인간에게 있든, 동물이나 식물에게 있든 항상 생명(life)이다. 그리고 죽음이라고 불리는 저 불가해한 시점이 도래할 때 나무에서나 인간에게서나 마찬가지로 떠나가는 자는 언제나 예수이다. – 기독교 저작가 레옹 블로와
- 제4장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삶
세계를 향하여 열린 실존
종교사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종교적 인간의 행동과 정신세계를 이해하고 남들에게도 이해시키는 일이다.
유럽 농업지대의 주민들이 천년 이상 기독교를 믿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기독교 이전의 종교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가운데 상당 부분을 기독교에 통합시키는 데 성공하였는 바, 그 유산은 기억할 수도 없는 고대의 것들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유럽의 농민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원초적이고 비역사적인 기독교.
종교적 인간에게 있어서 코스모스는 ‘살아있고’ ‘말을 한다’. 코스모스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것의 거룩함을 증거한다. 왜냐하면 코스모스는 신들에 의해 창조되었고, 신들은 우주적 생명을 통해 그들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기 때문이다.
열린 실존
종교적 인간, 특히 원시인의 실존은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다. 삶에 있어서 종교적 인간은 결코 고독하지 않다. 세계의 일부분이 그의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향하여 열린 실존이란, … 세계에로의 열림은 종교적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인식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인식하는 일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이 인식은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요, 존재에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귀중하다.
삶의 성화
삶은 두 개의 지평 위에서 살아진다. 그것은 인간의 생존으로서 자기 길을 밟아 가지만, 동시에 코스모스나 신들의 삶, 초인간적 삶을 공유하기도 하는 것이다.
비종교적 인간에게 있어서는, 모든 생활체험 – 성행위, 식사, 노동, 유희 등 무엇이든 – 이 탈신성화되고 말았다. 이것은 이 모든 생리적 행위가 정신적 의미를 빼앗겼고, 따라서 그것의 진정으로 인간적인 차원을 상실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사색에 대한 무한한 능력.
‘참으로 아는 자’는 세속적인 인간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경험을 갖는 것이다.
신체-집-우주
인간의 신체는 ‘하나의 기둥과 아홉 개의 문을 가진 집. – 고라크샤 샤타카
인간이 그에게 미리부터 운명지어진 모범적 상황 가운데 의식적으로 그 자신을 정립시킴으로써 그 스스로를 우주화한다.
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에게 있어서 코스모스는 불투명하고 활력이 없으며 말못하는 존재로 되었다. … 그것은 어떤 메시지도 전해주지 않으며, 어떤 암호도 갖고 있지 않다.
도시주민들의 종교적 감수성이 심각하게 가난해지고 있다.
그들의 종교적 경험은 … 궁극적으로 그것은 엄격히 사적인 경험이 된다.
인간-신-역사의 관계망 속에는 코스모스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렇게 되면 심지어 진지한 기독교도에게 있어서조차 세계는 더 이상 신의 작품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
다리와 좁은 문의 이미지.
종교적 인간의 경험 가운데에서는 그의 친숙한 나날의 삶이 변질을 겪는다.
집은 하나의 ‘둥지’ … ‘둥지’는 가축과, 자녀와, ‘가정’을 함축한다.
숨은 신(the Hidden God, Deus sbsconitus)
통과제의
존재론적, 사회적 신분의 급격한 변화.
참다운 의미에서의 인간이 되기 위하여 그는 이 최초의 (자연적) 생명으로서는 죽어야 하며, 종교적이자 동시에 문화적인, 보다 높은 생명으로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종교적 인간은 ‘자연적’ 차원에서의 자기 자신과 다른 존재가 되기를 원하며, 신화에 의해 그에게 계시되는 이상적인 이미지에 따라서 자신을 만들어 간다.
입사식의 현상학
신비를 경험한 입사자는 앎을 가진 자이다.
남성의 사회와 여성의 사회
죽음과 입사식
원시사회의 인간들이 죽음을 통과제의로 변형시킴으로써 그것을 정복하려 애써 왔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제2의 탄생’과 정신적 생식
근대세계에 있어서의 성과 속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
비종교적 인간은 … 인간은 그 자신을 만든다. 그리고 오로지 자기 자신과 세계를 탈신성화시키는 정도에 비례해서만 그 자신을 완전하게 만든다. 거룩한 것은 그의 자유에 대한 최대의 장애물이다. … 그는 최후의 신을 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이 궁극적으로 비극적 실존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실존적 선택이 그 나름의 위대성을 갖고 있다.
비종교적 인간도 종교적 인간의 후예이며, 좋든 싫든간에 종교적 인간의 산물이다.
영화, 독서. … 신화에 의해 수행되는 ‘시간으로부터의 탈출’에 비견될 만한 ‘시간으로부터의 도피’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종교적 인간의 대다수는 종교적 행동으로부터, 신학과 신화로부터 해방되어 있지 못하다.
순수하게 합리적인 인간이란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다. 실제 생활에서는 결코 그런 인간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인간존재는 그의 의식적 활동과 더불어 그의 비합리적 경험으로 구성된다.
무의식이 무수한 실존적 경험의 결과인 한 그것은 다양한 종교적 우주들을 닮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종교란 모든 실존적 위기를 위한 모범적 해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모범적 해결이유는 그것이 무한히 되풀이될 수 잇을 뿐 아니라 초월적인 기원을 가졌다고 믿어지며, 따라서 다른 초인간적인 세계로부터 수용된 계시로 평가되는 기인한다.
상징을 이해함으로써 그는 우주적인 것을 사는 데 성공한다.
자기가 비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근대인들에게 있어 종교와 신화는 그들의 무의식의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비종교성은 인간의 새로운 ‘타락에 해당한다.
연대기적 고찰: 지식의 한 갈래로서의 ‘종교사’
오늘날 종교사가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그러나 상호보완적인 방법론적 지향으로 대별된다. 하나의 그룹은 주로 종교적 현상들의 특징적인 구조에 집중하며, 다른 그룹은 그것들의 역사적 맥락을 탐구한다. 전자는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려 하며, 후자는 그것의 역사를 해명하고 서술하려 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