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846년 8월 10일, 미국 의회에서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설립안 통과
스미스소니언 협회(Smithsonian Institution)는 워싱턴 D.C.에 있는 미 정부가 1846년 8월 10일 미 의회에서 설립안이 통과된 교육 재단으로 박물관, 미술관, 연구소, 도서관 등을 관리하는 문화기관이다.
영국인 과학자 제임스 스미스슨이 유산 기부의사를 밝히면서 설립 추진이 시작됐다.
그는 유언장에 전 재산을 미국 워싱턴DC 재단 설립을 위해 사용해 줄 것을 명시했다.
10년에 걸친 논쟁 끝에 최종적으로 협회 설립에 의견이 모아졌고 제임스 포크 대통령이 법령에 서명했다.
스미스슨이 기부한 금화 10만 파운드는 당시 50만 달러의 미화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스미스슨은 미국에 와 본 적도 없고 미국과 관련도 없었다.
거금의 유산을 미국에 기부한 이유는 당시에도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큰 화제가 됐지만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나의 전 재산을 조카에게 준다. 단 조카가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었을 때 … 지식의 증대와 보급을 목적으로 한 스미스소니언협회를 워싱턴에 설립하기 위하여 전 재산을 미국으로 보낸다.”
영국인 제임스 스미스슨의 유언이다.
그는 1829년 6월 27일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사망했다.
유산을 받은 조카가 6년 만인 1835년 자식도, 유언도 남기지 않은 채 숨져 50만여 달러의 거액은 고스란히 미국의 몫이 됐다.
스미스슨은 누구인가. 미국에 어떤 연고도 없었다.
미국을 다녀간 적조차 없었다. 미국의 어느 누구도 그를 알지 못했다. 그는 귀족의 사생아였다.
왕가 혈통인 어머니 엘리자베스 메이시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그를 낳았다. 36세가 될 때까지 어머니의 성인 메이시로 불려야 했다.
열 살에 영국으로 왔으나 귀족 대접은커녕 상류 사회의 배척을 받았다. 생부는 친자 확인조차 거부했다.
화학자요 광물학자로서 각고의 노력 끝에 왕립협회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에 대한 원망이 싹텄던 걸까.
“나의 이름은 귀족의 칭호가 없어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쉴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상당한 재산을 남기고 숨지자 비로소 아버지의 성인 스미스슨을 썼다.
미국 의회는 논란을 벌였다.
외국인의 선물을 놓고 토의하는 것조차 미국의 품위를 손상하는 일이라며 단호히 거절하자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러길 3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단안을 내려 선물을 받아들였다.
이번엔 이 돈을 어떻게 쓸지를 놓고 논쟁했다.
‘지식의 증대와 보급’을 위한 방법으로 자연사박물관, 사범학교, 도서관 등 여러 안이 8년여를 맞섰다.
마침내 1846년 8월 10일 의회에서 스미스소니언협회 설립을 가결했다. 스미스소니언 협회는 산하에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연구소 등을 두고 있다.
협회를 운영할 평의회는 부통령, 대법원장, 상하원 의원 6명, 저명인사 9명으로 구성했다.
이 협회는 “산소 속에서 인(燐)을 태울 수 있으면 누구든 과학자” (조지프 헨리 초대 스미스소니언협회장)라고 했을 만큼 보잘 것 없던 미국의 과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모태가 됐다.
그리고 ‘미국의 성 (城)’으로 불리는 세계 최대의 박물관 스미스소니언을 키워 냈다.
박물관 19개, 연구센터 9개, 소장 유물 1억3600만여 점, 한 해 관람객 2400만 명, 직원 6300명. ‘스미스슨’은 이렇게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