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692년 2월 12일, 표류 중 제주도에 도착했던 네덜란드의 선원 헨드릭 하멜 (Hendrik Hamel, 1630 ~ 1692) 별세
헨드릭 하멜 (Hendrik Hamel, 1630년 8월 20일 ~ 1692년 2월 12일)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기 겸 선원으로, 표류중 1653년 8월 16일 제주도에 도착하면서 부터 1666년까지 조선에 살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멜 표류기’라는 책을 써낸 것으로 유명하다.

– 헨드릭 하멜 (Hendrik Hamel)
.출생: 1630년 8월 20일, 네덜란드 네덜란드 호린험
.사망: 1692년 2월 12일 (61세)
.성별: 남성
.국적: 네덜란드
.경력: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선원 및 서기
헨드릭 하멜 (Hendrik Hamel, 1630년 8월 20일 ~ 1692년 2월 12일)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 소속 선원이자 서기이다. 고향은 네덜란드 호린험이고 1653년에서 1666년까지 조선에 억류당했다.
○ 조선 체류
– 제주도
1653년 스페르베르 (‘De Sperwer’, ‘the Sparrowhawk’, 네덜란드어로 새매) 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인근 해역에서 폭풍을 만나 제주도 해안에 좌초한다. 이때 버려진 배를 이용해 탈출하려 했으나 돛대가 부러져 무산된다. 당시 조선 효종의 명으로 이 사람들은 한양으로 즉시 압송되었다.
– 박연과 조우
한양에서 하멜과 비슷한 경로로 조선에 표류하여 훈련도감 근무자로서 귀화한 얀 반스 벨테브레 (박연)의 통역을 이용하여 국왕을 호위하는 부대원으로서 체류는 허락받았으나 일본이나 중국 등을 이용해 귀국은 “조선에서는 이방인을 외부에 보내지 않는다”라면서 금지되었다. 이 사람들은 한양에 체류하였으나 조정에 감시받았다.
– 두 번째 탈출 계획
그 사람들의 두 번째 탈출 계획은 조선에 온 청 사신에게 호소하여 국외로 탈출하려는 계획이였다. 사건의 전모인즉 헨드릭 얀스와 헨드릭 얀스 보스는 네덜란드어로 호소했으나 청 사신과 대화되지 않아 실패하였다. 두 번째 탈출 계획 실패를 두고서 하멜은 일본 관리의 심문에서 사신이 국왕에게 매수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하였다.
– 분산
조선 효종이 죽은 1659년 후 현종 1년에서 3년 닥친 식량난 때문에 그 사람들은 각각 분산되어 남원, 순천, 좌수영 이 세곳에 보내져 7년간 억류당했다.
– 일본으로 탈출
심각한 식량난과 일부 관리들의 학대에 시달리던 22명 중, 하멜을 포함한 헨드릭 하멜, 호버트 데니슨, 마테우스 에보켄, 얀 피터슨, 헤릿 얀슨, 코넬리스 데릭스, 베네딕투스 클레르크, 데니스 호버첸은 어선을 타고 탈출하여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하였으니 이때가 1666년이었다. 이 사람들은 일본 관리에게 심문받은 후, 약 1년간 체류했다. 1년간 체류한 이유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 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 고향
그러다 고향을 떠난 지 13년 만인 1668년 바타비아 (지금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거쳐 네덜란드에 귀국한 하멜과 동료들은 소속 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조선과 일본에서 지낸 12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달라고 요구하여 보상금을 받았다. 이때 하멜은 정식 보고서인 1653년 바타비아발 나가사키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를 회사에 제출했는데 이 문서가 ‘하멜표류기’이다. 하멜은 평생 ‘하멜표류기’와 ‘조선왕국기’를 남겼다. 이후 하멜은 인도로 항해하기도 하였으나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정보 외에는 이후 생활은 미상이다.

○ ‘조선에서의 삶’ 세부내용
건축가의 아들이고, 그의 대부가 시장이었으며, 집안은 부유했다.
1653년 상선 스페르버르호 (Sperwer)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 제주도에서 몇 개월간 억류되어 있다가 일행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방인을 외부로 보내지 않는다’는 쇄국정책에 따라 억류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이방인에게도 예와 체통을 중시 여겼기 때문에 표류해 온 외부인은 송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단적으로 하멜보다 80여년 전에 표류해왔던 서양인을 명나라를 통해 송환한 적이 있고 정조 때에는 영국함선 프로비던스호가 부산항에 왔을 때 물자와 식량까지 챙겨서 돌려보낸 적이 있다. 또한 이들보다 30년 전에 표류해온 같은 네덜란드인 박연은 일본을 통해 송환하려 했으나 일본이 거부하여 박연이 조선에 정착하게 되었다. 하멜의 억류가 조선시대를 통틀어 매우 예외적인 사례이다.
이에 앞서 제주도에 머물 시에 먼저 조선에 표류해 정착한 얀 야너스 벨테브레 (박연)를 만나 이야기도 했으나 탈출포기 권고를 들었다. 그러나 하멜은 탈출을 시도해 실패하기도 했지만 결국 일본으로 탈출하는 것에 성공한다.
하멜 일행이 제주에 표류한 초기 왕명에 의해 한양으로 이송되었고 그 과정에서 하멜은 자신이 들른 조선의 고을들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기며 자신이 상륙한 이 신세계에 대해 꼼꼼히 기록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나중에 하멜표류기의 기초자료가 된다. 한달여 간의 여정 끝에 한양에 도달한 하멜은 효종을 알현하였고 효종에게 일본으로 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결국 기각되어 훈련도감에 소속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대외적으로 북벌을 (실현 가능성은 없었지만)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하멜 일행은 서양의 군사기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훈련도감에 배속되었다.
하멜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하멜 일행의 하얀 피부를 무척 좋아했다고 나온다. 전통적으로 하얀 피부를 무척 선호하던 조선인들에게 하멜 일행의 하얀피부는 상류층들까지 구경을 갈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 외에 그들은 대갓집에 불려다니며 네덜란드 노래와 춤을 취 보이곤 했다.
그러던 중 그의 동료 두 명이 군졸로 있다가 청의 사신이 조선에 왔을때 지나가는 길에 무단으로 뛰어들어 자신들의 송환을 청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들은 헨드릭 얀스와 헨드릭 얀스 보스로 각각 남이안과 남북산이라는 조선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헨드릭 얀스 보스가 호소하는데도 네덜란드 말을 모르는 청나라 사신들이 멀뚱히 있자 사태가 이상함을 느낀 헨드릭 얀스는 도망하다 곧 체포된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는 한 명의 범행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승정원일기에 한 사람은 현장에서 잡히고 다른 한 사람은 달아났지만 체포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 사신들에 대해 하멜은 타르타르 (혹은 타타르) 사신들이 네덜란드인들을 보고 스페르베르 호가 표류한 후 조선에서 취한 30만냥에 달하는 재물을 청에서 요구할까봐 조정이 불안해했으며 무엇보다 화란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조선에서 조직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청에서 의심할까봐 매우 두려워했다고 저술하고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비슷한 맥락이다. 결국 조정에서 사신들에게 막대한 뇌물로 이 일을 무마시키고 이들은 투옥되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낙심한 나머지 음식을 거부하다 곧 죽었다고 하고 하멜은 이들이 참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리만 남겨놓았다.
어쨌든 탈출 소동은 조정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하멜 일행을 몹시 불순하고 위험한 자들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에게 전부 곤장 50대를 선고하여 매운 맛을 보여주려 했지만 효종이 이들은 도둑질을 하러 우리나라에 온 것이 아니라고 변호하여 태형은 피했지만 곧이어 그해 8월에 청나라 사신이 또 오게 되면서 조정은 긴장한다.
위기의식을 느낀 하멜 일행은 때마침 그들 숙소를 지나는 인평대군 (효종의 동생)에게 그들의 사정을 호소하며 살려줄 것을 간청했고 동정심이 든 인평대군과 효종은 그들을 강력히 변호하며 전라병영으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벌을 마무리지었다. 하멜도 기록에 국왕과 국왕의 동생 덕에 우린 목숨을 건졌다고 저술했다.
처음엔 전라병영에서 7년 가량 지냈으나 현종 때 극심한 흉년으로 나주, 순천 등으로 그룹을 나누어 이배했는데 하멜은 여수의 전라 좌수영으로 가게 되었다. 그를 인계받은 전라 좌수사 이도빈은 네덜란드 인들을 후히 대접해주며 한달에 2번씩 있는 점호를 빼곤 모든 노역을 면해주었으며 자주 연회를 베풀었다. 하멜은 “좋은 사람 (이도빈 좌수사)을 부임시켜 주신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라는 기록도 남겼다. 이도빈은 후일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다.
전라 병영에서 지내는 동안 근처의 스님들과도 아주 잘 지냈다. 유교 사회에서 배척을 당하는 스님들이 이역만리에서 괴물 취급 당하는 하멜 일행에게 동정심과 동병상련을 느껴서 자주 교류하고 화란의 얘기도 듣곤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좌수사는 총 네 번 교체되어 하멜은 다섯 명의 수사를 겪게 되는데 앞서 언급한 이도빈과 정영을 빼고는 네덜란드 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도빈이 물러난 이후 부임한 자는 네덜란드인들을 부려먹으려 작정을 했는데 급사했지만 그 후임으로 온 사람도 네덜란드 인들을 착취하려는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하멜 일행은 부여한 노역을 회피하는 한편,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탈출 계획은 매우 치밀했는데 그들은 우선 배를 구하기 위해 그동안 모은 돈으로 친해진 이웃사람의 이름으로 동네 어부의 어선을 사게 되었는데 이 동네 어부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되고 거래를 무르려고 하자 원래 가격의 2-3배의 가격을 더 주고 간신히 배를 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년 동안 이 배를 이용해 바닷길로 장사를 하며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고 1666년 드디어 8명의 일행들과 극적으로 탈출해서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했다.
일본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자 데지마의 네덜란드로 송환하였고 하멜은 네덜란드가 일본에 강력히 요청하면 남은 8명의 사람들도 모두 송환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일본을 통해 조선에 송환을 요구하였고 일본도 네덜란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조선에서도 이득을 얻어낼 기회라고 판단하여 조선에 송환을 요구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요청 전에 물밑 접촉이 벌어졌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물밑 접촉에 이르러서야 조선은 네덜란드인 8명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곧 조정에 보고되었고 사건이 벌어지고 몇 달이 지났는데도 지방관들에게 탈출사실이 보고되지 않고 일본을 통해 알게된 사실에 조정은 분개하고 조사를 지시한다. 일본은 이들을 송환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정보라도 더 얻어내려고 치밀하고 집요하게 심문하는 한편, 조선에는 그들을 송환해주는 대가로 통상에 관한 이익을 더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본 측이 과거 박연의 송환을 거절한 사실이 드러나며 끝나버렸으며 남은 8명에 대한 송환은 조선으로서도 이들을 데리고 있을 명분이 빈약했으므로 송환하기로 했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의 체면중시적 유교사상을 엿볼 수 있는데 돌려보낼 때 중간 집결지에서 좋은 옷을 입혀 보내야 조선의 체면이 안 깎인다는 의견이 조정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결국 이들은 옷을 지급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하멜 일행은 이들이 송환되기 전에 이미 일본을 떠났는데 13년간의 임금을 지급받기 위해 동인도 회사에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것이 하멜표류기이다.

○ 하멜 표류기
귀국한 하멜은 동인도 회사에 13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했고 이에 대한 증거로 써서 낸 게 바로 ‘하멜 표류기’이다. 이 ‘하멜 표류기’는 크게 ‘표류기 (漂流記)’와 ‘조선 왕국기 (朝鮮王國記)’로 구성 되어 있는데 ‘표류기’는 네덜란드를 떠난 이후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거쳐 다시 귀국할 때까지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일지이며, 난파 경위, 조선에 표박한 이후 하멜 일행이 겪은 체험과 감상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왕국기’는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정치, 군사, 형법 제도, 종교, 교육, 교역 등 하멜이 조선에서 체류하면서 보고 들은 조선에 대한 각종 정보들을 기록한 것이다.
어쨌든 하멜은 네덜란드로 되돌아온 이후로도 선원 일을 계속해 서인도 제도에 갔다왔다는 기록과 평생 미혼으로 살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자세히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이후 하멜 표류기는 조선에 대한 지리, 언어, 풍속 등을 유럽에 소개하는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알려졌다. 이전까지 서양인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악어나 괴조가 사는 아프리카 같은 신비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이 책을 통해 조선의 실상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OC)는 하멜의 표류기를 보고 일본과의 교역보다 조선과 직접 교역하는게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코리아 호”라는 배까지 만들어 직접 무역을 하려고 했으나.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 이익을 남기기위해 “네덜란드가 직접 조선과 무역을 하려고 시도할 경우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류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압박하여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무역을 포기하게 된다.
하멜의 기록은 조선에 다소 비우호적으로 서술되는데 자신의 고생담을 강조해야 더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표류 직후 우리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도로서 무색해질 정도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저술하는 등 호의적인 내용도 많다. 더불어 평생 미혼이었다고 한다. 조선에서 맺어진 처와 자식에 대한 감정도 실려있는 듯 보인다.
○ 하멜 기념관련
하멜과 조선의 인연을 두고서 최근까지 네덜란드에서 많이 아는 사람이 없었으나 2002년 월드컵을 이용해 유명해진 축구 감독 거스 히딩크가 네덜란드에 소개되면서 하멜도 알려졌다. 하멜의 고향 호린헴에서는 하멜 동상이 세워졌고 하멜이 조선에 억류당해 7년간 체류했다고 알려진 전라남도 강진군에도 하멜 기념관이 2007년 8월경에 완공되었으며, 일본의 나가사키 시에도 하멜 기념관이 있다. 2003년에는 국립제주박물관에서 ‘하멜표류기’의 육필 원고 원본을 공개하였고 현 서귀포시인 당시 남제주군에서도 길이 36.6m 높이 11m 규모 당시 네덜란드 항해용 상선을 85% 규모로 축소해 제작하여 하멜의 제주도 표류 350주년을 기념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