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11월 9일, 일본 에도막부가 권력을 메이지 왕에게 빼앗기고, 메이지 유신 (明治維新, 1868 ~ 1871) 시작
메이지 유신 (明治維新)은 일본이 정치 경제 군사 전 분야에 걸쳐 서구화를 성공시킨 일련의 대사건을 말한다. 1867년 11월 9일, 에도 막부가 권력을 메이지 왕에게 빼앗기고,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는데 대개 개시 시기는 메이지 (明治) 원년인 1868년으로 간주한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명칭은 현대 역사 용어로, 당시에는 ‘고잇신’ (御一新, 어일신) 등으로 불렸다.
메이지 유신 (일: 明治維新, 메이지 이신)은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왕정 복고를 통한 중앙 통일 권력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과정을 총칭한다. ‘메이지 유신’은 학문상 명칭이며, 당시 ‘고잇신’ (일: 御一新) 등으로 불렸다. 메이지 유신의 개시 시기는 1868년이며 종료 시기는 1871년 폐번치현 (廢藩置縣), 1873년 지조개정 (地租改正), 1877년 세이난 전쟁 (西南戰爭), 1889년 헌법 발표 등 여러 설이 있으며 정설은 확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학계에서는 1889년 헌법 제정으로 메이지 유신이 종료되었다고 본다.
○ 배경
에도 막부는 외교에 관한 권리를 독점하고, 일본인의 출입국과 무역을 관리, 통제, 제한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쇄국 체제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856년부터 1860년에 걸친 아편 전쟁 이후 동아시아로 진출하려는 서구 제국주의의 물결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 제독이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개국 요구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흑선 내항). 이에 막부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굴욕적인 통상조약 (안세이 5개국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막부 정부에서 칙허 없이 처리했다는 점 때문에 이에 반발한 반막부 세력이 일어나 막부 정부와 대립하는 혼란기를 겪었다. 그러다가 260여 년이나 내려오던 도쿠가와 막부가 1866년 사카모토 료마를 내세우는 삿초 동맹에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과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 상세
200년 넘게 근세 일본은 에도 막부 체제 하에 있었다. 막부가 사무라이 봉건 영주들을 다스리는 봉건제로, 조선 원정 실패 후 어수선했던 일본을 안정시키고 문화 발전을 이룬 시대였다.
1853년 미해군 증기선 함대가 도쿄 근해에 나타나면서 모든 게 변했다. 동아시아는 최강 청나라 조차 대영 제국의 함대 앞에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지도 벌써 20여 년이 지났다. 에도 막부는 혹시 있을 침략을 걱정하고 긴장 상태였다. 그러나 페리 제독의 요구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이었다. 침략이 아닌 건 다행이었지만, 개항 약속이나 외국인 신분 보장 등 민감한 문제가 있었다.
에도 막부는 대로 (大老) 이이 나오스케의 주도 아래, 통상조약을 맺자는 데로 기울었다. 그러나 외교 문서는 막부에서 써도, 최종 수결은 일황이 한다. 막부는 교토 황궁의 재가를 기다렸다.
그런데 당시 고메이 왕이 ‘짐은 이인이 싫다’며 수결을 자꾸 미뤘다. 일왕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막부는 일왕을 제끼고 조약에 서명했다. 미군 함대는 곧 귀국했지만 일본 국내는 들끓었다. 외적을 막아야 할 막부가 굴욕 외교를 한데 대해 강경파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막부의 신분제에 엎드려 있던 하급 무사들의 탈번이 잇달았고, 칼 든 낭인들의 기세가 살벌했다.
문제는 에도 막부가 단순히 권위를 잃은 정도가 아니었다. 요시다 쇼인을 위시해 서구 열강의 침략을 알던 선구자들이 막부로는 외세를 막지 못한다는 주장 및 그 사상적 토대를 제시한 것이다. 단지 불평 불만자에 불과했던 젊은이들이 정치적 확신범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존왕양이의 기치 아래 왕과 국가는 곧 그들의 종교가 되었다.
존왕양이란 쇄국을 목표로 일왕에게 정권을 반환 하자는 사상이었지만, 조슈 번이 함부로 외양선을 공격했다가 된서리를 맞았던 시모노세키 전쟁 등을 거치며 이들 역시 개국으로 여론이 기울었다. 하지만 막부로는 절대 열강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는 대의 명분을 세우고, 경쟁적으로 서양의 군제와 병기를 수입했다.
막부는 아랑곳없이 서구화를 진행시켰다. 그러나 기득권의 속성이 다 그렇듯, 막부의 서구화는 막부를 중심으로 한 정치 구조는 그대로 둔 채로 서구의 과학 기술과 병기, 학문 정도를 도입하는 온건적 개화였다.
죠슈 번 혼자의 힘으로 일본을 바꿀 수는 없었다. 1차 죠슈 정벌 때 막부가 대군을 움직이자, 죠슈 번은 급진 개화파들을 다 쳐내고 최고위 3명의 중신들이 할복하고 막부에 항복했다. 막부의 승리로 끝나는 줄 알았던 당시 정세는 탈번 낭인 사카모토 료마 등의 노력으로 삿초 동맹, 삿토 맹약 등으로 사쓰마 번, 도사 번이 죠슈 번과 손을 잡으면서 일순간에 변한다. 여기에 쐐기를 박는 사카모토 료마의 ‘신정부강령팔책’에 따라 급진 개화파 (도막파)들이 막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압박해 대정봉환에 성공한다.
평화롭게 정권 교체가 되나 싶던 일본은 사쓰마 번의 도발로 내전에 휩싸이고, 신무기와 서양 병제를 먼저 도입한 급진 개화파들이 도쿠가와 군을 일본 동북부로 밀어냈다. 결국 도쿠가와 막부는 타도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868년 메이지 왕이 즉위하면서 메이지 유신이 선포된다.
일면 보면 이해가 힘들지만 여러 상황들을 다 살펴보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걸 알 수 있는데, 우선 이 당시 정변을 주도했던 지역이 사쓰마와 조슈 두 번이었고 그 중에서 막부와의 공무합체 (公武合体)를 추구하는 집단으로 잔류 중이던 사쓰마 번 소속의 무사가 ‘사소한 무례’를 이유로 영국인을 살해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 그 이후로는 반막부 세력 (신정부군)과 영국 상인들 사이에 무구 (武具), 조선 (造船) 통상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개군 (改軍) 현상이 돋보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비교적 적은 사건으로 끝난 사쓰마와 달리 조슈는 도막 (막부 토벌) 정신으로만 일관하면서 존황양이 의식을 일으키고 1864년에는 아예 시모노세키를 항해하는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양선에 발포하기까지 했으나, 곧 조슈 번도 열강의 보복으로 국력의 격차를 실감하고 도막 정책으로 항거하는 개국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전면 개항을 한 것도 이 때의 경험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일본도 막부 체제 하에서 어느 정도 서양화가 이뤄졌지만, 화혼양재라는 명목 하에 그다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에 이와쿠라 토모미, 이토 히로부미 등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여 직접 견학하고 서양의 문물, 제도 등 많은 걸 배웠는데, 이런 배움 속에서 내린 결론은 전면 개방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국내에서 반발이 없을 리 없고 사가 번 → 히고 (구마모토) 번 → 아키쓰키 번 → 조슈 번 순으로의 사족 반란이 발생했다. 이후로도 신정부에서 정한론이 무산된 점과 산발탈도령 (단발령 + 폐도령)에 항거한 사쓰마 번 사무라이들은 특권계급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뭉쳤고, 이들이 일으킨 반란이 바로 서남전쟁이었지만 결국 진압되고 개항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 동맹
1866년 사쓰마 번의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 사이의 삿초 동맹이 이뤄졌다. 이 두 지도자는 고메이 왕을 지지하였다. 이들은 사카모토 료마에 의해 천거되었는데 도쿠가와 쇼군의 지배에 도전하여 왕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1866년 12월 25일 고메이 왕이 세상을 떠나자 1867년 1월 9일 메이지 왕이 뒤를 이었다.
○ 개혁의 내용
메이지 정부는 주로 구미 열강 국을 따라 잡기 위해, 개혁을 모색하였다.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 (地租改正)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 하에 유럽과 미국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하여, 민주화와 인권 운동을 탄압하고 왕이 주도하여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였다.
– 중앙 행정
막번체제의 붕괴로, 중앙집권 국가의 확립을 서둘러야 했던 신정부는, 율령제를 본보기로 한 명칭을 부활시켰다.
왕정 복고의 대호령으로 인해, 막부나 섭정, 간파쿠의 폐지와 일본 천황의 친정이 결정되어, 일본 천황 아래로 총재 (総裁), 의정 (議定), 산요 (参与)로 나뉘게 되는 관제가 시행되었지만, 메이지 왕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것을 보좌하는 체제가 필요했다. 거기서, 메이지 원년 4월 21일, 정체서 (政体書)가 공포되었고 (정체서 체제), 다음 해 율령제의 2관 8성을 본뜬 2관 6성제가 발족한다. 구체적인 행정 기구로써는, 태정관 (太政官)과 신기관 (神祇官)을 두어, 태정관 아래에 각 성 (省)을 두는 율령제가 모사되었지만, 그 후 민부성에서 공부성으로 분리되거나, 형부성으로부터 사법성으로의 개편 등 무수한 개변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도가 안정되지 않았다. 또한 입법부인 좌원 (左院, 후 원로원; 元老院), 우원이나 지방관 회의등도 설치, 폐지가 반복되었다. 메이지 중앙의 개혁은 1885년 내각 제도의 발족으로 간신히 안정된다.
또한, 입법부에 관해서 기도 다카요시등이 메이지 초부터 의회개설을 주장하였지만, 의회제도를 발족시키기 위해선, 관제 개혁, 민도 (民度), 국민 교육등의 부분에서 미성숙하여 시기 상조였기 때문에,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유사 전제 (有司専制)’라고 불리는 사쓰마, 조슈 번의 파벌에 의한 관료를 중심으로 한 개혁 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의 고조나, 여러 제도의 정비에 의한 개혁 성숙 등도 있어, 1881년에 ‘국회 개설 조서’가 나와, 동시에 이토 히로부미등에 의해 의회 제도를 전제로 한 헌법제정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어, 헌법 심의를 위한 추밀원이 설치되었다. 1889년 일본 제국 헌법 공포, 다음 해 제국 의회가 발족하여,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입헌 군주제 · 의회제 민주주의 국가가 완성되었다.
수도에 대해선, 당초 교토에서는 구폐 (舊弊)가 많다고 하여, 오사카 천도론이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주창되었다. 그러나 교토에서 옮기는 것에 대해 반대가 많았고, 에도 성의 개성도 있어, 에도를 도쿄로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메이지 천황의 2번 도쿄 행차로 의해 태정관도 도쿄에 옮겨져, 도쿄가 사실상의 수도가 되었다.
– 지역 행정
메이지 정부의 지방 행정으로, 도쿠가와 가를 슨푸 번으로 이동, 교토, 나가사키, 하코다테를 정부 직할 ‘부 (府)’로 한 것 이외는, 원칙으로서 이전의 번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부국강병 목적의 근대국가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화에 의한 정부의 지방 지배 강화가 필요했다.
우선, 메이지 2년의 판적봉환으로 구 번의 영주가 자발적으로 판 (토지), 적 (인민)을 왕에게 반납하여, 다시 지번사 (知藩事, 지한지)로 임명되어, 번의 영지와 영주의 분리를 도모할 수 있어, 중요 지역이나 옛 막부부 직할지였던 부, 현과 함께 ‘부번현 체제 (府藩県体制)’가 된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를 진행시켜, 개혁을 전국적으로 망라하려는 데에 있어 번의 존재는 방해가 되었고, 번 측에서도 재정의 핍박이 계속 되어 자발적으로 폐번을 신청하는 번이 잇따랐다. 1871년 8월 29일, 사쓰마, 조슈 번 출신의 지도자에 의해 폐번치현이 실시되어 도도부현제도 설치 (당초에는 3부 302현, 직후 정리되어 3부 72현), 중앙정부로부터 지사를 파견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것에 대해선, 령제국의 지명을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명이 부현명이 된 곳도 적지 않다. 그러나 사쓰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쓰이외는 눈에 띈 반발은 없었다.
– 여러 제도의 개혁
폐번치현 (번을 폐지하고 모두 현으로 바꾸는 것)과 태정관 제도의 개혁을 거쳐 중앙집권 체제가 갖추어짐으로써, 간신히 옛 막부 시대의 제도를 개혁할 준비가 갖추어졌다. 거의 동시에 궁중 개혁도 이루어져, 구래의 궁중직이나 궁녀 폐지, 사족을 중심으로 한 시종 등이 메이지 왕을 개혁 군주에 어울리는 왕으로 양육하게 된다. 막부 말기에는 병약했던 메이지 왕도, 사족에 의한 양육 때문인지 건강도 회복하여, 서양식 입헌 군주로서의 마음가짐도 배워, ‘메이지 국가’ 원수로 어울리는 존재가 되어 갔다. 특히 헌법 제정 과정에서의 추밀원 심의에 모두 참석하였고, 또 국회 개설 전후 입헌 정치 미성숙기에 수상이 빈번하게 사임, 교대했을 때에도 정국의 조정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분 제도에서는, 에도 막부 아래의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 구 무사 계급을 사족, 그 이외를 평민으로 하여,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구 구게, 다이묘나 일부 승려 등을 새롭게 화족으로서 특권 계급으로 함과 동시에, 궁내성 지배 아래로 두게 되었다.
또한, 유신 정부는 서양의 여러 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이와쿠라 도모미를 정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을 부사로 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미에 파견하지만, ‘잔류 정부’로 불리며 일본에 남은 사이고 다카모리, 이노우에 가오루, 오쿠마 시게노부,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오키 다카토 등에 의해서, 차례차례로 개혁은 진행되어 갔다.
주 개혁으로는 학제 (学制) 개혁, 지조 (地租) 개정, 징병령,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단발령 등이 있다. 다만, 이런 개혁은 급격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모순도 적지 않았고, 사족이나 농민의 불만을 사서, 후에 정한론으로 이어졌다 라고도 말해진다. 구미 사절에서 귀국한 이와쿠라나 오쿠보가 정한론을 지지하지 않았고, 더욱 더 오쿠보 밑으로 내무성이 설립됨으로써 여러 개혁의 정리가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 이루어진 문명 개화의 움직임, 육식 보급과 철도 개통 등과 함께, 신시대 ‘메이지’의 분위기가 양성되었다.
경제 산업분야에선, 부국강병, 식산흥업의 슬로건 아래, 도미오카 제사장을 비롯한 관영공장이 만들어지는 등, 정부 주도의 산업 육성이 시작되어, 서양식 공업 기술이 도입되었다. 금융제도에서도 통화단위로 ‘엔’을 도입 (1871년), 국립은행 조례에 의한 국립은행 (내셔널 뱅크)을 거쳐, 통화 발행권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으로써 일본 은행을 설립 (1882년) 하는 등, 자본주의적 금융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유통 분야에서는, 우편제도, 전신망의 정비, 철도 및 선박 운수 (민간 우편 기선 미쓰비시 회사와 국책 회사인 공동 운수 회사의 경합을 거쳐 일본 유센 회사가 되었다) 등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본 활동에는, 실직한 대신 녹봉을 얻은 화족의 자산에 의한 투자 활동도 배경에 있었다.
이러한 개혁에는 적극적으로 서양 문명의 선진 제도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오야토이 외국인’ 이라고 불리는 외국인이, 기술 지도, 교육 분야, 관제, 군제 정비 등 여러가지 분야에서 고용되어 근대국가 건설을 도왔다.
– 종교정책
.불교
종교적으로는, 고대의 제정일치로 돌아가는 개혁인 점에서, 1867년 음력 1월 17일에 제정된 직제에는 하느님을 7가지 필두에 두어, 음력 3월에는 신불분리령이 내려졌다. 신불분리령의 주 의미는 불교 배척이 아닌, 에도 시대까지의 신불절충에서 불교와 신도의 혼합에서 양자를 분리하는 것이었지만, 당시의 복고적 시운은 불교조차도 외래의 종교로서 강하게 배척하는 폐불훼석으로 향했다.
.기독교
1612년 기독교 금령에 의해 막부의 질서에 반대하는 반국가적 종교로 규정되어 탄압받던 기독교는 메이지 정부에 의해서도 계속 금지되어 기독교 지도자 총 140명은 하기 (66명), 쓰와노 (28명), 후쿠야마 (20명)로 나뉘어 강제로 이주되었다. 그 후, 메이지 2년 (1869년) 12월 7일에는, 기독교인 약 3,000명을 가나자와 및 10개의 번으로 분산 이주시켰다. 하지만 메이지 4년 (1871년) 11월, 이와쿠라 도모미특명 전권 신도 국교화 정책과 관련해서, 기독교 금지를 해제해도 즉시 구미가 조약개정에는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생각에 근거한 정부내의 보호파의 반대뿐만 아니라, 종교계나 일반 민중에서도 ‘사종문 (邪宗門)’ 금지 해제에는 반대하는 목소리가 강해 분규 (紛糾)하였으나, 1873년 2월 24일 금지 고찰 (高札)을 제거, 그 뜻을 각 구니에 통고, 이주된 기독교도들이 마을로 돌아오자 드디어 종결되었다.
– 외교 정책
신정부의, 최대 목표는 구미 열강을 따라 잡는 것이기 때문에, 구 막부 시대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 개정이 급선무로 여겨졌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서구 여러 제도 조사도 목적이었지만, 조약 개정을 위한 사전 준비라는 면도 있었다. 실제로 교섭도 준비되었지만, 일본을 근대국가라고 보지 않는 구미제국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아직 시기 상조였다. 그 때문에, 우선 국내정책의 측면에서 국민들이 가진 외국인에 대한 반감을 제거하기 위해 외국인에 대한 공격을 법령으로 금지시키고, 만국공법을 수용하였으며 외국인이 국내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조치, 유럽화 정책 등여러 정책을 시도했지만, 조약 개정 자체는 반세기에 미치는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했다.
○ 개혁의 영향과 비판
주로 구 사쓰마 번, 조슈 번 및 일부 구게에 의한 전제 정치였기 때문에 ‘번 파벌 정부’라고 야유를 받았다. 하지만 중급 관료 이상에 구 신판 번, 구 막부 신하 였던 자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세력이 주도했다고는 하기 어렵다. 메이지 유신의 개혁은 새로운 제도로 인한 모순을 낳기도 했지만, 단기간에 입헌제도 달성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아시아에서는 메이지 유신을 모범으로 개혁, 독립 운동을 실시하려고 하였다. 다만 대부분이 형태만의 개혁이나 일면만 파악한 ‘위에서 부터의 개혁’으로 시종하여, 성공한 예는 많지 않다. 전통주의자들은 신성한 왕(천황)제가 현대 문명에 양보를 강요당하는 문제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 주요 한자어의 탄생
현재 한국인, 중국인의 일상 생활에 사용하는 상당수의 주요 한자어 (漢字語)는 메이지 유신 시기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는 서양의 근대적 개념을 들여오는데 이름이 없으면 곤란하므로 새로 이름을 붙인 것. 후쿠자와 유키치 (福澤諭吉) 같은 당대의 석학들은 1873년 메이로쿠샤 (明六社)라는 학술 단체를 결성해서 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근대 의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용어들을 만들어냈다.
대표적으로 ‘사회 (社會)’라는 단어는 일본인이 외국어를 한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든 번역어 (飜譯語)다. 서양 개념인 ‘society’에 해당하는 동양 한자권의 언어로 정착됐다. 회사 (會社)는 사회를 거꾸로 뒤집은 것이지만 영어의 Company를 번역했다 (단, 중국에선 공사 [公司/gōngsī]로 번역했다).
‘철학 (哲學)’도 마찬가지다. 서양 개념인 ‘philosophy’를 ‘철학’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국인이 늘 사용하는 ‘개인’ (個人)도 마찬가지이다. 일본 학자들이 메이지 유신 (明治維新)을 거치면서 영어의 ‘individual’을 한자 (漢字)로 번역한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자유’ (自由)라는 단어도 메이지 유신 (明治維新) 이후 일본인들이 서양 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든 번역어 (飜譯語)다. 영어의 liberty, freedom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던 ‘自由’를 근대적 의미로 전용한 것이다. 메이지 시대 이전 일본에서는 ‘제멋대로’라는 의미로 사용된 ‘자유 (自由)’가 많은데, 이로 인해 일본 사람들은 ‘자유 (自由)’라는 단어에 대해 처음에는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의미가 바뀌었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외국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자 (漢字)를 사용해 만든 단어는 ‘개인’ (個人) 뿐만 아니라 ‘자유’ (自由), ‘권리’ (權利), ‘사진’ (寫眞), ‘헌법’ (憲法) 등 현대 한국인이 사용하는 수 많은 단어들이 메이지 유신에서 만들어졌다.
– 조선에 끼친 영향
이때부터 국서 (서계)의 발신자가 쇼군에서 왕 (천황)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일본이 이렇게 개항을 결정하던 사이 청나라는 한창 아편전쟁을 겪으며 차차 개항해나간 덕에 그냥 서양과 직접적으로 근대적 외교 관례에 맞춘 조약을 체결해서 아편전쟁만 빼면 개항 과정 실패 이후 그리 큰 피해는 없었다.
문제는 아직 통상 수교를 거부하고 있던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조선 (한국). 조선이 준 도서 (圖書)가 아닌 새로 만든 도장을 사용한 점과 천황, 황조 등 청나라나 사용할 수 있는 황칙의 용어를 일본이 쓴 것 (즉 기존 화이질서의 위계상 일본<조선)에 심히 불쾌해하며 국서 (서계)의 접수 자체를 반환 · 거부해버렸다. 186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국서 거부 사건 (서계 거부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후 일본은 다시 조약을 맺자고 제의했지만 흥선대원군은 또 거부했다.
1872년 당시엔 점점 골이 깊어지다가 소요 사태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정식으로 국교가 단절되기까지 했으며 그전에 이미 조선 통신사가 50년간 교류가 없었다는 점에서 근세의 조일관계가 유명무실화 되었다. 이에 더욱 격노한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일시적으로 힘을 얻었지만 척화파인 흥선대원군과 정한론 강경파 (사이고 다카모리)가 양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실각하였다. 두 나라 모두 다시금 협상을 시도했지만, 수뇌부만 어느 정도 잘렸을 뿐이지 양국 모두 그 당시엔 척화파/정한론이 주 파벌이었기에 협상도 의미 없이 계속 결렬되고 그 와중 운요호 사건까지 터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선을 건너버렸다.
또 그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청 (淸) 이외에 서양권 국가들과의 교류 및 개방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고 그 범위에는 일본도 포함되어 있다. 이미 그 전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이후로 양란 (洋亂)이 연이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을 필두로 쇄국정책이 시행되고 있었으며 또한 서양에 문호개방을 한 일본에 대해서도 적개심과 불편함을 보이고 있었다.
우연인지 의도인지는 몰라도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조선을 멸망시키고 일본에 병합시키는 짓을 저질렀다.
○ 시대적 사건
쿠로후네 사건
미일화친조약
미일수호통상조약
무오의 비밀칙서
안세이의 대옥
사쿠라다 문 밖의 변
사카시타 문 밖의 변
테라다야 사건
분큐의 개혁
나마무기 사건
사쓰에이 전쟁
8.18 정변
이케다야 사건
금문의 변
시모노세키 전쟁
쿄호지 사건
제1차 조슈 정벌
시모노세키 거병
삿쵸 동맹
제2차 조슈 정벌
테라다야 사건
삿토맹약
대정봉환
오미야 사건
덴마야 사건
왕정복고의 대호령
무진전쟁
.토바 · 후시미 전투
.고슈 가쓰누마 전투
.우에노 전쟁
.호쿠에쓰 전쟁
.아이즈 전쟁
.하코다테 전쟁
에도 개성 (江戸 開城)
판적봉환
폐번치현
단발령
이와쿠라 사절단
메이지 6년 정변
사가의 난
폐도령
서남전쟁
키오이자카의 변
대일본제국 헌법
○ 조직
막부육군
사쓰마 번
.세츄구미
막부전습대
조슈 번
기병대 (말 타는 기병이 아님)
신정부군
신센구미
미마와리구미
에조 공화국
아이즈 번
도사 번
도사근왕당
해원대
○ 사상
교육에 관한 칙어
미토학
정한론
존왕양이
탈아입구
화혼양재
○ 인물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고메이 덴노
메이지 덴노
도쿠가와 이에모치
도쿠가와 요시노부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토시조
무츠 무네미츠
사카모토 료마
코마츠 타테와키
카츠 카이슈
카와카미 겐사이
야마가타 아리토모
에노모토 다케아키
존 만지로
요시다 쇼인
이노우에 가오루
이와쿠라 도모미
이이 나오스케
이토 히로부미
타카스기 신사쿠
후쿠자와 유키치
매튜 페리
해리 스미스 파크
어네스트 사토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