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535년 10월 2일, 프랑스의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 (Jacques Cartier)가 세인트로렌스강을 거쳐 몬트리올 (Montreal) 도착
캐나다 몬트리올 지역을 서구인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때는 1535년 10월 2일, 프랑스의 항해가이자 탐해가인 자크 카르티에의 발견 (방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카르티에는 하루도 채 안되는 기간에 오슐라가에 머무른 것으로 파악되며 그의 관찰을 통해 오슐라가가 어떻게 생겼는지 간략하게 설명한다.
카르티에에 따르면, 오슐라가는 산자락 근처에 있었다. 산자락을 따라 비옥한 경사로에 농사를 지었고 산 정상에는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산은 루아얄 산 (Mont Royal) 이라고 한다. 마을은 동그랗고 피라미드같이 생긴 나무 담장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오슐라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까지는 모르지만 맥길 대학교 근처에 발견된 이로쿼이 족 유적지가 오슐라가라는 설이 있고 또다른 설은 몬트리올과 라발 사이의 프레리 강을 건너 우트르몽 지역에 살았을 거라는 설도 있다.
서양인들이 도착하기 전 몬트리올 지역에는 세인트 로렌스 이로쿼이 족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휴론 족이나 이로쿼이 족과 함께 세인트 로렌스 이로쿼이 족은 이로쿼이어족으로 같은 언어적 계통의 사람들이지만 혈통이 다른 것으로 파악된다.
세인트 로렌스 이로쿼이 족은 1300년대 그 이전에 근처에서 살던 종족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이 되며, 이들은 주로 한 곳에 머무르면서 옥수수, 콩, 애호박, 담배를 재배하는 등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또한 주식으로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였으며, 알곤킨 족 수렵인과 수시로 교역하였다.
몬트리올 (Montreal, 프: Montréal; 몽레알)은 퀘벡주 남쪽에 있는 캐나다에서 토론토 다음으로 가장 큰 도시이며,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불어권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몬트리올은 미 대륙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불어권 도시이기도 하며 전 세계에서 주요 불어권 도시 중 한 곳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몬트리올의 인구는 퀘벡주의 주도인 퀘벡보다 세 배 가량 많으며, 몬트리올 시의 인구는 2016년 기준 170만 4천여 명, 몬트리올 섬 등지의 광역 인구까지 포함하면 409만 8천여 명이 살고 있다.
또한 몬트리올 시 인구의 49.1%은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고, 12.8%는 영어를, 33.2%는 불어와 영어 외에 다른 언어가 모국어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몬트리올은 1967년 세계 엑스포와 1976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또한 몬트리올 세계 영화제, 몬트리올 국제 재즈 축제, 코미디 축제인 Just for Laughs (프: Juste pour rire), 캐나다 그랑프리 등 다양한 축제를 매년 개최하는 축제의 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몬트리올의 아이스 하키 구단인 몬트리올 커네이디언스는 내셔널 하키 리그가 창립된 1909년부터 도시의 주요 스포츠 구단으로 굳건히 자리잡아왔다.
몬트리올의 구도심 지역인 비외몽헤알은 1964년에 퀘벡 주 역사지구로 지정되었다.

○ 자크 카르티에 (Jacques Cartier, 1491 ~ 1557) 개관
자크 카르티에 (프: Jacques Cartier, 1491년 12월 31일 ~ 1557년 9월 1일)은 프랑스의 탐험가로, 지금의 캐나다 지역을 처음으로 탐험한 유럽인이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지원을 받아 1534년과 1535년에 캐나다를 탐험하였다.
오늘날 퀘벡 지역인 스타다코나 마을에서 도착하여 원주민 추장 돈나코나에게 지명을 물어보았는데, 언어소통에 문제가 있어 말뜻을 이해못했던 추장은 그들의 말인 이로쿼이-휴런어 (語)로 ‘마을’이라는 뜻에 카나타 (Kanata)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자크 카르티에는 이를 지명으로 알아들었고 오늘날의 캐나다 (Canada)라는 나라 이름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캐나다에 정착촌을 세우려는 시도는 혹독한 겨울 추위로 인해 실패하였다.
1541년에 다시 캐나다 여러곳을 탐험하였는데, 이는 훗날 1604년에 앙리 4세의 명을 받은 사뮈엘 드 샹플랭이 캐나다에 프랑스 정착지인 퀘벡을 건설하여 프랑스가 캐나다를 식민통치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 초기 생애
자크 카리티에는 브르타뉴 공국 생말로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자메 카르티에, 모친은 게슬린 장사르였다.
탐험에 나서기 전인 초기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북프랑스의 어촌 생말로에서 자란 자크는 아마 고향에서 항해를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학자들은 카르티에가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을 여행했을것으로 추정하지만 이를 증명할 자료는 없다.
1519년 5월 카테린 드 그랑슈와 결혼하였다. 부인 카테린은 카르티에보다는 상류층 출신이었기에 카르티에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갔다.
많은 역사가들은 카르티에가 1524년과 1528년 신세계로 조반니 다 베라차노의 항해에 함께 했다고 추정한다.
카르티에는 항해 경험을 쌓으며 탐험가가 되어갔다.
그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신대륙에서 금과 은을 발견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도 신대륙 탐험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아시아로 향하는 북서항로를 찾기를 원하였는데 이 모험적인 사업에 카르티에가 선택되었다.
- 캐나다 탐험
– 첫 번째 항해 (1534년)
카르티에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로부터 중국과의 무역을 위해 항로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아 1534년 4월, 두 척의 배를 가지고 출항했다.
현재의 뉴펀들랜드 및 캐나다 동부 연안을 조사하고 세인트로렌스 만을 건너 프린스에드워드 섬을 발견했다.
가스페 반도의 동쪽 끝에 도달, 세인트로렌스 강 하구 부근을 탐험하고 일대를 누벨프랑스라고 명명했다.

– 두 번째 항해 (1535년~1536년)
두 번째 항해에서 카르티에는 지난 번에 발견한 세인트로렌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스타다코나 (현재의 퀘벡 시)를 발견했다.
또한 스타다코나와 그 주변의 땅을 “캐나다”라고 명명했다.
– 세 번째 항해 (1541 ~ 1542)
카르티에는 사그네의 대지를 찾는 데 3번째 항해를 택하는 데 허락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 일은 원정이 떠나기 5년전이었을 것이다.
이번에 로크 드 로베르발이라 불리는 남성이 담당할 것이었다.
로베르발의 팀은 정착이 시작된 후 이어진 해에 북아메리카에서 카르티에의 원정을 만나는 것이었다.
1541년 5월 23일 자신의 선원들과 5척의 항선과 함께 카르티에는 생말로를 떠났다. 원정의 목표는 북아메리카에서 정착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8월 23일 스타다코나에 도착하였고, 오늘날 퀘벡시 근처에 “샤를부르루알”로 불린 정착지를 설립하였다.
그들은 지역을 탐험하기 시작하였다. 곧 카르티에와 그의 선원들은 금과 다이아몬드 같이 생긴 발견된 돌들을 믿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들이 사실 석영의 조각들이며, 금은 “바보의 금”으로 더욱 잘 알려진 황철광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카르티에와 어떤 그의 선원들은 호첼라가로 돌아갔다. 어떤 휴런족들은 그러고나서 사그네를 찾으러 카르티에의 팀과 함께 갔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찾지 않아 카르티에와 그의 선원들은 샤를부르루알로 돌아와 겨울을 보냈다.
봄까지 원주민과 프랑스인들 사이의 관계들이 적대적으로 변하였다.
프랑스인들은 정착지를 버리고 1542년 6월에 떠났다.

- 말년과 사망
샤를부르루알을 떠잔 후, 카터의 함대는 뉴펀들랜드에 있는 세인트존스 항구에서 로베르발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이후에 무가치한 것으로 찾아낼 다이아몬드와 금의 다량을 로베르발과 함께 가졌다.
로베르발은 카르티에와 정착자들에게 돌아서 정착지로 돌아가는 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하였다.
카르티에와 식민주의자들은 어느날 밤에 미끄러져 생말로로 돌아갔다.
그들은 10월 고향에 도달하였다. 카르티에의 탐헙 경력은 북아메리카로 그의 3번째 항해 후에 종말로 왔다.
그는 자신의 사유지를 관리하는 마지막 세월 동안 프랑스에 남아있었다.
1557년 9월 1일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유산
카르티에는 프랑스를 위하여 대지를 단언하고 발견한 것 뿐만 아닌 것으로 신임되었다.
하지만 원주민들에 대한 그의 대접은 항상 위대하지 않았다.
자신의 3개의 항해들을 통하여 카르티에는 세인트로렌스만과 세인트로렌스강을 탐험하는 데 첫 유럽인이 되었다.
오늘날 퀘벡시 근처에 프랑스의 식민지를 설립하는 데 자신의 시도가 실패하였어도 그의 발견들은 16세기와 17세기를 통하여 더욱 나가서 유럽인의 탐험으로 이끌었다.
프랑스인들은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부유한 모피 교역을 설립하러 가려고 하였다.
몬트리올에서 퀘벡시로 세인트로렌스강을 가로지르는 자크 카르티에 교를 포함하여 캐나다에서 몇몇의 장소들이 그의 영예에 이름을 땄다. 그리고 탐험가의 동상이 그의 고향 생말로에 세워져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