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시간과 타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엠마누엘 레비나스 / 문예출판사 / 2001.2.28
–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프랑스에 처음 소개한 독창적인 사상가
저자는 `타자성의 철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레비나스의 저서로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이 책에는 인간의 존재 의미, 특히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해명하는 일에 몰두한 레비나스의 독창적인 철학세계가 담겨 있다. 저자는 서양의 자아중심적 철학을 거부하고 개인의 인격적 가치와 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는 `타자성의 철학` 또는 `평화의 철학`을 구축하고자 한다.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엠마뉴엘 레비나스의 저서. 이성적 주체를 절대화하는 독일 관념론을 비판하고 타자 중심의 철학을 재정립할 것을 주장하는 철학서다. 주체의 절대화는 주체를 무한히 확장하는 이기주의로 나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타자를 절대적 존재로 인정해 이를 윤리학의 기본으로 삼자고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통철학이 무시한 여러 주제들 (쾌락과 신체성, 노동과 거주, 여자와 아이의 존재, 고통의 문제 등)을 중요한게 다루고 있다. 서양의 자아중심적 철학을 신랄하게 비판한 레비나스는 이웃과 타인에 대한 책임과 연대를 강조한 ‘타자성의 철학’을 구축하고자 한다.
○ 목차

1. 시간과 타자 – 존재의 고독
2. 존재자 없는 존재
3. 홀로서기
4. 고독과 홀로서기
5. 고독과 물질성
6. 일상적 삶과 구원
7. 세계를 통한 구원 : 먹거리들
8. 빛과 이성의 초월
9. 노동
10. 고통와 죽음
11. 죽음과 미래
12. 사건과 타자
13. 타자와 타인
14. 시간과 타인
15. 할 수 있음과 타인과의 관계
16. 에로스
17. 생산성
18. 해설 : 레비나스의 철학 – 존재 부조리의 경험과 주체의 출현
19. 향유, 거주 및 노동
20. 타인의 얼굴
21. 인간 존재와 죽음, 그리고 죽음 저편
○ 저자소개 : 에마뉘엘 레비나스, 엠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 ~ 1995)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는 리투아니아에서 유태인 부모 아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프랑스로 유학해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수학했고, 1928~1929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로부터 현상학을 배운 뒤, 193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9년 프랑스 군인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종전과 함께 풀려났다. 1945년부터 파리의 유대인 학교(ENIO) 교장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이 무렵의 저작으로는 『시간과 타자』(1947),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후설과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를 찾아서』(1949) 등이 있다. 1961년 첫번째 주저라 할 수 있는 『전체성과 무한』을 펴낸 이후 레비나스는 독자성을 지닌 철학자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1974년에는 그의 두 번째 주저 격인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가 출판되었다. 그 밖의 중요한 저작들로는 『어려운 자유』(1963), 『관념에게 오는 신에 대해』(1982), 『주체 바깥』(1987), 『우리 사이』(1991) 등이 있다. 레비나스는 기존의 서양 철학을 자기중심적 지배를 확장하려 한 존재론이라고 비판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윤리학을 제1철학으로 내세운다. 그는 1964년 푸아티에 대학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여 1967년 낭테르 대학 교수를 거쳐 1973년에서 1976년까지 소르본 대학 교수를 지냈다. 교수직을 은퇴한 후에도 강연과 집필 활동을 계속하다가 1995년 성탄절에 눈을 감는다.
– 역자 : 강영안
1952년 경상남도 사천에서 태어났다. 고려신학대학 (현 고신대학교) 재학 중 네덜란드에서 신학을 공부할 생각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로 옮겨 그곳에서 네덜란드어와 철학을 공부하였다. 1978년 벨기에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벨기에로 건너가 루뱅 대학교 철학과에서 철학학사와 석사 학위를, 198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에서 칸트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덜란드 레이든 대학교 철학과 전임강사로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맡아 강의했으며, 귀국 후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거쳐 1990년부터 2015년까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벨기에 루뱅 대학교 초빙 교수로 레비나스를 연구하였고, 미국 칼빈 대학교에서 초빙 정교수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강의하였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 기독교학문연구회, 한국칸트학회, 한국기독교철학회, 대한철학회, 한국철학회 회장, 인문학대중화위원회 위원장,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두레교회와 주님의보배교회 장로로 섬겼다.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와 미국 칼빈 신학교 철학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강교수의 철학 이야기』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 『강영안 교수의 십계명 강의』 (이상 IVP),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이상 한길사),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이상 소나무), 『주체는 죽었는가』 『자연과 자유 사이』 (이상 문예출판사), 『타인의 얼굴』(문학과지성사), 『칸트의 형이상학과 표상적 사유』 (서강대학교출판부), 『일상의 철학』(세창 출판사), 『믿는다는 것』 『대화』(이상 복있는사람),『종교개혁과 학문』(SFC출판부), 대담집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묻고 답하다』 (이상 홍성사) 등이 있다.
번역한 책으로는 『시간과 타자』(문예출판사), 『몸·영혼·정신』 『급변하는 흐름 속의 문화』(이상 서광사), 『신은 존재하는가』 (복있는사람) 등이 있다.
○ 서평
‘인간의 존재 의미, 특히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얻는다’라는 요약에 끌려 읽었습니다.
인간의 주체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것이 현대철학의 쟁점 가운데 가장 첨예한 문제라고 옮긴이는 첫 마디에 적었습니다. 레비나스 이전까지의 서양철학은 타자에 대하여 체질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이는 자아중심적 철학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타자를 자아로 환원하거나 동화하고자 했고, 그 결과 전제주의가 성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레비나스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타자와 함께 하는 ‘타자성의 철학’ 또는 평화의 철학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는 평가입니다.
<시간과 타자>는 1946~47년 사이에 파리의 카르티에 라탱에 있는 장 발의 ‘철학학교’에서 행하였던 네 차례의 강의를 묶었던 것을 30년이 지난 1979년에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저자는 시간을 존재자의 존재라는 존재론적 지평이 아니라 존재 저편의 방식으로, 즉 타자에 대한 사유의 관계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타자는 다른 이가 될 수도 있고, 초월자 혹은 무한자로 이해될 수도 있는 듯했습니다.
제1강의 강의주제에 관하여 저자는 ‘시간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사실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자체임을 보여주고자 한다(29쪽)’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존재의 고독, 존재자 없는 존재, 고독과 홀로서기 등을 말합니다. 신에 이르기 위하여 사람들은 존재하지만, 실제로 이런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 같습니다. 불안을 무의 경험으로 본 하이데거를 인용한 저자는 ‘만일 죽음이 무라면 죽을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이 아닐까?(45쪽)’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보니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 도깨비에서 무로 돌아갈 운명을 가진 도깨비가 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한다는 모순을 말했던 것 같습니다.
제2강에서는 홀로서기의 과정에서 부디쳐야 하는 고독의 물질성에 관한 사유가 이어집니다. 고독은 물질로 가득 한 일상적 삶의 동반자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일상적 삶의 물질성을 극복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존재하기 위하여 필요한 대상들과 거리를 두는 홀로서기를 통하여 주체는 자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지배를 통하여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신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제3강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을 뛰어넘어 객체를 장악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노동의 중요성을 설파합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분석 명제를 제시합니다. ‘노동에서, 즉 그의 노력, 아픔과 괴로움을 통해 주체는 한 존재자의 자유 속에 함축되어 있는 존재의 무게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74쪽)’라고 합니다. 그리고 종국에 닥쳐올 ‘죽음’에 대하여 고민하게 됩니다. 죽음은 언제가 될 지 모르는 미래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공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고통을 통하여 자신의 고독을 더욱 팽팽하게 지탱하고 죽음에 직면해서 설 수 있는 존재만이 타자와의 관계가 가능한 영역에 자신을 세울 수 있다(85쪽)’라고 정리하였습니다.
제4강에서는 죽음에 직면해서 자아는 절데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음을 직시하고,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죽음이란 사건의 타자성과 더불어 인격적이어야 할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타자와의 관계가 어떤 형식으로 주어졌는가를 탐구해보아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타인을 나와 맞서있는 존재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타자성을 절대적으로 근원적인 관계인 에로스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존재를 통하여 아들의 개념을 이끌어냈습니다. 이 마지막 부분은 좀 더 고민을 해보아야 할 부분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 독자의 평 1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를 읽으면서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사색을 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독특한 시각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석하고 있는 저자의 사고를 만나면서 ‘아!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는 공감을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밝혀 나간 것은 존재에 대한 새로운 각도의 해석이라 생각이 된다. 나도 그렇게 여겼던 적이 더러 있었으니까. 가령 자식들을 통해서 내가 존재하고 있는 듯함을 느끼는 것 등이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에게 배우고 그의 현상학을 프랑스에 처음 소개하는 역할도 담당했으나, 이후 이것과 입장을 달리하여 ‘타자성의 철학’이라는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글은 그가 프랑스의 한 철학 학교에서 4시간 강의한 내용을 엮어 놓은 책이다. 이 책은 그의 타자성의 철학을 잘 살펴볼 수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번역된 글이고, 강의 형태로 된 것이기에(음성언어를 옮겨 놓은 것이기에) 문장의 매끄러움은 비교적 적다.
언젠가(대학 다닐 때) 철학에 관심이 많아 철학 강의를 많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교수님들의 이야기는 철학이 대개 그렇듯이 논리적인 사고를 쫓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했던 말이 나오고, 또 나오고 해서 그 반복이 매우 힘들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같은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는 방법을 동원했던 듯하다. 그렇게 하나 그 내용이 오히려 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철학은 어려운 것,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가? 논리력이 부족하던 당시는 이렇게 철학에 대해 힘겨워 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도 솔직히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용어에 대한 정의를 정확히 내려주지 않는 상황에서 일상적인 뜻으로 용어를 대해 나가면서 내용을 이해해 나가는 데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던 것이다. 존재 존재자, 버려짐 던져짐 들의 용어들은 글을 이해해 나가는데 매우 소중한 용어들인데, 아무런 설명 없이 그들을 문장 속에 마구 사용해 놓고 있다. 우린 그것을 앞뒤의 논리에 따라 그리고 기존의 사전적 의미에 따라 해석을 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추상성을 지닌 그것들이 우리와 잘 놀려고 하지 않는 상황을 더러 만나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당혹감을 지니게 되고, 더러는 고통스러워 하기도 한다
고독은 존재자의 일체성 자체이며, 존재 안에서 그 존재로부터 어떤 형식을 얻는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주체는 하나이기 때문에 홀로 있다. 시작의 자유,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지배가 가능하려면, 요컨대 존재자가 존재하려면 고독이 있어야 한다. 이 고독으로 실존주의적 해석이 가능했음을 말하고 그것이 성공했기 때문에 낭만성이 잊혀 지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주체의 이러한 지배에는 현재성이란 시간이 개입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시간이 미래가 되면 그것은 또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자아가 자신에게 얽매이는 본질적인 이유가 물질성이고, 그것이 현재의 시간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인간은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그것은 구원의 문제를 야기하고 미래의 시간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하여 물질성의 현재는 미래와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고 현대 철학이 당면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하게 됨을 이야기 한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간과 관련된 타자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
먹거리, 노동 등의 현상적인 일들을 통해서 고독의 일부분이 해소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해결책일 수는 없다.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실존적인 아픔이 죽음과 관련성을 지니게 된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고독은 영원히 해결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저자는 시간과 타인 속에서 자아의 모습을 보고 있다. 에로스 속에서 생산성을 만나고,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자아는 지속성을 지니게 되고 고독의 문제는 자연적으로 해결되어 간다고 본다. 그것이 시간과 타자의 개념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내용이다.
조금은 환상적인 내용이나, 종교성은 가미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마음에 와 닿던 아니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다만 학문적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노력, 그리고 독창적인 사고를 통한 해법 제시 등은 참으로 마음에 가감 없이 다가든다. 도를 통한 사람의 모습을 보는 듯한 읽기를 했다. 철학이 직관과 닿아 있음을 보는 책이었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현대 철학에 너무 등한시했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다. 그리고 단순화시킬 수 있는 내용을 분석적으로, 언어 조각을 통해서 제시해 나가는 철학자들의 입담에 다시 철학에 대해 관심을 지녀 보아야 하지 않는가 생각도 해보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일까를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우리는 늘 철학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언어화되어 제시될 때 우리도 학문적으로 인지할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으면서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 독자의 평 2
학부시절 헌법 교수님께서 강의시간에 레비나스를 굉장히 많이 언급하셔서 4년 내내 레비나스의 책을 단 한권도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의 책을 읽어본 것처럼 느껴졌었다. 늘 레비나스의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은 하다가 졸업후에 비로소 그의 책 ‘시간과 타자’를 읽게 되었다.
레비나스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명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정통적으로는 후설, 하이데거의 뒤를 잇는 현상학자이지만 하이데거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개념인 ‘타자성’을 주장한 프랑스 철학자이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개념들은 존재 (+존재자) / 죽음 / 시간 / 타자(他者)이다.
먼저, 존재는 존재자와 구별되는 개념으로 결국에는 존재자에게 지배 혹은 포착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존재자라는 한계를 가진다. 한편, 존재는 빛(이성, 인식)을 통해서 시간속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때의 시간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현재이다. 미래라는 것은 존재가 미래에 있다고 가정했을 때 현재의 존재는 없다는 점에서 결코 현재속으로 포섭될 수 없다.
이는 죽음과 상당히 유사한 성질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죽음이란, 존재자 결코 지배할 수 없는 것이며 죽음 그 자체가 오히려 존재에게 절대적으로 다가온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심지어 자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타자는 죽음과 비슷한 성격을 공유한다.
타자란, 나(존재)와 같은 인격을 공유하는 또 다른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무엇’이다. 그러므로 공감과 상호관계라는 것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죽음과 시간 타자는 결국에는 결코 설명할 수 없고 결국에는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레비나스에 의하면 ‘신비’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레비나스의 윤리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타인과 세상을 나의 확장된 존재 혹은 영역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부터 관계의 비극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 너는 너. 그리고 너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무엇이다, 라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해야 타인을 알기 위한 겸손하고도 진지한 여정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성’개념은 기존의 철학이나 윤리학에 존재하는 주류적인 입장과는 오히려 정반대라고 볼 수 있지만, 이성의 절대성을 인정해야만 비로소 이성의 한계 또한 인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윤리학의 지평을 열 것으로 기대된다.
○ 독자의 평 3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호랑이? 호랑이도 물론 무섭다. 그런데 호랑이가 무서운 것은 바로 죽음이 무섭기 때문이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호랑이가 무서운 것일 뿐이다. 호랑이에게 물려도 죽지 않는다면 호랑이가 하나도 무섭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두려운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죽음이다.
죽음 앞에 선 인간. 철학은 죽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한다. 티벳 불교에서는 삶보다 죽음을 더 고민하라고 한다. 죽음을 명상하라! 죽음을 바라보면 삶이 보인다. 레비나스는 죽음에 대한 독특한 성찰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인간은 에로스를 통해 아이를 낳음으로서 시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거칠게 요약한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에 실린 내용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다. 무조건 타자에게 선행을 베풀라는 것이다. 그런데 타자마저 죽어버린다면 나의 초월도 환상으로 끝나는 것인 아닌가? 여기서 바로 에로스가 나온다. 여자와 섹스를 통해 나는 아이를 낳는데 이 아이가 바로 <타자가 된 나>라는 것이다. 아이를 통해서 절대적 미래의 차원이 열린다는 것이다. 아이의 출산으로 과거는 또 다시 현재와 미래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아이를 통해 다시 젊어지고 푸르름을 띠게 된단다.
그렇다면 레비나스가 한 말은 쉽게 말해서 결혼해서 아이 낳고 남들에 선행을 하면서 알콩 달콩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걸 왜 그렇게 어렵게 쓴단 말인가?
레비나스의 핵심은 <타자>개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서양철학의 주류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동일자로 환원하려는 전체주의적 의지만 있었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타자는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전체주의적 사고의 출발이다. 남을 인정하고 존중해줘야 하는데 나 아닌 타자를 나라는 동일성에 복속시키려고 강요한다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히틀러처럼 타자를 말살하는 일을 저지른다. 서양종교 역시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이 아닌 배척을 노골적으로 내보인다. 오죽 했으면 토인비가 기독교를 불관용의 종교라고 했겠는가? 나 아닌 신을 믿지 마라! 여기서부터 서양문명은 단추를 잘못 끼웠고, 작금의 모든 전쟁과 종교간의 갈등이 태동된다. 히틀러는 게르만이 아닌 타자를 인정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태인을 아우슈비츠에서 죽였고, 유태인들은 자신의 종교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아랍국가들과 전쟁을 한다. 양아치 부쉬는 자신이 일으킨 전쟁을 현대판 십자군 전쟁이라고 명명함으로써 현재 아랍에서 자행되는 전쟁이 종교전쟁임을 명백히 선언했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중심으로 윤리학을 세우며, 형이상학의 제1원리는 윤리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에 백번 동의한다.
나는 박주영을 좋아한다.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찬스가 오면 표범처럼 나타나서 번개처럼 골을 넣는 모습은 너무 아름답고 예술이라는 찬탄을 뱉어내게 하고야 만다. 그런데 그가 골을 넣자 마자 하는 행동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며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일전에 차범근이 똑 같은 행동을 했다. 그러자 도올 선생이 버럭 화를 내고 신문에 차범근을 욕하는 칼럼을 썼다. 그런 천박한 짓을 하지 말라고. 기도는 하느님과 나의 영혼의 대화다. 따라서 진실된 기도는 홀로 하느님에게 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하느님은 박주영이나 차범근만의 하느님이 아니다. 하느님은 차범근과 싸우는 상대팀의 하느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이지 차범근에게만 축복을 내려 골을 넣게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차범근이 골을 넣고 하느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것은 차범근이 하느님을 독차지 하겠다는 심뽀가 아닐 수 없다. 이건 역으로 말해서 나 아닌 타자를 인정치 않겠다는 것과도 일맥 상통하는 행위이다. 내가 축구를 잘 보지는 않지만 외국의 축구선수들이 골을 넣었다고 쭈그려 앉아 감사 기도를 올리는 것을 본적이 없다. 그들은 애를 어르는 행동을 하거나 재미난 퍼포먼스를 할 뿐이다. 오늘 미국이 멕시코전에서 보인 추태도 마찬가지다. 담장을 확실히 넘어간 홈런조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독선과 오만을 보라. 미국의 정신이 완전히 썩어 문드러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타인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레비나스는 이것을 염려한다. 서동욱 선생이 번역한 레비나스의 주저 <존재에서 존재자로>를 읽고 싶다.
<아래 글은 강영안 교수의 <타인의 얼굴>에 대한 서울대 이남인 교수의 논쟁적 서평이다. 이 책을 읽었지만 이교수님이 지적하는 부분을 이해할만큼 깊은 독서는 아니었다. 시간이 되면 다시 한번 읽고 싶다>
– 레비나스의 철학적 주제 해명…”무비판적 수용은 아쉽다”
.논쟁서평: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강영안 지음, 문학과지성사 刊, 2005) _ 이남인 서울대
이 책은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 개념인 주체 개념이 “그의 초기 철학에서 중기 철학 그리고 후기 철학에 이르기까지 어떤 방식으로 변화, 발전하는지를” (15쪽) 해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우선 1장은 레비나스의 삶과 철학을, 2장은 주체 문제가 서양근대철학에서 논의되어온 과정을 정리한다. 거기에 이어 3장은 『존재에서 존재자로』, 『시간과 타자』 등의 작품을 중심으로 익명적 존재사건에서 주체가 출현하는 과정, 주체의 출현에서 타자와의 만남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해명하면서 레비나스의 초기 철학을 다루고 있고, 4장은 『전체성과 무한』을 중심으로 향유, 거주, 노동, 타인의 얼굴 등의 문제를 해명하면서 레비나스의 중기 철학을 다루고 있으며, 5장은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 등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을 토대로 대속적 책임의 문제 등을 해명하면서 레비나스의 후기 철학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6장은 고통 현상을 분석하면서 주체와 윤리 문제의 관계를 다시 검토하고 7장은 서양철학에서 레비나스가 이룩한 공헌을 정리한다.
절대적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인간존엄성이 땅에 떨어진 현대에 대해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현재 레비나스의 철학은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으며 국내 학계에서도 지난 10여년 사이에 그에 대한 관심이 비약적으로 커지고 있으나 아직 그에 대한 연구가 충분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비나스의 철학 전체를 조망하고 있는 이 책의 출간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20여 년 동안의 오랜 기간에 걸쳐 수행된 연구를 토대로 출간된 이 책은 앞으로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연구를 위한 필독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레비나스의 여러 작품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 및 그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토대로 주체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서 레비나스 철학을 해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분석되고 있는 레비나스의 작품들은 모두 아주 난해하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닌데, 저자는 이 모든 작품을 섭렵하고 철저히 분석할 뿐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체 개념을 중심으로 그들 사이의 관계까지 해명하고 있다. 그를 통해 익명적 존재사건, 향유, 거주, 노동, 얼굴, 책임, 대속 등 레비나스 철학의 여러 가지 어려운 주제들이 해명되었고, 주체 개념과 관련해 레비나스 철학의 전체적인 모습도 밝혀졌다.
이 책은 앞으로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레비나스 철학 연구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 책에는 “레비나스의 저작과 2차 문헌” 등 두 개의 부록이 붙어 있는데, 이 부록은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연구자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주체의 문제를 중심으로 레비나스 철학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시간, 역사, 신체, 언어, 여성성, 예술, 종교, 신 등 레비나스 철학의 여타의 중요한 주제들, 그리고 레비나스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레비나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철학자와 레비나스의 관계도 자세히 다루고 있지 않은데,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 이처럼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나름대로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지니고 있다.
첫째, 저자는 “나의 관점”, “나의 방식”(16쪽)에 따라 원전을 읽고 논의를 전개해 나갔다고 밝히고 있으나, 자신의 관점, 자신의 방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고 있지 않다. “나의 관점”, “나의 방식”을 밝히기 위해서는 다른 연구자들과의 비판적 대결이 필요한데, 다른 연구자들과의 비판적 대결이 이 책에 거의 나타나 있지 않은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둘째, 저자는 레비나스와 아무런 거리도 취하지 않은 채 레비나스가 표명하는 모든 견해를 옹호하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독자들이 레비나스 철학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레비나스 철학을 올바로 이해한다 함은 그것이 지닌 의의와 더불어 한계 및 문제점까지도 이해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뒤에서도 부분적으로 지적되겠지만 레비나스 철학이 지니고 있는 한계 및 문제점은 그동안 국내외 학계에서 많이 논의되어 왔는데, 저자는 그에 대해 거의 침묵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비록 자세히 논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때그때 간단히 짚고 넘어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셋째, 필자는 레비나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현상학자였다”(292)는 견해를 피력하면서 여기저기서 레비나스의 현상학적 분석을 소개한다. 평소 레비나스의 철학을 현상학으로 해석해온 평자로서는 아주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현상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논하고 있지 않으며 현상학에 대한 그의 태도는 모호하다.
저자는 레비나스가 현상학자였다고 주장하면서도 레비나스를 따라 “얼굴은 현상이 아니다”(179)라고 주장한다. 이 경우 “현상”은 후설을 비롯한 레비나스 이전의 현상학자들의 “현상”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후설의 입장에서 볼 때 얼굴이 “현상”이 아니며 따라서 후설의 현상학은 얼굴을 다룰 수 없는 것일까? 후설에 의하면 우리의 의식에 떠오를 수 있는 것, 즉 넓은 의미에서 경험될 수 있는 것은 모두 “현상”이다. 레비나스도 얼굴에 대한 경험, “절대적 경험” 등을 말하고 있듯이 “얼굴”이 후설의 현상학의 관점에서 볼 때 현상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만일 얼굴이 “현상”이 아니라서 전혀 경험될 수 없다면 레비나스는 “얼굴”이라는 “현상”을 분석하면서 “얼굴의 현상학”을 전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레비나스가 후설, 하이데거 등 이전의 현상학자들에 대해 가하는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저자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초개인성이나 익명성”(78)을 지향하는 “탈인격적” 사유로 규정하는데, 현존재의 “개별화” 현상을 분석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탈인격적 사유”로 규정함은 무리일 것이다.
또 저자는 후설의 현상학에 대해서도 그것이 의식의 “객관화하는 작용”(240)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관념론”(117)이며 후설의 “초월론적 주체”는 “주체의 절대화”(46)의 산물이라든가, 또는 후설의 초월론적 주체가 “역사성과 상황성”(257)과는 무관한 주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견해는, 필자가 『현상학과 해석학』(서울대출판부, 2004)에서 밝혔듯이,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일면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넷째, 책의 구성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 6장은 “고통과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미 3~5장의 논의를 통해 발전사적 분석이 이미 끝난 상태에서 6장에서 고통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지 궁금하다. 6장은 발전사적 논의와 무관하며 고통의 문제는 초기 철학을 다루는 3장에서도 논의되었다.
또 결론으로 제시된 7장은 레비나스 철학과 관련된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것이 비록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발전사적 연구의 결론으로 제시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책 전체의 구성을 고려하면 6장과 7장은 사족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두 장을 빼든지 부록으로 처리하고 3장, 4장, 5장의 논의를 확장시키면서 그를 토대로 어떤 결론을 도출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_ 필자(이남인)는 Bergische Univ. Wuppertal에서 ‘에드문트 후설의 본능의 현상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상학과 해석학 –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 등의 저서를 펴냈다.(출처 : 교수신문)
– ‘시간과 타자’에 나오는 중요 문구
“시간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사실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자체”라고 레비나스는 말하고 있다. 사실 시간을 경험하는 것은 그 시간 속에 맡겨진 혼자만의 고독한 순간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이 쌓아올린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과 고통, 습관과 환호를 마주하는 것이다. 가령 저녁 무렵의 쓸쓸한 어둠 속에서, 설령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순간에도 나는 책의 저자와, 벤치를 만든 목수의 손길, 그리고 나무를 가꾼 무수한 사람의 영혼과 마주한다. 시간의 타자성, 이것은 타자와의 교감 속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죽음은 ‘시간의 타자성’에 대해서는 예외적 사건이다. ‘시간의 타자성’은 죽음의 순간에만큼은 존재의 현재와 미래를 부정한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와 다른 관점을 취하는데,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전체성을 완성하는, 내적 필연성으로서의 죽음을 바라본 반면, 레비나스는 그와는 다르게 죽음을 절대적 폭력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죽음에 직면한다는 것은 주체로서의 자신을 상실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죽음으로써 존재는 완성되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파국으로 치달을 뿐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의 몸과 영혼은 소멸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타자성이 온전히 실현되는 때는 언제인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 레비나스는 ‘에로스’에서 찾고 있다. 이때 에로스는 좁게는 타자와의 육체적 관계이며 넓게는 모든 사물과의 교감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에로스는 바로 여성적인 신비와 함께 출현한다는 점이다. 보통 남성적인 것은 신화에서조차 사물에 논리와 질서를 부여하고, 어둠에서 끌어내려 빛으로 인도하는 행위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여성적인 것은 스스로 감추고 어떠한 지배로부터도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그로 인해 상처입을 가능성, 이해 불가능성을 가진 동시에 생산성까지 가지는 것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레비나스가 이 감추어진 것, 신비로운 것을 찾으려는 것을 ‘에로스’의 과정으로 말할 때는, 바로 에로스가 남성적인 세계가 아니라 여성적인, 신비로운 세계의 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애무>는 “있지 않은 것, 無보다 못한 것, 미래에 감추어진 것을 찾는> 행위이며, <성애>는 한층 고조된 <애무>이다.
그런데 <애무>나 <성애> 자체는 타자를 체험하는 과정일 뿐이지 그것이 실현되는 경우는 아니다. 이에 대해 레비나스는 ‘아이의 출산’이라는 사건을 통해 타자성이 완전히 실현된다고 본다. 아이는 <타자가 된 나>라는 것; 나는 아버지가 됨으로써 나의 이기주의, 나에게로의 영원한 회귀로부터 해방된다. 자아는 이제 타자와 타자의 미래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게 된다. 다시 말해 에로스는 죽음의 절대적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이다.
_ 첨언하면, 아버지가 되다는 것은 반드시 이성과의 결합 속에서 자신의 아이를 생산해낸다는 의미만을 내포하지 않는다. 에로스를 절대적 폭력인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그리고 타자와의 교감으로 정의한다면, <성애>만으로 국한시켜 에로스를 규정할 필요는 없다. 프로이트 또한 에로스를 광범위한 의미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살려는 의지이다.” 죽음의 대극으로, 타자와의 교감으로, 에로스는 우리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이다. 그리고 에로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의 하나로 <성애>를 택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