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22년 11월 4일,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 1874 ~ 1939)가 고대 이집트 왕 투탕카멘의 묘 발견
1922년 11월 4일,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에 의해 고대 이집트의 왕 투탕카멘의 묘가 발굴됐다.
투탕카멘 (생몰 미상, 재위 기원전 1361년 ~ 기원전 1352년)은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이다.
아크나톤의 아들로, 출생 시의 이름은 ‘투탕카텐’이었다.
재위 2년에 투탕카멘으로 개칭하였다. ‘투탕카몬’이라고도 한다.
투탕카멘에 대해 전해진 바가 없다가 그의 무덤은 1922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왕가의 계곡 KV 62호).
당시만 해도 아비도스 왕 목록이나 카르나크 왕 목록 등에는 아크나톤처럼 투탕카멘이 제외되어 있었다.
또한 그에 대한 자료도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만큼 그의 무덤 발굴 이전에는 투탕카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으나 하워드 카터의 발굴로 그의 이름이 드러났다.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 1874년 5월 9일 ~ 1939년 3월 2일)는 영국의 고고학자이며 이집트 투탕카멘의 묘를 발굴해 자신의 이름은 드높인 것은 물론 투탕카멘을 세상에 알렸다.
하워드 카터는 1874년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켄징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살에 대영 박물관에서 고고학을 배운 후 당시 최고의 고고학자였던 윌리엄 피트리에게 고고학을 배운 뒤 이후 이집트 고고국의 국장인 가스통 마스페로의 후원으로 1902년부터 왕가의 계곡에서 투트모세 4세 · 아멘호테프 1세 등의 묘를 발견했다.
그 후, 조지 하버트 카너본 경의 후원으로 1922년 11월 4일에 고대 이집트의 왕 투탕카멘의 왕묘를 발견하였다.
흔히 투탕카멘 묘를 발굴할 때의 파라오의 저주가 유명한데, 발굴자들의 죽음을 일일이 조사하여, 나이가 들어 죽었거나 발굴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죽음, 또는 우연한 죽음이었다고 진상이 밝혀졌다.
파라오의 관에 일반적으로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라는 문구가 쓰여진 것이 사실이나, 투탕카멘의 관에는 이와 정반대로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라는 말이 쓰여 있다.
투탕카멘의 묘 발견 후 6년에 걸쳐 발굴 작업이 계속 진행되었고 이집트학에 풍부하고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멘 왕묘의 발굴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발굴작업을 하지 않았으며 1932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1939년 3월 2일 6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투탕카멘의 생애
아마르나에서 왕자로 살아가던 투탕카텐은 아버지 아크나톤과 삼촌인 스멘크카레가 죽은 후 멤피스에서 10세의 어린나이로 파라오의 자리에 오른다. 행정관 아이와 장군 호렘헤브가 이 나이 어린 파라오를 보좌하였다. 또한 이미 출산 경험이 있는 누나인 안케센파아텐과 결혼하게 된다.
재위 2년 째에 아크나톤의 아텐 신앙을 철폐하려는 움직임이 공식화되었다. 투탕카텐은 투탕카멘으로, 안케센파아텐은 안케센나멘으로 개명하여 아멘 신앙으로의 복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큰 석비가 세워졌는데, 여기에는 아멘 신앙의 부활과 신전의 재건과 개방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카르나크와 룩소르에서도 갖가지 건축사업이 진행되었다. 훗날 호렘헤브가 파라오가 되었을 때, 이것을 모두 자신의 업적으로 돌렸는데, 이는 이미 이 때부터 호렘헤브 등이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의 치세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몇 차례의 해외원정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는 왕의 사냥, 전쟁 모습이 담겨 있다. 사막에서 사자 등을 사냥하기도 하며, 누비아와 시리아의 적들을 화살로 공격하기도 한다. 훗날 호렘헤브의 무덤이나, 누비아 총독 후이의 무덤을 통해 이러한 그림들이 실제 사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투탕카멘 본인이 직접 원정을 이끌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투탕카멘은 근친상간의 혼인에 의해 태어난 자식으로, 오른쪽 다리에는 골질환과 왼쪽 다리에는 선천성 내반족이 있어서 걷기가 아주 힘들었으며, 선천성 기형인 구개열이 있었으며 이로 인한 언어 장애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분석한 연구팀은 유전자 검사로 투탕카멘이 치명적인 말라리아의 원인기생충인 열대열원충에 감염되었었던 것을 밝혀내었다. 결국 여러가지 유전적 질환으로 면역체계가 약했던 투탕카멘은 다리 골절상을 입은 상태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재위 9년째에 1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 투탕카멘 묘 발굴 관련 이야기
1922년 11월 4일에 왕가의 계곡에서 엄청난 발견이 있었다. 투탕카멘의 무덤 (KV62)이 거의 도굴되지 않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서 ‘거의’라고 한 이유는 투탕카멘의 무덤도 도굴당한 흔적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입구에 봉인을 3개 해놓았는데, 2번째 봉인은 발굴 당시에 이미 뚫려 있던 것이다. 투탕카멘 왕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도굴꾼이 침입했는데, 무덤을 지키던 경비대에 걸려 미수로 끝났으며, 마야라는 관리와 사제들이 다시 무덤을 봉인했다는 기록이 전해져온다. 여러 유물에서 도굴의 흔적이 남아 있고 방들이 대체로 어지러져 있었지만, 그 정도가 타 파라오들의 무덤과 비교할 매우 온전한 상태였다. 2번의 도굴 시도에서 도굴꾼들은 가벼운 귀금속들과 귀한 연고 정도를 가지고 간 것으로 보인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한 하워드 카터는 그의 재정 후원자인 영국 귀족 카나본 (George Edward Stanhope Molyneux Herbert, 5th Earl of Carnarvon, 1866~1923)과 이전에도 여러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나 이미 도굴된 무덤들 뿐이라 큰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카터는 인근 무덤에서 투탕카멘의 장례식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유물 조각들을 찾아내어, 투탕카멘의 존재와 더불어 그의 무덤이 왕가의 계곡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전에 발굴을 하던 시어도어 데이비스는 이제 왕가의 계곡에는 무덤이 없다고 선언하고 발굴권을 넘겼고, 카터는 이번이 마지막 발굴이라는 부탁을 해 카나본에게 어렵게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마지막 발굴이 세기적인 발굴이 된 것이다.
카터는 람세스 2세와 람세스 6세 무덤 사이에 있던 곳에 주목했는데 그동안 발굴이 없었던 곳이었다. 이 자리는 원래 람세스 6세 무덤을 만들던 노동자들이 기거하던 오두막이 있던 곳이었는데 카터는 이 곳을 파내려 가다가 마침내 무덤으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카터의 일꾼들중에 일꾼들이 마실 물을 매일 항아리에 담아서 가져오는 일을 하는 ‘후세인 압델라술 (Hussein Abdel-Rassoul)’이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그 소년이 항아리가 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땅에 조그만 구멍을 파다가 무덤으로 향하는 제일 윗계단을 발견하였다 (이 후세인 압델-라술은 이 명성 덕에, 이 무덤 입구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사진 모델을 하면서 받는 돈으로 평생 먹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계단을 발견한 카터는 도굴당했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동시에 내부에 뭐가 있을까 호기심도 들었지만 5년 동안 막대한 돈을 투자하면서 자신을 믿고 후원해준 후원자인 카나본과 같이 봐야한다는 마음으로 요양중인 카나본에게 전보를 보냈다.
“마침내 왕가의 계곡에서 엄청난 발견을 이루어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아직까지 봉인이 남아 있는 무덤입니다. 카나본 경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재봉인 해 놓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1922년 11월 6일, 하워드 카터가 보낸 전보를 받아든 카나본은 서둘러 이집트로 갈 준비를 했다. 비록 카나본은 오랫동안 안고 있던 지병으로 인해 외출이 쉽지않은 상태였지만, 봉인된 무덤을 발견했다는 기쁜 소식에, 아픈 몸을 이끌고 그의 딸과 함께 3주만에 이집트로 왔다.
당시 카터는 그가 발견한 것이 진짜로 파라오의 무덤인지, 아니면 단순한 부장물 창고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비록 후원자가 있는 상태에서 봉인을 열기 위해 문은 열지 못했지만, 지하로 통하는 통로를 보고 무덤일 것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마침내, 1922년 11월 26일, 도착한 카나본과 그의 딸, 그리고 발굴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터는 끌을 이용해 통로의 봉인에 작은 구멍을 뚫었고, 그 구멍에 램프를 집어 넣고 수천 년 만에 무덤을 열었다
카나본, “뭔가 보이나?” (Can you see anything?)
카터, “네, 아주 아름다운 것들이 보입니다…” (Yes, Wonderful things…)
과연 하워드 카터가 말한 대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화려한 황금 마스크와 투탕카멘의 미라를 비롯한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고작 9년을 재위(在位)한 별 볼 일 없는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은 그 많은 이집트 파라오를 전부 다 제치고, 단숨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파라오가 되었다.
투탕카멘은, 재위 기간이 짧고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사실 다른 귀족을 위해 만들어 놓은 무덤을 이용한 것이다. 투탕카멘의 뒤를 이은 아이의 귀족 시절 무덤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심지어 최근 연구에 따르면 투탕카멘의 상징과도 같은 황금 마스크조차 네페르티티의 이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투탕카멘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닌 네페르티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을 수정해 사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입장도 있다. 그 때문에 왕에 걸맞지 않게 무덤의 크기가 매우 간소하다. 하지만 그 간소하다는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이 이집트 박물관의 1개 층을 모두 채우고도 남을 양이다.
이집트 고대사를 다룬 ABE 전집 5권 ‘파묻힌 세계’에서는 “투탕카멘 정도의 약소 파라오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이 이 정도인데, 만약 신왕국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람세스 2세의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대단했을까!”라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굴이 아니더라도, 당시에는 전임자의 무덤 부장품을 후대에서 쓰는 경우가 아주 흔했다. 예를 들어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는 19왕조 메르넵타의 석관과 20왕조 람세스 9세의 반지가 나왔을 정도다. 어쨌든 투탕카멘의 무덤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은 건 쉽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19왕조의 재상이었던 라모세의 무덤도 투탕카멘 왕의 것보다 크다.
하지만 투탕카멘은 호렘헤브가 이단자 파라오의 목록에 넣는 바람에 이후에는 존재가 잊혀졌고, 마야라는 관리가 도굴 미수 후에 제대로 봉인을 했으며, 결정적으로 그의 무덤 위에는 20왕조 람세스 6세의 무덤을 짓기 위한 공사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위한 숙소가 지어지는 바람에 완벽하게 은폐될 수 있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누구도 집 아래에 무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이런 상태에서 카터는 인근 무덤에서 나온 작고 조잡한 유물들을 통해 투탕카멘의 존재를 직감하고 마침내 찾아내게 된다.
사실 시어도어 데이비스라는 자가 왕가의 계곡에서 더 이상 새로운 무덤을 없을 거라고 큰소리치고 발굴권을 카터에게 넘겼는데 투탕카멘의 무덤은 데이비스가 마지막으로 발굴한 무덤에서 고작 2m 떨어진 곳이었다. 그나마 데이비드에게는 다행인 것이 카터가 이 무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데이비스가 죽은 후였다. 사실 데이비스가 1914년 이 무덤 발굴을 멈춰야 했던 것도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다음 해인 1915년, 78살로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데이비스의 유족들이 투탕카멘 무덤 발굴에 대하여 안타까워했었다.
한편 2016년에는 투탕카멘의 단검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재질이 철이다. 이탈리아 대학(Milan Polytechnic and Pisa University)과 이집트 박물관의 학자들은 이 단검에 대한 성분 조사를 하였는데 운석에서 볼 수 있는 성분이 검출되어, 이 단검은 운석으로 제작된 것으로 판명됐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