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콜롬바(St, Columba)의 생애와 영성(12)
성 콜롬바와 아이오나 공동체의 영성 – 수도원과 공동체의 영성(1)
켈트 기독교회는 온유한 생활 방식이 특징이면서도 금욕적인, 수도원 마을들과, 성도들의 개성에 의해 지배되고 시적 형태들로 표현되는 교회였다. 교회사적으로 유명한 수도사들은 니니안(Ninian), 콜롬바(Columba), 데비드(David), 아이단(Aidan) 그리고 컷버트(Cuthbert) 등인데, 이들은 모두 수도원의 설립자였다.
이 수도원의 기능은 교육센타, 병원, 학교, 호텔, 대학, 공예학습, 교도소, 영적 상담소 등의 다양한 사역을 감당했던 곳이었다. 초기 켈틱교회의 이러한 황금시대는 5세기에 시작되어 7-8세기까지 계속됐다. 황금시대에는 못 미치는 백은시대(Silver Age)가 12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수도원들이 고대 바드 및 드루이드 집단들을 대신 했으며, 수도사는 새로운 기독교 드루이드 이었다.
아담난의 ‘Life of Columba, 베데의 ‘Life of Cuthbert’와, 성시와 기도문, Gildas and David 등의 귀한 문서들 모두 다가 수도원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수도원의 연구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또한 수도원의 창설자들, Ninian, Columba, David, Columbanus, Aidan, Cuthbert들은 모두가 연구의 대상이다. Ian Bradley는 켈틱과 앵글로- 색슨의 수도원들은 커뮤니티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상택의 ‘켈틱교회의 신앙공동체 모델’에 대한 특별기고에 의하면, Colonies of Heaven 의 저자 Ian Bradley는 이러한 교회 공동체를 ‘하늘 공동체’라고 불렀다. 이 수도원적 교회는 영적, 지적, 육체적 복지뿐 아니라 문화전통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일랜드의 매듭문화와 전통, 시, 노래, 전래적인 이야기의 기록, 전달, 보관 하며 연구 발전시킨 것은 켈틱교회 였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로마와 스칸디나비아의 공격을 받고, 앵글로족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켈틱문화 전통을 유지하게 된 것은 교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의 기독교의 사상과 영성을 이해하려면 수도원, 수도원 제도, 수도원 생활의 역사를 반드시 고찰해야 한다. 고대 이집트와 팔렌스타인 광야 지역에서 3세기 말경 볼 수 있었던 고독한 은둔생활을 했던 수도승들의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스어로 ‘monos’가 ‘monasticism’의 어원인데, 이 의미는 ‘alone’이라는 뜻이다.
C. H. Lawrence에 의하면, 로마제국의 해체를 목격한 기독교인들은 당시 수도원 운동(Monastic Movement)를 통해서 시대의 아픔을 극복해 나갔다. 수도원의 창시자는 이집트의 성 안토니(St. Antony, 251-356)인데, 알렉산드리아 지방의 곱틱어(Coptic)를 구사했던 이집트인 이었다. 그는 이집트 사막에서 은둔 수도생활을 마친 305년부터 공식 출발한 수도원을 통해서 동방교회의 수도원 영성운동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들은 보통 천막이나 무너진 성채나 무덤, 동굴에서 살았으며, 하루일과중 가장 주요한 일은 금욕생활을 동반하는 기도와 명상 이었다.
마가복음 1:3에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기록된 바와 같다. 예수님도 40일 금식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긴 것 같이 광야는 수도원 생활과 성서학적으로 연결이 된다.
천 사무엘에 의하면 주전 150년부터 주후 68년까지 존재했던 쿰란공동체가 확실한 수도원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쿰란 공동체는 임박한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광야에서 성서를 연구하고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고 메시야를 기다려야 한다고 믿었다. 마카비 왕조 때 바리새파인들은 안식일에는 전쟁을 하지 않고, 적들의 공격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을 해서 공동생활을 한 것이 쿰란공동체의 효시가 되었다.
동방에서 태동한 수도원은 4세기경 여러 경로를 거쳐서 서방세계로 이동하게 된다. 이들중 명망있는 수도사는 자연스럽게 광야 금욕자들의 정신적 구심점을 이루었다. 이렇게 스승이 되는 수도자들의 말은 참 생명을 주는 말로써 받아들여졌으며 이들은 영적 스승 압바(Abba)로 불려지게 된다. 이들 압바들의 가르치는 말들이 묶여서 처음에는 구전으로 나중에는 기록으로 전해지는데, 이것이 발전해서 수도원의 규범으로 만들어 지게 되었다. 현대교회의 문제점인 영성의 결핍, 성도들의 세속화, 자기중심주의 등의 현안문제는 믿음의 조상들이 세웠던 수도원 생활이나 그 제도와 정신을 이어 나가지 못함에 있다.
존 맥나일은 그의 기록에서 맨 처음 아이오나 섬에 도착한 일행중 어난(Ernan)은 그의 삼촌이었고, 2명은 사촌형제들, 모콘나(Mochonna)는 왕자였다. 콜롬바는 그의 고향에서 선교에 필요한 언어교육, 영성훈련, 시인, 수도사 훈련, 성서번역 등을 통한 모든 준비를 갖추고 스코틀랜드로 파송된 것이다. 거기에다 그는 타고난 건강함,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울타리를 치고, 땅을 정리한 다음, 교회, 숙소, 식당, 손님 객사, 수도사를 위한 객실, 회의실, 집필실 등을 포함한 수도원을, 주로 목재로 건립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다시 이웃섬, Tiree로 가서 수도원을 세운 후, Hinba섬으로 들어가서 수도원을 세워 나간다.
아돔난의 기록에는 콜롬바가 아일랜드에서 사역했을 당시 Derry, Durrow, Kells 등 세 곳에 수도원을 이미 세웠다. 이러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해서 스코틀랜드 전역을 상대로 수도원을 하나씩 세워갔으며, 그 당시 왕실의 사촌혈연관계였던 스코틀랜드의 다리아다(Dariada)왕 코날(conall)의 협조를 여로모로 받았다. 켈틱 수도원운동은 그 이전의 동방의 수도원 운동들과는 두 가지 점에서 달랐다. 첫째, 켈트족은 사람들에게 훨씬 더 개방적 이었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가까이 닥아 갈 때 훨씬 더 복음적 이었다. 둘째, 그들은 연구와 지적인 학문추구에 훨씬 더 개방적 이었다. 한 세대가 채 지나지 않아서 문맹이었던 민족이 수도원 필사실의 필경사, 저술가들이 되어서 아일랜드의 과거의 위대한 역사, 시, 기도 등을 보존하는 수도사들이 되었다. 아일랜드 수도원 덕분에 로마와 그리스문명을 비롯하여 많은 고대문명이 보존 되었다.
5-11세기 사이의 켈틱교회는 교회대신 수도원(Monastery)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켈틱 교회의 특징은 수도원적 성격을 가진 영성과 신앙훈련을 동시에 중요시하는 수도원 공동체 모델 교회였다. 수도원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 사람들의 삶속에 깊숙히 관여하는 공동체였다. 수도원에서는 교회로서의 예배와 목회적 돌봄, 선교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수도원은 개인의 경건과 이세상과 결별된 수도사적 훈련소라고 생각했는데, 4-5세기에 발달해왔던 사막 교부들이 개척해온 수도원과는 차이가 있다.
콜롬바 수도원은 교회로서의 예배와 수양관이 있어 기도와 영적 치료가 이루어 졌고, 병원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을 치료 하였고,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어, 여행자들이 머물러 갈 수가 있었다. 그 전통을 이어 받아서 지금도, 한번에 3,000명이 머물 수 있는 숙박시설, 식당, 편의점등이 아이오나 섬 전체에 잘 갖추어져 있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로마와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의 공격에도 견디어내고, 앵글로의 지배하에서도, 켈틱문화 전통을 유지하게 된 것은 오직 수도원교회의 몫이었다. 오늘날의 이민 교회들이 그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이러한 켈틱교회 전통으로 부터 그 모델을 배워야 한다.
기록에 의하면 콜롬바가 Derry지역에 세운 교회는 매일 천 여명의 배고픈 사람들에게 급식을 했다고 한다. 한국의 최일도 목사가 시작한 ‘밥퍼운동’은 하루에도 수 만명 이상의 굶주린 사람들이 청량리, 프놈펜, 연변, 마닐라, 티벧 등지에서 급식을 받고 있다. 시드니의 Ashfield, Kings Cross의 호주연합교회에서도 배고픈 사람들에게 점심 한끼를 제공하고 있다. 예외없이 해외 한인교회는 거의 다 주일예배 후에 점심식사를 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있다.
티모시에 의하면, 초기 켈틱수도원을 세운 사람은 성 시아란(St. Ciaran)인데, 그가 545년에 세운 수도원은 크론막노아(Clonmacnois)로, 초기 아일랜드 교회에 있어서 그 종교와 문화가 가장 유명한 발상지인 알마(Armagh) 다음으로 유명하다. 여기에서 많은 이들이 중세기에서 수도원의 역할이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실을 알 수 있다. 로버트 반 드 베이어의 저서 ‘Celtic Gifts’에서 언급하기를, 지역교회나 수도원 공동체에서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이 각자가 소유하고 있는 달란트를 힘을 합쳐서 하나로 나갈 때 엄청난 힘을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켈틱 교회가 추구했던 정신이다. 아이단(St. Aidan)에게 주교를, 쿠트버트(St. Cuthbert)에겐 목양을, 패트릭(St. Patrick)에겐 설교, 브리지드(St. Brigid)에게는 치유의 사역을 감당케 하고 성 콜롬바(St. Columba)는 예술사역을, 일투트(St. Iltut)에게는 행정사무를 맡긴다는 시나리오이다. 이들은 켈틱교회에서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뛰어난 사역을 한 성인들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협동하고, 사랑하며, 서로 감싸서 상대를 보호해 주고, 환대해 주는 콜롬바의 사상때문에 켈틱영성의 숨소리는 오늘도 우리 모두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노정언 장로
한남·촬스슈터트대학 신학석사논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