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3)
제임스 한나 맥케이 목사 (1857. 8.20-1919. 9.14)
제임스 맥케이는 스코틀랜드의 남서 경계지역인 덤프리셔(Dumfriesshire)에서 태어났다. 그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자 멜번으로 와서 신학공부를 마쳤다. 그의 첫 임지는 발라랏(Ballarat)에 있는 세인트 존스 교회(St John’s church)였다. 그는 목회를 하던 중에 한국 선교에 대한 소명을 받게 되었고 3년 후에 목회를 사임하고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 1891년 10월 12일, 맥케이 목사 부부와 세 명의 미혼 여성선교사들은 부산에 도착했는데, 당시 그들은 부산에 캐나다 출신 혹은 미국 선교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디 의사(Dr. Hardie)와 베어드 선교사(Mr Baird)의 도움을 받으면서 임시 거처를 정하였다.
맥케이는 건강 악화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부인 사라(Sara)가 사망한 후 그는 6주 동안 병으로 앓아누웠고, 회복을 위해 몇 주 동안 호주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그는 1892년 8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선교의 근거지가 될 수 있는 두 건물을 건축할 토지를 물색하였다. 그해 10월 11일, 그는 일 년 전에 한국에 함께 왔던 미혼 선교사들 중 메리 포세트(Mary Fawcett)양과 결혼하였다.
1893년 초, 맥케이는 말라리아로 수 주 동안 고생을 했고 일본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초량의 마을 언덕에 4475 평방미터의 두 필지의 토지를 구입했고, 돌과 진흙으로 담을 세우고 가옥을 건축하는 일을 감독하였다. 이 지역은 다른 외국인들이 살고 있는 장소와 멀리 떨어진 한국인 거주지 한 가운데에 있었다.
맥케이 목사 가정은 7월에 새 집으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맥케이 목사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고 의사는 호주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그들은 1893년 9월 초 부산을 떠났다.
맥케이 목사의 한국체류는 채 2년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고, 그나마 한 번의 호주 방문과 선교회의를 위한 홍콩 및 상하이 방문, 뱃길의 서울 방문으로 단절되었다. 그는 선교활동과 토지매입협상, 천성에 어울리지 않는 업무로 인해 한국어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거주지가 아닌 한국인 거주지에 선교사들의 거처를 정하고 건물을 세웠던 맥케이 목사의 끈기 있는 고집은 호주선교회가 최상의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멕케이 목사는 아내 사라를 잃었고, 지속적으로 건강이 좋지 못했다. 그는 부산의 일본인 사진작가가 찍은 좋은 사진들을 얻었다. 그 사진들은 맥케이와 다른 선교사들이 순회하면서 한국을 소개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었다. 맥케이 목사는 호주로 돌아온 후에 해외선교위원회에서 봉사했고 그들에게 중요한 조언을 하였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