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구세군의 3가지 특징과 2개의 기둥
구세군의 DNA는 ‘구세군’이란 용어에서 찾을 수 있다.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은 ‘구원과 군대’란 두 단어로 이루어졌다. 먼저 구세군을 받아들인 일본이 ‘The Salvation Army’를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라는 의미로 ‘救世軍’으로 번역하였다.
구세군의 3가지 특징과 2개의 기둥
구세군에는 3가지 특징이 있다. 신학적으로는 웨슬리아니즘(Wesleyanism), 실천적으로는 전인구원(Holistic Salvation), 조직적으로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이다. 구세군은 감리교, 성결교 같은 뿌리를 갖고 있고, 실천적으로 영혼구원을 넘어 전인구원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개교회 주의가 아니라 국제 국제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구세군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구원과 성결이다. 구원이란 영혼구원을 넘어 전인구원, 개인구원을 넘어 사회구원까지 강조한다. 성결이란 구원받은 자가 구원받은 자답게 사는 것이다. 구원은 성령세례이고 성결은 성령충만으로, 구원도 성결도 모두 은혜로 인한 성령의 역사이다. 구세군의 주일 오전예배는 성결에 초점을 맞춘 ‘성결회’(Holiness Meeting)이고, 저녁예배는 구원에 초점을 맞춘 ‘구령회’(Salvation Meeting)이다. 성결회는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령회는 ‘어떻게 구원을 받나’에 말씀의 중심을 두고 있다. 구령회는 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문화적 코드를 활용하여 예배를 드린다. ‘교회의 문턱’은 교회 안에서 보는 것보다 아주 높다. ‘구령회’는 그 문턱을 낮춘 예배이다.
하나님의 군대에 속한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
구세군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용어는 구약은 창세기 32:2의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였다. 구세군은 하나님의 군대(God’s Army)이다. 신약은 딤후 2:3절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이다. 구세군인은 ‘하나님 군대’에 속한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다. 구세군의 상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군기, 자선냄비, 군복, 밴드, 군기, 붉은방패, 면류관 등이다. 상징이란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중세 때에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역할을 글을 읽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림과 조각 등이 대신했다.
상징 중에 하나가 ‘군복’이다. 군복은 ‘병사 입대식’을 받은 분에 한하여 입을 수 있다. 군복을 입으면 ‘자연인’이 아니라 ‘구세군인’으로 구세군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군복은 3가지 의미가 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I belong to Jesus Christ), 나는 봉사하는 사람이다.(I am here to serve), 나는 국제 구세군에 속한 사람이다.(I belong to the international Salvation Army) 군복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누구에 속한 사람인가를 보여준다. 군복은 그리스도의 증인을 위한 복장이기에, 다른 목적으로 오용이나 남용을 해서는 안 된다.
딤후 2장 3절- 6절에서 그리스도인을 3가지 직업으로 비유하고 있다. 첫째 병사, 둘째 경주자, 셋째 농부이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병사를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한다. 경주자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법대로 경주해야 하고, 농부는 곡식을 거두기 위해서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그리스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한다. 첫째로 고난이다. 고난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말씀을 조금 깊게 생각하면 일반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와 함께 고난을 받는 다는 것은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다. 벧전 1:7절에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도 귀하다고 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은 회개해야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은 기뻐해야 한다.
둘째 사생활이다. 살다 보면 내일과 하나님의 일에 충돌이 생길 때가 있다. 우선순위가 분명하지 않으면 선택의 순간에 고민하다가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셋째 예수 중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영접하였으면 주인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10:31)
현재 구세군은 131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구세군은 인간의 영혼구원 뿐 아니라, 실존적인 문제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교회’이다. 누군가 인간의 영혼구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영혼을 질식시키는 사회악(Social Evil)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구세군은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Heart to God, Hand to Men), ‘한 손에는 빵, 한 손에는 성경”(One hand holding Bread, the other Bible)의 모토으로 전인구원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
타이타닉 1912년, 엠프리스 오브 아일랜드 1914년

“나는 예수님을 알기에, 더 잘 죽을 수 있습니다”
1914년 아메리카 해안에서 배 한 척이 난파되었습니다. 바닷물이 순식간에 차오르더니 몇 분 만에 배가 가라앉았습니다. 탑승 인원은 1,477명이었고, 안타깝게도 그 가운데 1,012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배는 캐나다 퀘벡에서 출발해 영국 리버풀로 향하던 ‘엠프리스 오브 아일랜드 호’였습니다. 엠프리스 오브 아일랜드 호는 빙산을 들이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배는 자욱한 5월의 어느 날 밤 세인트로렌스 강을 벗어나 북대서양을 향하던 중 노르웨이 선박인 ‘스토슈타트 호’에 비스듬이 부딪혔습니다.
그 충격은 충돌이 있었다고 느끼지 않을 만큼 미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얼음을 뚫고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스토슈타트 호의 뱃머리는 정기선의 강철 전체를 마치 암살자의 칼처럼 부드럽게 가르고 들어갔습니다. 엠프리스 오브 아일랜드 호는 10분 만에 전복되더니 마침내 4분 뒤에는 차가운 수면 아래로 선채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사망자는 타이타닉호가 가라앉았을 때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날 배에 탄 840명의 승객 가운데 170명은 런던에서 개최된 회의에 참석차 여행 중이던 구세군 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구세군 교인은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띠가 없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구명띠를 넘겨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존자들은 수많은 구세군교인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다른 탐승객에게 구명띠를 묶어주었다고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보다 더 잘 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웅적인 마지막 봉사활동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다

12월은 마디와 같은 달이다.
12월이다. 아름답게 한 해를 마감하고, 대망의 새해를 맞이해야 할 때이다. 대나무가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것은 마디 때문이다. 약해지는 지점에 마디를 만들고, 그 마디를 바탕으로 다시 올라간다. 12월은 마디와 같은 달이다. 마디는 마무리이자 시작이다. 아름다운 마디를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끝에서 시작을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죽음에서 삶을 보는 ‘명철’이 있어야 한다. 하늘에서 땅을 보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1) 끝에서 시작을 보는 지혜
‘Nursing Home’은 인생을 마무리하는 장소이다. 시드니의 ‘Auburn Nursing Home’ 입구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은 수용할 수 있는 평안과 바꿀 있는 것은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이다. 인생의 불행은 할 수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여, 정말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식은 내가 노력하여 습득할 수 있지만,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우리는 끝에서 시작을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종말론적 삶’이란 무엇인가? 열심히 살다가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의 삶’을 오늘 사는 것이다.
2) 죽음에서 삶을 보는 명철
명철(明哲)이란 ‘밝을 명’, ‘밝을 철’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안다’는 히브리어로 ‘Yadah'(야다)라고 한다. ”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창4:1), 여기서 ‘동침하니’ 를 ‘야다’ 로 표현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안다는 의미다.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하나님을 올바로 알 때 죽음에서 삶을 보는 명철이 생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을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로 막는다. 삶은 죽음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고,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다.
3) 하늘에서 땅을 보는 혜안
혜안(慧眼)이란? 사물에 대한 이치를 꿰뚫어 보는 지혜로운 눈, 통찰력을 뜻한다. 하늘에서 땅을 보는 혜안이란? 하늘의 관점에서 땅을 보는 눈을 뜻한다. 땅의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을 전제로 존재하고 있다. 우주의 모든 것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고 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어리석은 인간은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땅의 것만을 위하여 산다. 땅의 시간이 끝날 때 그들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생을 마감한다. ‘상품과 작품’은 틀리다. 상품은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떨어지고, 유통기간이 지나면 폐기처분이 된다.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더해진다. 하나님은 인간을 상품으로 만들지 않고 작품으로 만들었다. 겉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사는 사람은 ‘상품적 삶’을 사는 것이고, 속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사는 사람은 ‘작품적 삶’을 사는 사람이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