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자유와 율법
갈라디아서는 ‘자유의 대헌장’이다. 주제는 자유이고, 핵심 구절은 5:1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 ‘종의 멍에’란 율법을 말한다. 믿음뿐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하여 ‘멍에’가 되었다. 율법이 예수께로 가는 ‘디딤돌’이 돼야 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1) 율법이란?
구약의 율법은 613개이다. 하라는 것 248개, 하지 말라는 것 365개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시켜 주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구원 받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준 말씀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말씀이다. 율법은 거울과 같다. 거울은 잘못된 것을 보여주지만 고쳐주지는 않는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갈3:24절)
2) 율법주의자란?
율법주의자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공로가 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구원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율법주의는 본질적으로 은혜에 반대되는 입장이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한 다민족 교회이다.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만으로 부족하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믿음에 율법이 필요하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구원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3) 반 율법주의자란?
반 율법주의자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자이다. 이제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유를 방종으로 전락시키는 사람들이다. 자유와 방종 모두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의미에서 비슷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방종이란 육신의 소욕을 따라 가는 것이고, 진정한 자유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짓는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갈5:13)
4) 율법의 완성이란?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는 율법주의자도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반 율법주의자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하라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17)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갈5:14)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13:8)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자이다.
시드니한인회 신년하례식 덕담
2021년 호주 시드니 한인회 신년하례식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21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정과 개인 그리고 하시는 일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고 배꼽시계도 자꾸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제가 마지막 순서라서 짧고 간단하게 한 시간만 하겠습니다.
요즘 세상은 머니 머니해도 머니가 최고인 것 같아서, 머니에 대한 덕담을 하려고 합니다. 호주 20 달러에 새겨진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호주는 1966년까지 화폐 단위는 ‘파운드’였습니다. 1966년 2월 14일에 파운드에서 ‘달러’로 바꾸었습니다. 1966년부터 1974년까지는 화폐에 ‘Commonwealth of Australia’로 사용하다가, 1974년 – 1994년까지 점진적으로 ‘Australia’란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호주 지폐는 5불을 빼고 양면에 모두 인물이 있어 앞면과 뒷면을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20달러 지폐는 더 그렇습니다.

20달러의 앞면은 호주의 여성사업가인 메리 레이비(Marry Reibey: 1777 ~ 1855)고, 뒷면은 존 플린(John Flynn: 1880 ~ 1951) 목사입니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도시화 현상으로 야기된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도시에 인구가 폭증하면서 범죄, 빈민, 실업자, 환경, 여성과 아동의 노동력 착취 등의 예상치 못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특별히 범죄자가 급증하면서 영국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어 가까운 유형 식민지로 죄수를 보냈습니다. 미국이 1776년 독립하자, 차선책으로 호주로 죄수들을 1788년부터 1840년까지 보냈습니다.
메리는 14살 때 남장을 하고 말을 도둑질하다가 체포되어, 1792년 호주에 왔습니다. 17살 때 그녀는 ‘준 장교'(Junior Officer)와 결혼했습니다. 당시 여자와 남자의 비율은 20:80 정도로, 여자들은 선택의 폭이 넓었습니다. 당시에 죄수와 자유인과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메리의 남편인 토마스는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1811년 그가 일찍 죽고 그녀는 사업을 이어받아 당시 가장 부자이고, 성공적인 사업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돈을 많이 벌어 20불의 주인공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자선사업가가 되어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해서 주민들의 존경을 받아 20달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큰아들은 후에 목사이며 정치가가 되어 타스마니아 총독을 역임했습니다.

20달러의 뒷면은 호주 내륙 지방 선교에 앞장선 ‘존 플린’(John Flynn: 1880 ~ 1951) 목사입니다. 존 플린 목사는 호주 최초로 오지에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항공 의료 서비스’를 시작한 분입니다. 그가 설립한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Royal Flying Doctor Service)는 호주 내 외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항공의료서비스기관’입니다. 존 플린 목사는 호주의 외곽지역으로 선교를 다니면서, 의료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고, 항공기를 통해 의료 봉사를 하며 의료 선교에 힘을 쓴 분입니다. 그의 사역이 호주 전역에 알려지면서 ‘호주내륙선교회’(Australian Inland Mission)가 발족되었습니다. ‘로얄 프라잉 닥터서비스’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잘 알려진 ‘항공의료서비스’ 단체가 되었습니다. 정부는 그의 업적을 기념하며, 그를 20달러 지폐의 주인공으로 선택했습니다.
한국 사람들과 서양 사람들이 돈을 세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나라 사람은 이것도 내 것, 그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하면서 안으로 돈을 세지만, 서양 사람은 이것도 네 것, 저것도 네 것, 그것도 네 것 하며 돈을 밖으로 셉니다. 번 돈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가정에 화근이 됩니다. 돈 때문에 형제가 법정 공방하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유산 때문에 혈육이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어느 날 거지 부자가 불난 집 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집 주인과 아이들은 어쩔 줄 모르고 통곡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거지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 너는 아버지를 잘 만나서 불탈 집이 없으니 얼마나 행복하니”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옆에 사람과 인사를 하시죠. “2021년에는 돈 많이 버세요.” 한번만 더 인사합시다. “2021년에는 번 돈을 잘 사용합시다”
2020년의 코로나의 시대는 가고, 2021년 백신의 시대가 왔습니다. 2021년은 신축년, 하얀 소띠의 해입니다. 흰색은 여유와 평화를 상징하고, 소는 근면하고 성실하며 책임감이 강합니다. 2021년은 주님의 평안을 누리며 여유를 갖고 사시는 행복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소

2021년은 신축년, 하얀 소띠의 해이다. 흰색은 평화와 여유를 상징하고, 소는 근면하고 성실하며 책임감이 강하다. 아래 글은 작년 10월에 만났던 캄보디아 김성일 선교사의 자작시이다.
“나는 순박하디 순박한 소처럼 살고 싶습니다. 영악하지 못하나 주인의 음성을 아는 소처럼 살고 싶습니다. 내 고삐는 주인의 손에 잡히고 몸에 쟁기의 굴레가 씌어져도 주인이 인도하는 대로 묵묵히 따라가는 소처럼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말처럼 달리지 못해서 더딜지라도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수려한 갈기는 없을지라도 투벅투벅 쉬지 않고 가는 소처럼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황금 밭은 아닐지라도 나의 일굼이 주인의 밭을 옥토로 만들 수만 있다면 나는 소가 되어 그렇게 쓰임 받는 일꾼이고 싶습니다.”
캄보디아는 우리에게 ‘Killing Field’로 익숙한 나라이다. 킬링필드는 1975년에서 1979년 사이, ‘폴 포트’가 이끄는 민주 캄푸치아의 준군사 조직 ‘크메르 루즈’가 자행한 학살로 죽은 시체들을 한꺼번에 묻은 ‘집단매장지’이다.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200만 명의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한때 동남아의 맹주였으나 최빈국가 중의 하나로 전락하게 된다. 인근국가인 베트남, 태국, 라오스 등은 선교사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캄보디아는 불교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를 받아준다. 캄보디아는 선교사들에게 동남아시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법궤를 빼앗김
오늘 본문의 배경은 사사시대 말기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21:25)라는 말씀대로 어둡고 혼탁한 시대이다. 법궤를 앞세워 블레셋과 전투를 하던 이스라엘은 크게 패하고 하나님의 법궤도 빼앗겨 버렸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했다.(삼상 4:15) 이 소식을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고,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목적이 수단으로 전락되는 순간 엘리 제사장의 가문은 풍지박살 나게 되었다.
블레셋은 빼앗은 법궤를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인 다곤 신상 앞에 갖다 놓았다. 다음 날 거대한 다곤 신상이 법궤 앞에 엎어져서 목이 부러지고, 허리도 잘려지고, 팔다리도 부러져서 박살이 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법궤를 가져다 놓은 아스돗 마을에는 독한 종기가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아스돗 사람들은 두려워서 법궤를 가드라는 곳으로 옮겼다. 그러자 가드에서도 독한 종기가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 다음에는 법궤를 에그론이라는 마을로 옮겼다. 거기에서도 무서운 독종의 재앙이 임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7개월 동안 블레셋의 아스돗에서 가드로, 가드에서 에글론으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옮겼으나 갈수록 하나님의 진노는 더 크게 나타났다. 이제는 블레셋 사람들이 겁이 나서 아무도 법궤를 가져가려고 하지 않았다.
블레셋 방백들은 모여서 이런 무서운 재앙이 ’법궤‘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인지, 아니면 우연한 현상으로 생긴 것인지 실험을 해 보기로 했다. 갓 새끼를 뗀 젖 나는 암소 두 마리를 구해서 새 수레를 만들어, 그 위에 하나님의 법궤를 싣고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가게 했다. 새끼를 돌봐야할 암소는 새끼를 뒤로하고 울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로 갔다.
벱궤의 행적
법궤는 실로에서 아스돗으로, 아스돗에서 가드로,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에그론에서 벧세메스로,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게 된다. 벱궤는 사울 왕이 전투할 때 한번 이동된 적이 있었지만(삼상14:18), 법궤는 다윗이 집권할 때까지 계속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다윗이 집권을 하고 12지파의 수장이 된후 그는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하였다. 법궤를 수레에 싣고 이동하다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소들이 뛸 때 웃사가 법궤를 붙들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법궤는 제사장이 메고 가야하는데 수레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두려워하여 오벳에돔의 집으로 법궤를 머물게 했다. 오벳에돔의 집이 축복을 받자, 3개월 후 다윗은 다시 명령하여 궤를 메어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였다. 너무 기뻤던 다윗은 자신의 바지가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 후로 법궤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다가, 바벨론 침공 이후 법궤는 행방이 묘연하게 되었다. 이디오피아에서는 시바 여왕과 솔로몬 사이에서 난 아들이 법궤를 가지고 와서 악숨(Aksum) 성전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Raiders of the Lost Ark’라는 영화가 있다. 이집트 왕 느고가 무깃도 전투에서 승리한 후 법궤를 가지고 이집트를 가지고 갔을 것이라는 전제로 만든 영화이다. 유태인들은 아직도 법궤가 예루살렘 성전 지하 어디인가 있을 것이라는 믿고 있다.
벧세메스로 가는 소
법궤는 벧세메스에 도착하여 수레는 장작으로 사용되고, 암소는 번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려졌다. 바울의 마지막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다. 바울은 13권의 서신서를 썼다. 마지막 쓴 서신인 디모데후서 4장에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4:6-8)
소명과 사명은 조금 다르다. 소명은 부르심이고, 사명은 보내심이다. 인간은 3번 태어나야 인간답게 산다. 첫 번째는 육으로, 두 번째는 영으로, 세 번째는 사명으로 태어나야 한다. 사명은 생명이다. 사명을 마치고 번제로 드려진 암소와 같이 바울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사명을 마치고, 자신의 생명은 전제(Drink Offering)로 부어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전제란 모든 제물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사르기 직전에 그 제물에 포도주를 붓는 의식이다. 바울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예견하고 남은 생명을 산 제물로 순교의 제단에 바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전제’로 표명하였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