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793년 1월 21일, 프랑스 부르봉 왕가 출신 ‘마지막 루이’ 루이 16세 (Louis XVI, 1754 ~ 1793) 기요틴으로 처형
루이 16세 (프: Louis XVI, 1754년 8월 23일 ~ 1793년 1월 21일)는 1774년부터 1792년까지 프랑스 왕국을 통치한 부르봉 왕가 출신의 왕이다. 본명은 루이 오귀스트다. 프랑스 혁명 때 퇴위당하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마지막 루이 (Louis le Dernier)’라는 별명이 있다. 루이 15세의 손자다.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하였다. 선량했던 그는 프랑스 사회를 개혁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나약하여 의지와 추진력이 부족하였고 국왕으로서의 적성이 결여되어, 이후 닥쳐온 비운의 최대 원인이 되었다. 당시 귀족층의 사치스러운 생활 또한 심각하였다. 튀르고를 등용하여 구제도의 모순 해결, 재정위기를 타개하도록 하였으나, 궁정 및 특권 신분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이어 네케르를 기용하였으나, 아메리카 독립혁명에 개입하여 국비를 낭비함으로써 재정은 더욱 곤란해졌다. 이후 칼론, 브리엔을 기용하였으나, 재정은 악화될 뿐 개혁은 특권신분의 반항으로 실현할 수가 없었고, 1788년 삼부회 (三部會) 소집을 결정, 재차 네케르를 기용하였다.
1789년 6월 삼부회가 국민의회로 성장하여 입헌왕정에의 움직임이 높아지자, 군대에 의해 의회를 탄압코자 책동하였다가, 이것이 도리어 바스티유 공격을 초래하였고, 시민의 봉기에 굴복하였다. 이후 소위 1789년 체제에 입각한 입헌 왕정에의 움직임에 대하여 자신의 무정견과 왕비 마리앙투와네트를 중심으로 하는 궁정의 압력으로 신체제에 저항하면서도 일보일보 양보하였으며, 한편 미라보, 라파예트, 바르나브 등과 손을 잡고 권력의 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791년 6월 20일 일가와 함께 국외로 도망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입헌 왕정을 기조로 한 1791년의 헌법의 승인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국민공회는 왕을 퇴위시키고 공화국을 선포했고, 루이 16세는 국민공회 (國民公會)의 투표결과 반역자로서 1793년 1월 단두대 (斷頭臺)의 이슬로 사라졌다.
– 루이 16세 (Louis XVI)
.본명: 루이 오귀스트 드 프랑스 (Louis Auguste de France)
.출생: 1756년 8월 23일, 프랑스-나바르 왕국 베르사유 궁전
.사망: 1793년 1월 21일,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혁명광장(매장지: 생드니 대성당)
.가문: 부르봉 가
.부모: 부) 루이 페르디낭 드 프랑스 왕세자, 모) 마리아 요제파 폰 작센 공녀
.배우자: 마리 앙투아네트 도트리슈
.자녀: 마리 테레즈 드 프랑스 왕녀, 루이 조제프 드 프랑스 왕세자, 루이샤를 드 프랑스 왕세자,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드 프랑스 왕녀
.종교: 천주교
*지위: 프랑스 국왕
.재위: 1774년부터 1792년
.대관식: 1775년
.휘: 루이 오귀스트 카폐프랑스
.왕조: 카페 왕조
○ 생애 및 활동
– 성장 과정
루이 16세는 1754년 8월 23일, 루이 15세의 손자로 왕태자인 루이 페르디낭과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딸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외손녀인 작센의 마리 조제프 공녀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베리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1760년 9월 8일 보귀용 공작이 가정교사로 낙점되었다. 1761년 부활절 형 부르고뉴 공작 루이 조제프가 암으로 사망하고, 11살 때인 1765년에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왕세손에 봉해졌다.
– 결혼
오랜 세월 동안 서로 적대시해 온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에 화해를 조성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와 부르고뉴 공작 루이 조제프 간에 정략 결혼이 획책되고 있었지만, 1761년 루이 조제프의 사망으로 인해, 1763년 5월 오스트리아로부터 사절이 파견되어 루이 오귀스트와 대신 결혼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결혼을 반대했던 루이의 아버지가 1765년에 사망한 후 1769년 6월, 루이 15세로부터 허락을 받아내어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약혼 문서를 보내게 하였다.
1770년 5월 16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태자 루이 오귀스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 즉위
1774년 5월 10일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서거하자 1775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때 그의 20세였으며, 아내와의 사이에서 1778년 장녀 마리 테레즈와 1781년 장남 루이 조제프(요절), 1785년 차남 루이 샤를(훗날의 루이 17세), 1786년 차녀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요절)를 낳았다.
1789년 과세의 승인을 요구하기 위해 170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는 제3신분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의회로 발전하였다.
루이 16세는 이를 무력으로 탄압하였으므로 프랑스 혁명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파리 시민은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고, 9월 폭동을 일으켜 마침내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의회는 “사람은 나면서부터 자유·평등해야 하며, 정치를 하는 권리는 국민에게 있다”고 하는 ‘인권 선언’을 발표하여 혁명의 뜻을 밝혔다. 루이 16세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외국으로 피하려다 실패하여, 1793년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 정치 활동
1774년 국력이 쇠약해진 때에 즉위하였다.
궁전의 경비 등으로 인하여 초래된 재정 악화는 루이 14세의 치세 말기부터 시작되어 루이 15세 치세하에서도 호전되지 못했고 루이 16세가 즉위할 즈음에는 다른 나라로부터 빚을 지는 처지가 되었다. 특히 북아메리카에서의 영국의 세력 확대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독립 전쟁에 관여하여, 미국을 지원하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경제는 한층 더 악화되고 말았다. 때문에 루이 16세는 즉위 직후부터 만성적인 재정난에 계속 골치를 썩어야만 했다. 여기에 프랑스의 고질적인 사회적 모순이 사태 해결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구 체제하에서는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는 정치능력이 아니라, 문벌이 사회적 성취와 출세를 좌우하여 문벌은 없지만, 학식,기술, 재산같은 실력을 갖춘 부르주아 계급의 힘이 강해지는 시대적 흐름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 또한 당시 프랑스는 통일된 기준 없이 각 지역별로 서로 관습, 법 등이 달랐다. 북부와 중부지방의 세금이 가장 무거웠으며 파리의 경우가 특히 심했다. 농부들은 추수한 곡식의 10~15%를 세금으로, 8%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를 부양하는 돈으로 내야했으며, 강제 노역에 종사해야 했다.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폐지될때까지 소득의 십분의 일 즉, 소득의 10%를 교회에 헌금하는 십일조를 해야 했다.
루이 16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조세개혁을 통해서 난관을 타개하려고 했지만, 수구적인 귀족들은 이러한 개혁조치에 크게 반발하였다. 이에 루이 16세는 부르봉 왕조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좀 더 과감하게 밀어붙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시간만 질질 끌다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1787년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145명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모인 명사회를 소집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 모임을 가졌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 삼부회와 테니스코트 서약
결국 남은 방법은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를 여는 것이었는데, 바로 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왕족이나 귀족은 삼부회를 소집해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었고, 그러한 속셈을 알아차린 부르주아 계급은 그것을 계기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자 했으니 그 결과는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1789년 6월 제3신분의 대표들은 제1신분 및 제2신분에 속한 일부 대표들과 합세, 테니스 코트에 모여 프랑스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선서했다. 이 선서는 훗날 ‘테니스 코트 선서’라 불리게 된다.
– 프랑스 대혁명
그러나 루이 16세가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국민의회의 활동을 방해하자, 팔레 루아얄에 모여 있던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7월 14일 오후 구체제를 상징하는 바스티유 감옥[3]을 습격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였다. 무정부 상태가 된 파리 시내에서 민중들은 혁명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들고 민병대를 조직하였다. 또한 서로 알아보기 위해서 밤나무 잎을 모자에 걸었다.
– 바렌느 사건
민중들의 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루이 16세는 가족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 했으나, 국경 근처 바렌느에서 발각되어 군인들에 의해 파리로 이송되어 탕플 탑에 유폐되었다. 그 곳에서 루이 16세 일가는 엄중한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다.
– 루이 16세의 처형
한편 유럽의 다른 군주들은 심각한 우려의 시선으로 이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민중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정치권력에 맞서 싸운 프랑스 대혁명이 자기들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웠기 때문이다. 유럽의 군주들은 루이 16세와의 연대를 선언하고 그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1792년부터 그들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 혁명 세력과의 전쟁을 시작했으며, 프랑스 왕가에 무슨 변이 일어날 경우 파리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굴욕적인 패배를 당할 위험에 직면한 프랑스는 식량 부족에다가 엄청난 물가 상승까지 겹쳐 다시 소요 상태에 빠져들었다.
– 재판
1792년 9월 21일, 국민공회라고 불리는 새로운 의회가 구성되어 그 첫 번째 회의에서 공화제가 선포되었다. 루이 16세는 새로 생긴 혁명 정부로부터 국가반역죄로 기소되어 1793년 1월 19일에 사형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 재판에서 루이 16세는 721명의 투표자 가운데 무죄 334표, 유죄 387표를 받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이틀 후인 1월 21일 콩코드 광장에서 샤를 앙리 상송(Charles-Henri Sanson)에 의해 단두대에 의한 공개 참수형을 당했다.
– 의연함
세간에서는 “나는 망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발버둥치자 사형집행관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며 협박해 단두대로 끌고 올라갔다는 것이 루이 16세의 마지막 모습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당시 기록을 보면 기독교수련으로 단련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왕으로서의 당당함을 잃지 않은 채 꿋꿋하고 냉정하게 모든 절차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 처형과 유언
루이 16세는 단두대 계단 앞에서 코트를 벗기를 거부했다. 함부로 윗옷을 벗는 것은 예의범절에 벗어난다는 이유였다. 사형집행관이 절차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하자, 그는 스스로 코트를 벗었다. 수갑도 차기를 거부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단두대의 칼날이 목에 떨어지기 직전에 루이 16세는 몰려든 군중을 향해 “프랑스인들이여, 나는 무고하게 죽는다”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는 이어 사형집행인들을 향해 몸을 돌린 뒤 “나는 기소된 모든 죄목으로부터 결백하다. 내 피가 프랑스 국민의 행복을 강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루이 16세의 배우자 마리 앙투아네트도 같은 해 10월 16일에 참수당했다. 향년 38세.
– 참형으로 인한 여파
귀족이나 다른 왕족의 반란, 또는 외세의 침략도 아닌 자국 민중들이 봉기로 몰아낸 것도 모자라 왕의 목을 자른 이 전무후무한 사건은 주변의 다른 군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이후 많은 유럽의 군주들이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인 태도로 나오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인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몇 년 전에 푸가초프의 반란을 겪은 경험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이었으며 주변국의 군주들에게 국서를 보내어 프랑스의 폭도들을 진압하고 루이 16세를 다시 옹립하자는 국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루이 16세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져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안 되어 사망하고 만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동서양 할 것 없이 군주가 반란으로 폐위되고 시해당한 예는 무수히 많았으나 루이 16세의 처형이 주변 유럽 국가들의 군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이유는 귀족이나 다른 왕족도 아닌 하찮은 평민들이 그들 스스로 재판관인양 법을 집행해서 군주를 무슨 형사사건의 죄인 취급하고 재판하여 처형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새 군주를 옹립한 게 아니라 아예 군주제를 폐지하고 군주가 지배하지 않는 공화제를 수립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군주가 반란으로 폐위될 경우 반란을 일으킨 대상은 귀족이거나 아니면 다른 왕족이었으며, 폐위된 군주가 형사법을 적용받은 예도 없었다. 왕정 시절 로마의 타르퀴니우스 왕, 제정 시절 폐위된 수많은 로마 제국의 황제들, 중국사의 걸왕, 주왕, 수양제, 영국의 존 왕, 한국사의 봉상왕, 진지왕, 연산군, 광해군 등도 어디까지나 귀족 또는 사대부 계층의 반란으로 폐위되었고 백성들이 직접 나서서 폐위된 군주를 죽인 예는 없었다. 비록 폐위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때는 엄연한 군주였기 때문에 백성이 직접 죽이는 건 옳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군주를 옹립하거나 아예 역성혁명을 일으켜 본인 스스로 찬탈 하여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고 군주가 되어 군주제를 유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대 로마 같은 경우는 비록 왕정을 없애고 공화정을 수립했어도 타르퀴니우스 왕을 민중이 직접 죽이지는 않았으며 현대의 네팔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했지만 전 국왕이었던 갸넨드라를 죽이지는 않고 폐위시키는 선에서 그쳤다. 예외가 있다면 올리버 크롬웰이 찰스 1세를 처형한 경우인데 청교도 혁명을 주도했던 크롬웰과 그의 지지/추종 세력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내 혁명 세력들처럼 평등주의자도 아니었고 그가 왕정 폐지 이후에 만들려던 공화정 체제는 시민이 직접 이끄는 나라가 아닌 기독교 근본주의 신정국가였다.
반면에 프랑스 혁명은 이전과는 달리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개창한 게 아니라 아예 왕정 자체를 없애버렸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고대 아테네나 로마에서 왕정이 폐지된 예는 있어도 까마득한 고대인 데다가 프랑스 혁명과는 그 성질이 꽤나 달랐다. 게다가 영국은 청교도 혁명으로 혁명 지도자였던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잠깐 왕정이 폐지되었지만 올리버 크롬웰 사망 후 크롬웰파 세력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비크롬웰파 세력들에 의해 참형당한 찰스 1세 전 국왕의 장남인 찰스 2세 전 왕세자를 새 국왕으로 옹립시키면서 다시 왕정이 복고되었다. 프랑스 혁명 직전 벌어진 미국의 독립도 그것 자체가 세계사에 남을 만한 대사건이긴 했지만, 애초에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심지어 영국에 적대적인 나라 입장에선 영국의 주요 식민지 중 하나가 떨어져나가는 반응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미국 독립과는 달리 왕의 직접통치에서 멀리 떨어진 식민지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 왕이 직접 다스리는 군주국인 유럽의 프랑스 본토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이는 당연히 프랑스 왕정의 폐지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게다가 미국인들은 영국으로부터의 식민지 독립을 원했을 뿐, 영국 본토로 쳐들어가 조지 3세를 죽이겠다는 수고는 할 생각도 할 능력도 없었지만, 프랑스 민중들은 자신들의 군주를 자신들의 손으로 사형시킨다. 게다가 더 충격적이게도 군주가 없는 새로운 나라를 유럽 한복판에 건국했다. 미국 독립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유럽의 절대 군주들이 프랑스 혁명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군주가 하극상으로 폐위된 예는 고대부터 무수히 많았지만 군주가 없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출현은 주변 군주들 입장에서는 군주의 처형보다 더 큰 위협으로 비쳐졌으며 자신들도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루이 16세의 처형은 필연적으로 유럽 군주들의 대불(대프랑스)동맹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 가족관계
할아버지 : 루이 15세(1710년 2월 15일 ~ 1774년 5월 10일)
할머니 : 마리 레슈친스카
아버지 : 도팽 루이 페르디낭(1729년 9월 4일 ~ 1765년 12월 20일)
어머니 : 마리아 요제파(1731년 11월 4일 ~ 1767년 3월 13일)
아내 : 마리 앙투아네트(1755년 11월 2일 ~ 1793년 10월 16일)
장녀 :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1778년 12월 19일 ~ 1851년 10월 19일)
장남 : 루이 조제프(1781년 10월 22일 ~ 1789년 6월 4일)[64]
차남 : 루이 샤를(1785년 3월 27일 ~ 1795년 6월 8일)
차녀 :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1786년 7월 9일 ~ 1787년 6월 19일)
누나 : 마리 제피리느(1750년 8월 26일 ~ 1755년 9월 1일)
형 : 루이 조제프(1751년 9월 13일 ~ 1761년 3월 22일)
형 : 루이 자비에(1753년 9월 8일 ~ 1754년 2월 22일)
남동생 : 프로방스 백작 루이 스타니슬라스(1755년 11월 17일 ~ 1824년 9월 16일)
남동생 : 아르투아 백작 샤를 필리프(1757년 10월 9일 ~ 1836년 11월 6일)
여동생 :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1764년 5월 3일 ~ 1794년 5월 10일) – 혁명 시기에 루이 16세와 함께 프랑스에 남았다가 처형되었다.
○ 평가
루이 16세는 몹시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해서 수감되었을 때는 교도관의 가정사정까지 신경을 써주거나 프랑스 국내에서 고문을 금지하는 등 개인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전통 가톨릭 계열 단체에서는 프랑스 혁명과 혁명의 산물을 부정적으로 여기기 때문에 루이 16세에게 동정적이다.
루이 16세는 어찌 보면 구시대가 남긴 숙제를 풀지 못해 희생된 왕이지만, 국가의 군주로서 국가의 쇠퇴를 막지 못한 것은 변명이 필요없는 실책이다.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것은 정치의 문제라기보다는, 직접적으로는 오스트리아와 내통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로 도주를 시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민들과 자코뱅파들은 처형에 염두해 두지는 않았으나, 스스로 공격을 가한 오스트리아로 도주하려 했다는 것은 엄연한 반역죄였다. 만약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로의 도주를 성공했으면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 침공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얻게 되고, 프랑스 내부적으로도 반혁명파를 결집시킨 후 봉기시켜 프랑스 내전으로 이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의견 차이는 근본적으로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에 기인한다. 유럽에서 군주끼리 서로 힘을 빌려주는 일은 흔했다. 처가집의 힘을 빌려서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회복하는 것은 군주제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국가주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죄였다.
하지만 “공화제적 가치관”에서 이 시도는 시민과 그 대표들을 역적으로 몰아서 외국 군대의 힘을 빌려서 죽이려 하는 사악한 적대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루이 16세가 명분을 부여해서 끌고 온 오스트리아 군대가 파리에 입성하면 무수한 사람들이 역적으로서 살육당할 것이 분명했다. 정치적 가치관과 권력 투쟁을 논하기 전에 프랑스 시민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사형판결이 신속하게 결정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프랑스 백성들은 아직 전통적인 권위와 관습의 영향으로 루이 16세를 “우리들의 왕”으로 여기고 있었다. 가난한 인민들에게 그렇게 가혹하지 않았으며, 폭군도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그들의 신뢰를 배신하고 외세를 끌어들이려다 발각된 셈이니 학살 목표로 지정되었던 시민들과 대표의 감정이 폭발할 수밖에 없고, 생쥐스트는 “국왕이 무죄라면 혁명이 유죄”라 주장했다. 반면 혁명이 정당하다면 같은 논리에 따라 왕은 유죄다’라는 논리이며, 생쥐스트는 왕이 오스트리아군의 힘을 빌리려 시도한 것 때문에 왕의 정당성과 혁명의 정당성이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이 16세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민들은 “왕의 배신”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애초에 프랑스 혁명의 계기가 된 재정파탄도 루이 14세의 무모한 원정과 전쟁 그리고 사치로 이미 국고가 파탄난지 오래고 조부인 루이 15세도 이를 해결하지 않고 더 악화시킨 상태로 루이 16세에게 물려준 것이며 귀족들의 힘도 상당히 강해서 이들에게도 세금을 징수하지 못하게 된 탓이 크다. 게다가 루이 16세의 해결책은 구시대의 문제 해결은 커녕, 기득권의 저항에 번번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