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11월 9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안창호 (安昌浩, 1878 ~ 1938) 출생
안창호 (安昌浩,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는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계몽운동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그의 사후 1988년 3월 21일, 24일 도산 안창호 선생이 공부한 구세학당 , 즉 경신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에 소속한 장로교회 학교)에서 그에게 명예 졸업장이 추서됐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본 제국 영사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송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형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했으나 소화불량과 간경화, 폐질환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합병증으로 출옥 직후 사망한다.
– 안창호 (安昌浩)
.별명: 자는 치삼, 호는 도산 (島山), 산옹 (山翁), 섬메, 신도생 (新島生), 별명은 안광택 (安廣宅), 안창호 (晏彰昊)
.출생: 1878년 11월 9일, 조선 평안도 강서군 초리면 초리7리 봉상도 (도롱섬)
.사망: 1938년 3월 10일 (59세),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경성 제국 대학 부속 병원
.국적: 조선 대한제국
.부모: 부) 안흥국, 모) 제안 황씨 부인
.배우자: 이혜련 (영: 헬렌리, Helen Lee)
.자녀: 아들 – 필립 안 (‘꼭 독립을 이룬다’라는 뜻), 안필선, 안필영 (영: Ralph Ahn), 딸 – 안수산, 안수라
.학력: 1896년 구세학당 보통부 졸업
.정당: 무소속
.종교: 유교 (성리학) → 개신교 (장로회)
.기념지: 도산 안창호 기념관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6대 국무령
.임기: 1926년 5월 3일 ~ 1926년 5월 16일
.전임: 이동녕 (제5대) / 후임: 이동녕 (제7대)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이며, 본관은 순흥, 호는 도산 (島山), 종교는 개신교이다. 구한 말 만민공동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자 미국으로 망명, 이후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또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발판이라 생각하여 1899년 (광무 2년) 점진학교, 1908년 (융희 2년) 대성학교, 1926년 중국 난징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대한의군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사령관을 지낸 항일 독립운동가 안중근 (安重根) 선생과는 동성동본 친족척이기도 하며 1938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간경화를 비롯한 폐렴과 만성기관지염 및 위하수증· 복막염 및 피부염과 소화불량 등의 합병증으로 타계한 그는 생전에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 재미한인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1919년 4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주도하였다. 1921년부터는 임시정부 창조론과 개조론이 나뉠 때 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된뒤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미국의 한인 교포사회의 지도자였던 그는 박용만, 이승만, 서재필 등과 경쟁, 갈등관계에 있기도 했다.
○ 생애 및 활동사항
선대는 대대로 평양 동촌 (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8세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김현진 (金鉉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이 때 서당 선배인 필대은 (畢大殷)과 알게 되어 그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국력배양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상경하여 언더우드 (Underwood, H. G.)가 경영하는 구세학당 (救世學堂)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서구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서 관서지부조직을 맡게 되었다. 이 때 평양지회 결성식이 열린 평양의 쾌재정 (快哉亭)에서 감사 조민희 (趙民熙)와 수백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18조목의 쾌재 (快哉)와 18조목의 부재 (不哉)를 들어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 (李商在) · 윤치호 (尹致昊) · 이승만 (李承晩) 등과 만민공동회 (萬民共同會)를 개최하였으며,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화암리에 강서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 (漸進學校)를 설립하였다. 점진공부와 수양을 계속하여 민족의 힘을 기른다는 교육목표를 설정하였으며, 초등과정의 남녀공학을 실시하였다.
190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1905년 4월 대한인공립협회 (大韓人共立協會)를 설립하였다. 여기에서 야학을 개설, 회원들을 교육시키고 『공립신보 (共立新報)』를 발행하여 교포들의 생활향상 및 의식계몽에 힘썼다.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귀국길에 일본 도쿄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우리나라 유학생단체인 태극학회 (太極學會)의 청년들을 만나 국내정세에 대한 지식을 얻고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귀국 후 1907년에 이갑 (李甲) · 양기탁 (梁起鐸) · 신채호 (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①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② 동지를 찾고 단합하여 국민운동의 역량을 축적하며, ③ 각지에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청소년의 교육을 진흥시키고, ④ 각종 상공업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 (富力)을 증진하게 한다는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1907년 평양에 대성학교 (大成學校)를 설립하고 평양과 대구에 출판기관인 태극서관 (太極書館)을 건립하였으며,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 육성에도 힘썼다.
또한, 1909년에는 박중화 (朴重華) · 최남선 (崔南善) · 김좌진 (金佐鎭) · 이동녕 (李東寧)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계몽운동 및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9년 10월에 있었던 안중근 (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었다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산동성 (山東省)에서 민족지도자들과 청도회의 (靑島會議)를 열었다.
청도회의는 북만주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어 영농과 군사양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자금관계와 급진파의 반대로 실패하였으며, 이에 시베리아를 거쳐 191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안창호가 미국으로 망명한 1911년은 일제에 의해서 조작된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된 해이기도 하다.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설하여 본국에서 이루지 못한 대성학교 · 신민회 · 청년학우회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1914년 11월 대한인국민회 (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15년 6월 23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에 취임하며 동포의 단결을 강조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독립운동방략 작성, 연통제 (聯通制) 수립,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상해 소집 등을 실행하였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취임한 지 2년째인 1921년에 임시정부 내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다 실패하여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하였다.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어 부의장에 취임하게 되었으나 공산당의 전략에 의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1924년에는 북중국 만주방면을 시찰, 여행하며 이상촌 (理想村) 후보지를 탐사하고 난징에 동명학원 (東明學院)을 설립하였다. 1924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1926년 중국에 돌아와서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여 이상촌사업을 추진하였다.
1927년 길림에서 군사행동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 (大獨立黨)의 결성을 토의하던 중 동지 200여 명과 함께 중국경찰에 감금되었다가 중국 내 사회여론이 비등하게 되어 20일만에 석방되었다.
1930년 1월 상해에서 이동녕 · 이시영 ·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대공주의 (大公主義)를 제창하였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으로 만주에서의 이상촌 계획을 단념하고 난징에서 토지를 매입하였다.
1932년 일본의 중국본토침략정책에 대응하여 독립운동근거지 건설계획을 재검토하던 중, 같은 해 4월 윤봉길 (尹奉吉)의 상해 훙커우공원 [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되었다.
4년의 실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2년 6개월만에 가출옥하여 지방순회 후 평안남도 대보산 (大寶山) 송태산장 (松苔山莊)에서 은거하였다.
1937년 6월 동우회사건 (同友會事件)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중, 같은 해 12월에 병으로 보석되어 이듬해 3월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졸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죽은 뒤 망우리에 안장하였다가 1973년 11월 미국에 있던 부인 이혜련 (李惠鍊)의 유해와 함께 도산공원 (島山公園)으로 이장, 안장되었다.
안창호의 교육사상은 교육을 통하여 민족혁신을 이룩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민족혁신은 자아혁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자아혁신은 바로 인격혁신이라 보았다.
따라서, 그는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격의 혁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자아혁신은 곧 자기개조로 연결되며, 자기개조는 ‘무실 (務實) · 역행 (力行) · 충의 (忠義) · 용감 (勇敢)’의 4대정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무실역행을 강조하였는데, ‘무실’이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이란 힘써 행하자는 것이다. 무실은 개조의 내용이고 역행은 그것의 행동으로, 무실과 역행이 없이는 자기개조가 불가능함을 주장하였다.
개개인의 인격혁명으로서의 자아혁신은 곧 자기개조이며 자기개조가 곧 민족개조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는 주인정신 (主人精神)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보았다. 대성학교의 교훈을 주인정신으로 설정한 것도, 주체·독립·책임을 의미하는 주인정신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자기개조와 민족개조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교육사상은 학교건설과 흥사단운동을 통해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안창호는 점진학교 · 대성학교 · 동명학원 등 3개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이 가운데 대성학교의 건학정신은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에 있었다. 이것은 곧 설립자인 안창호의 교육이념이었다.
또한, 흥사단 창립 당시의 약법 (約法)에 표시된 단 (團)의 설립목적 조문을 보면 “본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층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 (情誼)를 돈수 (敦修)하고 덕 · 체 · 지 삼육 (三育)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육성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여 우리 민족 전도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에 있음이라.”고 하여, 정의돈수를 통하여 인격을 육성한다는 교육목적이 제시되고 있다.
한편, 교육방법상의 원리로는 성실성과 점진성을 강조하였다. 인생관과 세계관의 근본원리 및 인간이 믿고 의지해야 할 진리의 등불은 곧 성실이라 하였으며, 거짓없고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일에 정성과 진실을 다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실이야말로 자아혁신과 민족개조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적 원리라 보았다.
또한, 그는 공부하는 정신과 태도로 점진성을 강조하였다. 점진공부는 학문과 실천의 기본적인 태도로서, 자신의 생활은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개척하여 향상을 기하자는 것으로 이는 성실성과 함께 주요한 교육방법의 원리가 된다.
그의 이러한 짐진주의적 사고는 학교설립의 순서에도 나타나는데, 점진학교 설립 이후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점진적으로 대성하는 인물을 기른다는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 활동가로서의 의의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무력투쟁론, 민족개조론, 외교독립론으로 나뉠 때 민족개조론을 주창하였으며, 민족개조론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에 의하면 스스로 힘과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기반으로 할 때만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또한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여 경제적, 사회적인 실력을 길러야만이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어 교육을 통한 교육 입국론을 제창하여 각종 학교의 설립과 양성에 노력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그의 실력 양성론은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 송진우, 안호상, 조병옥, 김성수 등에게 두루 영향을 주었다.
웅변술에 뛰어났으며, 연설과 웅변에 두루 능통하였다. 여러 청년들을 감화시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했다. 한편 그는 이상적인 정치인으로 유길준을 지목했다. 다른 이름은 창호 (昌鎬)이고, 자는 치삼, 호인 도산 (島山), 산옹 (山翁), 섬메, 신도생 (新島生), 별명은 안광택 (安廣宅), 안창호 (晏彰昊)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도산대로 (島山大路)와 도산공원은 그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
○ 사후
그는 망우리에 매장되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는 헌병을 보내 만일의 소요사태를 막는다는 이유로 망우리 묘소 장지의 출입을 통제, 감시하였다.
후에 강남구 신사동의 도산공원으로 이장되면서 그의 구 묘소가 있던 묘터 (애제자 유상규의 묘소 뒷편)는 원형 보존되고 있다.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이승만은 안창호를 추도하는 한자로 된 만시 (晩詩)를 지어 일제 치하의 한국으로 보내 애도를 표했다.
그 뒤 윤치호와 이광수, 김성수 등에 의해 추도식이 계속 되었고, 해방 뒤에도 김구의 귀국 이후, 김구, 김성수, 이광수 등에 의해 추도식이 계속 이어졌다.
윤치호에 의하면 이광수, 현제명, 주요한 등은 안창호가 죽자 마자 등을 돌리고 조선총독부에 아첨했다는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남겼다.
제1공화국 기간 중에도 흥사단과, 그를 존경하던 김성수, 장택상, 그리고 한때 그의 수양동우회 회원이었던 조병옥 등에 의해 계속 추모 사업이 계속 이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3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등급)을 추서하였다.
미국에 매장된 아내 이혜련의 시신과 함께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도산공원으로 이장, 안장되었다.
2000년대 이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인터체인지 (2002년)와 우체국 (2004년)이 세워졌다.
○ 사상과 신념
– 4대 정신
무실, 역행, 충의, 용감
– 실력양성론
안창호는 1920년대 내내 독립운동의 진행을 가로막던 고질적인 사상분열을 극복하고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사상과 노선 갈등의 극한 대립을 융화 시키고자 그 어떤 주의와 노선으로도 분파할 수 없는 자기 희생의 ‘대공주의’ (大公主義)라는 제3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는 스스로 힘을 키울수 있을 때만이 민족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실력양성론을 주장했다. 그의 실력 양성론에 이광수, 최남선, 김성수, 조병옥 등이 감화받았다.
안창호는 개인의 당리나 사익보다 사회 전반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민주적 토론절차를 통해 형성된 공론을 중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의 사회민주주의 나라 수립을 지향하는 중도적 노선을 선호했었다.
– 거짓 망국론
안창호는 한국인들의 거짓, 사기, 부정이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갔다고 봤다. “아아,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군부 (君父)의 원수는 불공대천 (不共戴天)이라 하였으니 내 평생에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라.”, “네 가죽 속과 내 가죽 속에 있는 거짓을 버리고 참 (誠)으로 채우자고 거듭거듭 맹세합시다.”라며 거짓과 거짓말이 나라를 망친 길이라고 보았다. 거짓이 만연한 것이 나라를 망친 것이라 진단한 그는 거짓이야 말로 나라를 죽인 원수로 규정하였다.
그는 “나라 일은 신성한 일이요. 신성한 일을 신성치 못한 재물이나 수단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오.”라며 공직을 통해 부당한 재물을 축재한 것 역시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는 원인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거짓이 협잡을 낳고 협잡이 불신을 낳고 불신에서 모든 불행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를 망친 최대의 원인의 하나가 거짓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거짓말을 말라. 심지어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자.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깊이 뉘우쳐야 한다. 거짓이 우리를 망친 원수다’라는 것이다. 각 개인의 가슴 가운데 진실과 정직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가 가장 미워한 것이 거짓이요, 그가 가장 사랑한 것이 진실이다. 그의 인격은 참의 인격이요, 그의 철학은 진실의 철학이다. 저마다 참되기를 힘쓰고 한국민족을 참된 민족으로 만들자는 것이 그의 숙원이었다. 그가 평양에 대성 (大成) 학교를 세우고 청년 제자들을 교육할 때에도 ‘참 (誠)’이 그의 교육 이념이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 (誠實)을 잃었거든 통회 (痛悔)하라”
안창호는 학생들에게 성실과 진실을 요구했다. 그는 저마다 ‘참’의 공부를 하자, 온 국민이 진실한 인간이 되기를 힘쓰자, 그것이 곧 나라를 구하는 길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하고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 대공주의
1927년 상하이에 있을 때 그는 대공주의 (大公主義)를 역설하였다. 이는 이념, 계파, 파벌을 떠나 조국과 독립을 위해 헌신하자는 것이며, 공적인 것을 위해 개인과 사적인 것을 희생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설립되면서부터 그는 ‘여러분, 공과 사를 가르시오. 공과 사 중 한쪽을 굳이 희생해야 된다면 사를 희생해야 됩니다.’라고 역설했다. 대공주의를 발표하면서 그는 여기에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추가하였다. 대공주의는 1920년대 중후반 독립운동가들간의 이념적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급속히 세력이 커진 사회주의자들과의 제휴 내지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해 내려는 의도에서 이를 구체화 하기에 이른다.
1919년 안창호는 독립운동기간에 서로 엄히 지킬 맹약으로서 공금을 횡령하지 못한다는 철칙을 세웠다. 공금을 사적으로 횡령하는 행위는 용서하거나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1920년 1월 3일 상해에서 신년 축하회가 열렸을 때 5시간 동안 독립운동의 방략으로서 육대사업 (6大事業)에 대한 설명을 할 때 그는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지탄하며, 임시정부의 직원들은 사사로운 감정과 사사로운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정부직원은 인민 (人民)의 노복 (奴僕)이지만, 결코 인민 각개의 노복이 아니요, 인민전체의 공복 (公僕)이다. 그러므로 정부직원은 인민전체의 명령을 복종하려니와 개인의 명령을 따라 마당을 쓰는 노복은 아닐 것이요. 그러니까 정부의 직원으로서 사우 (私友 )나 사복 (私僕 )을 삼으려 하지 마시오. 그러지 말고 공복을 삼으시오. 나는 여러 사람이 국무원 (國務院 )을 방문하고 사정 (私情)을 논하려 사사(私事)를 택하는 일을 보았소. 이는 크게 불가한 일이니, 공사 (公事)를 맡은 자와는 결코 한담 (閑談)을 마시오. 이것이 심상한 일인듯 하지만은 기실 큰 일이요. 금일은 정부직원이 아들이라도 아들로 알지 말고 사우라도 사우로 알지 마시오. 사우 (私友)를 위해서 공사 (公事)를 해함은 큰 죄입니다.”
1922년의 국민대표회 (國民代表會) 석상에서 통일과 대동단결 (大同團結)을 강조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에 대해서 몇 가지로서 고하고자 합니다. 즉 첫째는 과거의 감정을 망각할 것, 둘째 피아 (彼我)를 일시동인 (一視同仁)할 것, 셋째는 일만 표준하여 공평정직 (公平正直)할 것, 넷째는 흉금을 피력할 것, 다섯째 공결 (公決)에 열복 (悅服)할 것 등이외다. 제군이 어떠한 이론을 진술하고 어떠한 안을 제출하든지 각각 그 자신이나 친구나 당파의 이해 (利害)를 표준하여 외공내사 (外公內私 )하면, 구하는 원만 (圓滿)은 이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패망 (敗亡)에 이를지니 그러므로 각각 자가의 이해는 절대로 희생하고 오직 일만 하는 순결한 마음으로 회의석상에서 공평 (公平)과 정직 (正直)을 주장하면 설혹 이세 (理勢)로서 싸움의 치열함이 어떠한 정도까지 도달할지라도 아무 위해 (危害)가 없고 도리어 회의 전체는 원만하여지고 대표된 자의 책임을 다 하는 것이 될 것이외다.”
또한 안창호는 ‘물방황’ (勿彷徨)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유명한 사기 (史記)의 한 구절을 들어 ‘사투 (私鬪, 사적인 싸움)에는 겁을 품고, 공전 (公戰, 공적인 싸움)에 임해서는 용감하시오’라는 것이다. 1927년에 이르러 공을 위해 사를 희생해야 된다는 것을 주제로 한 대공주의라는 것을 구체화하여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는 서구의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에 대응하되 이념적이지 않은 이념이었다.
그는 민족주의자들이 추구하던 궁극적 목표인 독립국가의 건설이라는 틀 속에서 자유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인 어떤 것에도 억압되지 않는 자유의 가치를 수용하고,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인 평등의 가치 역시 적극 수용하였다. 대공주의의 바탕으로 그는 ‘안으로는 이를 정치,경제,사회,교육의 분야에서 평등사회를 실현하고, 개인과 개인간의 평등한 권리와 대우 보장’을, ‘밖으로는 민족과 국가간의 평등을 통한 평화적 세계질서 수립’을 그 존립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 교육입국론
실력양성론의 방법의 하나로 그는 교육입국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교육이 곧 도탄과 식민통치에 빠진 한국을 독립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1899년 평양에 점진학교, 1908년 대성학교를 건립하였고, 그와 생각이 같던 이동휘, 윤치호, 양기탁 등이 그의 점진학교, 대성학교의 운영에 적극 협력, 동참한다. 1926년 중국 난징에는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그의 교육입국론에도 감화된 김성수 등은 학교 신설과 경영난을 겪던 중앙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을 인수하였고, 장덕수, 윤치호 등은 이화여전, 근화여학교 등의 재단 이사로 참여하며 이들 사립 학교 재단의 재정적 후견인 노릇을 하였다.
○ 평가
안창호는 ‘민족의 선각자’, ‘독립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라는 등 높은 평가를 받는 반면, ‘개량주의자’, ‘조선독립불가론자’, ‘자치론자’등 독립운동계에 파벌을 조장시키고 민족개량주의를 양성시킨 인물이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실제 이광수, 최남선, 윤치호 등 그의 노선을 추종했던 인물 대부분이 1930년대 중반이후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벌였다. 그러나, 안창호 자신은 언제나 중립적 입장에서 평행선을 유지하려 했었고, 파벌을 조장하는 것에 대해 극히 원하지 않았었다. 그는 한국 근대사상 경제, 정치, 언론, 문화 각 방면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며 인재양성과 재정 확보 등을 통해 독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했을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이 장벽에 부딪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돌파구를 마련하고 정국을 전환하여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하였다.
당대의 시각으로는 ‘도산은 겸허한 사람이었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오만불손한 마음과 유아독존의 영웅주의적 태도는 도산에게서는 추호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두뇌와 언변과 통솔력과 용기와 덕성이 뛰어난 인격자였지만 절대 자만하거나 뽐내는 일이 없었다. 그는 앞에 나서서 떠드는 사람이 아니고 뒤에 서서 묵묵히 자기 직분을 다하는 분이었다. 그는 스스로 높이는 자가 아니고 스스로 낮추는 자였다.’는 평가도 있다.
안창호의 비서를 지낸 구익균은 참 온화하고, 화도 잘 안 내시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분 이라고 평하였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택상은 그를 대통령이 될 자질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영국으로 가는 도중 베를린에 있는 한국인을 만나 여관에 함께 묵고 있을 동안에 도산 안창호를 만날 수 있었다. 장택상은 ‘그가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도산은 어떠한 문제든지,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자기의 의견을 (쉽게) 납득시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한 번은 나이가 한참 어린 나를 데리고 얘기를 하다가 의견이 달라지게 되자, 그 날 밤중에 다시 찾아와서 의중의 말을 들려주며 어떻게 해서든지 꼭 상대방으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어린 생각에도 이 분이야말로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면 반드시 대통령이 될 분이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택상은 ‘그의 인상 중에서도 웅변술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분이야 말로 우리가 꼭 대통령으로 모셔야 할 분이라고 본다.”
유학하고 있는 동안 한국인 학생들과 만나게 되면 먼저 도산 선생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서 그야말로 대통령이 될만한 자질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살리기 사업 강행에, 도산 안창호가 주장한 ‘강산개조론’이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 LA엔 안창호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도산 안창호 우체국과 도산로가 있을 정도로 미국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있다.
○ 저서
.나의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도산 안창호
.도산 안창호 서한집 : 영원한 청년 안창호의 러브레터
.안창호일기 (도산일기)
○ 연보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도롱섬에서 통덕랑 안태열의 손자이자, 농부 안흥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 둘째 형의 요절로 사실상 2형제가 되었다.
1890년 평안남도 대동군 남부산면 노남리로 이주
1890년 서당에서 교육을 받다가 김현진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1895년 밀러학당 초등부에 입학하고, 장로교회에 출석하였다.
1897년 밀러학당 초등부 졸업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에도 가입하다.
1898년 독립협회 관서지부와 만민공동회 관서지부의 창립 발기를 주도하고, 소년 연사로서 명성을 알리다.
1898년 독립협회 관서지부 지부장, 만민공동회 관서지부 지부장이 되어 평안도지역의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지부를 관리하다.
1898년 평양 쾌재정에서 연설로 명성을 얻다.
1899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자 평안남도 강서군 고향에 점진학교를 설립하고, 황무지 개간사업을 함께 추진하다.
1902년 1월 이혜련과 결혼, 1차 도미
190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상항친목회 (桑港親睦會)를 조직, 회장에 피선
1905년 을사 보호 조약 체결 후, 서재필, 윤치호 등과 함께 을사 보호 조약 반대 운동을 벌였다.
1905년 공립협회 창립에 참여하고,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다. 동시에 공립신보를 발간, 발행인을 맡아보았다.
1907년 동경을 거쳐 국내로 귀국
1907년 유길준, 윤치호, 이승훈, 김구 등을 모아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08년 평양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윤치호를 교장대리로 임명한 뒤 마산동 자기회사, 태극서관 등을 설립하여 도자기 회사 운영과 서적 인쇄, 판매를 맡아보았다.
1909년 윤치호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결성하였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직후, 그는 배후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혐의불충분으로 2개월만에 석방되었다.
1910년 국외 망명, 중국 청도에서 독립운동가 회의 개최
1910년 대한인국민회가 미국에서 결성됨.
1911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설립. 제1대 회장 최정익. 부회장 한재명. BUT 중앙총회는 분과와 임원을 완비한 완전한 조직구성을 완료하지 못했다.
1911년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출국, 재러한인사회 및 북만주 봉밀산 일대를 돌아본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조직, 제2대 회장 윤병구. 중앙총회 조직구성 완료. 안창호는 중앙총회장에 출마했으나 낙선.
1913년 흥사단을 부활시켰다.
1915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제3대 회장 안창호.
1917년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사회를 방문하고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1918년 하와이로 건너가 박용만, 이승만 등을 만난 뒤 하와이 한인사회를 순방하다.
1919년 3·1 만세 운동 직후 서재필, 이승만과 독립운동 방법을 논의하다.
1919년 3·1 독립 선언 찬동 포고문 발표
1919년 4월 미국 체류 상태에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다.
1919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무총장 및 국무총리 서리에 선임되었다.
1919년 5월 상하이로 건너가 정식 취임하고, 연통제·교통국을 설치하다.
1919년 이광수, 주요한 등과 함께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편집책임자가 되었다.
1919년 9월 통합임시정부 노동국총판에 임명되다.
1920년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21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조직되자, 그는 처음에 참여를 주저하다가 임정 개조론을 주장하여 개조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1921년 임정의 내분에 실망한 이광수, 허영숙 등의 귀국을 만류했으나 그들은 귀국을 단행하였다. 대신 안창호는 이광수에게 국내에 있던 측근들과 함께 흥사단의 국내 조직인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 (후에 수양동우회로 통합)의 조직 책임을 맡겨 국내로 보냈다.
1922년 김구, 이유필, 신익희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 창립에 참여하다.
1923년 국민대표자회의를 상하이에서 개최하고 안창호는 부의장이 되었다.
1923년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부장 김구의 국민대표회의 불법화로 강제 해산되었다. 그는 대독립당 결성을 주장하여 민족파, 공산당, 아나키스트의 연대를 주도하는 한편 이상촌 건설계획을 수립하고 토지 매입을 추진하다.
1924년 중국 화북과 만주지역을 답사하였다.
1924년 난징에 동명학원 설립
1925년 미주 동포사회 순방, 대동단결과 통일 역설
1926년 이광수, 김동원, 주요한 등에게 국내 흥사단 조직인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를 통합하도록 지시하여 수양동우회로 통합시켰다. 이어 월간지 동광의 창간에 참여하고 운영은 이광수에게 맡겼다. 칼럼과 논설을 기고하였다.
1926년 중국으로 돌아와 만주 길림성과 간도 일대를 답사하며 토지를 매입,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으나 실패하고 토지는 도로 매각하였다.
1927년 길림성에서 ‘군사행동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의 결성’에 대한 민중 연설 중 중국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20여 일만에 석방되었다.
1928년 상하이에서 김구, 이동녕 일파, 조소앙 일파, 이청천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결성에 참여하다. 그는 한국독립당 당 강령의 초안을 작성하고 대공주의를 선언하였다.
1928년 필리핀에 이상촌을 건설하고 망명 요청을 했지만 일본 여권을 가져오고 1인당 50달러를 가져오라며 거절당하다. 필리핀 상원 의장 마누엘 L. 케손 등을 직접 찾아가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투척 무렵, 지인의 자녀에게 장난감을 사 준다는 약속을 지키러 갔다가 잠복한 상하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다.
1932년 국내로 압송,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1935년 간경화와 폐렴 등 지병으로 보석 신청을 냈으나 거절당하다. 윤치호, 김성수 등이 보석금을 지급하고 이광수 등이 탄원서를 쓰다.
1935년 병보석이 받아들여져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하였다.
1935년 지방순회 강연 후 평남 대보산 송태산장에 은거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이광수, 주요한 등과 함께 피체, 서대문형무소 수감되었다.
1937년 간질환과 폐질환이 심해져 옥중에서 경성제국대학병원으로 이송, 통원 치료를 받았다.
1937년 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져, 지병인 간경화와 폐렴 등으로 보석 출감하였다.
1937년 병세가 위독하여 경성제국대학병원으로 입원
1938년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병원에서 간경화, 간장염, 폐질환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1세
1938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중장 (후에 대한민국장으로 변경)이 추서되었다.
1973년 정부의 지시로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으로 묘소를 이장하고,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와 합장되었으며 성역화가 시작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