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안네의 일기 : The Diary of Anne Frank (Das Tagebuch der Anne Frank)
감독) 조지 스티븐스 / 주연) 밀리 퍼킨스, 조지프 실드크라우트, 리처드 바이머, 셸리 윈터스, 다이앤 베이커, 에드 윈 / 1959년
영화 ‘안네의 일기’ (The Diary of Anne Frank)는 1959년 미국의 드라마 영화로, 안네의 일기를 극화한 동명의 브로드웨이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해당 연극의 극본가 프랜시스 굿리치와 앨버트 해킷이 직접 영화 각본을 썼고, 조지 스티븐스 감독이 연출했다.
주인공 안네 역은 밀리 퍼킨스가 맡았으며, 조지프 실드크라우트, 리처드 바이머, 셸리 윈터스가 조연으로 출연한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셸리 윈터스), 촬영상 (윌리엄 C. 멜러), 미술상을 수상했다.
○ 출연 / 스텝
.감독 -조지 스티븐스
.출연 – 밀리 퍼킨스, 조지프 실드크라우트, 리처드 바이머, 셸리 윈터스,
다이앤 베이커, 에드 윈
.제작 – 조지 스티븐스
.각본 – 프랜시스 굿리치, 앨버트 해킷
.원작 – 안네의 일기
.음악 – 앨프리드 뉴먼
.촬영 – 윌리엄 C. 멜러
.편집 – 데이비드 브레더턴, 윌리엄 메이스, 로버트 스윙크
.배급사 – 20세기 폭스
○ 줄거리
1934년 여름 히틀러가 집권하자 안네 가족은 프랑크프루트를 뗘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게 된다. 불안한 생활 가운데에서도 한동안 평화로운 생활이 계속되는 안네의 가족. 그러나 1941년 네덜란드를 침공하고 암스테르담에서의 유태인 검거와 처형에 혈안이 된 나치들의 횡포가 더욱 심해지자 안네의 가족은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로부터 1년 후 안네의 언니 마르코프가 출두 명령을 받게 되고 다음 달, 안네의 가족을 비롯하여 반단씨 가족과 그의 아들이자 안네의 연인 피터, 의사인 뒤셀씨 등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은신처로 옮겨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그러나 2년이 넘는 은둔생활 중 게슈타포에 의해 발각되고 이들은 폴란드의 유태인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그 다음해 안네의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독일이 패망한 후 안네의 아버지는 자신의 가족들이 독일군의 눈을 피해 숨어 지냈던 다락방에서 안네의 일기장을 발견하게 된다.
○ 등장인물
.밀리 퍼킨스 – 안네 프랑크
안네는 1929년 독일의 상업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유대인 사업가 오토 프랑크(Otto Frank)와 어머니 에디트 프랑크(Edith Holländer Frank)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에디트 프랑크는 개혁파 유대교(진보성향의 유대교) 신자여서 개혁파 유대교 신자로 자랐다. 나치 치하에서 독일의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1933년 프랑크 가족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민을 떠났고, 안네는 네덜란드에서 자랐다. 뒤에 나치 독일이 유럽 전체로 동맹국이나 점령국을 확대해 가며 네덜란드도 나치 치하가 되어 프랑크 일가는 미국 또는 캐나다로 망명을 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자, 홀로코스트를 피해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암스테르담의 은신처에서 또 다른 유대인 가족인 판 단 가족, 그리고 유대인 치과의사 알베르트 뒤셀과 함께 숨어 지냈다.
안네의 일기는 안네가 13세 생일선물로 일기장을 받은 1942년 6월부터 은신처가 게슈타포에게 발각되어 수용소로 전원 압송된 1944년 8월까지 약 2년 2개월 동안 쓰였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 박물관에 일기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일기는 안네가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던 시기에 쓰였지만, 독일에서 태어나고 어렸을 때 독일어를 써와서 그런지 안네의 일기 대부분은 독일어로 작성되었다고 한다. 다만 안네 본인은 네덜란드어에 능통하였고, 독일에서 쫓겨난 이후에는 자신을 네덜란드인으로 규정하며 독일에 대한 반감과 네덜란드에 대한 호감을 일기에 남기기도 하였다.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 중 일부는 안네가 일기를 은신처에 있을 때부터 쓴 것으로 잘못 아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은 은신처로 가기 약 2달 전 생일 선물로 일기를 받은 직후부터 쓰기 시작했다. 안네는 책을 굉장히 좋아하여 14살 때 읽은 책이 ‘그리스 로마 신화’ 와 ‘두 도시 이야기’이다. 수학 과목은 유급을 면하는 정도였지만, 언어 점수는 늘 만점이었다. 본인이 쓴 글을 반 전체 앞에서 발표할 정도였다. 필력과 문체가 유려한 이유는 엄청난 다독 덕분이었다.
안네 본인이 독서나 글쓰기를 좋아했던 것은 맞지만, ‘일기’로 워낙 유명해서 뭔가 내성적인 문학소녀일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은신처에 가기 전 학교에 다닐 때는 수학 빼고는 공부도 잘하고 인기가 많아 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많고 소위 잘 나가는 여자아이였던 것. 안네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많아서 안네 본인은 그런 남자애들을 ‘추종자’라고 불렀다. 정말 키 크고 잘생기고 수줍은 남자아이와 가까워질 때도 좋아하는 남자아이와 적당히 잘 지낼 남자를 구분해서 사귀는 똑부러지는 면이 있어서 ‘남자친구 여러 명 두는 게 뭐 어떻죠?’라며 열린 연애관을 가지고 있어 에디트와 늘 충돌했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할 때에 은신처에서 보내면서 자신의 상황과 성장을 겪는 고뇌를 겪으면서 성장한다.
은신처로 사용하던 회사에는 8명의 유대인들이 그곳에 숨어 있는 걸 모르는 직원들도 있었고, 손님들도 자주 오는 곳이었기 때문에 낮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가 들릴까봐 제대로 대화를 나누거나 일상생활을 하기도 어려웠으며, 공간이 좁아서 여러 명이 방을 같이 사용해야 했다. 은신처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물품은 늘 부족하여 작은 속옷을 억지로 입어야 하거나, 개인 물건을 가질 수도 없었으며, 청결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졌다. 누구라도 견디기 어려운 답답한 환경이었으므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해외로 휴가를 다녀올 정도로 유복했던 가정에서 자란 안네에게는 특히나 힘들었을 것이다. 안네는 은신처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들에 비하면 천국같은 곳이라며 견뎌내는 성숙한 모습도 보여준다.
속이 깊고 생각이 조숙한 데다 일기 후반엔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성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면서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였으며, 여자에게 성적인 감정을 느꼈던 일화 등 자신의 성 지향성이나 다양한 피임 방법 등 여성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어른들은 애들한테서 성에 관한 얘기를 쉬쉬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되면 자기들 끼리 올바르지 않은 정보만 갖게 된다. 아들뿐만 아니라 딸에게도 성교육을 해야 한다.’라는 통찰력 있는 말도 했다. 그래서일까,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는 딸의 일기를 출판할때 성에 대한 얘기 등 대체적으로 자신과 맞지 않는 일부는 쏙 빼놓아 후에 비판받았다.
사이가 가장 안 좋았던 건 어머니 에디트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건 상상해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건 상상할 수 없다”라고 적기도 했다 (무삭제판에만 수록). 에디트는 마르고가 잘못한 일들까지 안네를 혼낸 것 때문에, 어머니에 대해 가족으로써의 정조차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물론 에디트의 보수적인 성격이 진보적인 작은딸 안네와 충돌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을 듯하다. 양쪽 부모님과 다른 어른들이 명랑하고 수다스런 안네보다 얌전하고 공부를 잘 했던 언니 마르고를 편애했던 (마르고만 칭찬하고 우대해준 것 등) 것도 영향이 크다. 마르고가 잘못하면 주의를 주는 것에 그치는 반면, 안네가 잘못한 것은 온 가족이 나서서 혼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에디트 때문에 나온 안네의 일기 중 유명한 문구가 “나는 친구 같은 엄마는 필요 없고, 엄마 같은 엄마가 필요하다.”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아버지에게도 실망하고, 어머니에 대해 극렬한 증오심을 가진 것에 대해 조금 반성한다.
일기를 읽어보면 안네의 성격은 크게 1942년 말과 1943년, 1944년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 1942년 말 은신처로 옮기기 전에는 굉장히 활발하고 항상 행복하지만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1942년 말 은신처로 옮기게 되면서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해 절망과 희망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가, 1943년 말기에 접어들면서 한층 성숙해진 모습을 보인다. 1944년에는 본인의 1942년 전쟁 이전 모습을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성장한 면모와 여성의 삶, 왜 전쟁이 일어나는지, 사람들 모두가 친하게 지낼 수 없는지 등에 대해 고민하는 굉장히 생각이 깊은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역사를 너무 좋아한다고 일기에 여러 번 썼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푹 빠져 뮤즈 9명의 이름을 외우고, 헤라클레스 이전 애인 이름들도 줄줄이 읊었다. 유럽 왕실의 계보도를 신문이나 책에서 발견하는 즉시 종이에 적어두고 외웠다.
후에는 누군가의 밀고로 게슈타포에게 발각되어 가족들과 흩어져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에 끌려갔지만, 당시 안네와 함께 있었던 수용소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대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행히 아우슈비츠의 의사들 중 한 명이 오토 프랑크의 친구였던지라, 안네 자매는 진료를 받고 오후 노동은 면제되는 등 아우슈비츠에서도 비교적 혹독한 생활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판 단 부인과 마르고와 안네 셋이 수용소에서 제일 건강한 여성 3명으로 뽑혀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 수용소 상황은 너무나도 열악했고, 이미 뼛속까지 쇠약해져 있던 안네의 언니 마르고는 베르겐-벨젠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장티푸스를 앓다가 결국 사망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안네 또한 1945년 2월 말 혹은 3월 초에 장티푸스로 결국 사망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1945년 4월 15일, 영국군이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해방시키고 피수감자들을 구출했다. 그러나 해방 당시 피수감자들의 상황이 어찌나 심각했는지, 휴 글린 준장의 지도 아래 영국군이 이들을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음에도 약 6만여 명의 생존자들 중에서 정확히 13994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해방 이후 두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숨졌다. 만약 안네가 수용소에서 딱 한 달만 더 버텼다면 영국군이 그녀를 구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독자들과 수많은 역사의 증인들의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다. 안네와 마르고를 비롯한 수많은 포로들을 학대하고 죽음으로 내몬 요제프 크라머 수용소장, 프리츠 클라인 수용소 담당의 등 베르겐-벨젠 수용소의 주요 관리 인원들은 영국군에게 전원 체포됐으며, 이들 중 많은 수가 교수대에 매달렸다.
.조지프 실드크라우트 – 오토 프랑크
1889년 5월 12일 생으로 아돌프 히틀러와 동갑이다. 부유한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미하일 프랑크(Michael Frank (1851–1909))와 그의 부인 엘리스 베티(Alice Betty (1865–1953)) 사이에서 네 자녀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1908년부터 1909년까지 경제학을 공부하였고, 직후 미국 뉴욕의 메이시스(Macy’s) 백화점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909년 9월 그의 아버지(안네와 마르고의 친할아버지)가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귀국했고, 곧 미국으로 돌아가 1911년까지 미국에서 근무한 후 독일로 귀국했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육군 포병으로 징병되어 1917년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고, 종전 후 중위로 전역하였다. 하지만 그는 전쟁 당시 재산을 잃었는데, 다행히 친척들도 부유했던 덕분에 생계를 이어가는 데 문제는 없었다.
이후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자신의 아버지가 경영했던 은행을 형제들과 함께 운영하며 금방 재산을 다시 늘렸고, 업계에서 나름 이름을 날리는 사업가가 되었다. 그리고 1925년 5월 12일에는 아헨에 있는 한 시나고그에서 고철과 산업 원자재 기업의 상속녀인 에디트 홀랜더(Edith Holländer)와 혼인하였고, 이듬해인 1926년에는 마르고를, 그리고 1929년에는 안네를 낳았다. 아버지와 처가에서 물려받은 유산의 기반 위에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그는 번듯한 사업장과 부족함 없는 유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훗날 은신처에서 나치에게 체포되었을 때, 방 한구석에 있는 오토 프랑크의 전역 증명서를 발견한 나치 장교가 은신처 사람들의 짐 싸는 시간을 5분에서 1시간으로 늘려 주었다고 한다. 수용소로 끌려가는데 무슨 소용인가 싶을 수 있지만, 그것이 이미 발각되어 처분이 사실상 확정된 사람들을 위해 현장 지휘관이 배려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수용소로 가는 길이나 수용소에서 쓸 귀금속류나 보석을 몰래 챙기거나[5] 필요한 여러 자료들을 숨기고 가족 사진을 챙기는 등의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현장 지휘관 입장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큰 특혜를 배푼 셈이다.
그러나, 1929년의 세계 대공황과 뒤이은 바이마르 독일의 극심한 사회-경제적 혼란 속에서 오토의 형제들이 경영하던 은행과 오토가 경영하던 사업이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1932년 아돌프 히틀러의 지도 하에 나치 독일이 집권하여 유대인 탄압 정책을 시작하자 1933년 장모 (안네와 마르고의 외할머니)가 거주하던 아헨으로 그 기반을 옮겼다. 그리고 같은 해에 아헨에서 독일 내 자산과 신변을 정리한 이후 나치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가족을 이끌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다. 안네는 일기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한 1933년 무렵부터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한 1940년까지 약 6년 동안을 상당히 행복한 기간으로 추억하는데, 언니와 함께 새로 다닌 네덜란드 학교에 잘 적응하여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좋은 성적을 받았고, 아버지 오토는 스위스 바젤의 한 식품 회사에서 근무하던 매제 에리히 엘리아스의 도움으로 그가 일하던 식품 회사의 암스테르담 지사에서 근무하며 기반을 다진 후 1938년에는 건실한 식품 업체를 설립하여 운영하게 되었고, 1939년에는 오토가 장모(안네의 외할머니)까지 암스테르담으로 모셔오며 모든 가족이 성공적으로 네덜란드에 정착하여 제법 승승장구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의 행복하던 삶도 1940년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하며 끝이 났다. 네덜란드를 점령한 이후 SS에서 맏딸 마르고에게 소환장을 보내자, 현실적으로 해외 도피가 어려워진 상황을 깨달은 오토는 자신이 운영하던 회사 건물에 숨는 계획을 세워 실행하였다. 이후 은신처 사람들의 리더 역할을 하면서 은신처 살림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꾸려나갔다.
성격은 무뚝뚝하고 엄격하지만 자상한 편. 성미가 급한 아내에 비해서는 다소 느긋하고 유한 편이지만, 안네는 “어머니만큼은 아니어도 구시대적이고 답답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사춘기 소녀인 작은딸 안네의 반항에 눈물 짓기도 하고, 일기 내에서지만 “내가 힘들 때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하나.”는 안네의 원망을 들었다. 은신처 내에 중재자 역할과 정신적인 리더역할을 하지만 사춘기 청소년인 안네와 같은 방을 쓰면서 찌질하게 구는 뒤셀이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판 펠스와 안네가 싸움이 붙었을 때 중립만 지키는 바람에 안네가 뒤로 가면 갈수록 실망한다. 은신처에 싸움이 붙으면 안된다는 철칙을 잘 지킨 듯 하지만, 뒤셀이나 판 단이 시간이 지날수록 음식을 훔친다거나 소포를 자기만 차지하는 행동 등을 하는 걸 보면 그걸 참은 안네가 대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어떤 확신할 수 없는 사유로 은신처가 발각되어 나치에 의해 은신처 사람들이 모두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 과정에서 오토는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의 중간 수용소를 거쳐 마침내는 폴란드에 위치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1944년 9월 남성 전용 수용소로 옮겨지며 가족들과 영원한 이별을 한 오토 프랑크는 스위스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와 편지와 소포를 주고 받으며 연명했다.
1945년 1월 16일, 소련군이 폴란드까지 진격하자 독일군은 아우슈비츠에서 철수했고, 건강 문제로 아우슈비츠 병동에 수용되어 있던 오토 프랑크는 1월 27일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어 구출되었다. 그리고 결국 은신처 사람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네덜란드는 독일 유대인들에게는 이상적인 피난처였다. 네덜란드와 독일은 서로 이웃에 같은 게르만족이 주류가 된 서유럽 국가이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든 언어적으로 비슷한 구석이 많고, 독일어를 구사할 줄 아는 네덜란드인들이나 이미 독일에서 망명한 이들도 많아 지내기가 더 편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내의 유대인 사회도 컸기 때문에 피난 온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큰 손실 없이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결과를 아는 훗날의 시점에서야 영국이나 미국, 캐나다, 스위스, 하다못해 덴마크로 갔으면 참화를 피할 수 있었을 거라고 안타까워하지만, 이 국가들은 당시 독일 유대인들이 의지할 기반이 없어 이곳으로 이주하면 처음부터 맨손으로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즉, 당시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네덜란드가 다른 국가들보다 리스크가 적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엔 “설마 나치가 중립국인 네덜란드를 공격할까”는 믿음도 강했는데,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벨기에와 프랑스를 침공할 때도 네덜란드는 중립을 존중해 협상국 진영과 동맹국 진영 둘 다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를 제외하면 많은 독일 유대인들이 나치를 피해 다시 한 번 중립을 선언한 네덜란드로 도피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으로 전장이 돼 아비규환이 된 벨기에와 프랑스, 그리고 영토 문제로 독일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폴란드는 전쟁터가 될 게 뻔하지만, 네덜란드는 안전했으니 이번에도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치는 네덜란드가 바다 건너에 있는 영국과 결탁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네덜란드를 침공하였고, 이것이 프랑크 일가에 비극이 되었다. 덧붙여 네덜란드 외에 프랑스, 벨기에, 헝가리 등 나치에 의한 대대적 학살이 일어난 독일/폴란드 주변국들로 도피한 유대인들이 많았는데, 이들 또한 대부분 참혹한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구스티 후버 – 에디트 프랑크
안네의 어머니. 오토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오토처럼 그 당시 기성세대답게 구시대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있어서 안네와 자주 충돌했으며, 안네는 어머니를 그야말로 답답하고 속이 좁다고 묘사했다. 무삭제판에 따르면 성에 대해서도 보수적이고, 성미가 급하거나 꼼꼼하지 못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허황된 생각만 한다는 둥, 부정적인 묘사가 대부분. 물론 일기는 어디까지나 사춘기 소녀 안네의 시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걸러서 들어야한다.
일기에서는 어느 날 밤에 독일군이 밖에서 고사포와 기관총을 계속 쏘아대서 발각되는 걸 막기 위해 식구들이 모든 불을 끄고 숨어 있던 중에, 안네가 너무 무서우니 촛불이라도 켜 달라하자 발각될 것을 걱정한 오토가 안된다고 했지만 에디트는 바로 촛불을 켜 주었고, 오토가 불을 끄라고 말리자 “안네는 전쟁에 익숙한 군인이 아니에요.”라고 했다. 오토는 그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에디트를 말리지 않았다.
안네가 부모에게 마음을 닫아 가던 시기에 쓴 일기에서는, 아빠가 늦을 예정이니 대신 같이 잠자리 기도를 해 주겠다고 부드럽게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때 상처받은 듯한 반응으로 엄마는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는 서술을 보면 안네의 닫힌 마음을 본인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으며, 자기 나름대로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을 해 보았으나 잘 안 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베프의 회고에 따르면, 베프가 우연히 일기를 쓰고 있는 안네를 보게 되었는데, 에디트는 베프에게 ‘보다시피 우리 딸은 작가랍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비록 안네와 사이가 크게 좋지는 않았어도 속으로는 딸이 하는 것에 대해 나름 자랑스러워 하고 신경 써 주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게슈타포에게 발각된 이후 모든 은신처 사람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 끌려갔고, 결국 1945년 1월 27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2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안네, 마르고, 판 단 부인이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옮겨졌을 때 혼자 아우슈비츠에 남겨진 것에 충격을 받아 정신착란을 일으켜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어 사망했다는 설, 다른 하나는 독일 경비병이 마르고를 강간하려 하자 몸을 던져 딸을 지키려다 그 병사에게 구타당하고 끌려간 후 죽었다는 설. 어느 쪽이든 매우 안타까운 죽음이다.
.다이앤 베이커 – 마르고 프랑크
안네의 언니. 성격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묘사된다. 그래서 트러블이 많은 안네와는 달리 은신처 사람들하고는 대부분 별탈없이 잘 지내며, 안네하고도 서로 다툴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이가 좋은 편이다.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우등생을 먼저 진급시켜주거나 장학금제도가 있으면 늘 받았을 것이라고한다. 그래서인지 안네는 훌륭한 큰딸 마르고와 그렇지 않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고민도 했고, 당연히 마르고를 싫어한다고 쓰거나 심술궂다, 아무 생각이 없다며 감정적으로 글을 쓸 때도 있었다. 엄마 에디트, 아빠 오토 모두 마르고를 편애하는 면이 있었고, 본인도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적당히 착한 첫째 역할을 잘 수행하였다. 안네는 마르고가 주관없고 꿈이 없다며 한심해했다. 사려깊고 잘 인내하는 성격이다. 안네가 페터랑 둘이서만 어울려 놀 때 청소년이 3명밖에 없어 마르고트가 소외된 것에 죄책감 가진 안네를 보고 편지를 보냈다. 엄마 아빠뿐 아니라 은신처식구인 판 단 부부와 뒤셸은 늘 안네와 마르고를 비교해대서 안네가 마르고를 원망도 많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네는 마르고에게 의존도 많이 했다. 마르고가 “엄마 아빠 간섭이 너무 심해져서 지겨워”라며 안네에게 마음을 터놓았을때 안네도 마르고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기쁘면서도 은신처로 오기 이전에 사이좋았던 가족이 거리를 두지 못해서 서로 사이가 나빠지고 있다며 답답해했다.
은신처에서 마르고는 미프의 이름을 빌려 라틴어 교재를 신청해 제출했는데, 선생님이 채점하고 이런 훌륭한 학생이 대체 누구냐며 편지를 보낼 정도로 학구열과 성적이 뛰어났고, 은신처 내에서 뒤셸(본명 프란츠) 에게 네덜란드어를 가르칠 정도로 똑똑하고 머리가 비상했다.
발각 후 수용소로 끌려간 마르고는 앞서 언급한데로 안네와 함께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옮겨지게 되었고, 1945년 2월 경 장티푸스로 죽었다. 언니가 죽자 안네 역시 급속도로 절망해 곧 죽고 말았다.
마르고도 일기를 썼으나, 이 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마르고의 일기가 남아있었더라면 자매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부와, 안네가 남긴 일기의 내용과 크게 다르진 않았을 수 있지만 마르고의 관점에서 보는 주변인과 생활상 등도 교차검증해볼 수 있었을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 이하 ‘판 단’ (Van Daan) 가족의 본명은 판 펠스 (Van Pels)로, 안네가 일기가 공식적으로 출판될 경우를 고려했기 때문에 일기에는 전부 안네가 지은 가명으로 쓰여 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펠스 씨가 프랑크 씨와 사업상 인연을 맺어 은신처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셸리 윈터스 – 페트로넬라 판단
헤르만 판 단의 아내이자 페터 판 단의 어머니. 정치적 의견을 가지고 토론하는 것을 즐겼고, 매우 신경질적인 여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처음 은신처에 들어왔을 때 요강을 가지고 와서 주변 사람들을 웃게 했다. 참견이 심했고 잔소리를 많이 해서 안네와 자주 다퉜고, 툭하면 마르고와 비교했다. 심지어 ‘안네가 내 딸이었으면 좋았을텐데. 안네가 만약 내 딸이라면 이렇게 버릇없이 키우지 않았을 것이다.’란 말을 수시로 하여 안네가 질려했을 정도.
안네뿐만 아니라 프랑크 가족 모두에게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녀에 대하여 에디트는 비열하다고 평했고, 마르고는 하찮다고 평했으며, 오토는 추악하다고 평했다. 특히 안네와 에디트는 아우구스테가 못난 자기 남편과 비교되는 듬직한 오토에게 호감을 가진 것을 싫어했다
어느 날 식사를 했을 때 안네가 감자만 먹고 야채를 남겼을 때 계속 훈계를 늘어놓자, 참다 못한 오토 프랑크가 안네를 옹호해주며 판 단 부인의 접시에 담겨 있는 야채를 지적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담으로 그녀는 욕 솜씨가 아주 뛰어나 독일어와 네덜란드어를 섞어 말하는게 예술이었다고 한다.
한 번은 안네가 일기를 쓰는 것을 목격했는데, 놀란 안네가 얼른 일기를 덮자 마지막 페이지만 보여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필 마지막 페이지가 안네가 아우구스테에 대한 욕만 잔뜩 써놓은 페이지였기 때문에 안네가 거절했다.
훗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고, 안네와 마르고와 함께 수용소에서 건강한 여성 3명으로 뽑혀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베르겐-벨젠에서 또다른 수용소로 옮겨진 정황까지는 확인되는데, 이후에는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만 확인되었을 뿐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확인된 바가 없다. 심지어 죽은 시기와 장소도 확인할 수 없어 1945년 4월 9일에서 5월 8일 사이에 독일 혹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측만 되고 있을 뿐이다.
.리처드 바이머 – 페터르 판단
헤르만 판 단과 페트로넬라 판 단의 아들. 폭력적인 아빠와 신경질적인 엄마 사이에서 자라 소극적인 성격을 가졌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다락방에 틀어박혀 고양이 무쉬하고만 지냈다고 한다. 초반에는 안네가 시끄럽고 수다스럽다는 이유로 싫어했으나 안네와 몇 번 얘기를 주고 받은 후 따로 만나서 얘기하고 놀 정도로 관계가 발전했다.
안네가 부모님과 친한 편이고, 자존감 높고 긍정적인 성격을 가진 것을 굉장히 부러워 했으며, 의존도 많이 했다. 안네와 키스도 몇 번 나누며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안네는 마르고도 페터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안네가 미안해서 한동안 마르고의 눈치를 보았는데, 마르고 본인이 나중에 자신은 페터에게 관심이 별로 없다며, 청소년 3명 중에서 자기만 소외되는 게 섭섭할 뿐이라고 직접 말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간 뒤, 1945년 1월에 “유대인들을 전부 독일로 옮기라”는 명령으로 인해 건강하지 못해 남겨진 오토 프랑크와 헤어지게 되었다. 죽음의 행진을 거쳐 그는 오스트리아 린츠 근교의 마우타우젠(Mauthausen) 강제수용소의 부속 수용소인 멜크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그곳의 광산에서 끔찍한 중노동에 시달린 끝에 결국 병을 얻어 수용소 병동으로 보내졌다가 사망했다. 자세한 사망 일자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십자 기록에는 5월 10일로 기재되어 있는데, 비극적이게도 이는 수감자들이 수용소의 통제권을 장악한 지 6일, 독일이 항복을 선언한 지 이틀, 그리고 마우타우젠이 조지 S. 패튼 장군의 미 3군 분견대에게 해방된 지 5일이나 지난 이후였다.
은신처 식구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 네덜란드의 한 임시 수용소에 머물렀는데,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안네와 페터는 항상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지냈으며, 이별과 죽음을 직감했겠지만 두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고 한다.
은신처 내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와 싸우는 모습도 그려지고, 막말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 반항하기도 한다.
안네와의 관계는 극도로 가까워져, 안네의 어머니는 둘이 친해지는 것을 꺼렸다.
.루 저코비 – 한스 판단
.더글러스 스펜서 – 크랄러
오토 프랑크의 회사 직원. 역시 상냥하고 착한 성격이다. 게슈타포에게 발각되어 유대인을 숨겨준 죄로 은신처 식구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자기들 때문에 무고한 직원들까지 끌려가게 되었다고 자책하는 오토에게 “우리들은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니 후회하지 않는다”고 위로하는 대인배다운 모습을 보였다. 이동 도중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을 때 그 혼란을 틈타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은신처의 문을 책장으로 가리는 비밀문을 제안한 사람. 전쟁이 끝난 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해 그곳에서 살다가 19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에드 윈 – 알베르트 두셀
은신처에서 새로 받아들인 유대인 치과의사. 베라 비티네(Vera Bythine)라는 여자와 이혼한 사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샤를로트 칼레타(Charlotte Kaletta)라는 프랑스인 애인이 있었지만 홀로코스트 와중에 이별했다. 가끔 애인이 식량을 선물로 보내주곤 했는데, 은신처 사람들이 목숨을 구해줬음에도 혼자만 열심히 화장실에서 처먹어댔다. 이 때문에 안네가 ‘페퍼가 굶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며 화를 냈다. 평판이 매우 안 좋아서 은신처 식구들이 처음에 걱정했다.
오토 편집판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편집판에서는 그저 무심한 치과의사일 뿐이었는데, 무삭제판을 읽으면 이런 남자와 2년을 같이 살아준 안네가 거의 부처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첫날 은신처 합류 날짜를 멋대로 바꿔서 안네가 ‘염치는 갖다버린 신참’이라고 했다. 은신처로 들어오기 전, 겉으로는 신사인 척 다했지만 막상 은신처 식구로 받아들여지고 나자 매우 제멋대로 굴었다. 본인이 그곳에 있음을 들키면 안 되는 은신처에서 연신 편지를 보내질 않나, 심지어 나치가 금서로 정한 책을 미프에게 구해오라고 부탁해 하마터면 미프가 잡혀갈 뻔했던 적도 있었다. 신경질적이고 사람의 속을 살살 긁어서 은신처 식구들 간의 갈등을 일으켰고, 생각 없이 말을 내뱉어서 마르고가 화를 냈을 정도였다. 판 단 네와 시시건건 시비가 붙었으며, 16살 안네와 방을 같이 쓰면서 코를 골거나 이를 갈고 옷을 아무데서나 갈아입는 등 배려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 책상을 쓰는 문제에서 안네에게 “넌 겨우 어린애가 일기 쓸 뿐이잖니? 네 공부는 하찮은 거잖아. 난 치과의사라서 할게 많아”라며 망언을 하기도 했고, 이에 안네가 항의하자 오토는 책상 사용시간을 안네에게 불리하게나마 시간을 정해 주었다. 꼰대 첫날부터 아이들이 화장실을 너무 오래 쓴다며 짜증내 놓고는 본인은 방 문제로 싸우고 난 뒤 화장실을 오래 사용하는 식으로 복수했다. 게다가 안네와 책상문제로 얘기하고 나서 책상을 쓰지 않을 때도 책상에 앉아 12시간을 버텨댔다. 안네는 54살이나 먹은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속이 좁고 찌질하며 쓰레기 같다고 뒤셀을 평했다. 한편 미프는 그에 대해 “마음씨가 좋고 잘생겼으며 매력적”이라고 평가했는데, 이는 같이 안 살아본 사람의 증언임을 감안해야 한다.
마르고가 은신처에서 그에게 네덜란드어를 가르쳤는데, 마르고의 평에 따르면 조금도 공부할 생각이 없고 게으르기 짝이 없어 실력이 늘지도 않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항상 불평불만을 해대면서도 성격은 소심했던지라, 에디트를 붙잡고 또 불평불만을 하다 에디트에게서 ‘모두가 당신의 불평을 지긋지긋해 한다.’ 라는 말을 듣고 불면증이 올 정도로 예민하게 굴었었다.
프랑크 가족, 판 단 가족과 같이 게슈타포에게 연행되어 강제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44년 12월 20일에 독일 함부르크의 노이엔감메(Neuengamme)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원작자 – 안네 프랑크 (Anne Frank, 1929 ~ 1945)
아넬리스 “아네” 마리 프랑크 / 안네 프랑크 (Anne Frank, 독: Annelies “Anne” Marie Frank, 네: Annelies “Anne” Marie Frank, 1929년 6월 12일 ~ 1945년 3월 12일)는 독일의 유대인 소녀로 나치가 네덜란드를 지배한 시기에 쓴 일기로 유명하다. 그 일기는 한국어로는 ‘안네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 안네 프랑크 (Annelies Marie Frank)
.출생: 1929년 6월 12일, 바이마르 공화국 프랑크푸르트
.사망: 1945년 3월 12일 (15세), 나치 독일 동하노버 대관구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 벨젠 (Bergen-Belsen)에서 병으로 사망
.종교: 유대교(개혁파 유대교)
.부모: 부) 오토 프랑크, 모) 에디트 프랑크
.가족: 마르고트 프랑크 (언니)
.주요 작품: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 (Anne Frank)는 1929년 6월 1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유대 인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1933년 나치의 유대 인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나치에 의해 네덜란드가 점령되면서 1942년부터 은신 생활을 시작했다. 그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고, 1944년 8월 4일 누군가의 밀고로 은신처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리고 수용소로 끌려간 뒤 1945년 3월의 어느 날, 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훌륭한 작가와 언론인이 되기를 꿈꾸던 소녀 안네는 은신 생활 중에 쓴 일기에 ‘은신처’라는 특수한 환경과 ‘사춘기’라는 보편적인 상황 속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다양한 감정과 고민들을 솔직하고 재치 있는 표현으로 그려 냈다. 그리고 이 일기는 전쟁이 끝난 후인 1947년,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에 의해 책으로 출간되었다. ‘은신처’를 뜻하는 네덜란드어 ‘Het Achterhuis’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안네의 일기’는 이후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고 안네 자신의 바람대로 지금까지 전 세계의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생애 및 활동
– 키티와의 만남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안네는 1929년 독일의 상업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대인 은행가 오토 프랑크 (Otto Frank)와 어머니 에디트 프랑크(Edith Holländer Frank)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디트는 독실한 개혁파 유대교 신자여서-현대 유대교는 토라의 엄격한 준수를 주장하는 정통주의 유대교, 토라의 느슨한 준수를 주장하는 개혁파 유대교로 구분된다. 큰 딸 마르고트와 작은 딸 안네도 어려서부터 시나고그에서의 유대교 예배에 참여하여 유대교 신앙을 배웠다.
1933년에 나치당의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교육, 교통, 거주지 등에서의 인종차별이 실시되고, 1938년 17세 소년 헤어쉘 그린츠판이 거주의 자유 박탈에 항의하다 파리주재 독일대사관 3등서기관 에른스트 폼 라트를 살해한 사건을 구실로 유대인들에 대한 집단 테러를 가한 범죄인 수정의 밤 사건을 시작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홀로코스트)이 일어나자, 삼촌들은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안네 프랑크의 가족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다. 당시 대다수의 유럽국가들은 히틀러가 유대인 정책을 강제 추방에서 강제수용소 수용 및 학살로 바꿀만큼 유대인들의 망명을 좋아하지 않았고 영국의 경우 재정후원이 있는 경우에만 어린이의 망명을 허락했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홀로코스트를 묵인한 공범이라는 비평을 받았다.
몬테소리 학교에서 개별 자유 수업을 받았으며, 중학교는 유대인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이유는 1938년 이후 유대인들을 유럽사회에서 소외시키려는 나치의 인종차별 실시로, 학교 진학에서도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13살 생일에 (후에《안네의 일기》라고 불리게 된) 붉은 체크 무늬 일기장을 선물로 받았다. 안네는 일기장에게 ‘키티(Kitty)’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 미국으로의 망명실패와 은신처 생활 시작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은 서부 유럽으로 확대되어 나치 독일은 네덜란드를 중립국가임에도 점령하였고, 곧 네덜란드 내의 모든 유대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Otto Frank)가 나치의 네덜란드 점령에 대해 그리 위험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2007년 1월 26일자 《타임》에서 공개한 편지에 따르면, 오토 프랑크는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한 사건이 가족들을 해외로 망명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만큼 위험한 사건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미국 대사관이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으로 폐쇄되어 미국으로 망명할 수 없게 되자, 고육지책으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암스테르담의 프린선흐라흐트(Prinsengracht) 263번지에 있는 펙틴 (과일잼에 들어가는 식재료) 공장 사무실에 있는 창고를 책장으로 위장해서 교묘하게 막고 1942년 7월 5일에 자신의 가족을 그곳으로 피신시킬 준비를 하였다.
은신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되어서, 안네가 일기장에 아빠가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몰랐다고 적었을 정도였으며,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이웃들도 안네 자매가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느니, 안네 일가가 나치에게 끌려갔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돌만큼 보안도 완벽했다.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되자 안네 일가는 새벽에 일어나 옷가지같은 생필품만 챙긴 채 은신처에 갔다. 도망가는 것을들킬까 봐 트렁크는 쓸수 없었다.차별 때문에 안네는 자동 전차를 타지도 못하고 비를 맞으면서 걸어갔다. 그래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신들을 불쌍하다고 쳐다보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야 했던 비참한 상황이었다고 적었다. 이때부터 비밀 저택이라고 이름붙인 은신처에서 2년간 숨어 살면서 안네는 일기장 키티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안네의 일기》를 적어 갔다.
은신처에서 산 이들은 안네의 가족과 그의 이웃 유대인들 (오토 프랑크의 사업을 돕던 판 단과 그의 가족, 치과 의사 뒤셀) 들을 포함한 총 8명이며, 약 2년 동안 생존을 위해 투쟁하였다. 식료품(주로 감자)와 생활용품)은 당시 오토의 공장에 종사했던 3명의 사무직원이 담당하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미프 기스(Miep Gies)라는 처녀가 심부름을 해 주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안네의 표현을 빌면 쉴 틈이 없었을 정도로 행동의 자유가 없는 은신처 사람들의 심부름을 해 주었다.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압수과정으로부터 안네의 일기와 그가 습작한 글들을 몰래 빼돌린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은신처에서 안네 일가와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부친의 먹거리 장사로 중산층 이상의 생활 수준을 누리던 은신생활 이전의 삶과는 달리 먹을 것, 속옷 등의 생활에 있어야 할 것들이 부족했고, 같이 살기 전에는 몰랐던 서로의 결점이 눈에 띄면서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지만, 나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죽지 않기 위해 불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하지만 일기에는 자그마한 행복들도 보인다. 지하경제로 산 고기와 양념으로 소시지를 만들어서 사우어크라우트(양배추를 발효한 음식)와 같이 먹은 이야기, 불어, 영어, 지리, 역사 등을 공부한 이야기, 독후감, 딸기를 사서 먹은 이야기 등의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행복들이 일기에 담겨 있다.
– 은신처 발각과 안네의 죽음
1944년 8월 4일 밤, 익명의 밀고를 받은 나치의 제복 경찰 (Grüne Polizei)은 이 은신처를 급습하여 유대인전원을 체포하고 안네의 가족을 나치 강제 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래서 안네의 일기는 1944년 8월 4일로부터 불과 3일 전인 8월 1일 화요일로 끝나 있다.
범우사에서 번역한 안네의 일기 해설에 의하면, 안네의 가족을 잡아간 나치의 게슈타포 카를 실베르바우어는 훗날 검거되었다. 안네의 가족을 고발한 밀고자의 신분에 관해서 지금까지 서너 가지 추측이 있었다. 이를테면 창고지기가 한 사람당 5길더를 받고 밀고를 했다는 설이 있는데, 모두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안네는 16세의 나이로 1945년 3월에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 벨젠 (Bergen-Belsen)에서 영양실조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해방되기 2달 전이었다. 어머니는 정신이상으로 죽었다. 언니 마르고트도 장티푸스로 죽었는데, 그녀가 사망한 후 안네가 상심이 커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네의 가족 가운데 아버지 오토만이 옛 소련군의 수용소 해방으로 생명을 건졌는데,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며 안네의 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그외 은신처 가족들은 모두 수용소에서 병이나 가스실에서의 학살로 죽었는데, 판단 씨 가족의 경우 부인은 안네와 마르고트와 같은 수용소에서 지내면서 아이들을 돌보다가 독일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죽었고, 판단 씨는 가스실에서 학살되었으며, 안네의 남자친구였던 페터는 독일군의 수용자 강제이주로 어디론가 끌려간 뒤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도 하고 수용소에서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안네가 쓴 일기는 1947년에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편집(안네의 성(性)에 대한 사춘기적 관심이 드러나는 부분, 부모와 은신처의 다른 가족을 비난하는 부분이 삭제되었다)을 거쳐 출판되었으며, 이 일기는 약 60개 국어로 번역되어 약 3천 2백만 권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중 한국어판은 안네 아버지가 편집한 원고를 출판해오다가, 원고를 모두 번역한 무삭제판이 안네가 습작한 단편소설들과 함께 출판되었다. 안네의 가족이 피신하여 살던 집은 현재 안네 프랑크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사후
1959년에는 조지 스티븐스(George Stevens) 감독이 안네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 세 분야에서 오스카상을 수상하였다.
2009년 6월 12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박물관(원래 명칭은 ‘안네 프랑크 하우스’)은 그동안 전쟁문서연구원에 보존돼 온 안네의 자필 문서들이 박물관으로 옮겨져 영구 전시될 것이라고 하였다. 박물관에 영구 전시될 자필 문서들은 안네가 1942년 7월 은거에 들어가기 한 달 전인 같은 해 6월 처음 쓰기 시작한 일기장, 역시 일기장으로 사용했던 2권의 학교 학습공책, 퇴고한 360매 분량의 원고이다.
안네의 취미는 영화감상이었다. 안네의 일기를 보면 명견 린 틴 틴이 나오는 영화를 생일날 친구들과 같이 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47년 6월 25일, ‘안네의 일기’ (The Diary of Anne Frank) 출판
‘안네의 일기’ (The Diary of Anne Frank)는 1947년 6월 25일 출판됐다.
‘안네의 일기’는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국외 탈출에 실패한 아버지의 결단으로 2년간 은신 생활을 하면서 남긴 일기이며, 일기장에서 ‘키티’ (Dear Kitty)라고 부르며 친구에게 말하듯이 써내려간 독특한 양식이 특징이다.
일부내용은 은신 생활에 들어가기 전의 내용 (독일과 네덜란드에서의 성장 과정)을 담고 있지만, 대다수 내용은 은신생활을 주제로 하고 있다.
1942년 6월 12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 썼고, 네덜란드어 판은 1947년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일부 원고 편집에 의해서 출간되었다.
1995년 한국어판으로 무삭제 원고가 완역되어, 문학사상사에서 출판되었다.
1944년 8월 4일 독일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안네의 가족이 살던 곳을 급습하여 일행이 모두 붙잡혔고 그 뒤 안네는 다음해 3월 수용소에서 16살의 나이로 티푸스에 걸려 죽고 말았다.
출판 역사
안네 프랑크가 쓴 일기에는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안네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일기장과 두 공책에 첫 번째 버전의 일기(version A)를 작성했다. 안네는 1944년 라디오에서 전쟁 기간을 기록에 남기기 위해 전쟁 중의 일기를 모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일기를 재작성했다 (version B).
버전 B는 철 되지 않은 종이에 작성되어 있고 버전 A에서 몇몇 부분이 추가되거나 생략된 형태이다.
네덜란드어판 출판
안네의 일기는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랭크가 스위스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과 친척들을 위해 독일어로 처음 필사됐다. 이들은 안네의 아버지가 일기를 출판하라고 설득시켰다. 그는 버전A, 버전B와 함께 안네의 에세이들을 발췌하고 출판을 위한 첫 번째 원고를 재출했다. 이 원고에는 원작자의 운명을 설명하는 에필로그가 포함되어 있다. 1946년 봄에는 이 원고가 두 역사학자 Jan Romein 박사와 그의 아내 Annie Romein-Verschoor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후 Anne Romein이 출판사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Romein 박사가 Het Parool에 이 일기에 관한 글을 기고 했다. 이 글을 본 출판중개인은 출판 심사를 위해 오토 프랭크에게 일기의 네덜란드어 원본을 달라고 부탁한다. 출판사는 결국 일기를 출판하기로 했지만 오토 프랭크에게 안네의 성 (sexuality)에 대한 솔찍한 언급은 특정 보수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고 조언하고 약간의 내용 삭제를 제안한다. 추가로 초반 부분 또한 삭제되었다. 일기 (버전A+버전B)는 “Het Achterhuis. Dagbrieven van 14 juni 1942 tot 1 augustus 1944 (비밀의 별관. 1942년 6월 14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의 일기 편지)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다. 오토 프랭크는 나중에 안네가 지금 이곳에 있었다면 안네는 매우 자랑스러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책은 잘 팔렸다. 첫 번째 에디션은 3000부가 팔려 매진되고 1950년에 여섯 번째 에디션이 출간된다.
1986년에는 무삭제판이 출간된다. 총 714쪽이고 세 권에 나누어 출판이 되었다.
진위 여부
안네는 작가를 지망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적은 일기도 퇴고해서 새로 적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기에는 오리지널 일기와 자신이 정서한 개정판 원고의 두 가지가 있다. 이 원고들은 어느쪽이건 완전한 책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사후에 출간된 책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양쪽을 상호 보완하는 형태로 편집해서 만든 것이다.
이 편집의 도중에 안네가 기술한 내용 중, 사춘기 소녀다운 성적 호기심이나 지루한 에피소드, 어머니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제 3자들에 대한 비판은 일부 삭제나 정정이 있었다. 그런데 안네 프랑크가 유명해지면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안네의 일기가 허구이며 안네는 실존하지 않았거나 일기의 내용이 부친에 의해서 날조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58년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의 ‘안네가 실존했다면 안네를 체포한 인간을 찾아내라”는 주장에 대하여 나치 헌터로 유명한 시몬 비젠탈은 게슈타포 출신으로 네덜란드에서 SD 상사였던 카를 질베바우어를 1963년에 찾아내어 안네가 실존했음을 증명하는데 성공한다. 인터뷰에서 실베바우어는 그가 전시중에 SD에서 일했음을 시인했고 안네 프랑크의 사진을 보고 그가 체포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고 인정했으며 체포한 유대인들에게서 압수한 물건을 담는 가방에서 안네의 일기장을 빼내는 것을 보았다고 한 그의 진술은 오토 프랑크의 진술과 합치했다.
이후에도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끈질기게 안네의 일기가 허구라는 주장을 계속했으며 1970년대에 영국의 유명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비드 어윙은 일기가 가짜라고 주장했고 1976년에 일기가 허위라는 팜플렛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배포하던 네오나치주의자 에른스트 뢰머와 에드거 가이스가 체포되었을 때 일기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재판중에 오토 프랑크의 의뢰를 받은 역사가 팀이 원본을 정밀 조사하여 일기가 진짜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1978년 뢰머와 가이스가 상소하면서 독일 내무성 소속 범죄조사국 (Bundes kriminalamt ; BKA)은 원본의 종이와 잉크에 대한 과학 분석을 실시해서 “일기를 적을 때 사용한 잉크는 전시중의 것이지만 나중에 기입된 정정사항들은 흑, 녹, 청 볼펜으로 기록된 것이다”라는 취지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BKA는 이에 관련된 상세한 내용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일기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볼펜은 1950년대에나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일기가 허위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받아들였다.
1986년 일기의 원본을 보관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전시자료 연구소는 보다 상세한 과학적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BKA에게 볼펜으로 기술된 부분을 지적할 것을 요구했으나 BKA는 그 부분을 지적할 수가 없었다. 추후의 조사를 통해서 볼펜으로 기입된 종이 두 장을 발견했으며 1987년 함부르크의 심리학자로 필적 감정 전문가인 한스 오클먼은 그의 어머니인 도로시 오클먼이 미나 베커와 공동으로 일기를 조사했을 때 그 볼펜의 텍스트를 기입했음을 밝혀내어 일기의 진위에 대한 의문점은 해결되었다. 2003년에 출간된 수정판 일기에서는 논란이 된 두 장의 종이의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문학에서의 언급
소설가 가람 이병주는 역사소설 ‘그를 버린 여인’에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권위주의와 폭력을 비판하는 소재로 ‘안네의 일기’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인용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