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7월 24일, 하이럼 빙엄 (Hiram Bingham, 1875 ~ 1965)이 잉카의 유적지 마추 픽추 (Machu Picchu) 발견
마추 픽추 (스: machu picchu)는 페루에 있는 잉카 문명의 고대 요새 도시로 하이럼 빙엄 (Hiram Bingham, 1875 ~ 1965)에 의해 1911년 7월 24일 발견됐다.

마추 픽추는 15세기에 남아메리카를 지배했던 잉카 제국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해수면에서 2,430m나 되는 산맥의 정상 위에 위치해있다.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80km정도 떨어져 있고, 우루밤바 강이 도시가 있는 산맥 아래를 꺾어 흘러가고 있다.
대다수의 고고학자들은 잉카 제국의 파차쿠티 황제가 이 요새 도시를 건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보통 ‘잃어버린 도시’의 이미지로 잉카 문명을 상징하는 유적으로 많이 불리는 경우가 많다.
마추픽추는 1450년 즈음에 지어졌고, 약 1세기 후에 스페인의 침략과 비슷한 시기에 버려졌다.
이후 주변 현지인들에게만 간간히 알려져 있던 정도였고, 1911년에 미국의 탐험가 하이럼 빙엄이 다시 발견해 내기 전까지 세상에서 잊혀져 있었다.
마추 픽추는 잉카 고전 양식으로 지어졌다.
접착제나 모르타르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돌과 석재들을 쌓아 올려 만들어졌고, 주요 건물은 해시계, 태양의 신전, 세 창문의 방 등이 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페루 정부에서 관광객들을 위해 복원시켜 둔 것으로, 1976년에 전체 유적지의 약 30%정도가 복원되었고 현재도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1983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새로운 세계의 7대 불가사의들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 마추 픽추 (Machu Picchu)
.문명: 잉카 제국
.소재: 페루의 기 페루 쿠스코 주 쿠스코 북서쪽 안데스 산맥
.건립 연대: 미상 (대략 15세기)
.건립자: 불명 (파차쿠티 황제로 추정)
.발굴자: 하이럼 빙엄 (1911년 발굴)
.유네스코 유적 등재: 1983년
– 어원
고대 잉카 언어로 마추 픽추의 ‘마추’는 옛, 혹은 옛날을 뜻하며, ‘픽추’는 고대 잉카인들이 마약 용도로 주로 사용하던 코카 잎, 피라미드 등을 뜻한다.
때때로는 오래된 봉우리라는 뜻으로 불리기도 한다.

– 역사
마추 픽추는 1450 ~ 60년대에 지어졌다. 이 도시의 건축은 2명의 왕이 대를 이어 감독하였는데, 첫째는 파차쿠티이고 둘째는 투팍 잉카 유팡키이다. 고고학자들은 파차쿠티 황제가 군사 원정을 끝낸 후, 황제 전용 궁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 도시가 약 80여년 간 사용된 이후 버려진 것을 보아, 잉카 황제들에게 대대로 전해져 내려가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나타난 이후, 마추 픽추에 살던 거주민들이 스페인에서 전해온 천연두와 같은 질병들로 인해 모두 사망하였다는 설도 설득력이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추 픽추가 황제의 궁전이었을 당시, 이 곳에는 약 750여명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대다수는 이 곳에 영구적으로 거주하며 황제의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던 사람이었다. 또한 종교적, 군사적인 이유로도 이 곳에 사람들이 거주하며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흉년이 들거나 식량이 넉넉하지 못한 때에는, 이 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수를 100여명 이내로 줄이고 오직 최소 인원의 제사장들만 남겨두어 제사를 지속시키도록 하였다.
고고학자들이 이 곳에서 출토된 유골들을 조사한 결과, 이 곳에는 제국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서로 다양하게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들의 뼈에는 페루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기생충들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또한 뼈의 구성 성분들을 조사한 결과, 그들은 모두 각자 먹었던 식량의 종류도 달랐고, 살아갔던 방식 또한 동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곳에서 출토된 대다수의 유골들에는 한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모두 생애 초기에는 감자, 생선과 같은 음식들을 주로 먹었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산간 지방에서 많이 자라는 옥수수를 많이 먹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 곳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이 한때 해안 지방에서 살았다고 나중에 이 곳으로 올라와 거주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 유골들의 주인들은, 잉카 제국의 타 지방에서 발견된 유골들에 비해 훨씬 그 노동량이 적었고, 더 풍족한 식생활을 누렸다.
마추 픽추 인근에서 살지 않는 동물들의 뼈가 출토되는 것을 보아, 사람들이 마추 픽추로 올라옴에 따라 가축들도 함께 데리고 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곳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동물 뼈들은 라마나 알파카의 유해이고, 이 동물들은 보통 해발고도가 4,000m가 넘는 고산 지대에 살기에 고도가 2,000m밖에 되지 않는 마추 픽추에서 이 동물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인간들이 이들을 도시로 끌고 왔다는 것을 증명한다. 대다수의 동물들은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끌려왔고, 신에게 바칠 제물로도 쓰였다. 또한 이 곳의 몇몇 장례용 동굴들에서 기니피그의 뼈들이 발견되는 것을 보아, 기니피그가 장례용 제물로 많이 쓰였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6마리의 개들이 사람의 무덤에서 함께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죽은 자의 동료로 함께 묻혀졌던 것으로 추정한다.
마추 픽추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농업은 계단식 농업이었다. 마추 픽추 인근에는 각각 3m의 높이를 가지는 단들이 모두 40개나 존재하고 있고, 약 3,000개나 되는 계단들로 이를 잇고 있다. 이 수 백개가 넘는 계단식 밭들을 사용하면, 산사태나 토양 유실의 위험 없이도 충분히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가끔씩 밭들이 무너져 내리거나 산사태로 인해 쓸려내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현재 마추 픽추에는 산사태로 인해 밭들이 쓸려나간 흔적과 잉카인들이 이를 다시 보수한 흔적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마추 픽추 주변 지역은 1450년대 이래 연간 약 1,800mm의 강수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잉카인들이 밭에서 주로 재배하던 감자나 옥수수에 필요한 강수량을 충분히 충족했기 때문에, 마추 픽추의 밭에는 특별한 수로 시설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밭에는 너무 많은 강우로 인해 물들이 넘칠 경우를 대비한 시설들이 완비되어 있었다. 조사 결과, 이 계단식 밭들 아래에는 모두 겹겹이 구성된 층들이 있는데, 맨 아래에는 기반암으로 이루어진 층, 그 위에는 모래와 자갈을 섞어 만든 층, 맨 위에는 흙으로 만든 층이 있었다. 맨 위에 덮여있던 흙들은 모두 계곡 아래에서 직접 퍼 올린 것들이었다.
다만 이 계단식 밭들의 총 면적은 고작 4.9 헥타르 밖에 되지 않았으며, 이는 750명이나 되는 인원을 먹여살리기에는 부족했다. 이로 인해 종종 사람들은 계곡 아래로 내려가 식량들을 새로 가지고 올라와야만 했다.

.발견
마추 픽추가 쿠스코에서 불과 80여km밖에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인들은 끝까지 마추 픽추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마추 픽추는 결국 현재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의 기록에 ‘피코’라는 이름의 장소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 곳에 스페인 원정대들을 보내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마추 픽추는 잉카 제국의 다른 유적들처럼 사원이나 묘지 권역을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마추 픽추 근처의 정글이 점차 유적 전체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오직 몇 안되는 외부 원주민들만이 마추 픽추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다. 마추 픽추는 1867년에 독일인 사업가에 의해 한시적으로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는 독일인 기술자가 그보다도 이른 시기에 잠시 들렀을 가능성도 있다. 1874년에 제작된 지도에는 마추 픽추에 대한 언급이 있기에, 마추 픽추가 하이럼 빙엄 (Hiram Bingham, 1875 ~ 1965)의 방문 전까지 유럽인들에 의해 단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1911년, 미국의 역사가이자 탐험가인 하이럼 빙엄이 잉카 제국의 잊혀진 수도, 빌카밤바를 찾아 모험을 떠났고, 잉카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마추픽추를 찾아낸다. 그가 비록 마추 픽추를 방문한 첫 유럽 여행가는 아닐지라도, 그의 발견으로 인해 마추 픽추가 전세계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기에 대다수의 저술에는 그를 마추 픽추의 발견자로 칭하게 된다. 빙엄은 1912년에 또다른 탐험단을 조직하여 더욱 체계적인 발굴 조사를 위해 마추 픽추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
“이 도시의 매력과 마법은, 이 세계의 그 어떤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곳에는 눈덮인 산봉우리가 끝없는 높이에서 구름을 굽어보고, 다채로운 색깔의 절벽들이 깎아지를 듯이 솟아올라 도시를 비추고 있다. 이 곳에는 나무와 꽃들이 만발하고, 정글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 하이럼 빙엄, 1911년
1981년, 페루 정부는 마추 픽추와 그 주변 325.92제곱 킬로미터에 해당하는 지역을 역사 보존 영역으로 선언하고, 개발 제한을 선포했다. 이 지역에는 마추 픽추와 같은 잉카 유적 외에도 생물학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들이 포함되어 있다.
1983년, 유네스코는 이 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로는, ‘인류 건축 기술의 걸작이자, 잉카 문명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 유네스코 유적 – 마추픽추 역사 보호 지구
해발 2,430m에 자리한 마추픽추 (Machu Picchu)는 열대 산악림 (tropical mountain forest) 가운데에서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한다. 잉카 (Inca) 제국의 절정기에 건설되었으며 가장 놀라운 도시 창조물로 평가될 만한 이 유적의 거대한 벽, 테라스, 경사로는 마치 자연적으로 깎여서 형성된 절벽처럼 보인다. 안데스 (Andes)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 있는 이곳의 자연 환경은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아마존 (Amazon) 강 상류의 분지를 에워싸고 있다.

– 마추픽추 역사 보호 지구
.영문명: Historic Sanctuary of Machu Picchu
.국가: 페루 (Peru)
.등재연도: 1983년
.유산면적: 32,592㏊
.참고번호: 274
마추픽추는 쿠스코 (Cuzco) 및 우루밤바 (Urubamba) 강 계곡에 있는 올란타우타이보 (Ollantautaybo), 룬쿠라카이 (Runcuracay), 사야마르카 (Sayacmarca), 푸유파타마르카 (Phuyupatamarca), 후이나이 후아이나 (Huinay Huayna), 인티푸쿠 (Intipucu) 등의 고고학 유적들과 함께 대표적인 잉카 문명 유적이다. 쿠스코와 옛 마을들에는 잉카 제국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들은 도시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져 있기 때문에 국제적인 관심을 기울여 보존할 필요가 있다. 또한 마추픽추는 인간과 자연 환경의 상호작용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해발 2,430m에 자리한 마추픽추는 열대 산악림 가운데에서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한다. 잉카 제국의 절정기에 건설되었으며 가장 놀라운 도시 창조물로 평가될 만한 이 유적의 거대한 벽, 테라스, 경사로는 마치 자연적으로 깎여서 형성된 절벽처럼 보인다. 안데스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 있는 이곳의 자연 환경은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아마존 강 상류의 분지를 에워싸고 있다.
페루 (Peru)의 안데스 산맥에서 가장 매력적인 경치를 자랑하는 마추픽추는 면적이 32,500㏊에 이른다. 잉카 제국의 마지막 근거지이자 탁월한 건축적, 고고학적 중요성을 지닌 마추픽추는 라틴아메리카 (Latin America)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천연 재료를 이용하여 주변 환경과 완벽하게 어울리도록 창조된 이 유산의 석조 건축물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 사례 중 하나이다.
1,000년 이상 계속해서 훌륭히 경작되어 온 주변 계곡은 인간이 땅과 맺은 생산적 관계를 보여 주는 가장 좋은 사례이다. 마추픽추의 주민들은 지금도 감자, 옥수수, 라마 (llama)를 기반으로 하는 잉카 제국 시대 선조들의 생활 방식과 매우 유사한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마추픽추는 또한 몇몇 위기에 처한 종들, 특히 이 지역에서 가장 흥미로운 종인 안경곰 (spectacled bear, Tremarctos ornatus)에게 안전한 서식지를 제공한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다른 동물로는 난쟁이 사슴 (dwarf brocket), 수달 (otter), 긴꼬리족제비 (long-tailed weasel, Mustela frenata), 팜파스고양이 (pampas cat, Leopardus pajeros), 멸종 위기에 처한 오셀롯 (ocelot)과 보아뱀 (boa), 안데스바위새 (Andean cock of the rock, Rupicola peruvianus), 안데스콘도르 (Andean condor, Vultur gryphus) 등이 있다.
천연 식생은 주로 키아데아 (Cyathea) 등의 양치식물 (fern)과 야자나무로 구성된, 아열대 지방의 습도가 높은 저지대 삼림으로 되어 있다. 침식에 의해 깎여 나간 화강암 산꼭대기에 자리하여 뱀처럼 굽이쳐 흐르는 우루밤바 강을 굽어보고 있는 마추픽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고학 유적지이다. 치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이 놀라운 도시는 잉카 제국이 만들어 낸 가장 찬란한 창조물 중 하나이다.
이 도시가 만들어진 시기는 파차쿠텍 잉카 유팡키 (Pachacutec Inca Yupanqui, 1438 ~ 1471)와 투팍 잉카 유팡키 (Tupac Inca Yupanqui, 1472 ~ 1493)라는 위대한 두 잉카 제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도인 쿠스코에서 적어도 100㎞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이 도시의 기능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검증된 기록이나 눈에 보이는 충분한 물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정확히 알 수 없다.
목적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마추 픽추 유적에는 경사면을 일구어 공중 정원처럼 만든 거대한 테라스 부근에 ‘농부 (Farmer)’ 구역, ‘산업 (industrial)’ 구역, ‘왕실 (royal)’ 구역 및 ‘종교 (religious)’ 구역 등 주목할 만한 몇몇 구역들이 있다. 계단식 기단 제작, 바위 돌출부 평탄화 작업, 경사로와 계단 조성, 자연의 연장 (延長) 처럼 보이는, 말 그대로 산을 조각한 것처럼 만든 거대한 건축물 축조 등 엄청난 토목 공사를 통해 완성된 잉카 제국의 모습에서 그들이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발견자 ‘하이럼 빙엄’ (Hiram Bingham, 1875 ~ 1965)
하이럼 빙엄 (Hiram Bingham, 1875년 ~ 1965년)은 미국 하와이 출생의 고고학자로 예일 대학교 라틴-아메리카 역사학 교수, 미 코네티컷 부지사 및 주지사, 미 상원의원을 역임했다.
예일 대학교와 미국 지리학협회 소속 페루 탐사대장으로 1911년 유명한 마추픽추를 발견했다.
저서로는 [Lost City of the Lucas], [The Ancient Incas], [Machu Picchu: A Citadel of the Incas], [Across South America] 등이 있다.
한편 남미 잉카문명의 보고인 페루 ‘마추픽추 (Machu Picchu)’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100여년도 더 됐지만 유적지의 최초 발견자가 누구인지를 따지는 논쟁은 여전히 뜨겁다.
이 유적지는 미국 예일대 고고학자인 하이럼 빙엄이 1911년 잉카의 마지막 요새인 ‘빌카밤바’를 찾다 우연히 발견하면서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라는 별명을 얻게 됐지만 최근의 연구들은 빙엄을 첫 발견자의 위치에서 끌어내리고 있다.
빙엄이 첫 발굴자라는 기존 학설을 뒤집는 주장은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페루 역사학자인 마리아나 모울드는 당시 ‘마추픽추와 미국 인류학 사회의 윤리강령’이라는 책에서 마추픽추가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며 19세기 독일인 탐험가 아우구스트 베른스가 이 곳에서 유물을 약탈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도를 실었다.
모울드는 책에서 베른스가 이전에 마추픽추에 갔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를 빙엄이 갖고 있었으며 영국의 역사학자인 클레먼츠 마컴도 이전에 마추픽추의 위치를 기록한 지도를 갖고 있었다며 빙엄을 첫 발굴자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빙엄은 1911년과 1912년, 1915년 세차례에 걸쳐 마추픽추를 탐험했으나 베른스는 그 이전인 1880년대 후반 마추픽추를 찾아 목재와 탄광회사를 설립해 페루 정부의 묵인 하에 유물을 약탈해 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울드의 연구 외에도 빙엄이 첫 발견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곳곳에서 나온다.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마추픽추의 토지 소유주인 아구스틴 리사라가가 남긴 기록으로 마추픽추에는 그가 현지를 찾았던 날짜 (1902년 7월 14일)가 벽에 또렷이 남겨져 있다.
또 19세기에 작성된 여러 지도에는 마추픽추의 위치가 표기돼 있으며, 멀게는 1565년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라는 스페인 사람의 저서에 마추픽추가 ‘피추 (Pijchu)’로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같이 여러 역사학적 증거를 토대로 한 연구와 주장이 쏟아져 나오면서 빙엄은 사실상 첫 발굴자의 위치에서 멀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마추픽추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이라는 점을 놓고는 이견이 많지 않다.
빙엄이 마추픽추에서 미국으로 가져간 수천점의 유물은 이후 소유권을 놓고 공방을 벌이게 되지만 그를 시작으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마추픽추도 유적으로서의 가치와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마추 픽추 (Machu Picchu)에 대한 다양한 가설들
잉카제국의 마추 픽추 (Machu Picchu)는 100여년 전인 1911년 7월 24일, 예일대 고고학자 하이럼 빙엄 (Hiram Bingham)이 발견한다. 당시 주변에 세 가족이 살고 있었으나 두 가족은 1915년에 떠나고 한 가족이 남아 유적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다.
15세기에 번성했던 남미 페루의 잉카도시 마추픽추. 16세기 잉카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스페인군과 장기전투를 벌인 곳이라는 점에서 잉카 최후의 도시로 알려진 설이 유력한 가운데 잉카의 발상지 설에 대해서도 의견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100년이 흐른 지금까지 여러 가설들이 줄줄이 나왔다.
또 다른 가설은 “신성한 수도원”이었을 것이라는 설이다. 빙엄은 이 유적이“태양의 처녀 (太陽의 処女)사원 같다는 것이다. 즉, 잉카의 태양신 인티에 바쳐지는 “선택받은 성스러운 여성 ‘이라는 가설이 그것이다. 그 근거로 빙엄 팀이 발견당시 주변에 수많은 유골이 있었고, 이 유골을 미국의 뼈 학자 조지이튼이 분석한 결과(20세기 초) 모두가 여성이었다고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설도 2000년에 뒤집어진다. 예일대 인류학자 존베라노 교수가 유골을 다시 분석한 결과 유골이 남녀 반반이었다고 확인한 것이다. 이튼시대에는 골격으로 인한 성 분석을 할 수준이 되지 못했기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 유골들에 대해 고고학계에서는 잉카제국의 성직자나 여자가 아니라 건축 일을 하던 장인들과 하인들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황제의 별장”이었다는 가설에 의한 것이다. 만일 이 곳이 황제가 귀빈을 부르는 왕가의 별장이라고 가정하면 요리나 농작물 재배, 청소 등을 담당하고 있던 사람들일 것이라는 추측인 것이다
15세기의 황제 파챠쿠테쿠의 별장으로 사용되면서 황제와 그 친족집단의 레저, 사냥, 영빈 용으로 활용된 장소라는 것이다. 동일한 가설이지만 1980년대에 발표된 “황제별장”설은 16 세기 스페인의 고문서에 등장하는 황제 가운데 “마추피추”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점에 근거한다.
또 다른 가설은 마추픽추의 건설은 종교성이 강한 성지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2009년 밀라노 공과대학의 천체물리학자 줄리오 마그리는 마추픽추는 성지순례 장소였기 때문에 오르기 힘든 고지에 세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들의 선조들은 잉카의 발원점인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에서 지하를 타고 여행을 계속한 끝에 쿠스코 근처에서 지상에 나왔다고 전해지기 때문.
여기에 힘을 보탠 학자는 고고학과 인류학자인 요한 라인하르트가 1991년 발표한 “마추픽추:고대성지의 연구 (Machu Picchu : Exploring an Ancient Sacred Center)”에서다. 마추픽추는 성스러운 강 우루밤바강에 둘러 싸여있다는 점에서 이렇게 추론했다. 또한 하지와 동지, 춘분과 추분에 마추픽추의 특정 지점에서 관측하면 일출과 일몰이 종교적으로 중요한 산과 딱 맞춰진다는 것이다. 참고로 당시 태양은 잉카의 조상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렇듯 여러 가설들이 난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나온 가설들을 종합한 모든 영역의 특별한 곳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마추픽추는 황제의 별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어려운 고지를 선택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페루의 고고학자 기에루모에 의하면 현대에는 여러 문화가 존재하지만 잉카 사회에서는 정교 분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중 목적을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