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철학, 기쁨을 길들이다 : 존재의 가장 강력한 경험, 기쁨으로 성장하는 지혜
원제 : La Puissance de la Joie (2015년)
프레데릭 르누아르 / 와이즈베리 / 2016.10.7
“고통, 불안, 분노… 그럼에도 결국 기쁨이 이겼다”
– 프랑스의 대표 지성, 프레데릭 르누아르의 기쁨 철학 특강, 불안과 분노에는 쉽게 휘둘리면서도 순수한 기쁨을 누리는 데는 서툰 현대인들을 위한 빛나는 통찰
우리는 늘 수동적으로 기쁨의 순간을 기다려야 할까?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기쁨이 떠오르게 할 수는 없을까? 기쁨을 길들일 수는 없을까? 금세 사라지고 마는 기쁨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기쁨을 길러낼 수는 없을까?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으로, 세계적 철학자이자 종교사학자인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이런 질문을 바탕으로, 장자, 예수, 몽테뉴,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등 ‘기쁨을 중점적으로 사유한 사상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 해답을 모색한다.
그리고 기쁨의 역량에 근거한 자기성취의 길, 지속 가능한 기쁨의 지혜를 제시한다. 그 지혜는 자기애적 · 소비지상주의적 문화가 제시하는 가짜 행복과 정반대되면서도, 욕망을 버림으로써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초월적 지혜와도 다르다. 프레데릭 르누아르가 제시하는 기쁨의 지혜는 생의 모든 고뇌까지 포용하면서도 생을 사랑할 수 있는 완전한 기쁨, 순수한 기쁨에 이르는 길에 대한 철학적 대답이자 실천적 해결책이다. 이 책은 2015년 파리 테러 이후 슬픔에 잠긴 프랑스 국민들에게 ‘기쁨’이란 어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이자, 역량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작은 책으로 각인되며, 출간 즉시 프랑스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 목차

서문
1 쾌락, 행복, 기쁨
2 기쁨의 철학자들
바뤼흐 드 스피노자
프리드리히 니체
앙리 베르그송
3 기쁨이 만개하게 하라
주의 집중
현존
명상
신뢰와 마음 열기
자비
대가를 바라지 않음
감사
끈기
놓아버림과 동의
육체적 희열
4 자기 자신이 되어라
개성화 과정
너 자신을 알라, 그리고 너 자신이 되어라
스피노자가 말하는 해방의 길
예수, 욕망의 주인
내면의 자유에서 세계의 평화로
5 세상과 화합하라
우애
열정에서 자유롭게 하는 사랑으로
내주는 기쁨
자연과 동물을 사랑하라
6 완전한 기쁨
마음과 자아
편안한 마음가짐, 자신을 자아와 동일시하지 마라
순수한 기쁨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길
자아를 ‘죽이려’ 하지 마라
7 살아가는 기쁨
아이들의 절로 우러나는 기쁨
단순한 삶의 기쁨
내면에 있는 기쁨의 샘을 해방시켜라
동의의 힘
인생과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쁨
에필로그: 기쁨의 지혜
주
참고문헌
○ 저자소개 : 프레데릭 르누아르 (Frederic Lenoir)

프랑스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세계적인 종교사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이다. 또한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과 국립과학연구소CNRS의 연구원, 대학교수, 프랑스 최고 권위의 종교 간행물 『종교의 세계』 편집인, 국영방송 프랑스 문화의 종교 프로그램 <하늘의 근원>의 편성 책임자이다. 동시에 베스트셀러 작가로서도 활동 중이며 프랑스 문단에 ‘프레데릭 르누아르 신드롬’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2001년 첫 소설 《비밀》 발표 이후 40여 편의 저서를 출간하였고, 그중 다수는 밀리언셀러를 기록해 전 세계 2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 외에도 다수의 희곡과 뮤지컬을 집필해 무대에 올렸으며, 최근 집필한 영화 시나리오는 르누아르 자신이 메가폰을 잡을 예정이다. 프랑스에서 초판 6만 부를 발행한 《루나의 예언》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신간이 한자리에 모인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최고 경매가를 기록했다.
다재다능한 21세기 르네상스인 프레데릭 르누아르의 대표적 저서로는 전 세계적 밀리언셀러를 거머쥔 『루나의 예언』과 『불교와 서양의 만남』, 『추적-다빈치 코드의 진실과 거짓』, 『이중설계』,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심층적인 내용을 담은 『신이 된 예수』,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세계의 영혼』,『오직, 사랑』 등이 있다.
– 역자 : 이세진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랭스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지금은 다른 나라의 재미난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내가 여기에 있어』, 장 자크 상페의 「돌아온 꼬마 니콜라」 시리즈, 수지 모건스턴의 「엠마」 시리즈, 『밖에 나가 놀자!』, 『마리 퀴리』,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파도가 지나간 후』, 『설국열차』, 『체리토마토파이』, 『음악의 기쁨』 1·2·3·4, 『나는 왜 네가 힘들까』, 『나, 꽃으로 태어났어』, 『내가 여기에 있어』, 『여섯 개의 도덕 이야기』 등 많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 책 속으로
그렇다면 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인생이 불시의 사고, 사별, 재앙으로 시련에 빠뜨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스토아주의자들은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지혜라고 말한다. 그들은 수레에 매여 끌려가는 개의 비유를 들었다. 개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힘으로 버텨봤자 결국 가야 할 곳까지 끌려가게 마련이다. 버텨봤자 괜히 힘만 빼고 몸만 다친다. 개가 헛되이 몸부림치지 않고 수레의 진행 방향을 순순히 따라간다면 어차피 도착하는 곳은 같아도 고생은 한결 덜하다. — p.24~25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삶의 비극적 차원을 수용한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이 종교의 병적인 시각, 구원받으려면 고행을 겪어야 한다는 시각은 거부했다. 또한 불교를 공부한 후에는 이 종교가 번민을 거부했지만 욕망의 소멸을 주장했다고 비판했다. 니체는 이 두 갈래 길 사이에서 제3의 길, 즉 생을 고통까지 포함해서 긍정하는 길을 제시했다. 우리를 옭아매고, 상처 입히고, 두렵게 하는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생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신성한 긍정, 이 절대적 동의를 니체는 ‘운명애 (amor fati)’라고 불렀다. ……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절대적 기쁨의 조건이다. — p.49
기쁨이 태어나게 하려면 우리 몸과 정신을 온전히 감각에 맡겨야 한다. 이렇듯 우리 감각에 접속하는 것은 슬픔, 분노, 두려움 같은 부정적 감정들에도 그만큼 여지를 내주는 일이다. — p.60
도교 사상은 때를 아는 철학이다. 도교가 그토록 강조하는 ‘무위無爲’는 아무 행동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인생의 흐름을 탈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 목표, 자기 의도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되, 무슨 수를 동원해서든 빨리 실현하고 말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생이 내 시도에 맞서거든 힘으로 버티지 말고 생이 이끄는 방향으로 가라. 그 목표는 나중에 이뤄질 수도 있다. — p.89~90
스피노자 자신은 욕망을 “인간의 본질 자체”라고 했다. 인간은 자기 욕망의 방향을 잘못 설정할 때 예속되어버리고 만다. 욕망이 자기 존재 역량을 증진하기는커녕 위축시키는 대상들에게로 향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슬프고 불행해진다. 슬픔과 수동적 기쁨에서 능동적 기쁨으로 나아가는 해방의 과정은 욕망을 억압하거나 제거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알아보고 욕망이 좋은 방향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 p.112
관계에 더 이상 기쁨이 없다면 그 관계가 정말로 나에게 좋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반복적으로 슬픔을 느낀다면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런 감정은 대부분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살지 못할 때 찾아온다. 관계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분별이라는 작업이 필요하다. — p.137
통찰, 개성화 과정, 생에 대한 동의로 내공을 쌓을수록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아와 완전히 동일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다. 나라는 존재가 나의 감정, 신념, 생각, 마음으로 구성된 프레데릭으로만 요약되지 않는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내 존재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안에 프레데릭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그 무엇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나의 정신에 속하는 훨씬 더 심오한 정체성으로서의 자기 (Soi) 말이다. — p.153~154
나환자촌에는 아기,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400여 명이 한데 어울려 살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의료팀이 와서 더 이상 치료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괴사된 손이나 발을 절단하는 수술을 하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을곳곳에서 기쁨이 샘솟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그런 분위기를 불편해하던 어느 독일인 의사가 기억난다. “저 사람들은 뭐가 저리 좋을까요? 다들 저렇게 흉측한 꼴을 당했는데, 팔을 잃고 다리를 잃고 사람 몰골조차 아닌데 말입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빈자 중의 빈자요, 병자 중의 병자인 그 사람들은 아직도 사랑하고, 먹고, 말하고,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기뻐했다. 그들은 생을 사랑하기에 기뻐했다! — p.179
아타락시아의 지혜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욕망을 아예 뿌리뽑거나 위축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쾌락과 감정을 단념하거나 축소시키고 만다. 반대로 기쁨의 지혜는 감정이 풍부한 삶, 욕망하는 삶을 온전히 떠안고, 고통마저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 p.197
○ 출판사 서평
“고통, 불안, 분노… 그럼에도 결국 기쁨이 이겼다”
– 프랑스의 대표 지성, 프레데릭 르누아르의 기쁨 철학 특강, 불안과 분노에는 쉽게 휘둘리면서도 순수한 기쁨을 누리는 데는 서툰 현대인들을 위한 빛나는 통찰
우리는 그 어떤 감정보다도 기쁨을 열망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때, 예술작품을 완성할 때, 연구자가 중대한 발견에 도달할 때… 우리는 온 존재가 압도되는 듯이 북받치는 감정을 느낀다. 기쁨은 쾌락보다 깊고 행복보다 구체적인 감정으로, 바랄 나위 없는 충만을 느끼게 하는 위력,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위력이 있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자연은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분명한 표시로 알려준다. 그 표시는 바로 기쁨이다”라고 이야기하며, 인생에서 기쁨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설명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점점 순수한 기쁨을 누리는 데 서툴러져만 간다. 고통, 분노, 불안이라는 감정에는 쉽게 휘둘리고 전전긍긍하지만, 순수한 기쁨을 누리는 데는 서툴다. 설사 느낀다 해도 아주 짧게 스치듯 경험할 뿐이며, 감각적 쾌락거리를 좇고는 기쁨을 추구한다고 착각하기 일쑤다. 우리는 기쁨이 우리를 덮치는 순간이 오길 고대하지만, 매일 마주하는 세상의 뉴스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기쁨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에 더 쉽게 압도되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늘 수동적으로 기쁨의 순간을 기다려야 할까?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기쁨이 떠오르게 할 수는 없을까? 기쁨을 길들일 수는 없을까? 금세 사라지고 마는 기쁨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기쁨을 길러낼 수는 없을까?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으로, 세계적 철학자이자 종교사학자인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이런 질문을 바탕으로, 장자, 예수, 몽테뉴,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등 ‘기쁨을 중점적으로 사유한 사상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 해답을 모색한다.
그리고 기쁨의 역량에 근거한 자기성취의 길, 지속 가능한 기쁨의 지혜를 제시한다. 그 지혜는 자기애적 · 소비지상주의적 문화가 제시하는 가짜 행복과 정반대되면서도, 욕망을 버림으로써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초월적 지혜와도 다르다. 프레데릭 르누아르가 제시하는 기쁨의 지혜는 생의 모든 고뇌까지 포용하면서도 생을 사랑할 수 있는 완전한 기쁨, 순수한 기쁨에 이르는 길에 대한 철학적 대답이자 실천적 해결책이다. 이 책은 2015년 파리 테러 이후 슬픔에 잠긴 프랑스 국민들에게 ‘기쁨’이란 어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이자, 역량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작은 책으로 각인되며, 출간 즉시 프랑스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 몽테뉴, 스피노자, 니체, 예수, 노자… 기쁨을 사유한 동서양의 사상가들을 지혜를 찾아서
고대로부터 철학자들은 기쁨의 긍정적 성격을 인정하면서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는 드물었다. 기쁨에는 이성으로 헤아리기 어렵고 예측 불가능한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은 기쁨보다 더 명쾌하게 논의할 수 있는 쾌락이나, 행복을 사유의 대상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기쁨을 사유의 주축으로 삼은 동서양의 현자들도 분명 존재한다.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서양에서 ‘기쁨 철학’의 선구자로는 16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를 꼽는다. 그는 행복한 삶의 기준을 기쁨에 두었으며, “기쁨은 널리 펼치고 슬픔은 쳐낼 수 있는 한 쳐내야 한다”며 기쁨을 증대시키는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쁨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 몽테뉴가 내세운 조건은 이성적 분별이다. 그는 ‘우리에게 좋은 것,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 혹은 그 반대로 우리를 슬픔에 몰아넣는 것을 분별하는 판단력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후로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인 스피노자가 기쁨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꽃피운다. 스피노자는 합리적, 비판적 성경 분석의 선구자로, 노아와 대홍수 이야기,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이집트를 탈출한 이야기가 신화에 불과하다는 등의 급진적 주장으로 자신이 몸담고 있던 유대교 공동체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 추방당했다. 그는 그 이후 어떤 종교에도 귀의하지 않고 렌즈세공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낮에는 렌즈를 연마하고, 밤에는 인간 정신을 연마하며 살았던 그는 주요 저서 『에티카』를 통해 ‘기쁨의 철학’을 설파했다.
스피노자는 수동적 기쁨과 능동적 기쁨을 구분했다. 수동적 기쁨은 우리가 기쁨에 있어 부분적 원인밖에 되지 못하는 경우를 뜻하며, 능동적 기쁨은 우리 자신이 기쁨의 원인으로 충분한 경우다. 예컨대 국가 간 대항전에서 우리 축구팀이 골을 넣으면 우리는 짜릿한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순간적이며, 경기의 양상이 바뀌면 기쁨이 곧 슬픔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수동적 기쁨에서는 외부 상황, 혹은 우리의 기대 및 상상이 큰 변수가 된다. 능동적 기쁨은 개인에 대한 관찰과 심오한 탐구, 즉 이성을 전제로 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기 욕망의 방향을 잘못 설정할 때 인간은 자기 예속에 사로잡히며, 슬프고 불행해진다. 반면 자기 행동과 생각의 원인을 알고자 하는 이성적 분별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부적절한 욕망보다 더 강력하고 좋은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정념’이 아닌, 자기 자신의 진정한 욕망의 주인으로서 능동적이고, 심오하며 지속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가 설파한 ‘욕망의 주인된 자로서의 기쁨’의 맥락과도 동일하다.
스피노자에 이어 프리드리히 니체는 기쁨이 인간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는 근본적인 윤리 기준이라고 보고 기쁨의 철학을 설파했다. 기쁨은 외부에서, 혹은 하늘나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의 중심에 아로새겨진 무엇이며, 우리 생명력을 증진시키는 모든 것이다. ‘우리를 옭아매고, 상처 입히고, 두렵게 하는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즉 고통까지 포함한 있는 그대로의 생을 긍정하고 동의하는 것을 니체는 ‘운명애(amor fati)’라고 보았다. 운명애는 그저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그저 묵묵히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절대적 기쁨의 조건이다. 니체 이후에는 베르그송이 ‘기쁨의 철학자’로서의 명맥을 잇는다. 그는 생이 창조하기 위해 존재하며, 창조의 행위에는 본질적으로 기쁨이 따른다고 이야기했다. 즉 ‘기쁨은 생이 결실을 맺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도교사상이 기쁨에 기반한 사유를 추구했다. 도(道)는 마음을 열고 생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기쁘게 동행하는 데 있는데, 장자는 이를 (우리내 인생의 풍파처럼) 험한 물살의 강을 헤엄쳐 건너려는 자의 비유로 설명했다. “장자는 물살이 셀수록 거스르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강 저편에 다다라야 한다는 목표는 염두에 두되, 물살에 저항하지 말고 오히려 몸을 맡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상대적으로 힘을 덜 빼고 무사히 우리가 가고자 하는 강 건너편에 다다를 수 있다.”
– 우리는 어떻게 기쁨으로 가득한 내면의 텃밭을 가꿀 수 있을까?
사유만 할 뿐, 실천하고 누릴 수 없는 기쁨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동서양 현자들의 가르침과 자신의 생생한 경험담을 바탕으로 기쁨에 이르는 실천적 지혜를 탐구한다. 우리는 어떻게 기쁨이 솟아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르누아르는 기쁨을 키우기에 적합한 부식토 같은 정신상태 및 생활 태도들을 여럿 소개하는데, 그 첫 번째는 바로 주의 집중과 현존이다.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에 넉넉히 시간을 내어주고 그런 감각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주의 집중을 통해 우리는 주변의 풍경, 이야기, 예술작품 등에서 기쁨을 끌어낼 수 있다. 현존은 감각을 넘어, 마음과 정신까지 모두 현재에 오롯이 임하는 훈련이다. 집중과 현존을 질적으로 향상시켜주는 훈련으로 저자는 마음챙김 명상을 권장한다.
신뢰와 마음열기 역시 중요한 기쁨의 요소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에 철벽을 치는 경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것을 우려한다. 이렇게 닫힌 마음은 사랑에 대해서도, 기쁨에 대해서도 닫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쁨을 맞아들이는 마음열기의 지혜를 이렇게 설명한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상처받을 가능성을 어느 정도 남긴 채 살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면 상처받을 여지도 수용해야 한다.”
또 다른 기쁨의 소산은 바로 감사다. 저자는 불면으로 고생하던 중에 심리학자인 친구로부터 잠자리에서 그날 있었던 감사한 일 다섯 가지를 떠올려보라는 조언을 듣고 실천한다. 그러면서 결국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던 경험을 들려주며 감사가 가져오는 은근한 기쁨의 위력을 설명한다. “감사는 무엇보다 인생에게 바치는 감사다. 인생에 배은망덕하게 굴지 말고 우리가 받은 것을 인정하고 고마워하자. 생은 끊임없는 교환이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기쁨의 토양은 ‘놓아버림과 인생에 대한 동의’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삶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늘 전전긍긍하고, 이것저것 미리 고민하기 십상이다. 또 무엇 하나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쉽게 불안해하거나 분노에 휩싸인다. 저자는 “언짢고 내키지 않는 순간에(‘이놈의 열차가 왜 서서 안 가는 거야. 이러다 환승 못 하는 거 아냐?’) 그냥 놓아버리자. 수레에 억지로 끌려가는 개처럼 발버둥치는 대신 인생에 시간을 내주기로 마음먹자는 얘기다. 인생이 나를 여기로 끌고 왔는가? 그렇다면 나도 인생에 장단을 맞춰주자. 인생이 나를 끌고 가는 그 흐름을 타주자. 어차피 선택의 여지도 없는데 어쩔 건가”라고 이야기하며, 도교사상과 니체가 가르쳐준 놓아버림과 동의의 지혜를 상기시킨다. 이밖에도 조화로운 육체에서 나오는 희열, 자비, 끈기와 노력, 자연을 즐기기 등등 ‘기쁨을 배양하는’ 다양한 실천적 지식들을 들려준다.
– 지속 가능한 기쁨, 순수한 기쁨을 길들이며 성장하는 지혜
앞에서 언급한 기쁨의 토양에서 비롯된 기쁨들은 일시적이다. 아등바등하지 않고 놓아버릴 때, 인생에 감사할 때, 우리 자신을 이겨낼 때 그 기쁨은 강렬하고 충만하며 절대적이지만 쉽게 사라져버린다. 스피노자는 좀 더 변치 않는 기쁨, 나아가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길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처음으로 제기하고 사유한 최초의 철학자다. 그가 말하는 영원한 기쁨은 몸을 들썩이게 되는 그런 종류의 강렬한 기쁨이 아니라, 생의 부침 속에서도 언제나 우리 존재를 떠나지 않는, 은근하면서도 심오한 기쁨이다. 프레드릭 르누아르는 이렇듯 능동적이고 영원한 기쁨으로 나아가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개성화 과정’의 길이고, 나머지는 타자들에게로 향하는 ‘세계와 화합하는 길’이다. 그러나 이 두 갈래 길은 결국 서로 만나며 상호보완적인 길이다.
지속 가능한 기쁨으로 가는 첫 번째 길인 ‘개성화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성찰이라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진정한 자신이 아닌 것, 즉 교육이나 문화, 공동체라는 간접수단을 통해 아무 비판 없이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정신분석학자 구스타프 융이 언급했듯이 ‘자신의 뿌리 깊은 본성과 열망에 부합하는 삶을 살기 위한 작업’인 동시에, 스피노자가 당부했듯 ‘기쁨을 위한 이성적 분별의 작업’이기도 하다. 예컨대 우리는 사회, 신, 신념, 가치관 등등 우리 자신을 옭죄는 고리들을 비판적으로 보고, 이를 끊어내는 해방의 작업이 필요하다. 융은 이를 ‘개성화 작업’이라고 칭했다. 자기 개성화는 부모나 사회의 기대 같은 외부적 예속뿐만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를 어떻게 예속하고 있는가를 파악하고 자기 예속을 끊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런 작업의 끝에는 왜곡 없이 자신의 본질에 다가가는 자유와 순수한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저자는 원래 카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까지 감내하며 몇 년간 수도원 생활을 했지만, 결국 몇 년 만에 포기하고 자유로운 생활인의 길을 걷는다. ‘국무장관을 지냈던 아버지와는 정반대되는 분야에서 인정받고 아버지를 뛰어넘으려 했던’ 일종의 영웅심리와 자기애적 상처가 영성생활을 선택한 동기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은 저자가 정신분석과 심리치료를 받아가며 방황과 성찰을 거듭한 끝에 얻은 것이었다.
지속 가능한 기쁨으로 가는 두 번째 길은 바로 타자를 향한 길, 즉 세상과 화합하는 ‘인연 맺기’의 길이다. 슬픔과 거짓 기쁨밖에 남지 않는 관계 대신, 타자와 자신을 모두 기쁘게 하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사는 데 도움이 되는 길을 선택하기 위해 저자는 ‘필리아 (philia)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필리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서 사랑과 우정을 모두 지칭하며 쓴 단어다. 필리아는 서로 격려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 느끼는 애정이다. 필리아는 이런 상호성을 바탕으로, 그 자신도, 타자도 온전히 본연의 모습이 되는 기쁨을 수반한다. “상대가 나의 욕구, 두려움, 결핍을 채워주기를 바라며” 열정과 정념에 근거한 사랑은 상대를 이상화하거나 투사한 것으로 ‘상상력’에 불과한 사랑이자 수동적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의존의 관계’가 아니라 필리아를 바탕으로 자신도 상대도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택한다. 즉 무관심하지 않되, ‘자기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고 상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는 여지, 나를 떠날 수도 있는 여지를 남겨둘 수 있는 초연한 사랑, 능동적인 사랑을 택하는 것이다.
완전한 기쁨으로 가는 또 다른 지혜는 우리의 ‘자아’와 ‘마음’이 사실은 온전한 우리 자신이 아님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힌두 철학에서는 인간의 인격에 ‘자아’와 ‘마음’이라는 두 가지 바탕이 있다고 본다. 자아는 쾌, 불쾌를 지각하는 일종의 소프트웨어이자 감정의 매체다. 분노, 슬픔, 기쁨 등의 감정은 우리의 행동방식, 생각, 신념에 영향을 주어 인격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다. 마음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을 해명하거나 정당화하는 데 작용하는 사유의 소프트웨어다. 그러나 마음은 이런 해명에 거짓을 끌어들일 수 있다. 감정에 기반한 자아도 세상을 보는 필터를 왜곡시킬 수 있다.
르누아르는 모든 것을 통제하려드는 자아와 마음을 초월하는 연습, 자아와 마음이 만들어내는 왜곡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성과 직관의 도움이 필요하며, 자기성찰, 개성화 과정 역시 필요하다. 그런 과정의 끝에서 우리는 니체가 말했듯, 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순수한 기쁨, 즉 외부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능동적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아나 마음이 아닌 심오한 정체성으로의 ‘자기(Soi)’를 마주할 수 있다. 생에 대한 긍정,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있는 삶은 그저 살아가는 그 자체로도 기쁨이 된다. “그저 살아 있다는 단순한 상태 외에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다. 다른 조건은 필요치 않다. 안락도, 성공도, 건강조차도.”
저자는 프랑스 시골 농부에게서, 인도의 가난한 마을 및 나환자촌 사람들에게서 이런 순수한 기쁨으로 항상 웃는 사람들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들의 기쁨이 예수, 장자, 스피노자, 니체 등 모든 기쁨의 사상가들이 얘기했던 바로 그 기쁨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기쁨은 나눌수록 더 커지는 희한한 속성이 있다. 저자는 이런 기쁨의 특성을 바탕으로 자신과, 타자와 사회를 ‘기쁨’으로 유도하는 것이라면 작은 무엇이라도 실천하고 동참하자고 이야기하며, 기쁨의 경지가 개인을 넘어 사회로, 세계로 확대될 수 있도록 독려한다.
○ 독자의 평 1
(20쪽) 쾌락이 없으면 행복도 엇지만 진정 행복해지려면 쾌락을 분별하고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에피쿠로스 “어떤 쾌락도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중 어떤 쾌락을 발생시키는 원인은 쾌락보다 훨씬 더 큰 혼란까지 발생시킨다.”
(25쪽) 스토아주의자들은 어찌 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지혜라고 말한다. 피할 수 없는 것을 거부하면서 운명과 싸우지 말고 그냥 받아들여라, 다른 방도가 없다면 사태를 잇는 그대로 받아드리고 인생에 순응하는 편이 낫다. 자숙은 쾌, 불쾌가 그저 지각에 불과함을 의식하므올써 유쾌한 일은 그대로 유쾌한 대로, 불쾌한일은 불쾌한 대로 누리는 법을 가르쳐준다.
(62쪽) 나는 이미 오래전에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지 않기로 결심했다. 간혹 사진을 직더라도 어떤 장소를 내 논에 충분히 담고 다른 곳으로 떠날 대 한 두 장 직을 뿐이다.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오래오래 그곳의 분위기를 감사하고 음미하는 게 먼저다. 나는 여행을 다닐 때마다 현지인들과 말 한 번 섞지 않은 채 이 나라 저 나라 발만 담그고 떠나는 여행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발견하고는 깜짝깜짝 놀란다. 이런 여행자들은 심지어 그러고 싶은 마음조차 없는 것 같다.
(133쪽)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상대가 마음껏 숨 쉬게 해주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를 독점하거나 나 없이는 못 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오히려 그 사람의 자율을 바란다. 진정한 사랑은 타자의 현존을 추구하지만 고독한 시간, 그 사람과 따로 보내는 시간도 사랑한다. 그런 시간이 있기에 그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욱더 감미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81쪽)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생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기뿜은 사라졌다. 우리는 불만에 찬 자아와 뭐든지 통제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 매여 살아간다.
‘철학, 기쁨을 길들이다’는 프랑스 철학자가 자신의 생각을 이끈 철학자와 개인적인 경험을 곁들어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철학자아자 종교학자답게 서양 철학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도교, 불교 등에서도 기쁨에 대한 가르침을 찾고 있다.
기쁨에 대해 여러 가지로 다루고 있지만 나한테는 ‘사랑’에 대한 기쁨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136쪽) 나는 각자의 비밀의 화원이 있어야˨ 건강하고 개방적인 연애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 화원에서는 자기 멋대로 활보할 수 잇고 자기만의 친구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불안한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즐거움을 보면 마음 깊이 즐거어하는 정신 상태라고나 할까.
우리는 가끔 무관심과 초연을 혼동한다. 철학자 니콜라고의 탁월한 분서을 보라. “무관심이 사랑의 부재 상태라고 한다면 초연은 소유욕 없는 탁월한 사랑의 놓아버림이다.”
책을 읽으면서 ‘행복의 기원’이 떠올랐다. 행복은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진화의 결과라는 저자의 주장 말이다.
금용적인 삶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대하는 것을 많이 접했다. 하지만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고 나를 충만하게 해준다. 기쁨, 즐거움. 쾌락이 나쁜 것이 아니다. 발췌했듯이 즐거움을 유발하는 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저자는 본 책에서 집중, 현존, 명상, 신뢰와 마음열기, 자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세, 감사, 끈질긴 노력, 놓아버림, 육체적 희열을 살펴보고 있다. 저자가 언급한 것을 적절히 조절한다면 우리 삶은 즐거우며 기쁨을 자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독자의 평 2
이 책의 저자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프랑스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세계적인 종교사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이다.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과 국립과학연구소의 연구원, 대학교수, 프랑스 최고 권위의 종교 간행물 <종교의 세계> 편집인, 국영방송 프랑스 문화의 종교 프로그램 <하늘의 근원>의 편성 책임자이며, 베스트셀러 작가로서도 활동 중이다. 프랑스 문단에 ‘프레데릭 르누아르 신드롬’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다재다능한 21세기 르네상스인 프레데릭 르누아르의 대표적 저서로는 전 세계적 밀리언셀러를 거머쥔 <루나의 예언>과 <불교와 서양의 만남>, <추적-다빈치 코드의 진실과 거짓>, <이중설계>,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심층적인 내용을 담은 <신이 된 예수>,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세계의 영혼>, <오직, 사랑> 등이 있다.
저자는 자신의 삶에 피가 되고 살이 된 영성, 철학, 심리학 분야의 성찰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고 한다. 시간이 부족한 많은 현대인들에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와 융, 불교와 성경 등 그들이 남긴 지혜로운 삶의 메시지를 접할 수 있기를 바랬다며 이 책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사람은 언제나 행복을 꿈꾼다. 인간은 쾌락, 즉 만족 없이는 살 수 없는 동물인데 쾌락은 지소되지 않고 훼방 받을 여지가 많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은 쾌락의 일시성과 양면성을 넘어서서 오래도록 지속되는 만족이 과연 존재할까? 지속 시간에 제한이 없고 외부 상황에 좌우되지 않으며 해로운 효과를 미치지 않는 만족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이런 상태를 정의하기 위해 하나의 개념이 고안됐으니 그것은 바로 행복이라는 개념이다. 그때부터 오랜세월 동안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은 행복한 삶과 행복의 원인 등 행복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책은 행복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이루는 요소인 기쁨에 대해 다루고 있다.
기쁜 일이 없어도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라는 흥미로운 이 질문에 저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살아가는 기쁨을 되찾을 수 있고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렇게 기쁨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 몸과 정신을 온전히 감각에 맡겨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는 법, 접촉하는 법, 눈여겨 바라보는 법, 냄새를 맡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법을 다시 배워 자신의 감정과 따로 노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매사에 시간을 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기쁨이 활짝 꽃 피우려면 실용적인 차원에서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나도 그렇지만 항상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는 경쟁적이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넘치는 정보들과 많은 선택지를 주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것을 좋아하고 따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용성만 따지다 보면 마음을 열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볼 여유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손에 잡히는 결과가 아닐지라도 그 과정과 노력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남들의 시선만 신경 쓰고 사랑과 인정을 받고 기대에 부응하려고 자신의 삶이 아닌 남들의 시선 속 좋은 이미지를 만들려고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온전한 자신을 마주할 수도, 자신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현대인들에게 지나치게 바쁘게 살다 보면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 없다며 여행도 다니고 자연을 누리고 잠깐의 시간을 내서라도 일상에서 산책하며 여유를 가지며 꼭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한다.
이 책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느낄 수 있는 기쁨이라는 것을 지속 가능한 기쁨으로 길들일 수는 없을까? 이와 같은 질문에 삶의 기준을 기쁨에 두며 기쁨을 중점적으로 사유한 사상가인 장자, 예수, 몽테뉴, 바뤼흐 드 스피노자, 프리드리히 니체, 앙리 베르그송 등의 사상을 접하고 그들의 철학적 대답을 통해 해답을 찾는다. 그리고 기쁨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몇몇 생활 태도와 존재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집중, 현존, 명상, 신뢰와 마음열기, 자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세, 감사, 끈질긴 노력, 놓아버림, 육체적 희열에 대해 중점적으로 알려준다.
살면서 매사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불만족스러운 상황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많은 돈을 벌고 오랫동안 건강히 잘 살기를 바라지만 그것보다는 매 순간을 영원처럼 충만하게 사는 법을 배워 자유로운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들이 자신의 삶을 소중히 아끼며 넘치는 기쁨을 느끼며 가장 나답게 후회없이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현대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는 내용이었다.
○ 독자의 평 3
기쁨은 우리 생명력의 발현으로, 존재하고 생을 음미하는 힘에 맞닿는 수단이다. 기쁨을 만끽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경험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 의지와 노력으로 기쁨이 떠오르게 할 수 있을까? 기쁨을 길들일 수 있을까? 기쁨을 길러낼 수 있을까? 기쁨의 역량에 바탕을 둔 지혜를 제대로 구축할 수 있을까? – ‘서문’ 중에서
어떻게 완전하고 순수한 기쁨에 이를 수 있을까?
저자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이자 세계적인 종교사학자, 철학자이다.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도미니크회 수사인 마리 도미니크 필립과 세계적인 철학자인 에마뉘엘 레비나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정신적인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인도와 이스라엘에 체류하고 프랑스의 수행 암자와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파야르 출판사에서 총서 책임자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직접 저자로 나서 피에르 신부, 움베르토 에코 등과 나눈 철학과 영성에 관한 다수의 대담집과 심층 연구서를 펴냈고, 생태 문제에 관심을 두고 ‘국경 없는 환경’이라는 단체를 창립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1994년에는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학문적 스승인 에드가 모랭의 뒤를 이어 철학, 사회학, 역사학을 한데 엮은 학제간 연구에서 종교 문제를 다뤘다. 공영방송 프랑스5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시리즈 <사이비 종파, 그 거짓말과 이상>을 공동 연출하고 여러 편의 TV 다큐멘터리 시나리오를 집필했으며, 공동 집필한 희곡 <신의 선의>는 2009년에 초연한 뒤 5개국에서 각색되어 상연되고 있다.
현재 철학자이자 소설가, 라디오 진행자, 프랑스 최고의 종교 간행물 <종교의 세계> 편집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대중과 만나고 있다. 두 편의 역사소설 <천사의 약속>과 <루나의 신탁>은 20개국에서 1백만 부가 판매되는 등 ‘프레데릭 르누아르 신드롬’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저서로는 <오직 사랑>, <네오르네상스가 온다>, <불교와 서양의 만남>, <이중설계>, <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 철학자>,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등이 있다.
그가 제시하는 기쁨의 지혜는 생의 모든 고뇌까지 포용하면서도 생을 사랑할 수 있는 완전한 기쁨, 순수한 기쁨에 이르는 길에 대한 철학적 대답이자 실천적 해결책이다. 이 책은 2015년 파리 테러 이후 슬픔에 잠긴 프랑스 국민들에게 ‘기쁨’이란 어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이자, 역량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작은 책으로 각인되며, 출간 즉시 프랑스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쾌락 없이는 행복도 없다
하지만 여기서의 쾌락은 스스로 선택한 절제된 것이어야 한다. 스토아학파는 자기 자신에게 달린 일과 어찌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라고 가르친다. 이처럼 우리들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일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알코올의존증 환자나 게임 중독자라면 본인 스스로 결단력 있게 이런 중독과 싸우며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인생이 불시의 사고, 사별, 재앙으로 시련에 빠뜨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스토아주의자들은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지혜라고 말한다. 그들은 수레에 묶여 끌려가는 개의 비유를 들었다. 개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힘으로 버텨봤자 결국 가야 할 곳까지 끌려가게 마련이다. 버텨봤자 괜히 힘만 빼고 몸만 다친다. 개가 헛되이 몸부림치지 않고 수레의 진행 방향을 순순히 따라간다면 어차피 도착하는 곳은 같아도 가는 도중의 고생은 한결 줄어든다.
니체가 생각한 기쁨의 원리는 역량이다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삶의 비극적 차원을 수용한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이 종교의 병적인 시각, 구원받으려면 고행을 겪어야 한다는 시각은 거부했다. 또한 불교를 공부한 후에는 이 종교가 번민을 거부했지만 욕망의 소멸을 주장했다고 비판했다. 니체는 이 두 갈래 길 사이에서 제3의 길, 즉 생을 고통까지 포함해서 긍정하는 길을 제시했다.
우리를 옭아매고, 상처 입히고, 두렵게 하는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생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신성한 긍정, 이 절대적 동의를 니체는 ‘운명애amor fati’라고 불렀다. 운명애는 바로 우리들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절대적 기쁨의 조건이다.
“기쁨은 역량이다. 그 역량을 잘 키우고 건사하라” – 달라이 라마
기쁨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우리는 보는 법, 접촉하는 법, 눈여겨 바라보는 법, 냄새 맡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나아가 마음으로 느끼는 법을 다시 배워 자신의 감정과 따로 노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자면 매시에 시간을 들일 줄 알아야 한다. 단순한 충격, 단 세개의 음표에서 기쁨이 솟아나는 일을 드물다. 기쁨이 태어나게 하려면 우리 몸과 정신을 온전히 감각에 맡겨야 한다. 이렇듯 우리 감각에 접속하는 것은 슬픔, 분노, 두려움 같은 부정적 감정들에도 그만큼 여지를 내주는 일이다.
도교는 유교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상이다
공자는 행복하기 위해 인간은 덕을 갖춰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덕을 갖추려면 우주의 질서를 본받아 살아야 한다. 반면 도교 사상가들은 우리 인간은 천상이 아닌 지상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았다. 향후 300년간 해가 몇 시 몇 분에 뜰지는 예측할 수 있어도 내일이 어떤 날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도교 사상은 때를 아는 철학이다. 도교가 그토록 강조하는 ‘무위無爲’는 아무 행동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인생의 흐름을 탈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 목표, 자기 의도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되, 무슨 수를 동원해서든 빨리 실현하고 말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생이 내 시도에 맞서거든 힘으로 버티지 말고 생이 이끄는 방향으로 가라. 그 목표는 나중에 이뤄질 수도 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해방의 길
스피노자 자신은 욕망을 “인간의 본질 자체”라고 했다. 인간은 자기 욕망의 방향을 잘못 설정할 때 예속되어버리고 만다. 욕망이 자기 존재 역량을 증진하기는커녕 위축시키는 대상들에게로 향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슬프고 불행해진다. 슬픔과 수동적 기쁨에서 능동적 기쁨으로 나아가는 해방의 과정은 욕망을 억압하거나 제거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알아보고 욕망이 좋은 방향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의지의 힘만으로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정을 이성과 의지의 힘으로 길들일 수 없는 일종의 악악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각은 ‘집착이 ㅜ불행을 낳으니 집착의 원인인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불교적 시각과도 차별화된다. 오히려 그는 욕망은 인간의 본질인만큼 그 감정을 위축시킬 게 아니라 더 풍부히게 고양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글기 위해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관계에 더 이상 기쁨이 없다면 그 관계가 정말로 나에게 좋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반복적으로 슬픔을 느낀다면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런 감정은 대부분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살지 못할 때 찾아온다. 관계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분별이라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아를 초월해야 진정 능동적 기쁨을 접할 수 있다
통찰, 개성화 과정, 생에 대한 동의로 내공을 쌓을수록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아와 완전히 동일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다. 나라는 존재가 나의 감정, 신념, 생각, 마음으로 구성된 프레데릭으로만 요약되지 않는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내 존재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안에 프레데릭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그 무엇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나의 정신에 속하는 훨씬 더 심오한 정체성으로서의 자기Soi 말이다.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은 역설적이게도 자아와 동일시된 자기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진정한 자기성취는 자기상실의 경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래야만 자아Moi에서 자기Soi로 넘어갈 수 있다. 더욱 깊이 내려가 진정한 나 자신이 될수록 어린 시절부터 마음과 감정이 형성해온 자아의 거짓 정체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단순한 삶의 기쁨
저자의 직접 체험이다. 나환자촌에는 아기,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400여 명이 한데 어울려 살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의료팀이 와서 더 이상 치료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괴사된 손이나 발을 절단하는 수술을 하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을곳곳에서 기쁨이 샘솟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분위기를 불편해하던 어느 독일인 의사가 기억난다. “저 사람들은 뭐가 저리 좋을까요? 다들 저렇게 흉측한 꼴을 당했는데, 팔을 잃고 다리를 잃고 사람 몰골조차 아닌데 말입니다” 그 의사는 이해할 수 없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빈자 중의 빈자요, 병자 중의 병자인 나환자들은 아직도 사랑하고, 먹고, 말하고,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기뻐했다. 그들은 생을 사랑하기에 기뻐했다.
○ 독자의 평 4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원합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무엇일까요?
철학자인 저자는 가장 먼저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기쁨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나는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능동적이고 영원한 기쁨을 고양하는 첫 번째 길은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 길의 초입에서 우리는 자기성찰이라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자기 내면을 관찰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닌 것, 교육과 문화라는 간접 수단을 통해 별다른 비판 없이 외부에서 유입된 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사회, 신, 우리 자신에 대한 이념이나 신념이 대개 다 그렇다. 그런 이념과 신념은 진정한 ‘우리’를 옥죄고 질식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슬퍼진다. 더 심오한 기쁨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이 고리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우리 발목을 잡는 것들을 끊어내야 한다.
우리 인생을 살펴보면 태어나서 서른 살이 되기까지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시기이다.
인생의 중반기, 대략 서른다섯 살에서 쉰 살 사이에 자기 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열망에 대한 자각이 일어난다.
이런 개성화 고정은 이중의 자기성찰에 근거한 인연 벗어나기 작업이다.
이중의 자기성찰은 나에게 맞지 않는 것, 참다운 내가 아닌 것을 자각할 뿐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
참다운 자기 욕구와 뿌리 깊은 본성도 자각하는 것이다.
“자기인식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기성찰이다.”
자기성찰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너를 기쁘게 하는 것과 너를 슬프게 하는 것을 잘 관찰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인식과 통찰이라는 내면의 작업을 수행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의 감정, 욕망, 정념, 신념, 상상, 의견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때 비로소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고 즐거워하는 기쁨이다.”
불교 용어에 “항마촉진인”이라는 수인이 있다.
석가모니가 온갖 번뇌를 물리치고 도를 깨닫는 순간에 짓던 손동작이다. 도를 깨닫는 순간의 기쁨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수행을 하던 석가모니는 마지막 손가락을 살짝 구부려 기쁨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진정한 자아를 깨닫는 순간, 진정한 나로 사는 우리 인생은 과연 어떨까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희망했던 그 사내처럼, 서른세 살에 죽으며 ‘다 이루었다’는 말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요?
기쁨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인식을 갖게해 준 소중한 책 추천해봅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