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김장수 / 푸른사상 / 2020.1.28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이자 오늘날까지도 국모로 추앙받는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계몽절대주의 체제를 처음으로 도입한 군주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최초로 의무교육 제도를 실시하여 계몽절대주의 체제를 견고히 다지고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뿐만 아니라 문화적 단일화를 구축했다. 아울러 행정, 재정, 외교 분야에서 개혁정책을 강력히 추진했고, 군제 개혁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 책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계승권을 부여한 국사조칙의 제정 원인과 그 진행 과정을 다루었다. 또한 3차에 이르는 왕위계승전쟁을 조명하며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 등 주변국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어 마리아 테레지아의 탄생 및 성장, 프란츠 슈테판과의 결혼 및 자녀 양육, 남편 프란츠 1세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아들 요제프 2세와 15년간 왕국을 통치하며 갈등을 겪은 말년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모습을 탐구하였다. 40년 동안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며 강한 결단력과 여성성을 겸비한, 위정자로서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모습을 재평가한다.

○ 목차
책머리에
제1장 카를 6세와 국사조칙
-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 상호계승약관
- 국사조
제2장 마리아 테레지아의 성장과 결혼
- 마리아 테레지아의 탄생
- 마리아 테레지아의 성장
-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
- 카를 6세와 프란츠 슈테판
-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 출산과 양육
-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 요제프
제3장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과 각국의 대응
- 프리드리히 2세의 등극
- 프리드리히 2세의 선제공격
- 제1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 제2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 제3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 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조약
- 상속전쟁 이후의 프로이센의 위상
제4장 계몽절대왕정체제 구축
- 하우크비츠의 내정개혁
- 다운 백작의 군제개혁
- 스비텐의 교육개혁
- 카우니츠-리트베르크의 외교정책
- 쇤브룬 궁전의 증축
제5장 말년의 활동
- 프란츠 1세의 서거
- 프란츠 1세의 사생활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대응
- 공동통치자 요제프 2세
- 바이에른 상속전쟁과 모자간의 대립 심화
- 의무교육제도의 도입
- 생의 마지막 순간
나가면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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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김장수 (金長壽)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학부에서 석사 및 철학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이며 한국서양문화사학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Die politische Tatigkeit F. Palackys, Korea und der ‘Westen’ von 1860 bis 1900, Die Beziehungen Koreas zu den europaischen Großmachten, mit besonderer Berucksichtigung der Beziehungen zum Deutschen Reich, 『프란티세크 팔라츠키(F.Palacky)의 정치활동』 『독일의 대학생 활동 및 그 영향 』 『서양의 제 혁명』 『비스마르크』 『중유럽 민족문제』(공저) 『유럽의 절대왕정시대』 『주제별로 들여다본 체코의 역사』 『주제별로 살펴본 서양근대사』 『체코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 『슬라브 정치가들이 제시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방안』 『후스로부터 시작된 종교적 격동기(1412-1648)』 『19세기 독일통합과 제국의 탄생』 등이 있으며, 그동안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와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민족 문제를 주제로 많은 논문을 써왔다.

○ 책 속으로
당시 독일권에서 오스트리아와 대립하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역시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1726년과 1728년에 체결된 부스터하우젠 비밀조약과 베를린 조약에서 국사조칙을 인정했다. 이렇게 선왕이 두 번이나 인정한 국사조칙을 무시한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분쟁을 활용하여 풍요로운 슐레지엔 지방을 차지하려고 했고 1740년 11월 15일 오스트리아와 비밀협상을 통해 자신의 목적도 관철시키려고 했다. 당시 프리드리히 2세는 200년 전에 호엔촐레른 가문과 슐레지엔 지방을 통치했던 피아스텐 (Piasten) 대공 사이에 체결된 결혼조약을 부각시키면서 슐레지엔 지방에 대한 프로이센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1740년 11월 6일 프리드리히 2세는 카를 6세의 사망을 계기로 슐레지엔 지방을 차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자신의 행동이 매우 합당 (billig)하다는 입장도 밝혔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 국왕으로 등극한 이후부터 오스트리아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즉 그는 남자 후계자 없이 카를6세가 사망할 경우 오스트리아 왕위계승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예견했고 실제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오스트리아 왕국의 일부 지방을 프로이센에 편입시키겠다는 구체적인 구상도 했다. — P.126~128
점차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책적 효율성을 갖춘 정부 및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정례적인 징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고 거기서 일반 조세제도의 도입도 강력히 추진했다. 귀족계층과 가톨릭교회의 교회령 및 성직자들은 더 이상 면제 대상이 아니었다. 일반 조세제도의 도입에 따라 귀족 및 성직자 계층은 그들 수입의 18.75%를 세금으로 납부해야만 했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국가는 징집, 군대 무장 및 유지비를 부담하기로 했다. 이러한 세금 제도는 경제적으로 활성화된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시행되었다.
어릴 적부터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의 뜻을 따른다는 자세로 자신이 신으로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보존하는 의무를 위임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신앙심이 돈독하던 여왕은 평소부터 로마 교황을 비롯해 빈의 대주교를 존중하며 미사나 성채배령 등의 가톨릭 의식에도 예를 다했다. 그러나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에는 수도원을 비롯하여 교회 관련 영지가 지나치게 많았다. 게다가 교회는 면세 대상이었기 때문에 국가권력인 징세권 행사는 불가능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경우 자신이 주도하던 국가개혁 역시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 세력은 ‘교회의 면세특권’을 부각시키면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혁안에 동조하지 않았다. 가톨릭 세력의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예수회의 활동을 제한하고 금전과 시간의 낭비에 불과한 성지순례도 중지시켰다. 아울러 교회 내부의 화려한 의식 역시 폐지시켰다. 이렇게 가톨릭교회의 면세특권이 폐지됨에 따라 당시 로마 교황청은 여왕의 개혁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던 계몽사상의 확대로 상황은 이미 그녀 편이었다. — P.202~203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는 다운 백작이 무인으로서의 재능과 군사 부문에 대한 높은 식견도 가졌음을 인지했다. 따라서 그녀는 그에게 오스트리아군을 혁신하는 일체의 업무를 위임했다. 그에 대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믿음은 그녀가 가장 신뢰하던 푹스-몰라드 백작부인의 딸을 그의 배우자로 주선하는 적극성을 보인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마리아 테레지아는 다운 백작을 푹스-몰라드 백작부인의 딸과 결혼시켜 황제 부부 중심으로 구성된 소수 모임의 일원으로도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다.
다운 백작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기대한 대로 군 전반에 대한 개혁 및 개편을 시행했다. 즉 그는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던 각 지방 단위의 징모와 군량 공출, 영주 자의에 따른 연대제를 폐지하고 각 영주의 병력을 통합하여 전국 규모의 오스트리아군을 발족시켰는데 그 수는 108,000명이었고 이 수는 하우크비츠가 제시한 것과도 일치했다. 여기서 다운 백작은 오스트리아군의 복무규정과 훈련세칙을 마련했고 그것에 따라 오스트리아군을 엄격히 통솔하고자 했다. 아울러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참여하는 야영훈련도 매년 실시하여 강인한 군대를 구축하려고 했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의 실수를 다시 범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 같다. 또한 다운 백작은 리히텐슈타인 (Josef Wenzelv. Lichtenstein) 공작에게 포병대 운영을 맡겨 기존의 보조적 역할에서 벗어나 전투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끔 했다. — P.209~210
○ 출판사 서평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이자 오늘날까지도 국모로 추앙받는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계몽절대주의 체제를 처음으로 도입한 군주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최초로 의무교육 제도를 실시하여 계몽절대주의 체제를 견고히 다지고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뿐만 아니라 문화적 단일화를 구축했다. 아울러 행정, 재정, 외교 분야에서 개혁정책을 강력히 추진했고, 군제 개혁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 책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계승권을 부여한 국사조칙의 제정 원인과 그 진행 과정을 다루었다. 또한 3차에 이르는 왕위계승전쟁을 조명하며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 등 주변국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어 마리아 테레지아의 탄생 및 성장, 프란츠 슈테판과의 결혼 및 자녀 양육, 남편 프란츠 1세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아들 요제프 2세와 15년간 왕국을 통치하며 갈등을 겪은 말년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모습을 탐구하였다. 40년 동안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며 강한 결단력과 여성성을 겸비한, 위정자로서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모습을 재평가한다.

○ 언론소개 : 오스트리아의 국모, 계몽군주 마리아 테레지아 – 김장수 명예교수 신간 발간
모차르트와 클림트가 태어난 예술과 문화의 본고장, 평화를 사랑하는 영세중립국, 알프스의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청초한 에델바이스. 오스트리아라는 나라 이름을 들었을 때 대체로 떠올리는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한때 유럽의 절반을 차지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양대 본거지 가운데 하나였고 다스리는 영토는 현대 독일의 2배에 달했으며 유럽의 복잡한 정치적 소용돌이 중심에 선 나라였다.
근대서양사 전문가인 김장수 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가 쓴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푸른사상)는 40년 재위 기간 내내 격동의 유럽사를 온몸으로 부대끼며 유럽의 정치지형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여왕의 생애와 정치를 다룬다. 근대서양사 연구가 영국과 프랑스, 독일에 치우친 우리나라에서 오스트리아를 본격적으로 다룬 학술서는 드문 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17년 5월 13일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오스트리아 국왕을 겸한 카를 6세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제위를 물려받을 아들을 간절히 바라던 황가였기에 마리아 테레지아 탄생은 축복받을 일은 아니었다. 바로 그 전해 아들인 레오폴트 요한이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죽은 터였다.
부황 카를 6세는 결과적으로는 딸 셋밖에 얻지 못하지만 아들을 볼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국가행정이나 법률·군사 제도, 정치에 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 레오폴트 1세, 아버지 카를 6세와 마찬가지로 마리아 테레지아도 일찍부터 음악과 춤, 연기 등에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종종 현기증에 시달리는 등 건강 상태는 그리 양호하지 못해 부모의 걱정을 자아냈다.
장차 오스트리아 왕국의 왕위 계승자가 될 수도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은 전 유럽의 관심사였다. 왕가의 결혼은 영토의 합병으로 이어져 유럽의 세력 판도를 바꾸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로트링엔 (프랑스어로는 로렌) 대공국 왕자인 프란츠 슈테판이 신랑감으로 낙점됐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를 본 뒤 단숨에 사랑에 빠졌다.
프란츠 슈테판은 마리아 테레지아를 얻기 위해 로트링엔 통치권을 포기해야 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둘은 1736년 화려한 예식과 함께 부부가 됐다. 부부는 무려 16명의 자녀를 얻게 된다. 성인까지 성장한 건 아들 4명과 딸 6명뿐이었지만.
막내딸 마리아 안토니아는 장차 프랑스 국왕이 될 루이 왕자와 결혼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개명한다.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를 중시해 부르봉 왕가와 정략결혼을 추진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 마리아 안토니아에게 프랑스 왕궁에서 조신할 것을 신신당부했으나 딸은 곧 어머니의 조언을 잊어버리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탐닉하게 된다. 이런 소식을 접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에게 ‘우둔한 행동’을 시정하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딸은 프랑스대혁명의 와중에 단두대에 서는 비극을 맞게 된다. 그나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다행한 점은 이 비극이 그의 사후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1740년 10월 13일 사냥을 나갔다가 급격한 복통을 일으킨 아버지 카를 6세가 1주일만에 숨지자 23세 마리아 테레지아는 73만㎢ 영토를 보유한 오스트리아 왕국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당시 임신 3개월이었던 딸의 건강을 염려해 카를 6세는 자신의 장례식에 딸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즉위는 즉각 주변국들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졌다. 당시 유럽에서는 국가의 영유권을 왕가의 사유재산으로 간주하던 터여서 한 나라의 국왕이 사망하면 혼맥으로 복잡하게 얽힌 주변국들의 상속권 주장이 정치적 분쟁이나 전쟁으로 이어지는 일이 많았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에 대해 카를 알브레흐트 바이에른 선제후가 이의를 제기했고 프랑스, 에스파냐, 스웨덴, 덴마크, 사르데냐-피에몬테, 쾰른선제후국 등이 동조했다. 무엇보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오스트리아에 위협이 된 것은 훗날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리게 되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였다. ‘필생의 라이벌’이라고 할 두 군주는 거의 재위 기간 내내 독일 지역, 나아가 유럽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을 두고 시작된 군사적 충돌은 점차 확대돼 1756년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참가하는 국제전 성격의 ‘7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모두 더는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을 정도로 국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두 나라는 후베르투스베르크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을 종결한다.
일련의 전쟁으로 오스트리아는 니더 및 오버슐레지엔, 글리츠백작령 등 상당한 영토를 잃었고 국제적 위상도 추락했다. 막대한 전쟁 경비를 갚을 길도 요원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2세의 계몽절대주의 정책에 따라 국가의 재정이 튼튼해졌고 20만명에 달하는 상비군을 갖춘 군사 강국으로 부상했다.
거듭되는 전쟁의 와중에서도 마리아 테레지아는 일련의 개혁을 단행해 오스트리아를 근대 국가로 변모시켰다. 재상으로 하우크비츠를 등용해 귀족들의 조세동의권 제한, 중앙정부의 행정권 강화, 귀족 및 성직자들의 면세특권 폐지 등 귀족들의 특권을 축소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조치를 밀어붙였다. 또 대법원을 설립하고 각 지방의 법률을 ‘테레지아 법전’으로 집대성해 법률을 일원화했다.
왕위 계승 전쟁의 패배를 교훈 삼아 군제도 개혁했다. 오스트리아는 외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 귀족들과 영방군주들이 용병을 모집하거나 군대를 구성해 대항하는 방식을 택했다. 따라서 각기 다른 영주 산하의 군대들은 무기체계와 지휘 방법이 제각각이어서 조직적인 작전 운용이 어려웠다. 일찍이 상비군 체제를 확립해 평소 고강도 훈련을 받은 프로이센 군대에 맥없이 패한 이유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 지도자 다운 백작에게 전국 규모의 상비군 창설, 복무규정과 훈련세칙 마련, 평민 출신도 입학할 수 있는 사관학교 창설 등 군 개혁을 추진하게 했다. 스스로 군대 야영훈련에 매년 참가해 강인한 군대의 구축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의사이자 계몽주의자인 스비텐을 기용해 교육 개혁도 추진했다. 학교법을 제정해 오스트리아 왕국 전역에 초급학교 및 중급학교를 설립했고 교회가 가졌던 교육 독점권을 박탈해 대학을 국가기관으로 만들었다. 빈 대학에 의학부를 설치하고 각국에서 유능한 의사들을 초빙하는 한편 의사자격시험 근간도 마련했다.
이러한 개혁이 성과를 내면서 국가재정은 건실해졌고 국정이 전반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이러한 재정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역대 국왕들이 추진했으나 성과를 보지 못한 쇤부른 궁전의 대대적인 보수 및 증축에 나서 1749년에 완공했다. 1천441개 방과 390개 홀, 149개 부엌을 갖춘 우아하면서도 소박한 바로크 양식의 쇤부른 궁전은 ‘국가를 상징하는 인물과 그의 가족들에게 걸맞은’ 왕궁이었다.
1765년 8월 사랑하던 남편이 궁중에서 쓰러진 후 바로 사망하자 크게 상심한 48세 마리아 테레지아는 “나는 이제 행복한 시절과 고별하려고 한다”고 말하고는 긴 머리칼을 자르고 화려한 옷과 보석을 모두 딸들과 궁정의 여인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후 죽을 때까지 오로지 턱까지 묶은 검정 모자에 검은 미망인 옷만 입고 살았다.
1780년 11월 초 개방마차를 타고 쇤부르크 궁전을 돌다 강한 비를 맞은 테레지아는 오한을 느끼고 자리에 드러누운 후 내내 회복되지 못했다. 11월 28일 아들이자 공동통치자인 요제프 2세에게 “신민의 복지와 빈자에 대한 지원에 특히 신경 써 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숨을 거뒀다.
그의 충만한 정의감과 따뜻한 마음을 사랑하고 찬미한 빈 시민과 오스트리아 왕국 신민 모두는 어머니이자 통치자였던 여왕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통해했다. 같은 해에 왕위에 올라 일평생 그와 대적했던 프리드리히 2세도 “여왕은 오스트리아 왕국과 합스부르크에 큰 영예를 남겼다”면서 “여왕과 긴 전쟁을 벌였지만 결코 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고 추도했다.
저자는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치세에 대해 “오스트리아 왕국에 계몽적 절대왕정 체제의 근간을 구축했고 이것은 향후 그의 아들들에 의해 더욱 확고해졌다”면서 “40년 동안 통치하면서 결단력과 여성성을 겸비하고 의무 이행과 성실성 및 도덕성을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한 군주로 군림해 오스트리아인들로부터 ‘국모’로 추앙받고 있다”고 정리했다. _ 추왕훈 기자 (연합, 20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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