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홍길복 목사의 ‘잡기장과 라틴어 인문학’ 중에서
돈 / Optimus magister bonus liber / 너무 나가지 마라! / Saxum volutum non obducitur musco / 두 번째 실패 이야기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76) _ 2020년 10월 19일
“돈”

인간과 인간의 삶을 중심한 역사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고 설켜 있습니다. 그런 복잡다단한 세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을 수 있고 또 실제 가능성도 별로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도 늘 그랬던 것처럼 저는 또 한번 바보짓을 해 보겠습니다.
서양 정신사의 기초를 놓았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은 크게 늘 두 가지 질문을 해왔습니다. 첫째는 ‘존재란 무엇인가?’ 둘째는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잡기장은 그 두 번째 물음인 가치에 대한 생각 나눔입니다.
그리스 철학의 두 기둥이었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에는 3가지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는 ‘진’ 입니다. ‘진리’ ‘참된 것’이 가치있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둘째는 ‘선’ 입니다. ‘착한 것’ ‘좋은 것’을 가치 있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셋째는 ‘미’ 입니다. ‘아름다운 것’ ‘예쁜 것’이 곧 가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후 18, 19 세기 ‘가치철학’의 시대를 거치면서 여기에 네 번째로 ‘성’ 즉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 추가 되면서 전통적 서양철학은 진, 선, 미, 성, 이 4가지를 인간과 인간공동체가 함께 추구해 나가야 할 최고의 가치개념으로 정했습니다. 19세기 말은 이런 가치철학이 서구 세계 전반에 걸쳐 널리 퍼져있었던 때였습니다. 바로 그런 시절, 그런 가치관을 지녔던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진 한국의 근대식 학교인 이화여대는 교육의 목표를 ‘진선미성’으로 정하고 학교의 뱃지에도 그 네 글자를 밝히 새겨 놓았습니다. 신교육을 통하여 한국사회를 ‘진선미성’을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는 나라로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그 무엇이나 ‘절대적인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포스트 모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전통과 가치관들은 급속하게 무너지거나 살아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진선미성’은 이화여대 뱃지에나 붙어있는 꿈 같은 장식품일 뿐이지, 우리 삶의 현실 속에서는 시궁창의 장미 취급을 받는 신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실용적인 것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실용성이 가치의 기준과 척도가 되었습니다. ‘진선미성이 밥 먹여 주냐?’고 묻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는 물론 미국적 실용주의철학과 그에 연계된 자본주의가 끼친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전통이나 문화,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나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에 실제로 도움이 되고, 우리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것을 찾고 있습니다. 결국 도달한 것은 무엇입니까? ‘돈’ 입니다. ‘물질’ 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나라와 사람에 따라 생각이나 주장이나 의견이 정말 많고 다양하지만, 그러나 하나로 완전히 통일된 것이 있습니다.
‘돈’ ‘경제’ ‘잘 먹고 잘 사는 것’ ‘물질적 풍요’는 이제 모든 인류의 공통된 이상과 꿈이요 통일된 사상이요, 목표요, 종교가 되었습니다. 간혹 그래도,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 새로운 신흥종교의 신자들은 대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위선자들아! 사람이 좀 솔직해져라!’
오랫동안 ‘돈’은 화폐니 자본이니 노동이니 금융이니 등등 여러 가지 낱말들로 바꿔 가면서 주로 경제학에서만 취급해 왔습니다. 그러나 짐멜 (George Zimmel)이 ‘돈의 철학’ (Philosophie der Gledes)을 출간한 이후 최근 하비 콕스 (Harvey Cox)가 ‘신이 된 시장’ (The Market as God)을 내놓는 사이, 이제 ‘돈 문제’는 경제학에서만 취급될 주제가 아니라 인문학에서도 핵심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인문학은 ‘돈을 돈으로 보지 않는다. 인문학은 돈을 단순히 물질이나 재화로만 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제 돈은 정치와 문화, 사회와 교육, 인간과 관계, 더 나아가 사랑과 종교, 진리와 영원의 안목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인간과 역사에서 필수불가결한 현실이 되었다는 생각이 무척 강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늘 이상과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문학 친구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선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런 당위성을 떠나, 지금 여기, 현실 속에서, 나는 진정 무엇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나요?
(추천하는 책 : 돈의 인문학, 김찬호 지음, 문학과 지성사, 2011)
라틴어 인문학 (51) _ 10월 20일
Optimus magister bonus liber.
오프티무스 마기스테르 보누스 리베르

optimus, 가장 좋은, 최고 최선, 제일 훌륭한, bonus의 최상급, 영어 best
magister, 스승, 선생, 영어로 teacher 보다는 master에 가까움, 여선생은 magistra
bonus, 좋은, 선한, 영어 good
liber, 책, 문장, 문서, 편지, 글자, 영어 literal, letter, literature
Optimus magister bonus liber.
오프티무스 마기스테르 보누스 리베르
최고의 스승은 좋은 책이다.
가장 훌륭한 스승은 아름다운 문장이다.
좋은 책이나 문장은 최고의 스승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는 ‘옵티머스’ (정확한 라틴어 발음은 ‘옵티무스’)라는 funding회사, 자산운용을 해 주는 회사가 사기 사건에 얽혀 큰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기회에 라틴어 optimus의 뜻을 찾아봅니다.
optimus, 옵프티무스란 영어에서 good의 최상급인 best로써, 가장 좋은, 최고 최상, 제일 훌륭한 이란 뜻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좋고, 위대하고, 추구하거나 자랑하거나 갖고 싶은 것은 제각기 다를 것입니다. 저희 집에선 손주들을 볼 때 마다 엄지척을 하면서 ‘최고!’ 라고 외칩니다. 우리 집의 ‘오프티무스’는 손주들 입니다.
그동안 익힌 라틴어 단어들을 떠올려 대입해 보면 어떨까요?
나의 optimus는?
Ego, 나, 나 자신이다.
Tu, 나에겐 ‘당신’이 optimus다
Amor, 난 ‘사랑’이 최고다.
Aeris, Moneta, 아니다.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인생의 Optimus다!
Veritas, 나는 ‘진리’를 따르리라!
Vita, 그렇다 ! ‘생명’이다! Vita,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Fides, ‘믿음’ ‘신앙’ ‘신념’이 인생의 optimus다!
Ancora, 나는 ‘희망’ ‘소망’ ‘바램과 기다림’ Ancora를 최고의 Optimus라고 믿는다.
라틴어 사전을 검색해 보았는데 거기에는 funding, 주식, 자산운용 같은 단어들이 나오질 않습니다. 아마 라틴어가 통용되던 시대엔 그런 것들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여튼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스승이요, 가치요, 자랑이요, 기쁨이며 내가 제일 지니고 싶은 것” “나의 Optimus는 무엇인가?”
‘옵티머스’ ‘최고의 스승’을 잘못 선택하고, 잘못 이름을 붙인 사람들을 보면서 ‘나의 optimus는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아침입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77) _ 10월 21일
“너무 나가지 마라!”
저는 오랫동안 ‘균형과 조화’ (Harmony and Balance)를 제 생각이나 삶의 중심개념으로 삼아왔습니다. 때로 저는 그것을 ‘중용’ (Moderation) 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인간과 하느님, 인간과 자연, 개인과 공동체, 동양과 서양, 여자와 남자, 옛것과 새것, 자연미와 조형미를 포함한 거의 모든 것의 조화와 균형을 꿈꾸어 왔습니다. ‘극단을 피하자’는 생각이 컸습니다. 아무리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고 성스럽게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거짓이 되고 악으로 변하게 되고 추해진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은퇴하기 전 저의 평생 직업은 기독교의 목사였습니다. 저는 주로 설교와 교육을 포함한 목회활동으로 40여년을 보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저의 중심개념인 중용, 즉 조화와 균형에 대한 제 생각과 마음씀에 따라, 저는 유신론과 무신론,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신앙과 이성, 합리주의와 신비주의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낼수 있을까 하는 데도 크게 마음을 써왔습니다. 믿음이 좋으면서도 생각이 깊고,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매사가 합리적이고, 경험적이면서도 이성적이고, 머리는 냉철하면서도 가슴은 따뜻한 “합리적 영성”의 가능성을 묻고, 토론하며, 고민해 왔습니다.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며, 고민하며 신앙의 세계로 나아가 합리적 질문을 던지며 괴로워하는 지성들은 무조건 신앙이 없다거나 믿음이 약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종교적 풍토 속에서 ‘무조건 믿는 것’ 만이 옳은 태도가 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생각하면서 믿고’ ‘고민하면서 가까이 가고’ ‘죽을 때 까지 고민만이라도 할 수 있는 자세’야 말로 보다 더 밝은 이성과 뜨거운 영성이 함께 만나게 해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말해 왔습니다. 물론 이런 것은 동양적 기질과 한국적 샤머니즘이 지배적인 한국인 신도들 사이에서는 많이 힘들고 퍽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나름 꾸준히 이 길을 걸어왔습니다. 동료나 후배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교인들을 너무 지성적으로 만들면 목회는 힘들어 집니다’ ‘목사님은 너무 이상적이야 ! 너무 진보적이야!’ 그래도 저는 인간과 하느님, 철학과 신학, 이성과 신앙, 합리성과 신비성, 신학과 과학, 프레 모던이즘 (Pre-Modernism)과 포스트 모던이즘 (Post-Modernism)이 서로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며 균형과 조화를 맟추어 가며 피차 용납하고 보완해 간다면 진리는 보다 더 가까이 오고, 생명은 훨씬 더 풍성해지고, 역사의 미래는 더 밝아질 것 이라고 믿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극단적 생각, 극단적 말, 극단적 행동, 극단적 신앙, 극단적 보수, 극단적 진보 등등, 대부분의 극단적인 것들은 결국 ‘극단적 선택’이라고 부르는 자살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피해야 할 것들입니다.
너무 나가는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고유불급입니다.
저는 오늘도 저에게 당부합니다.
제발 적당히 해라!
튀지 않도록 조심해라!
너무 나가지 말거라!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추천도서: 포스트모던 하나님 포스트모던 기독교. God and Religion in the Postmodern World, 데이빗 그리핀 저. David Ray Griffin, 강성도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라틴어 인문학 (52) _ 10월 22일
Saxum volutum non obducitur musco.

사크숨 볼루툼 논 오브두키투르 무스코
saxum, 돌, 바위, 암석, 대리석, 영어 stone
volutum, 원형 volvo (자동차 Volvo) 굴리다, 구르다, 돌리다, 딩굴다, 회전하다, 데굴데굴 구르다, 영어 roll, rolling, roll over
non, 아니다, 없다, 영어도 non
obducitur, 원형 obduco, 덮다, 숨기다, 가리다, 얻는다, 영어 obtain, gather.
musco, 원형 muscosus, 이끼, 영어 moss
Saxum volutum non obducitur musco.
사크숨 볼루툼 논 오브두키투르 무스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
원래는 기원 전 1세기에 살았던 로마의 작가이며 풍자 시인으로 알려진 푸빌릴리우스 시루스 (Pubilius Syrus)가 한 명언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마치 하나의 속담 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시루스가 남긴 단편적 명언들 중에는 잘 알려진 것들이 많습니다. ‘남은 용서하되 자기 자신은 결코 용서하지 말아라’ ‘가장 높은 곳에 오르려는 사람은 가장 낮은 곳에서 부터 출발해야한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신발을 신킬 수는 없다’ ‘늦게라도 배우는 것은 않배우는 것 보다는 낫다’
그건 그렇고 오늘의 라틴어, Saxum volutum non obducitur musco.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은 보통 두 가지로 해석하곤 했습니다.
첫째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쉬지 않고 일하며, 근면, 성실하게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은 녹슬지 않고, 먼지가 쌓이지 않으며, 이끼 처럼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고, 계속 발전하게 된다는 해석입니다.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지만 지난날 한국 사람들은 주로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각도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한 자리에 지속적으로 머물지 못하고 자꾸 움직이는 사람들, 집이나 직장이나 사업이나 종교단체 까지도 지긋하게 오래 머물러 일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구르는 돌맹이 처럼 여기며, 그런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이루어 내기가 어렵다고 본 것입니다. 구르는 돌맹이 같은 사람들은 돈도, 친구도, 신용도 얻을수 없다고 해석이 바로, Saxum volutum non obducitur musco –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우뮬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 –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musco, 영어의 moss, 우리말의 ‘이끼’를 이렇듯 녹이나 먼지처럼 않좋은 것, 없애 버려야 할 것으로 해석해 온 것과는 달리 주로 서구에서는 ‘이끼’ musco, moss를 ‘전문성’ 이나 ‘전문지식’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따라서 ‘구르는 돌처럼’ 한 자리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자꾸 직업이나 사업이나 인간관계나 환경을 바꾸는 사람은 결코 한 가지 일에 있어서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양 사람들은 이발사든, 양복을 만들든, 빵집을 하든, 심지어는 교회를 다녀도 한 교회에 대물림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몇 대에 걸쳐 빵이나 양복이나 구두를 만드는 식으로 ‘굴러다니는 돌맹이’가 되지 않어야 ‘이끼’ 같은 오래된 전문성이 쌓이게 된다는 해석 입니다.
‘한 가지 현상은 꼭 한가지로만 해석하려고 들면 않됩니다’
‘한 가지 현상도 다양하게 달리 보고 해석할 수 있음을 잊지 맙시다’ – 인문학교실에서 자주 나누었던 이야기입니다.
시대는 끊임없이 변하고 생각과 사상 역시 계속해서 변화합니다. 요즘의 젊은 세대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Saxum volutum non obducitur musco를 다시 해석합니다.
맞다! 굴러야한다! 계속해서 한자리에 오래 머물면 이끼만 낀다! 직장도, 사업도, 인간관계도 모든 것은 구르지 않고 한 자리에만 머물게 되면 전문성이 생길 수 없다!
그들은 ‘이끼’를 양면성, 이중적 의미로 해석할 줄 압니다.
Saxum volutum non obducitur musco.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Carpe diem !
Bonam fortunam !
한 가지도 다양하게 보고,
한 가지도 넓게 해석하심으로,
오늘도 풍성한 기쁨이 있으시길 빕니다.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78) _ 10월 23일
“두 번째 실패 이야기”
저는 가끔 저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해보기 위해서, 지난날 제가 썼던 글이나 일기, 혹은 제가 했던 설교문이나 기도문들을 다시 꺼내서 읽어보곤 합니다. 오늘의 잡기장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둘째로 나는 사랑에 실패한 목사이다. 나는 목회의 목적을 세우는 데 있어서도 실패했지만 목회의 실제적인 행동에서도 실패한 사람이다. 목회란 기술이 아니라 진심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오랫동안 목회란 책에서 배우고 교실에서 익히는 기술인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목회란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목회란 사랑 이상도 아니고 사랑 이하도 아니다. 목회란 사랑의 예술이다. 목회란 사랑의 연습이고 사랑의 실천이며 사랑의 확대재생산이다. 목회란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아픔을 경험하는 일이다. 목사에겐 사랑을 주어야 할 의무만 있지 사랑을 받을 권리란 전혀 없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 다른 사람의 비극과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은 목회자가 되어서는 않된다. 억울하게 죽으리라 각오한 사람만이 가는 길이 목회자의 길이다. 목회자의 모델인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하셨기 때문이다. ….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복잡하게 말할 것 없다. 예수님 처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없는 이에게는 나누어 주고, 아픈 이는 위로해주고, 억울한 사람은 편들어주는 것이다.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말고 끝까지 목적으로 대하면서 살면된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고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교회 다니는 이유는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는 능력을 얻기 위해서다. 혼자서 하기 어려운 사랑을 힘 합쳐서 같이 하기 위해서 교회라는 데를 다니는 것이다. 목회란 영원한 사랑의 연습이고 실천이다. 그런데 나는 그만 여기서 실패한 목사다. …. 목사에게는 죄의 기준이 달리 적용된다. 목사는 사랑하지 못하거나 용서하지 못하면 그게 큰 죄다. …. 사랑에 성공한 사람은 인생에 성공한 사람이고 사랑에 실패한 사람은 인생에 실패한 사람이다. 성공한 목사란 누구인가? 공부 많이 하고, 설교 잘하고, 책도 쓰고, 방송도하고, 부흥회도 자주하고, 교회를 크게 만들고, 정치에 익숙하여 총회장도 지내고, 그야말로 후배들이 ‘목사님은 목회에 성공하셨습니다. 존경합니다’ 하는 소리를 듣는 목사가 진정 성공한 목사인가? 아니다! 사랑에 성공한 목사가 성공한 목사다. 제아무리 이름을 날리고 성공한 듯이 보여도 사랑하는 데 실패한 목사는 실패한 목사이다.

나는 어떤가? 나는 확실히 실패한 목사다. ….
지난 날 나의 목회는 ‘고객관리’ 라는 차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으로 했을 뿐이다. 이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의 억울하고 가난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 까지도 내 책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괴로워 할 수 있어야 그 사람이 목사이다. 목사란 사랑에 대해 무한책임을 진 사람이다.
공동묘지에 무덤의 숫자가 늘어났다고 해서 그것을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않된다. 머릿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성공이다. 예수님은 괜찮은데 목사와 신자들 때문에, 그들이 꼭 장사하는 사람들 같애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사랑에 실패한 목사인 나 또한 할 말이 없다.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이 집현전에서 일직을 서다가 그만 잠이든 적이 있었다. 한 밤중에 세종대왕이 집현전에 들렸는데 성삼문이 자고 있는 것을 보았다. ‘깨울까? 혼을 낼까? 집현전에서 쫓아낼까?’ 잠시 생각하던 세종은 조용히 자신의 곤룡포를 벗어서 잠든 성삼문의 어깨 위에 덮어주고 나왔다. 새벽에 눈을 뜬 성삼문은 임금의 곤룡포가 자기 어깨 위에 놓여있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난 이젠 꼼짝없이 세종을 위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구나!’
너그러움과 관용, 은혜와 사랑이 성군도 만들고 충신도 얻는 첩경이다. 나는 그걸 못한 사람이다. 세례도 많이 주고, 주례도 많이 서고, 교회도 크게 만들었지만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거나 사람을 얻지는 못했다. 나는 곤룡포를 벗어 주지 못한 사람이다. 그때 그 교우에게, 그때 그 장로에게, 그 때 그 목사에게 “김선생님, 이장로님, 박목사님, 내가 다 잘못했어요. 용서하세요” 그리 말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톰 왓슨은 전 미국 PGA 투어에서 39승을 했고 메이저 대회에서만도 8차례나 우승한 골프계의 전설적 인물이다. 한 신문기자가 인터뷰를 하던 중 프로 골퍼로서 평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왓슨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PGA 투어에서 첫 우승을 한 날입니다. 게임이 끝난후 환호하는 갤러리들을 등에 두고 락커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떤 초등학생이 종이와 펜을 들고 사인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더웠고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또 흥분된 상태여서 그냥 못 본척하고 락커룸으로 들어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봐요! 왓슨씨, 이제 보니 당신 참 형편없는 사람이군요. 내 아들이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 줄도 모르는 사람이군요!’ 바로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완전히 산산조각아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 나는 배웠습니다. 아무리 골프를 잘치고 PGA에서 수십번을 우승하고 사람들에게서 인기를 얻는다 해도, 어린아이 하나가 사인 좀 해달라고 내민 손길을 무시하고, 지극히 작은 사람 하나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풀줄 모른다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난 그날 골프가 아니라 인생을 배웠습니다.”
톰 왓슨도 일찍이 배웠던 그 인생의 진리를 나는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도 미처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사랑과 섬김, 너그러움과 베품, 용서와 관용에 있어서 실패한 목사이다. 이것을 나는 ‘나의 인간적 실패’라고 이름한다. 앞에서 고백한대로 나는 ‘신학적으로 실패한 목사’이며 또 ‘인간적 실패’도 맛본 사람이다. 목회를 포함하여, 인생이란, 모두 사랑의 성패로 결정이 된다. 내 남은 인생이 얼마일지는 모르나 이제 와서 돌이키기는 그리 쉬워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후배들에게는 제발 나처럼 실패하지 말라는 말 만은 꼭 남기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출처: 호주 다아스포라 목회와 신학, 홍길복 지음, 한국장로교출판사, 2014년 중에서 ‘한인 디아스포라 목회 이야기 2 – 실패와 그 실패를 넘어서 pp 94-98에서 옮겨온 글)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좋은 주말 되시길 바라며.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3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