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42년 10월 23일,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Marcus Junius Brutus, Quintus Servilius Caepio Brutus, BC 85 ~ BC 42) 자살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또는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브루투스 (Marcus Junius Brutus, Quintus Servilius Caepio Brutus, 기원전 85년 ~ 기원전 42년 10월 23일)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인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자 중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Marcus Junius Brutus)
.출생: 기원전 85년
.사망: 기원전 42년 10월 23일 (43세), 마케도니아 필리피
.부모: 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친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양부), 모) 세르빌리아
.파벌: 옵티마테스
그의 가문은 당대 공화정 말기에 최고의 명문이라 인정받은 유니우스 가문으로, 로마 7왕중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제거하고 로마를 공화정으로 건국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후대의 이 인물을 젊은 브루투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딸 세르빌리아와 그녀의 첫번째 남편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르빌리아는 브루투스가 죽은 뒤 전남편과 같은 유니우스의 일족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재혼해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의 협력자), 유니아 프리마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의 부인, 부부 사이의 딸 세르빌리아는 아우구스투스의 약혼상대였다가 정치적 역학관계에 의해 파혼후 레피두스의 아들과 혼인하였다), 유니아 세쿤다 (삼두정치의 주역 레피두스의 부인), 유니아 테르티아 (카이사르를 암살한 카시우스의 부인) 등 1남 3녀를 두었다. 브루투스는 외숙부인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에 의해 사후입양되었고, 한동안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브루투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는 클라우디아 풀케르와 첫 번째 결혼을 하였다.
브루투스는 본인 스스로 군사적 면에서 경력을 쌓으려는 노력을 하질 않아 군사적인 능력은 동년배의 다른 귀족 청년들보다는 많이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지적 능력과 강직함으로 유명했기에 어디에서든 우습게 취급되는 위인은 아니었다. 군사적 능력이 숭상되는 당대 분위기에서 그것만으로도 높이 대우 받았다면 그 분야에서의 인정은 남들보다 훨씬 웃돌았던 건 확실하다. 거기다 플루타루코스나 당대 역사가들의 평가도 높았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생애
브루투스는 폼페이우스의 군단장과 같은 이름의 아버지와 어머니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원로원의 강직한 정치가인 카토 (소)와 이부남매 지간이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부였다.
플루타르코스는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나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다. 기원전 77년 술라의 대숙청 때 아버지가 죽고 그는 외삼촌인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에게 양자가 되어 한동안 삼촌의 이름을 썼다.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아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켜서 브루투스는 아테네, 페르가몬, 로도스 섬 등지에 유학했다.
그는 이종삼촌인 카토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처음 정치생활을 시작한 것도 카토가 키프로스의 총독으로 갈때 그를 보좌하면서 부터 시작했다.
브루투스는 키프로스에서 고리대금업으로 많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 로마로 돌아왔다.
이때 소아시아의 총독으로 있던 키케로는 그의 고리대금업을 강하게 비난했다. 로마로 돌아와서는 정계에 진출해 “원로원파” (보수적인 공화주의파벌)에 가담했다.
그는 제1차 삼두정치에 반대했는데 특히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폼페이우스를 미워했다.

– 내전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아버지의 원수이지만 지금은 원로원파를 이끌고 있는 폼페이우스의 편에 가담했다.
카이사르는 정부인 세르빌리아의 부탁을 받고 특별히 전쟁터에서 브루투스를 죽이지 말 것을 부하들에게 명령했고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군이 대패하자 포로가 된 그를 용서하고 즉시 석방하였다.
기원전 46년 삼촌 카토가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함께 북아프리카에서 카이사르와 격전을 벌일 때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호의로 갈리아 키살피나총독으로 파견되었고 무난히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갑자기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무슨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망인이 된 카토의 딸, 포르키아 카토니스와 결혼하였다.
카이사르의 밑에서 그는 계속 출세하여 기원전 44년 법무관에 임명했다.
– 카이사르 암살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고 점차 왕위를 노린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카이사르의 반대파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카이사르의 암살을 모의했고 브루투스를 그들의 중심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
아마도 삼촌인 카토와 현재의 부인인 카토의 딸 포르키아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3월 15일 브루투스는 반란자들과 함께 카이사르를 원로원 회의장에서 암살했다.
반란자들이 너무나 허둥대는 바람에 서로를 찌르기도 했고 브루투스도 손에 상처를 입었다고 전해진다.
암살 직후 브루투스는 “폭군은 죽었다! (Sic semper tyrannis)”, “자유가 회복되었다!” 고 외치며 원로원 회의장 밖으로 나왔지만 누구도 호응하지 않았다.
– 암살 이후
다음날, 브루투스는 로마 시민들을 상대로 암살의 정당성을 연설했으나 폭도로 변한 시민들과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의 위협을 받았다.
그 기세에 눌려 반란파들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타협하여 카이사르의 유지를 받들기로 하고 목숨을 부지하였다.
브루투스는 성난 군중을 피해 로마에서 달아나 이탈리아 이곳저곳으로 피해다니다가 나중에 안토니우스와 타협하여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자격으로 망명하듯 떠났다.
한편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서서히 옥타비아누스가 부상하고 있었고 그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카이사르 암살파에 대한 복수에 나섰다.
브루투스는 암살 공모자인 가이우스 카시우스와 함께 그리스에서 군사를 모집하였고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였다.
기원전 42년 마케도니아 동부에서 벌어진 두 번에 걸쳐 필리피 전투를 치렀다.
첫 전투에서는 브루투스군이 옥타비아누스군을 이겼고 안토니우스군은 카시우스를 이겼다.
카시우스는 자살하고 홀로 남은 브루투스도 두 번째 전투에서 패하자 자살했다.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의 유해를 화장하여 어머니인 세르빌리아에게 보냈다.

○ 브루투스, 너마저?
“브루투스, 너마저?” (라: Et tu, Brute?)는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친구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포함한 무리에게 암살당하면서 브루투스를 보고 외쳤다고 여겨지는 유명한 인용문이다. 흔히 믿던 상대에게 배신당하였을 때 사용되는 인용문이다.
이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우스 시저》에 나오는 대사로 잘 알려져 있으며, 정확히는 셰익스피어의 다른 희곡인 《Henry VI》에 먼저 등장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카이사르가 그러한 유언을 남겼다는 증거는 없으며,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는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일각에서는 그리스어로 “녀석, 너마저? (καὶ σύ, τέκνον)”라고 외쳤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고 쓰고 있다.
암살 직후의 상황에 대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기록된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암살이 감행된 후,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우리는 독재자를 처단했고, 자유를 수호했다”라고 외치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시민들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자 브루투스는 시민들을 모아 연설을 했다.
“카이사르가 살면 로마시민들은 노예가 될 것이고, 그가 죽으면 자유로워질 것이오! 카이사르의 용맹함과 위대함은 나도 물론 찬미하던 것이었지만, 그는 황제가 되려고 했소. 그래서 나는 눈물을 감수하고 날 아들처럼 보살펴 준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소!”
그의 연설에 대중이 조금 안정을 찾으려 하자 갑자기 상복을 입은 안토니우스가 나타나 외쳤다.
“나는 카이사르의 장례를 치르러 왔지 그를 찬양할 생각은 없지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는 로마의 노동력을 높이는데 큰 공헌을 했고, 수많은 돈을 국고에 기부했고, 사익을 위해 단돈 한푼조차 쓴 바 없으며, 가난한 이들의 편이 되어주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황제가 될 생각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안토니우스가 말을 마치자 시민들은 그 말이 옳다며 외쳤다. 그러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서를 들어보이며 “저는 도저히 이 유서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이걸 읽으면 여러분은 모두 그의 시신에 달려들어 발에 입을 맞추려 할 테니까요.” 라고 말하며 시민들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유언을 알려달라며 소리쳤다. 안토니우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시민들을 카이사르의 시신 주위로 둥글게 앉혔다.
“이곳은 카시우스에게 찔렸고, 카이사르가 사랑한 브루투스에게 찔렸습니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여기 없습니다. 그 카이사르를 브루투스가 찔렀습니다. 카이사르조차 브루투스를 보고는 얼굴을 가리고 쓰러졌으며, 그 순간, 저도 로마 시민 여러분도 모두 쓰러진 것입니다!”
안토니우스가 피투성이가 된 카이사르의 옷을 들어보이자 분노한 시민들은 살인자들을 잡으라며 소리를 질렀고 안토니우스는 그 때를 놓치지 않았다.
“유서에는 이렇게 써 있습니다. 로마 시민 전체에게 74드라크마 씩의 돈을 나누어 주라고 했으며, 자신의 별장, 과수원, 사유지를 전부 시민들의 처소로 바쳤습니다. 이런 로마의 영웅이 죽음을 맞았단 말입니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중에서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