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성령의 선물’이 필요한 이유
나는 지난주 9월 28일에서 30일까지 전주 세향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담임 목사님의 요청으로 기도 받기를 원하는 이들이 앞으로 나왔는데, 둘째 날 저녁 80명 이상, 셋째 날 저녁에는 100여 명이 넘는 성도들이 주님 앞에 섰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이곳저곳에서 방언이 터지고, 애통하는 회개의 울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안수 기도를 하는 가운데 수많은 이들이 성령의 권능 앞에 쓰러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님의 강한 임재는 단순히 감정적인 격앙을 넘어섰습니다. 참석자들은 영혼과 육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휠 체어를 타는 분이 홀로 걷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앓아왔던 통증으로부터 즉각적으로 자유로워지는 육체적 치유의 간증이 이어졌고, 깊은 우울과 중독 같은 영적인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성령님은 조명하시는 빛으로 임하셔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죄를 드러내셨고, 이는 머리로 하는 고백이 아닌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는 통회자복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환경에 상관없이 지속되는 넘치는 거룩한 기쁨과 평화가 임재 가운데 충만했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인간의 노력이나 과학적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명확한 증거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물질만능주의와 과학 기술의 발전이 극에 달한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곧 다가올 AGI (범용 인공지능) 시대에는 인공지능이 로봇의 몸을 입고 인간의 역할을 상당 부분 대체할 것입니다. AGI는 엄청난 정보를 처리하고, 노동하며, 복잡한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역설에 직면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인공지능이 완벽해진다 하더라도, 과학은 결코 성령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인공지능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영적 공허 (空虛)를 채워줄 수 없습니다. 기계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거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거나, 참된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켜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지능의 높이가 아니라, 영혼의 깊이이며, 이 영혼의 깊이를 채우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뿐입니다.
과학의 발전이 인간을 더 편리하게 만들수록, 영혼은 더욱 메마르고 고립되기 쉽습니다. AG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에, 인간이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유일한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거룩한 생명력입니다. 세향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의 불길은 바로 이 메마른 시대의 영적 필연성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이겨낼 힘과, AGI가 줄 수 없는 참된 가치를 전할 더 강력한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1장 13절)
21세기, 과학의 첨단에 서 있는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성령의 선물을 더욱 강력하게 간구하며, 이 영적 능력을 세상에 흘려보내야 할 때입니다. 성령의 불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영혼의 공허를 채우는 유일한 소망입니다. 더 성령의 선물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
양극화로 달리는 한국
한국에서 한 친구 목사님과의 대화에서, “목사님 우리 한국 사회는 너무나 양극화 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심각하게 말을 했습니다. 현 시점에서 심리학적 내면의 측면에서 한번 심도있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을 합니다.
한국 사회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성취와 최악의 사회 지표가 병존하는 ‘코리아 패러독스’라는 이중성을 안고 있습니다. 세계를 선도하는 IT 인프라, 한류 문화의 전파, 글로벌 산업 경쟁력이라는 긍정적인 지표 뒤에는,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OECD 최고 수준의 자살률 및 노인 빈곤율이라는 뼈아픈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은 단순히 경제 구조의 문제가 아닌, 국민적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강한 우월의식 (우월도)과, 그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이 겪는 구조적 열등의식 (열등도)이 충돌하는 집단 무의식의 분열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짧은 기간에 이룬 압축 성장의 동력은 식민 지배와 전쟁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 이후, 국가적 위상을 회복하고 ‘남에게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집단 무의식에서 비롯된 열등 보상 심리였습니다. 이 열등의식은 과도한 교육열과 무한 경쟁 체제를 낳았고, 이는 기술 혁신과 문화 콘텐츠 수출이라는 외향적인 성취, 즉 우월도의 형태로 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취의 기반이 외부 비교와 경쟁에 놓여 있었기에, 사회는 내부의 취약한 곳을 돌보는 대신 끊임없이 다음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강박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간략은 분석은 열등감이 외형적 성취로 나타났지만 , 반대로 내면이나 심리적인 부분에는 더 약해짐을 보여줌으로 행복지수는 더 낮아졌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러한 현상은 아시아의 강력한 도시국가로 부상한 싱가포르에서 비슷한 양상을 뛰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한 경쟁 체제의 필연적인 결과는 승자독식 구조의 고착화와 깊은 양극화입니다. 자산 불평등 심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 소득에 따른 교육 기회의 양극화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사실상 걷어찼습니다. 이 경쟁에서 밀려난 대다수의 청년 세대와 고령층은 노력해도 삶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구조적 절망감을 내면화하게 됩니다. 세계 최저 출산율과 최고 자살률은, 바로 이 집단 무의식 속에서 ‘나의 삶이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만큼 가치 있는가?’라는 질문에 부정적인 답을 내린 극한의 표현이자, 공동체가 개인의 생존과 안녕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깊은 사회적 불신의 결과입니다.
결국, 한국 사회의 양극화는 ‘강한 우월도의 외피 아래 강한 열등도가 공존’하는 분열된 정신 상태를 증명합니다. 외형적으로는 강대국이 되었지만, 내면적으로는 경쟁을 통해 덧씌운 상처만 커졌을 뿐, 진정한 사회적 연대와 상호 신뢰를 통한 ‘내면의 평온’을 구축하는 함께 뭉치는 연합에 실패했습니다. 한국 사회가 건강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외적인 성취 중심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경쟁의 논리가 아닌 공감과 연대의 논리를 통해 사회적 안전망을 복원하고, 계층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구성원의 ‘존재 가치’ 가 훼손되지 않음을 확인시켜 주는 치유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밭의 기경과 상한 심령의 치유, 그리고 사도바울이 말한 속사람의 강건 (엡 3:16)을 더욱 깊에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법사들의 성행
최근 필자는 한국을 방문하면서 재미있는 현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점을 치는 역술인들이 스스로를 ‘법사(法師)’라 칭하며 공공연하게 활동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불교계의 고승을 높여 부르던 권위 있는 칭호인 ‘법사’가 이제는 무속과 점술의 영역에서 난립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명칭의 변화는 단순한 마케팅 전략을 넘어, 우리 사회가 겪는 깊은 불안의 징후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사람들은 점을 치러 갑니다. 취업, 결혼, 사업, 투자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확실성을 찾기 어려운 현대 사회의 냉정한 현실이 사람들을 길거리의 작은 점술소나 유튜브의 영적 채널로 이끌고 있습니다. 심리학자 오토 랑크 (Otto Rank)가 언급했듯,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안한 존재입니다. 아이들이 모체와의 분리를 경험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출생 불안 (Birth Trauma)’은 인간이 근원적으로 안정된 평안을 갈망하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불안은 현대를 살아가는 대중에게 더욱 증폭되어, 잠시나마 미래에 대한 위안과 지침을 얻고자 ‘권위 있는 스승’의 이미지를 차용한 ‘법사’를 찾아 성행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제공하는 해답이 일시적인 심리적 위로일 뿐, 근원적인 영혼의 평안이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깊은 불안에 대한 진정한 해답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과거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교회는 그야말로 “성령의 새 바람”이 크게 불었던 시대를 경험했습니다. 예배당과 기도원은 기쁨과 활력으로 넘쳐났고, 성도들은 기뻐하며 춤추고 노래했습니다. 이 성령의 부어주심은 교회의 부흥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불안한 미래를 점치기 위해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행렬이 지금처럼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는 그 뜨거웠던 성령의 바람이 식어버린, 혹은 멈춰버린 듯한 ‘영적 공백기’를 겪고 있습니다. 교회의 프로그램과 조직은 건재할지 몰라도,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을 채워주던 성령의 임재를 통한 실제적인 기쁨과 확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을 맛보지 못한 성도들, 그리고 일반 대중들은 그 결핍된 기쁨과 해답 없는 불안을 채우기 위해 교회가 아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영적 멘토의 권위를 가진 듯 보이는 ‘법사’들의 세계입니다.
이는 교회가 잃어버린 “예언자적 기능”을 세상이 사이비 형태로 채우고 있는 비극적 현상입니다. 점쟁이들이 제공하는 짧은 운세 풀이는 성령이 주시는 영원한 소망과 비교할 수 없지만, 급한 마음에 임시방편으로 찾게 되는 영적 진통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정한 평안은 외부의 환경 변화나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입니다.
“법사들의 성행” 은 결국 한국 교회를 향한 준엄한 질문입니다. “교회는 지금 성도들에게 오토 랑크가 말한 그 근원적인 불안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구원의 기쁨과 성령의 평안을 제공하고 있는가?”
다시 한국 교회에 성령의 새 바람이 불어와, 형식적인 교리가 아닌 살아 있는 주의 성령이 사람들의 영혼을 기쁨과 확신으로 채울 때만이, 이 땅의 수많은 이들이 점쟁이의 문을 두드리는 행렬을 멈추고 진정한 평안의 근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 시대의 영적 멘토링 공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법사들의 성행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하고 궁극적인 대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완전히 죽어야 살립니다
필자는 정원에 조그마한 공간에 가끔씩 채소를 심으며, 자라나는 것들을 보면서 나름대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한번은 제대로 썩지도 않았던 음식물 찌그러기를 거름 삼아 채소 밑에 뭍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몇일이 지나지 않아서 밑에서 잎들이 말라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들 썩었던 음식물이 썩기 시작을 하면서 독기를 품어내기 시작해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독기의 열기로 잎이 말라 갔던 것입니다.
이 비극적인 정원의 교훈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만일 과거의 죄성 (罪性)을 가진 옛 사람 (Old Self)이 완전히 죽지 않고 우리 안에 남아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덜 썩은 거름이 독기를 품듯, 그 옛 사람은 우리 마음 밭에서 끊임없이 독가스를 품어내어 주변의 모든 관계를 시들게 하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독가스를 품는 마음 밭
예수님께서는 마음 밭의 기경 (起耕)을 강조하셨습니다. 겉모습이 아무리 거룩해 보여도, 마음의 중심이 덜 썩은 채소 찌꺼기로 가득하다면,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는 피할 수 없습니다. 이 독기는 무엇일까요?
1.내면의 독가스: 그것은 자기 의(自己義), 분노, 시기, 교만, 그리고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습관입니다. 이는 내적으로 우리 자신을 갉아먹고 평안을 빼앗습니다.
2.관계 속의 독가스: 덜 썩은 자아는 관계 속에서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 다른 이들을 공격합니다. 통제와 비판으로상대를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하고, 끊임없이 잘못을 찾아 비판하는 말의 독입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끊임없이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며 관계의 분위기를 침체시키는 독입니다. 역시쓴뿌리 인해과거의 상처를 놓아주지 않고 간직하여,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 쓰라림을 전염시키는 독입니다.
덜 썩은 거름이 잎을 말리듯, 이 독가스는 관계의 잎, 즉 사랑, 기쁨, 평화를 말려 죽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나에게서 독가스가 나온다면, 그것은 옛 사람이 죽기를 거부하고 여전히 내 삶의 주권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급진적 단언, “나는 죽었습니다”
이 심각한 영적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바울은 ‘나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고, ‘나는 죽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이미 완료된 과거형으로 단언합니다.
‘완전히 죽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단순히 옛 습관을 고치는 금욕주의적 노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자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혀 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완전히 사망 선고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선하다고 생각했던 것, 내가 의지했던 능력, 내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십자가에서 끝났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독가스를 영원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예수께서 사시지 못하고, 독가스가 나 자신과 역시 다른 사람들의 생명까지 죽입니다.

김병근 목사
시드니성시화운동 대표회장, 엠마오상담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