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순교자의 영성이란?(고전 15:31,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인간은 영혼육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능이며, 혼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 의지를 포함하는 인격의 중심이고, 육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물리적인 수단입니다. 인간은 혼과 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은 죽음입니다.

- 영성이란 무엇인가?
혼의 성품은 인성이고 영의 성품은 영성(Spirituality)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영성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인성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인성이 좋은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착하고, 정직하고, 성실하여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영성은 그러한 인격적 성숙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영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가질 수 있는 성품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고, 그 결과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지만 죽어 있습니다. 이러한 죽은 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바로 영성의 시작입니다. 이 살아난 영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점진적으로 성장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 변화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 지속되는 ‘영적 여정’입니다.
영적인 사람과 종교적인 사람은 다릅니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외적인 형식에 초점을 마춥니다. 영적인 사람은 신앙 생화를 하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종교생활을 합니다. 영성은 단순히 교회 출석이나 종교적 활동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내면에 깊이 새겨질수록, 우리의 사고방식, 가치관, 감정, 선택과 행동은 변화되어 갑니다. 영성은 외적인 종교 행위보다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성에 집중합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며, 나를 통해 그분의 성품과 능력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 깊은 영성이란 무엇인가?
깊은 영성이란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열정이나 종교적 지식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는 성숙입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말씀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여정을 강조합니다. 깊은 영성의 핵심은 성령의 충만함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온전히 임하실 때, 우리의 삶은 자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됩니다.
깊은 영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깊은 영성은 개인적인 경건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깊은 영성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단순히 종교적인 직분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깊은 영성을 가진 사람은 고난과 시련 중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깊은 영성을 가진 사람은 공동체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살아가도록 이끕니다. 깊은 영성을 가진 사람은 매일의 작은 순간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그분의 뜻을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깊은 영성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안테나를 높이 올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 순교자의 영성이란 무엇인가?
순교자의 영성은 깊은 영성의 궁극적인 표현으로, 믿음의 극치를 보여주는 개념입니다. 순교자의 영성이란 매일의 삶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하며,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세상에 속한 나입니다. 육에 속한 나, 옛 사람인 나, 겉 사람인 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종욕 이생의 자랑을 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육의 사람인 나는 죽고, 영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겉 사람인 나는 죽고 속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옛 사람인 나는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는 죽고 내 안의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하며, 철저한 자기부정과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표현합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있습니다. 평양의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친구들에게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 죽었다.” 어느 날 길에서 친구가 그를 보고 놀랬습니다. 친구는 술 한잔하러 가자고 말했습니다. 김익두는 약을 먹고 술을 끊었다고 했습니다. 친구가 무슨 약을 먹었냐고 묻자, 김익두는 대답했습니다. “신약과 구약을 먹고 끊었다. 너도 먹어봐”
누가복음 24장 48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부여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증인이란 헬라어 ‘마르투스’는 순교자란 뜻입니다. 개인의 신앙도 지키기 힘든 상황에서 순교자 영성이 없으면 증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에도 순교자의 영성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공산 정권이나 이슬람 지역, 종교가 탄압받는 지역에서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신앙을 지켜냅니다. 순교자의 영성은 영웅적인 한순간의 결단이라기보다, 매일 반복되는 작고 충실한 결단의 연속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인은 십자가의 예수를 ‘행복한 예수’라고 묘사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 죽을 만큼 사랑하는 우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가장 소중한 목숨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수는 있지만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언젠가는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순간이 오면 살았던 삶에 대해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오늘 영성, 깊은 영성, 그리고 순교자의 영성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혼의 성품은 인성이고 영의 성품은 영성(Spirituality)입니다. 영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가질 수 있는 성품입니다. 깊은 영성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는 삶, 말씀과 기도 속에서 날마다 자신을 비우고 주님으로 채워지는 삶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열심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과 내면의 성숙을 말합니다.
순교자의 영성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타협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기꺼이 손해 보고, 고난을 감수하며, 심지어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영성입니다.

이야기로 풀어보는 교리의 형성사
기독교가 태동한 이후, 교회는 복음의 확산과 함께 수많은 질문과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그는 참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피조물인가? 성령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은 어떤 관계인가? 마리아는 단지 인간 예수의 어머니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낳은 어머니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한 철학적 호기심을 넘어서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과 신앙의 기초를 위협하는 문제였습니다. 이처럼 교회의 근본을 뒤흔드는 사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교부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로마 황제들까지도 나서게 되었고, 이에 따라 총 일곱 차례의 에큐메니컬 공의회가 열리게 됩니다.
이 일곱 차례의 공의회는 단지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한 사건이 아니라, 초대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기도하며, 분열과 화해를 반복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교회가 어떻게 오늘날의 신앙 고백과 교리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첫 번째 이야기: 니케아 공의회 (325년)
이야기는 4세기 초, 로마 제국이 아직 기독교를 공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소아시아의 니케아라는 도시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성직자 아리우스는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 번째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주장은 순식간에 제국 전역으로 퍼졌고, 교회 안팎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교인들 간의 분열은 심각해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폭동까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제는 교회의 분열이 제국의 안정을 해친다고 판단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 지도자 300여 명을 한자리에 소집합니다. 그곳이 바로 니케아였고, 325년 이 회의에서 교회는 역사상 첫 공식 신경, 즉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 본질을 지닌 참 하나님이시다(ὁμοούσιος)”라는 고백은, 삼위일체 교리의 출발점이자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결정적인 선언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381년)
니케아 공의회가 끝난 후에도 논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성령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불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일부는 성령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나 영향력 정도로 여겼고, 또 다른 일부는 성령을 인정하되 그 본질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에서 두 번째 에큐메니컬 공의회가 열립니다. 이번 공의회에서는 성령에 관한 신앙 고백이 정립되었고, 니케아 신경에 이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는 성령을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성부와 (성자? Filioque)로부터 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라 선언하며, 삼위일체 교리가 본격적으로 완성되기에 이릅니다.
세 번째 이야기: 에페소스 공의회 (431년)
시간이 흐르고 5세기 초, 또 다른 신학적 혼란이 교회를 흔들게 됩니다. 이번에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과연 어떻게 결합되었는지를 두고 벌어진 논쟁입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가 아니라, 인간 예수의 어머니(Christotokos)”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곧 예수 안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었고,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431년, 에페소스에서 열린 공의회에서는 이 문제를 다루었고, 교회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공인합니다. 이는 단지 마리아에 대한 존경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셨다는 교리의 핵심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위격적 일치를 강조하는 기독론을 정립합니다.
네 번째 이야기: 칼케돈 공의회 (451년)
20년 후, 또 다른 극단적 주장이 등장합니다. 에우티케스라는 수도원장이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섞여 신성만 남게 되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는 ‘단성론’으로 불리며, 예수의 인간성을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견해였습니다.
451년, 칼케돈에서 열린 공의회에서는 이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역사적으로 가장 정밀하고 균형 잡힌 기독론 선언, 즉 ‘칼케돈 신조’가 채택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존재하며, 그 두 본성은 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고, 나뉘지 않는다”는 고백은 이후 모든 정통 기독론의 기준이 됩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553년)
하지만 여전히 교회 내에는 단성론과 네스토리우스주의의 여운이 남아 있었습니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논쟁을 종결짓고자 또 한 번의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553년에 열린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세 장서(Three Chapters)’로 불리는 네스토리우스 추종자들의 저작을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하고, 칼케돈 신조를 더욱 확고히 다지는 역할을 합니다.
여섯 번째 이야기: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680–681년)
7세기에 들어, 또 다른 형태의 기독론 논쟁이 발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는 ‘의지가 하나냐, 두 개냐?’라는 질문이 제기된 것입니다. 일부는 ‘그분께는 신적 의지 하나만 있다’고 주장했고, 이는 인간적 선택과 고뇌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680년부터 681년까지 열린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그리스도께는 두 의지—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가 존재한다는 이중의지론(Dyothelitism)을 공식화합니다. 이는 그분의 인성과 신성이 각각의 의지로 작용하면서도 하나의 위격 안에서 일치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결정이었습니다.
일곱 번째 이야기: 제2차 니케아 공의회 (787년)
마지막으로 8세기 후반, 교회는 ‘성화 사용’ 문제로 다시 큰 분열을 겪게 됩니다. 일부 황제들은 성화가 우상숭배라고 판단하여 파괴 운동을 지지했고, 반면에 많은 수도자들과 성직자들은 성화가 신앙의 시각적 도구로서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공의회는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공의회는 성화는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공경의 대상이며,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로써 성화 공경의 신학적 토대가 마련되었고, 동방 정교회는 이후 예배의 일환으로 성화를 계속 사용하게 됩니다.
결말: 이야기의 계속
이처럼 초대 교회의 일곱 대공의회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교회가 자기 신앙을 지키고 가르치기 위해 흘린 눈물과 땀의 결정체였습니다. 각 공의회는 신앙의 본질적인 질문들에 대해 공동체가 함께 고민하고 하나의 목소리로 답한 역사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신조, 예배의 형식, 교회 내 교리의 뿌리는 바로 이 이야기 속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우리는 과거의 공의회들을 기억함으로써 오늘의 신앙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숙제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히브리서 12:22-24)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를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학교의 숙제를 하듯이, 혹은 회사의 업무를 수행하듯이 예배에 참여합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무기력한 마음으로 예배에 나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배를 그런 부담스러운 의무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예배는 부담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예배는 복종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예배는 숙제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시간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념하는 기쁨의 축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억지로 형식적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기쁨과 감사로 그분 앞에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은 3가지의 관점에서 예배가 왜 축제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의 축제입니다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좋은 만남을 통해서 닫혔던 문이 열리는 사람도 있고, 악연을 통해서 열렸던 문도 닫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좌충우돌 성지순례’는 배낭을 매고 5개국을 여행하고 쓴 책입니다. 원래의 계획은 사도바울의 유적지인 터키와 그리스만을 가려고 했습니다. 아테네에서 민박을 하던 선생님 가족을 만났습니다. 두 분다 현직 교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교사를 그만두고 대안학교를 만들기 위하여 세계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만날 때 이미 10개월간의 가족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녀가 3인데 큰 딸이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녀는 고민 끝에 자퇴를 하고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가 모든 계획을 세웠으나 10개월이 지난 그때는 큰딸이 계획을 세워서 이동할 정도로 성숙했습니다. 저는 그 학생의 제안으로 이집트를 가게 되었고, 이집트 시내산에서 베트남 선교사를 만나,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여행을 마치고 여행에 대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인생은 여행이고, 여행은 만남이다. 길을 걸으며 오늘의 사람을 만나고, 유적지를 방문하여 어제의 사람을 만나서,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내일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인생에는 다양한 만남이 있지만 가장 위대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의 축제입니다. 시편 122편 1절에서 “사람들이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다”는 말씀처럼,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나아가는 설렘과 기쁨의 자리입니다. 신앙의 연수가 쌓이며 쌓일수록 교회 생활이 익숙해져서 예배의 감격이 사라지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의 익숙함이 감격을 잃어버린 무료함이 되고, 나가서 익숙함이 무례함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많은 예배 중에 또 한번의 예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받을 은혜가 있고,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광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신 잔치 자리입니다. 우리는 초대받은 손님이며, 하나님께서 기쁘게 우리를 맞이하시는 주인이십니다.
느헤미야서 8장 10절에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며 준비하지 못한 자와 나누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축제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뻐하는 자리이니,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을 다해 찬양하고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 예배는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우주적 축제입니다.
축제는 본질적으로 혼자서 즐기는 것이 아닌, 여럿이 함께 모여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적 사건입니다. 예배 또한 개인적인 신앙 고백을 넘어서서, 믿음의 가족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높이는 시간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고전 12:27)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체로서 서로 연결된 한 몸입니다. 우리는 한 몸으로서의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히브리서 12장 22~24절에는 우리가 예배할 때, 하늘에 있는 수많은 천사들과 이미 하나님 곁에 있는 신앙의 선배들, 그리고 예수님과도 함께하는 거룩한 예배에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함께 연결된 아주 특별한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공동체가 모여 하나님께 드리는, 하늘과 연결된 거룩한 축제입니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온 산,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은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와 그가 뿌리신 피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해 줍니다.”
신약 성경에서 저자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책은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신약 성경의 책 중 하나입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제사 제도와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음을 강조하며, 예수님이 완전한 대제사장이자 새 언약의 중보자임을 설명합니다. 또한, 구약의 희생 제사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며,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율법의 시내산”(히 12:18-21)과 신약의 “은혜의 시온산”(히 12: 22-24)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시내산은 모세조차도 두렵고 떨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가는 은혜의 시온산은 축제의 장소입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천사와 예수님, 하늘에 등록된 장자 하나님, 의인의 영들이 함께 모인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과 새 언약의 피로 완성된 천상의 예배에 동참하는 신비를 선포합니다. 예배는 개인적 경건을 넘어,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하늘과 땅의 경계를 넘어 함께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우주적 축제’입니다.
- 예배는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는 감사의 축제입니다.
기독교 예배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죄 사함과 새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예배는 지금 이 순간 우리 삶 속에 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며, 죄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로서의 삶을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이 축제를 통해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옮겨지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예배는 구원의 감사를 표현되는 시간입니다. 시편 118:21 –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우리는 예배 안에서 복음을 다시 듣고, 그 복음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깊이 되새기며, 새로운 힘과 소망을 얻습니다.
하비 콕스(Harvey Cox)는 현대 신학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예배의 축제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예배를 하나의 살아 있는 사건으로 이해하며, 이를 세 가지 교회 모델로 상징화하였다.
첫째 출애굽기의 교회는 자유를 지향하는 교회입니다. 출애굽기의 교회는 애굽의 억압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해방된 사건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둘째 시편의 교회는 감사와 축제가 있는 교회입니다. 시편에는 인간이 겪는 다양한 감정들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그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히브리성경을 ‘타나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사람들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토라와 예언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인간이 살고서 고백한 글이 케투빔입니다. 케투빔은 성문서로서 대표적인 책이 시편입니다.
셋째 계시록의 교회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하는 교회 계시록의 교회는 고난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와 회복을 바라보며 소망을 품는 공동체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고,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소망을 갖게 되었기에 오늘을 감사와 축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특권을 의무로 전락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는 부담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복종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복종은 강압적인 것이지만, 순종은 자발적인 것입니다. 예배는 숙제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축제의 자리에서 숙제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