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신앙은 시선이다
지난 화요일 11월 18일, 2025년 마지막 ALT 모임이 콜라로이의 ‘버터 박스 카페’에서 열렸습니다. 이번 모임은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와 교제를 나누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특별히 지역관인 스티브는 정성스럽고 직접 만든 작은 쿠키와 성구를 준비하여 참석한 모든 이들과 나누며 자리를 더욱 빛나게 했습니다. 저는 이곳에 온 것은 개인으로 온것이 아니라 구세군 채스우드 교회의 담임사관으로 왔으니, 이 말씀은 개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교회에 주는 말씀으로 알고 오늘 설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잠언 3:26절과 살후 3:3절입니다.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오늘의 본문을 의지하여 ‘신앙은 시선이다’라는 제목으로 피차 간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이 흔들리는 이유는 흔들리는 세상에 시선을 두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늘 변하고 불안정합니다. 상황은 예고 없이 바뀌고, 사람의 마음도 하루아침에 달라지며, 우리가 붙잡고 있던 계획과 기대도 쉽게 무너집니다. 어제는 든든하다고 여겼던 것이 오늘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어제는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길이 오늘은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 변하는 것에 마음을 두고 바라보면 우리 역시 그 불안정함을 그대로 닮아 요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약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의지한 대상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을 예수님께 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소망도, 우리의 사랑도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사람은 변해도, 세상은 바뀌어도, 주님의 사랑과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파도처럼 요동치지만 주님은 반석처럼 변함없으십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시며(히 13:8),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사람은 변해도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상황은 뒤집혀도 주님의 뜻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민 23:19)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내가 만들어 내는 힘이 아니라 예수를 바라볼 때 예수께서 내 안에서 일으키시는 생명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 주님은 우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의 흔들림이 사라져서 평안한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세상 한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주님을 바라보기에 견고해집니다.

- 시선의 전환
신앙은 시선의 전환입니다. 잠언은 “여호와는 네 의지할 이시니라”(잠 3:26)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의지한다’는 것은 삶의 중심과 기대를 어디에 두느냐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지할 곳을 찾습니다. 문제는 그 의지처가 무엇이냐입니다. 우리의 기대와 의지, 우리의 시선이 세상에 머물 때 우리는 결국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본질적으로 변하고, 우리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요소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칭찬과 인정은 순간에 불과하고, 성공과 성취도 영원한 보장이 되지 못합니다. 건강도, 돈도, 관계도, 심지어 내 마음의 의지도 언제든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의지하는 마음은 결국 불안과 두려움을 낳습니다.
회개란 바로 이 시선의 전환입니다. 단순한 감정의 후회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결단입니다. 세상을 향하던 눈을 돌려 주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붙들고 있던 기준을 바꾸고, 내 인생의 중심을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일이 회개입니다. 내가 안전하다고 믿던 것에서 손을 떼고, 나를 참으로 안전하게 하시는 분께 마음을 옮기는 일이 회개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마 14:28–31). 밤중에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무서워 떨고 있을 때, 주님은 물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고, 주님이 “오라” 하시자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물이 단단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 베드로의 시선이 주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의 말씀을 붙들 때, 베드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길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순간 두려워져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손을 내밀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라고 꾸짖었습니다. 파도가 더 세져서가 아닙니다. 바람이 갑자기 생겨서가 아닙니다. 시선이 주님에게서 세상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에서 눈이 떨어지는 순간, 마음이 두려움에 붙잡히고, 그 두려움이 베드로를 가라앉게 했습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는 담대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면 두려움에 빠집니다.
우리의 삶에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아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바람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때 믿음이 하는 결정적 선택은 바람보다 크신 주님을 바라보는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은 주시지 않고, 시험당할 때에 반드시 피할 길을 예비하십니다.
성경은 수없이 우리에게 시선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너희는 위의 것을 찾으라”(골 3:1),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이땅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는 우리가 땅의 현실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땅의 현실에 붙들린 시선을 풀고 위로부터 오는 생명과 소망으로 옮기라는 초대입니다. 세상의 불안정함과 사람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 시선의 고정
시선을 주님께 돌렸다면, 믿음은 이제 그 시선을 계속 기울여 고정하는 길로 자랍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살후 3:3)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다, 믿을 만하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믿음의 중심이 ‘우리의 신실함’이 아니라 ‘주님의 신실하심’에 있음을 명확히 합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을 자기 의지의 강도로 측정하곤 합니다. “내가 얼마나 흔들리지 않느냐, 내가 얼마나 결단했느냐, 내가 얼마나 꾸준하냐”로 믿음을 재단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의 근거를 우리의 결심보다 훨씬 깊은 곳에 두고 있습니다.
박영선 목사의 『하나님의 열심』은 그의 대표작으로, 신앙의 본질을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풀어낸 설교집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빚어낸 결과임을 강조합니다. 이사야 9:7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변하지 않고 반드시 약속을 성취합니다.
지난 주 아는 목사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삶의 여건이 그렇게 좋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평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뿌리를 자신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에게 두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결심이나 힘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직 신실하신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믿음이 강해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합니다. 감정이 흔들리고, 환경이 무너지고, 예상치 못한 고난이 찾아올 때 믿음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할까?” 하고 스스로를 정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강해질 때만 함께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약할 때 더욱 가까이 오시는 분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사 42:3)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작은 믿음도 끝까지 살려 내십니다.
우리가 흔들릴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굳건히 세우십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주님께 뿌리내릴 때 굳건해집니다. 신앙의 길은 ‘자기 강화’가 아니라 ‘하나님 신뢰’의 길입니다. 내 안에서 ‘자아 실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과 성품 위에 마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시선을 고정하는 일은 우리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다시 주님께 붙들어 매시는 은혜의 과정입니다. 말씀을 가까이할수록 주님이 선명해지고, 기도할수록 주님을 향한 신뢰가 깊어지며, 예배할수록 우리의 시선은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재정렬됩니다. 특히 말씀은 우리 시선을 교정하는 거울과 같습니다. 세상의 소음이 커질수록, 말씀은 “너는 누구를 바라보고 있느냐?”고 조용히 되묻습니다. 기도는 흔들리는 시선을 다시 주님께 돌리는 숨이며, 예배는 그 시선을 공동체 안에서 다시 고정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시선을 고정한다는 것은 단지 한 번의 감동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매일의 선택이고, 반복되는 훈련이며, 은혜의 누적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주님을 바라보고, 하루의 갈피에서 주님께 마음을 묶고, 밤에 하루를 정리하며 다시 주님께 시선을 두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의 흔들림 속에서도 점점 더 단단해집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실하심을 바라보는 시선이 오래 머물수록 우리의 영혼은 안정된 중심을 회복합니다.

- 시선의 결실
시선은 결실로 드러납니다. 잠언은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신다”(잠 3:26)고 말씀하고, 데살로니가는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3)고 약속합니다. 이 두 약속은 주님께 시선을 둔 사람에게 나타나는 실제적인 열매를 보여 줍니다. 믿음은 마음 속에서만 맴도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확인되는 열매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국 우리의 걸음과 선택, 그리고 인생의 방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시선을 주님께 고정할 때, 주님은 우리의 걸음을 보호하시고 악한 자의 손길에서 지켜 주십니다. 삶의 길이 언제나 평탄해서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길에는 시험과 유혹, 예상치 못한 고비가 찾아옵니다. 때로는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지고, 때로는 발밑이 무너지는 듯한 순간도 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 순간마다 주님의 손에 붙들려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주님은 길을 잃지 않게 하시고, 넘어져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하시며, 결국 주님이 뜻하신 자리로 인도해 주십니다. 넘어짐이 없는 삶이 아니라, 넘어져도 끝나지 않는 삶이 은혜의 열매입니다. 넘어진 자가 실패한 자가 아니라 일어나기를 포기한 자가 실패한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는 삶에는 평안이 자라고, 두려움이 줄어들며, 넘어져도 회복이 빨라지고, 무엇이 길인지 무엇이 유혹인지 더 선명히 보이는 은혜가 나타납니다. 시선이 주님의 사랑에 머물면 마음은 점점 넓어지고, 시선이 주님의 진리에 머물면 생각은 점점 맑아지며, 시선이 주님의 약속에 머물면 미래는 점점 소망으로 채워집니다. 결국 믿음의 결실은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 마음의 중심이 단단해지는 것, 그리고 위기 속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능력이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인생은 잔잔한 호수가 아니라 거친 바다와 같다. 인생은 푸른초장 맑은 시냇물가가 아닐 광야와 같다. 우리의 민수기는 히브리 성경의 제목은 ‘베 미드바르’라고 합니다. 베미드바르는 ‘광야에서’ 혹은 ‘사막 속에서’라는 뜻을 가지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 아래 떠돌았던 광야를 지칭합니다. 미드바르와 다바르와 드비르는 어원이 같습니다. 미드바르는 광야이고, 다바르는 말씀이고 드비르는 지성소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곳입니다.
이 광야의 시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순히 고난의 연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그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훈련과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특히, 광야에서의 매일의 만나와 구름 기둥, 불 기둥의 인도는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친밀한 공급을 상징합니다.
시선을 전환하여 흔들리는 세상에서 반석이신 주님에게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시선을 신실하신 주님께 고정하여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주님과 함께 걸을 때, 우리는 보호와 평안을 누리며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복 있는 책, 요한 계시록 (계 1:1-3)
‘요한계시록’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무엇입니까? 어떤 분들은 어렵다고 느끼고, 어떤 분들은 마지막 재앙, 짐승의 표, 전쟁과 같은 이미지 때문에 두려움을 먼저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왠지 가까이하기 힘든 책, 함부로 읽었다가 이상한 해석에 빠질 것 같은 책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요한 계시록의 많은 상징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로 유배되었을 때, 에베소에서 남서쪽으로 약 90km 떨어진 지중해의 작은 섬인 밧모섬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원어는 ‘Apokalypsis’로, 묵시입니다. 묵시는 주로 환상, 상징, 비밀스러운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고난받는 공동체에게 종말의 소망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가톨릭은 문학적 성격을 강조해 ‘묵시록’이라 부르고, 개신교는 신학적 의미를 강조해 ‘계시록’이라 부릅니다. 묵시는 계시의 한 형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방식 중 하나가 묵시입니다. 구약의 묵시문학은 상징과 환상을 통해 계시를 전달했고, 신약의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계시를 묵시적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묵시는 제한된 장르적 표현이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더 큰 틀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의 서론인 1장 1–3절은 이 책의 성격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우리를 겁주기 위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누가 역사의 주인이며, 결국 어떤 결말을 향해 역사가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심으로, 이 계시의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는 책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짧은 세 구절 속에 담긴 세 가지 큰 메시지를 따라가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모습을 가진 성도, 어떤 모습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둘째는 요한의 증언의 책, 셋째는 복 있는 책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절)
먼저 1절은 이 책이 어떤 성격을 가진 책인지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표현은, 이 책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계시이자, 예수님 자신에 관한 계시이기도 하다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성경공부 베드로전서를 배웠습니다. 외부의 핍박과 내부의 이단으로 고난을 받고있는 교인들에게 베드로는 ‘산 소망’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산 소망이란 현실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소망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5:13절에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소망의 하나님’이란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인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소망이란 뜻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편 39:7)
‘계시’라는 말은 원래 “가려져 있던 것을 열어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커튼으로 가려져 있던 무대를 한순간에 열어 보이듯이, 보이지 않던 세계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보며 살아갑니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정치와 경제 이야기, 전쟁과 갈등, 기후 위기와 사회적 불안 같은 것들이 우리의 시선을 압도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 마음 밑바닥에는 “이 세상이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과연 소망이 있는가”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자리 잡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열어 보여 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리고 계신가?”, “역사의 마지막 결말은 누구의 손에 있는가?”를 분명히 보게 됩니다.
1절은 또한 이 계시가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었는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시고, 예수께서 천사를 보내시고, 천사가 요한에게 알리고, 요한이 그 종들, 곧 교회에게 전합니다. 이 긴 전달 경로는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강조입니다. 이 말씀은 어느 개인의 사상이나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권위 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종교 지도자가 자기의 철학과 견해를 적어 내려간 영적 수필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셨고, 천사를 통해 사도 요한에게 전달하신 공식 문서입니다.
또한 1절은 이 계시가 주어진 목적도 분명히 말합니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속히”라는 표현은 시계를 보면서 “곧, 당장”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더 깊이 보면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고, 그 완성이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것을 “보이시려고” 하신다는 점입니다. 숨기시려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 두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알려 주시고 준비시키시고 깨어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의 기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마다 시간관이 다릅니다. 기독교는 선형적 시간관을, 불교, 힌두교는 순환적 시간관을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시간을 직선으로 보고 있지만, 불교는 시간을 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시간관은 창조- 타락- 구원 – 종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 요한의 증언의 책(2절)
이어서 2절은 이 계시를 받아 기록한 요한이 어떤 태도로 이 말씀을 전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증언하였다”는 표현입니다. 증언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꾸미거나 보태는 것이 아니라, 본 대로, 들은 대로, 사실대로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자신의 생각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하여 기록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충실하게 전달한 증인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로마 제국의 박해 아래에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황제를 주로 인정하라는 로마의 요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예수의 주권을 선포하고, 장차 황제가 아니라 어린양 예수께서 역사를 심판하시고 다스리신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자신이 본 것을 모두 증언했습니다. 보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았지만, 본 것은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절제와 용기가 함께 있는 증언입니다.
사도행전 1:8절의 증인이 되라고 했습니다. ‘증인’이란 단어인 헬라어 ‘마르투스’는 ‘순교자’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증인이 된다는 것은 죽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교 공동체’입니다. 선교는 순교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선교’이고, 교회가 세상을 닮아가는 것은 ‘세속화’입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성령공동체’이고 ‘증인 공동체’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예수님게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The Great Commission)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중심적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기에 성령을 받지 않으면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 다 도망갔던 제자들이 어떻게 변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증인이 되었습니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단지 놀라운 환상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목숨 걸고 증언한 요한의 증언입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너도 내 증인이 되어라”라고 부르십니다.

- 복 있는 책(3절)
마지막으로 3절은 요한계시록을 대하는 성도의 태도와 그 결과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많은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저주와 심판의 책”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부터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요한계시록 전체에는 일곱 번의 “복 있는 자” 선언이 나오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이 책을 통해 성도들을 겁주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시고, 위로하시고, 깨어 살게 하시려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은 독자와 공동체에게 주어지는 일곱 가지 복을 선언합니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 지키는 공동체가 누리는 종말론적 약속입니다.
1.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의 복 (1:3) → 계시록 전체의 서문에서 이미 “복 있는 책”임을 밝힘. 2.죽은 자 가운데서 주 안에서 죽는 자의 복 (14:13) → 순교와 신실한 믿음을 끝까지 지킨 자의 안식. 3.깨어 자기 옷을 지키는 자의 복 (16:15)
→ 영적 경계와 정결을 유지하는 자의 보호. 4.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의 복 (19:9) → 종말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은혜. 5.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의 복 (20:6) → 둘째 사망(영원한 심판)이 그들을 해하지 못함. 6.계시록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 (22:7) → 말씀을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자. 7.생명나무에 참여할 권세를 얻는 자의 복 (22:14) →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복락.
3절은 복이 있는 사람을 세 부류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의 공동체를 세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읽는 자”가 있습니다. 당시 교회 예배에서는 한 사람이 앞에 서서 성경을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설교자와 인도자의 역할입니다. 이어서 “듣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는 함께 모여 그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회중, 곧 성도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머리로만 알고 끝내지 않고, 실제 삶 속에서 순종으로 옮기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지난 금요일에 히브리서 13:16절을 묵상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제사’는 단지 제도적 예배가 아니라, 삶 전체를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찬양과 기도뿐 아니라, 선행과 나눔이 곧 예배라는 선언입니다. 히브리어 ‘아보다(avodah)’는 ‘일’, ‘섬김’, ‘예배’라는 세 가지 의미가 담긴 단어입니다. ‘아보다’는 예배가 단지 의식이 아니라, 삶 전체를 드리는 태도임을 말합니다.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삶의 예배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행할 때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3절의 마지막 표현, “때가 가까움이라”는 말 역시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여기서 때는 ‘카이로스’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의 시간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시계 속에 있는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마음 속에 있는 시간입니다. 크로노스는 양적이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입니다. 크로노스는 수평적인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수직적인 시간입니다. 크로노스는 땅의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하늘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크로노스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 시간을 만들며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땅의 시간 속에서 하늘의 시간을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시간은 시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마음이 바쁜 사람은 시간도 바쁘고,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은 시간도 여유롭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본 요한계시록 1:1–3은 세 가지 사실을 우리 마음에 새기게 합니다. 첫째,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 되십니다. 계시록의 중심에는 언제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둘째, 요한계시록은 요한의 증언의 책입니다. 요한은 죽음을 불사하고 본 것을 증언한 종이었습니다. 셋째, 요한 계시록은 복 있는 책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때가 가까운 이 시대에, 말씀을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내려는 성도가 진정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게 이렇게 초대하십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초대에 응답하여, 우리 모두가 읽고, 듣고, 지키는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교회로 서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카뮈의 부조리(Absurde)
삶은 원래부터 부조리한 것이다. 고난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은 처음부터 공평하지 않다. 그러니 부조리 속에서 삶을 긍정하며 살아라.
고난에는 의미가 없다. 의미없는 고난은 없다.
주님,
고난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절망이 아니라 기도가 되게 하소서.
고난의 밤이 길어질수록 주님을 향한 기도가 깊어지게 하소서.
기도가 주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시고, 그 만남이 기쁨의 찬송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사람은 누구나 고난과 기쁨 사이를 오가며 삽니다.
고난은 외로움이나 절망으로 빠지기 쉬운 시간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를 기도로 인도하여,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하고, 기쁨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