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진 목사 칼럼

던바의 수 (Dunbar’s Number) [1]
현대 사회학이나 조직론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입니다.
1. 정의: “우리가 진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한계치”
영국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 (Robin Dunbar) 교수가 제안한 개념입니다. 한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고, 그와 나와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인격적으로 파악하며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최대 150명이라는 법칙입니다.
.기준: 단순히 얼굴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저 사람이 누구와 친하고, 지금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스쳐 지나가다 만나도 기억해낼 수 있는 수준의 관계를 뜻합니다.
2. 왜 하필 150명인가? (뇌의 용량과 관계)
던바 교수는 영장류의 뇌 크기 (대뇌피질)와 그들이 이루는 집단의 크기를 연구했습니다.
인간의 뇌 용량으로 계산해 보니, 우리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최적의 집단 크기가 147.8명 (약 150명)으로 나온 것입니다.
즉, 우리의 뇌가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의 용량에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3. 역사적·사회적 증거들
놀랍게도 인류 역사 속에서 ‘효율적이고 끈끈한 집단’은 늘 150명 내외였습니다.
.원시 부족: 전 세계 수렵 채집 부족들의 평균 마을 인구는 약 150명이었습니다.
.군대 조직: 로마 군대의 기본 단위나 현대 군대의 ‘중대’ 규모도 보통 150명 내외로 유지됩니다. 지휘관이 부대원 개개인의 성향과 능력을 다 파악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기 때문입니다.
.아미시 공동체: 미국의 아미시 (Amish) 사람들은 마을 인구가 150명을 넘으면 공동체를 분리하여 새로운 마을을 만듭니다. 그 이상이 되면 서로를 통제하거나 돌볼 수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4. 교회론에 적용해본 ‘던바의 수’
“대형 교회의 위압감과 이질감”은 이 숫자를 넘어서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150명 이하 (가족 같은 공동체): 누가 아픈지, 누구네 집에 경사가 있는지 다 압니다. 이사야 58장의 말씀처럼 “심정이 동하는” 실천이 가능합니다.
.150명 이상 (조직과 시스템): 얼굴은 알지만 사정은 모릅니다. 이때부터는 ‘인격’이 아니라 ‘관리’가 필요해집니다. 비서실이 생기고, 목사와 성도가 격리되는 시점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대형 교회 (관객과 공연자): 숫자가 천 단위, 만 단위가 되면 뇌는 더 이상 그들을 ‘형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군중’이나 ‘타인’으로 인식합니다. 이때부터 성도는 ‘녹아지는 소금’이 아니라 ‘구경하는 관객’이 됩니다.
던바의 수 (Dunbar’s Number) [2]
● 목회의 적절한 수는 얼마일까요?
던바의 수 (Dunbar’s Number) 150명은 ‘한 개인이 맺을 수 있는 전체 관계의 총합’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 지인 150명, 친구 150명, 직장 동료 150명을 각각 가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내 삶에 들어와 있는 모든 그룹을 통틀어 우리가 ‘안정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대치’가 약 150명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교인 100명과 깊은 유대감을 갖고 목회한다면, 나머지 사회적 관계 (가족, 친구, 동료 등)에 할당할 수 있는 여유분은 50명 남짓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 그러면 목회의 적절한 수는 얼마일까요?
75명의 법칙: 일부 연구에서는 목사가 심방하고, 상담하며, 일상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숫자를 75명 내외로 봅니다. 어떤 전도학 교수님은 40명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밀착 돌봄 / 50~70명 / 모든 교인의 사정을 깊이 파악 가능
.인격적 인지 한계 / 150명 / 목사가 얼굴과 이름을 매칭할 수 있는 마지노선
.조직적 관리 / 200명 이상 / 시스템과 소그룹 리더를 통해서만 돌봄 가능
● 교인이 적절한 돌봄의 한계치를 넘어서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품질 (돌봄)의 저하: 식당에 손님이 너무 많으면 서비스가 엉망이 되듯, 교인이 감당 안 되게 많아지면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고 상처받는 이들이 방치됩니다.
.메시지의 타협: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듣기 좋은 말만 하거나 진정한 변화보다 위로에만 치중하는 ‘마케팅적 설교’를 하게 될 유혹에 빠집니다.
.소진 (Burnout): 목회자 개인의 ‘던바의 수’를 초과한 인원은 결국 목회자의 영적, 정신적 소진을 불러옵니다.
● 무서운 전염병처럼 만연되어 있는 대형화 추구는 다음과 같은 현상을 초래합니다.
1. ‘목양’이 아닌 ‘마케팅’의 지배, 즉 비즈니스적 사고가 작동하게 됩니다.
.교인의 도구화: 성도를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교회를 키우기 위한 ‘일꾼’이나 ‘자원’으로 보게 됩니다.
.투자 대비 효율: 에너지가 많이 드는 ‘아픈 양’을 돌보기보다,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유능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선별적 목회가 나타납니다.
2. ‘현재’가 없는 징검다리 목회
.장사하는 사람이 오늘 번 돈으로 내일 더 큰 가게를 차릴 생각만 하듯, 성장 지향적 목회자는 ‘지금 여기’에 있는 교인들과의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안식의 부재: 현재의 공동체에 만족하지 못하니 목회자 스스로 늘 조급하고 불안합니다. 그 불안은 고스란히 교인들에게 “더 전도하라, 더 헌신하라”는 압박으로 전달됩니다.
.관계의 결핍: 교인은 목사님과 마음을 나누고 싶어 왔는데, 목사님은 더 큰 건물을 짓거나 숫자를 채우는 ‘프로젝트’에만 몰두해 있어 정작 정서적 지지와 영적 돌봄은 공백 상태가 됩니다.
3. 소형 교회의 축복을 인식하지 못하는 비극
소형 교회는 그 한계치 안에서 최고의 밀도를 만들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인데 이 축복을 버리고 비즈니스 모델을 따르게 될 때 다음과 같은 모순에 부딪치게 됩니다.
.시스템의 조기 도입: 30명밖에 안 되는 교회에서 대형 교회의 행정 시스템을 흉내 내느라 인격적 관계 대신 서류와 보고 중심의 딱딱한 조직이 되어버립니다.
.공동체의 해체: 가족 같은 끈끈함이 소형 교회의 최대 장점인데, 숫자를 늘리려다 보니 기존 교인들이 소외감을 느끼고 떠나가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 운영이 반복됩니다.
● ‘전염병’처럼 번진 대형화의 욕망
한국 사회의 고도성장기와 맞물려 교회 안에도 ‘성장=축복=능력’이라는 등식이 신앙의 공식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생존의 공포: 임대료와 유지비를 감당해야 하는 개척 교회의 현실에서 숫자는 곧 존립의 문제입니다.
.비교와 명예욕: 목회자 그룹 내에서도 교회 크기가 계급이 되고, ‘성공한 목회’의 척도가 교인 수로 치환되면서 목회자들은 끊임없는 열등감과 과시욕 사이에서 중독되어 갑니다.
● ‘목자’는 사라지고 ‘CEO’만 남은 현실
대형화 추구 속에서 목회자는 더 이상 양의 이름을 부르는 목자가 아닙니다.
대형 교회 목사를 초빙하여 집회를 하고 목회자 세미나를 하지만, 목회 세미나가 아니라 목회 기업 운영 세미나입니다.
.관객과 연출자: 교인은 목양의 대상이 아니라 주일 예배라는 ‘쇼’를 채워주는 관객이 되고, 목사는 그 무대를 화려하게 만드는 연출자가 됩니다.
.서류상의 양들: 교인은 데이터베이스 속의 숫자로 관리될 뿐, 그들의 삶에 묻은 먼지와 상처를 닦아주는 목자의 손길은 시스템 (부교역자나 소그룹 리더) 뒤로 숨어버립니다.
● 슬픔 너머의 대안: ‘작음’의 영성
이 전염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근 일부에서는 ‘탈성장’과 ‘작은 교회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장이 아닌 성숙: 숫자가 늘어나면 기꺼이 교회를 분립하여, 목사 한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안에서 관계의 밀도를 유지하려는 시도입니다.
.흩어지는 교회: 모이는 숫자에 집착하지 않고, 교인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가도록 파송하는 구조입니다.
결론: ‘작음’의 가치를 잃어버린 시대
“작은 교회는 큰 교회로 가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성된 가치를 지닙니다. 대형화된 조직 속에서 작은 자는 무시됩니다. 교회의 존재 의미는 상실되고 세속화의 앞잡이가 되는 위험에 노출됩니다. 대형화의 욕망이 목회자의 영성을 철저하게 오염시키고 교회를 무너뜨렸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강조하신 작은 자로 돌아갈 때입니다.

이상진 목사 (시드니소망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