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경 목사 칼럼

동반자 경험 (Companionship Experience), 이민자의 나침판
몇 해 전,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던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혼자서 정상에 오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경험 많은 가이드의 권유로 현지 동반자와 함께 길을 나서게 되었다. 산행 도중, 눈길에 발을 헛디뎌 절벽 가까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순간, 그는 속수무책이었고, 만약 그대로 추락했다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의 곁에 있던 동반자가 재빨리 손을 붙잡아 끌어올려 주어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정상에 오르고 난 후, 그 청년은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고백했다. ‘오늘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동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였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동반자라는 말은 참 아름다운 단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동반자란 단순히 옆에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함께 걷고, 존재를 나누며, 삶을 서로 지탱하는 관계를 담고 있기에 철학가, 시인, 사색가들에게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이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참된 친구는 또 하나의 자아(alter ego)이다. 친구는 삶의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이다’라고 말한다.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는 ‘나와 너 (Ich und Du, 1923)’에서 ‘인간은 ‘너’를 통해 자신이 ‘나’임을 알게 된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는 인간이 독립된 자아가 아니라, 언제나 ‘너’라는 동반적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된다고 설명한 말이다.
현대 사회는 동반자적 삶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가치를 삶의 현장에서 외면하는 모습을 보인다. 유행처럼 번지는 ‘황혼 이혼’과 ‘졸혼’이라는 말과 나 홀로족 또는 일본의 히키코모리란 말이 그 상징적 단면이다. 황혼 이혼은 인생의 석양 무렵, 서로를 오랫동안 동반해 온 부부가 관계의 끈을 끊어내는 현상을 가리키며, 졸혼은 법적으로 이혼하지는 않지만, 결혼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살겠다는 선언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유와 자율의 표현 같지만, 그 이면에는 동반자로서의 피로, 소통의 단절, 그리고 관계를 지탱할 정서적 근육의 약화가 깔려 있다.
이민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땅은 어쩌면 동반자의 의미를 잃어버린 대표적인 현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그리고 서로 다른 배경에서 오는 차이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러운 거리를 만들어 낸다. 그 속에서 이민자들은 종종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며, 그 경험은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누군가 가까이 다가올 때, 본능적으로 따뜻한 동반자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경계하며 믿지 못하는 태도가 먼저 자리를 잡는다. “혹시 또다시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혹은 내 연약함을 드러냈을 때 이용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결국 진정한 동반자의 자리를 열어 주지 못한 채, 고립 속에서 스스로 지키려는 방어적 삶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동반자가 필요한 이들이 바로 이민자들이다. 고독하고 낯선 길 위에서 손 내밀어 함께 걸어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은 한결 덜 무겁고, 마음은 다시 희망을 향해 열리게 될 것이다. 동반자의 부재가 만든 불신의 장벽이 허물어질 때, 비로소 이민자의 삶은 상처를 넘어 새로운 관계와 회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동반자 위기는 단순히 부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관계 구조가 흔들리고 있음을 드러낸다. 스마트폰으로 비롯한 개인주의 심화와 SNS가 관계를 대신하고 있으며 경쟁적 생존구조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타인’이 되어 간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은 깊은 동반자적 경험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비교와 소외를 키워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관계적 존재’다. 동반자를 포기하는 순간,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진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형태의 동반자적 삶에 대한 성찰과 회복의 문화이다. 그것은 단순히 결혼제도를 유지하자는 구호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본질적 질문이다. 이민 사회에서도, 고국에서도, 진정한 동반자는 서로를 자유롭게 하면서도 책임으로 묶어 주는 존재다. 그 관계가 바로 인생의 나침판이며, 우리의 마음이 향해야 할 진정한 ‘귀향의 길’이다. 동반자를 잃은 사회는 겉으로는 자유와 독립을 강조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깊은 고독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인간관계 위기, 황혼 이혼, 졸혼, 히키코모리 등의 사회현상은 동반자의 얼굴을 외면한 시대의 징후이다. 우리는 여전히 함께 있으나, 서로를 보지 않는다. 스마트폰 화면에 가려진 얼굴, 경쟁에 가려진 마음속에서 “타자의 얼굴” 즉 동반자는 사라진다. 임마누엘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는 일은 곧 동반자의 회복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관계적 인간 존재”의 회복이기도 하다.

박만경 목사
(시드니 우림 교회 담임, Iona Trinity College 상담학 교수, Ph.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