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역사로서 나타난 계시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 대한기독교서회 / 1979.10.10
이 책 속에 실린 연구 내용은 1960년 10월에 가진 신학 강습회에서 처음으로 발표된 것으로, 다소 수정되긴 했지만, 발표 당시의 원형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논문들은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의 상호보완에서 출발했으며 이러한 방식에서 문제에 관한 공통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서론적 강의에서는 주석학적으로 채택되고, 증명된 개괄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두 개의 성서신학 논문들은 방법론적으로 상이하게 전개된다.
구약성서 강의는 개념적 접근방법에 더 의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쩌면 전승사적 보충을 여전히 요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와 반면에 신약성서 강의는 “계시”를 다른 말로 표현하려는 개념적 접근 및 연구를 강조하기 보다는 계시의 원시기독교적 이해에 관한 전승사적 방법을 시도한다.
균형있는 강의는 두가지 방법이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자는 상호보총되기 때문이다.
전체 논문형식에 있어서 조직신학 강의가 점유하는 위치는 모든 문제가 주제에 관해 균형을 취한다고 해서 그러한 형태로만 취급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듯 하다.
결론적 강의는 교회개념과 계시문제 사이의 관계를 평가한다.
○ 목차
머리말
저자의 머리말
영어판 서문
Ⅰ. 서론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W.Pannenberg)
Ⅱ. 고대 이스라엘의 계시 관념 롤프 렌토르프(Rolf Rendtorff)
Ⅲ. 원시기독교사에 나타난 계시 이해 빌켄스 (Ulrich Wilckens)
Ⅳ. 계시교리에 관한 교의학적 주제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V. 교회개념 안의 계시문제 트루쯔 렌토르프(Trutz Rendtorff)
○ 저자소개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Wolfhart Pannenberg, 1928 ~ 2014)
1928년 10월 2일 독일 슈테틴 (현재 폴란드의 슈테친)에서 세무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루터교에서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유년기에는 기독교에 적대적인 부모로 인해 신앙생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18세 무렵 강한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후에 그는 이 체험을 “빛 체험”이라 불렀다. 그는 이런 체험을 학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철학자들과 종교 사상가들의 다양한 책을 읽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문학 교사의 권유로 기독교를 깊이 탐구하여 “지성적 회심”에 이르렀으며, 그 결과 기독교가 최선의 종교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어린 시절 클래식 음악에 심취하여 피아니스트나 혹은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과 같은 지휘자가 되고 싶었다. 그는 15세 때 도서관에서 니체의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전쟁을 경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인으로 전쟁의 끝에 가담하게 되면서 결국 전쟁포로로 1945년 여름을 맞았다. 포로 생활 이후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 1946년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후 1947년 베를린대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베를린대학교에서 3학년을 마치고 1950년 여름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계속 공부하였다. 그는 교의학과 관련된 많은 신학 서적들을 읽었으며, 성서 해석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철학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는 1953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둔스 스코투스의 예정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958년 부퍼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1958 ~ 1961)로 3년 뒤에는 마인츠대학교 (1961 ~ 1968)로 옮겨 교의학을 강의했다. 1963년 시카고 대학에 초빙되어 교환교수로만 한 학기를 머물렀다. 그리고 1968년 뮌헨대학교 교수 (1968 ~ 1994)로 초빙되어 은퇴할 때까지 강의했다.
판넨베르크의 계시 사상은 K. 바르트와 역사를 정신과 자유가 계시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헤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역사가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헤겔의 역사관을 그대로 수용하는 한편,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기적 (proleptic) 사건이며 역사는 그 예기적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견해는 강한 바르트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물론 불트만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도 강한 비판을 받았다. 헤겔좌파, 마르크스와 에른스트 블로흐에게 철학적 뿌리를 가지는 몰트만도 은연중에 판텐베르크를 비판했다.
저서로서는 ‘역사로서의 계시’ (1961), ‘예수, 신과 인간’ (1964), ‘신학과 하나님의 나라’ (1969), ‘신학적 관점에서의 인간론’ (1983), ‘조직신학’ 1-3권 (1988 ~ 1993), ‘신학과 철학’ (1996), ‘유비와 계시’ (2007) 등이 있다.
– 역자 : 전경연
일본 동경신대 졸업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대학원 신학석사 미국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박사 한신대 교수 및 대학원장 현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저서로 ‘로마서 연구’ ‘원시 기독교와 바울’ ‘고린도서신의 신학논제’ ‘예수의 부활’ ‘로마서 신학’ 등, 주석서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주석과 신학’ 등, 그외 다수의 역가 있다.
○ 출판사 서평
W. 판넨베르크의 ‘역사로서 나타난 계시’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고대 이스라엘의 계시 관념, 롤프 렌토르프, 원시 기독교사에 나타난 계시 이해 등이 수록되어 있다.
○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해석학
- 역사로서 나타난 계시
판넨베르크는 바르트의 하나님 말씀의 신학과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 사이의 딜렘마를 극복하기 위한 제3의 길로서 다시금 역사의 범주를 신학의 주제로 새롭게 부각시켰다 그는 변증법 신학자들의 역사와는 괴리된 이원론적이고 배타적인 계시관을 배격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거나 역사적 현실에서 유리된 것이라면 그것은 공허다가 마찬가지로 역사적 근거와 내용을 갖지 못한 케리그마는 허구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케리그만는 세계의 역사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업적을 선포하는것 이외에 다른 것일수가 없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1961년에 그의 동료들과 함께 ‘역사로서 계시’라고 이름붙힌 심포지엄 책자를 출판하였다 이 제목 가운데서 계시와 역사라는 두 단어를 연결시키는 ‘로서’ (als)라는 연결사가 중요한 의미를가지고 있다. 계시는 단지 역사 ‘안에서’ 혹은 역사를 ‘통해서’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 ‘로서’ 온다는 것이다.
바르트나 불트만은 역사에 대한 과학적, 비판적 연구가 구속 사건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위한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계시에 대한 신앙적, 신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역사적 현실과 그에 대한 비판적 접근으로부터 도피해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판넨베르크는 ‘역사로서의 계시’에서 – 특히 IV부 계시교리에 관한 교의학적 주제 – 계시론에 관한 일곱가지의 명제를 제시하였다.
이 일곱가지의 명제는 다음과 같다
1) 성서적 증언에서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신의 현현이라는 의미의 직접적 형태가 아니라, 간접적 형태로서 하나님의 역사 행위에 의하여 발생한다.
판넨베르크는 출14:18의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야 애굽사람들이 나를 야웨인줄 알리라’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그 신성의 간접계시라고 표현을 한다.
그는 언급하기를, ‘이것은 갈대 바다의 통과에 대한 제의적 수정이다. 단어 속에서는그렇게 표현되었다고 할지라도 야웨께서 그의 역사행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그 행위 속에서 그의 신성의 간접적 계시를 지적하는 표현임이 분명하다(출 16:6). 이러한 점에서 현재적 사실을 구원과 심판 안에서 미래적으로 표현하는 묵시적 희망 역시 분명히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따라서 묵시신학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는 종말사건까지 계속되며, 여기에서 선택의 구원이 계시된다.’
2) 계시는 역사의 시초에서부터 완전히 이해되지 않고, 계시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 완전히 이해된다.
‘하나님의 표현을 역사의 종말에다 설정하는 것은 성서적 하나님이 이른바 그 자신의 역사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 계시사건이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는 외형적 길로서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역사 과정 역시 본질상 하나님의 계시에 속한다.’
3) 하나님의 특별한 나타나심과는 달리 역사적 계시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개방되어 있다. 역사적 계시는 보편적 성격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선포는그 선포를 듣는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의 생애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4) 하나님의 신성의 보편적 계시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나사렛 예수의 생애에서 비로서 실현되었으며, 모든 역사의 종말은 그의 생애 안에서 예기적으로 미리나타났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예수의 생애에서 가리워진 하나님으로 계시되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가리워짐과 초월성은 이해할 수 없는 철학적 신 개념의 기준을 넘어선다. 위에서 언급한 이유를 근거하여 보건데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부활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자기계시임이 분명하다.’
5) 그리스도 사건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계시와 다른 독립된 사건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일부분이다.
6) 예수의 운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종말론적 자기 계시의 普遍性은 이방기독교회의 비유대교적 계시사상의 형식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7) 말씀은 약속, 예언 및 보도로서 계시와 관련된다.
(1) 약속으로서의하나님 말씀
(2) 예언으로서의 하나님 말씀
(3) 선포로서의 하나님의말씀
- 보편사적 해석학
여기에서 다룰 문제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이라는 면에서 해석학적 동기를, 그리고 이성과 종말이라는 해석학적 원리를 갖고 있는 판넨베르크의 신학 안에 어떤 해석학적 내용이 특징적으로 놓여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물론 그는 쉴라이에흐마허, 딜타이, 하이덱거, 불트만, 가다머, 그리고 푹스나 에벌링에 이르는 해석학적 전통가운데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한다. 이른바 ‘보편사적 해석학’이다.
1) 실존론적 해석학의 지향
판넨베르크는 신학의 해석학적 과업을 축소시킨 두 가지 전통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 하나는 ‘사이비 정통주의 언어학’이며, 다른 하나는 소위 ‘실존론적 해석’으로서 판넨베르크가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상이다. 실존론적 해석학은 역사를 현재적 실존으로 용해시켜 버림으로써 참된 현실성에 도달할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는 ‘쉴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의 정신적 해석학에서 처럼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은 과거에 대한 현재적 의미를 찾음에 있어서 전승된 본문에 표현된 인간에 대한 질문 안으로 축소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불트만의 해석학을 판넨베르크는 ‘인간론적 축소’라고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인간 현존의 가능성애 대한 질문은 그 명료화를 위해서 세계, 사회, 그리고 이 양측에서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으로 항상 되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인간이 자신에 대한 질문의 대답을 세계와 사회와 역사와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같이 기대할 수 없는 것은아닌가? 그렇다면 자기 이해는 선행하는 세계 이해에 대한 열망없이, 그리고 당연한 의미에서 선행하는 하나님 이해없이 주제화 되어질 수 없다.’
이처럼 판넨베르크는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이 인간의 주관적 이해에 머물고 말기 때문에 참된 이해에 도달될 수 없다고 판단하는데, 불트만에게서 제기된 실존론적 해석학의 문제들이 소위 해석학파라고 불리우는 푹스와 에벨링에 의해 발전되어 나간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들을 불트만과 같은 해석학적 범주에 놓고 평가하고자 한다.
판넨베르크는 역사가 實存으로 상실되는 실존론적 해석학의 한계를 가다머의 ‘지평융해’ 개념에 근거해서 극복하고자 한다.
가다머에 의하면, 해석학적 순환에있어서 이해란 ‘전승의 운동과 해석자의 운동의 교환관계’인데 여기에서 중요하게 기능하는 것은 이른바 전승사와 영향사이다. 과거의 본문지평은 오늘의 지평 역사에 어떠한 방법일지라도 전승되어 있으며, 또한 영향을 미치고있기 때문에 본문지평을 제외한 상태에서 오늘의 지명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가다머는 서로 다른 지평이 융해되려면 당연히 실존론적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며, 오히려 역사적 이해를 통하여 그 현실성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크는 가다머의 지평융해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겠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추려 본다면, 판넨베르크는 역사의 전승개념을 간과한 실존적 해석학이 역사를 하나의 역사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역사가 개인의 실존에서 단절될 뿐이기 때문에 더이상 참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러한 실존적 해석학의 극복은 역사를 하나로 이해하는 전승사로서 가능하다고 본다. 이 전승사적 해석학은 신학적 해석학에도 적용되는 방법으로써 다음에 다루게 될 보편사 개념에서 더욱 확실한 판넨베르크의 해석학적 특징으로 확대된다.
2) 보편사적 해석학으로서의 정향
실존론적 해석학이 상실한 역사의 회복은 전승사적 역사의 단일성 가운데서 가능하다고 본 판넨베르크는 가다머의 지평융해 개념을 통해 그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는 전승사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보편사 개념을 통해 가다머의 해석학을 극복하고자 한다. 우선판넨베르크가 어떻게 가다머의 해석학적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본문의 지평과 현재의 지평이 만나 새로운 지평을 형성하게 된다는 가다머는 불행하게도 역사적 관점으로부터 언어과정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다머에게 있어서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건을 다른 이에게 표상화시켜는 대화 상대자나 본문이 문제가 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사건 이 자체를 언어화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본문의 사건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언설 (Aussage)이다. 가다머에 의하면 이 언설을 명확히 함에 있어서 보편사는 언급되지 않는 것을 추상화시키기 때문에 ‘언설안에서 본래적으로 언급되어야 할 것의 의미지평이 방법적 엄밀성으로 숨어버린다.’ 따라서 가다머는 보편사적 해석학을거부하고 언어적 개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볼 때 가다머가 언어성으로 빠져든 이유는 역사를 통해 현재적 진리를 헤겔식으로 중재하려는 시도를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헤겔의 보편사 개념은 미래의 우연성을 무시하고 일반적인 것 아래서 개체의 의미를 간과하고 있음이 사실이기 때문에 가다머가 지평융해 개념을 보편사에서가 아니라 언어성에서 찾으려고 했다는 점을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철학의 과업과 보편사적 신학이 포기되어 질 수 없다고 판넨베르크는 확신한다.
과거의 지평과 현재의 지평이 미래의 지평에서 통전화 된다고 보는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해석학은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역사의 종말론적 이해, 그리고 예수의 부활사건이 가리키고 있는 종말의 선취 구조 가운데서 그 기초를 형성한다. 모든 세계와 역사가 온전히 드러나게 될 종말의 전망, 그 미래적 존재론이야 말로 역사의 의미를 온전히 밝혀줄 수 있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선취된 성취, 역사의 완성은 새로운 약속을 뜻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약속의 성취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 일어났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일어난 성취는단지 잠정적인 성격을 가지며, 새로운 약속을 뜻하게 된다. 하나님은 예수의 운명 속에서 자기를 궁극적으로 계시하면서도 우리에게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래는 아직도 개방되어 있고 가능성이 충만하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해석학은 쉴라이에르마허로부터 이해의 기술로서 취급된 해석학적 신학의 흐름을 수용하면서 말씀의 해석학과 실존적 해석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참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본문과 해석자의 지평이 현재적 실존으로 해소되는 것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간격이 고유하게 보존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전승사 개념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단일성 안에서 보고자 하는 이 전승사 개념은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전체 역사 사고인 보편사에서 확장되어 그의 역사신학을 구성하는데 기여한다.
판넨베르크는 가다머의 지평융해 개념에서 실존적인 해석학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점을 찾고 있을뿐만 아니라, 동시에 가다머의 언어 과정이라는 언어 존재론적 해석학을 비판하면서 헤겔의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자신의 보편사적 해석학의 구도를 만들어 가고있다.
* 참고문헌
윤철호 교수 글모음집.
역사로서 나타난 계시, 판넨베르크, 복음주의 신학총서 제23권, 1992.
역사와 종말, 조성노, 현대신학연구소, 1992.
말씀신학과 역사신학-판넨베르크의 계시론을 중심으로, 정용섭, 한국신학연구소, 1995.
신학적해석학 (제1차 학술발표회), 호남신학대학교 해석학연구소, 1997.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