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을 통해 본 근대 중국사
1. 서론: “황금의 도시” Shanghai와 제국의 그림자
20세기 초, 중국 동해안의 항구도시 상하이는 단순한 개항지를 넘어선 세계적 문명 실험의 무대였다. 국제 자본과 외국인 거주자, 문화적 융합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며 이곳은 ‘동양의 파리 (Paris of the East)’라 불렸다.

밤마다 와이탄 (The Bund)1)의 고층 빌딩에는 전등이 꺼질 줄 몰랐고, 재즈 밴드의 선율이 클럽가를 가득 메웠으며, 은행가와 밀수업자, 외교관과 첩보원이 같은 거리에서 마주쳤다.
이곳은 아편전쟁의 잔재 위에 세워진 식민지 도시이자, 새로운 근대의 욕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주1 와이탄 <The Bund>은 중국 상하이의 황푸강 <黃浦江> 서안에 위치한 약 1.5km 길이의 강변가로, 난징조약 <1842> 이후 영국 조계 <租界>가 형성되면서 국제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와이탄 <外滩>’이라는 명칭은 ‘바깥의 둔덕’이라는 뜻으로, 당시 외국 은행, 해운회사, 무역상사, 대사관 등이 줄지어 들어서 ‘동양의 월스트리트<Eastern Wall Street>’로 불렸다. 오늘날에도 영국식, 프랑스식, 고전주의 및 아르데코 양식의 석조건축물들이 보존되어 상하이 근대건축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조나단 카우프만 (Jonathan Kaufman)은 이렇게 묘사한다.
“상하이는 이미 1930년대에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 할리우드 명사들도 상하이를 찾아 마제스틱 호텔에 머물기 시작했다.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Douglas Fairbanks)와 그의 아내 메리 픽퍼드 (Mary Pickford)가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그들은 마제스틱 호텔에서 일주일간 머물렀다.” (pp.148-149)
이 유명한 마제스틱 호텔 (The Majestic Hotel)은 다름 아닌 유대인 사업가 엘리 커두리 (Elly Kadoorie)가 세운 호텔이었다. 그는 상하이에 전력, 철도, 호텔 산업을 도입한 인물로, 사순 가문 (Sassoon family)과 더불어 유대인 상업 왕조의 양대 축을 이루었다.
커두리의 호텔은 단순한 숙박 시설이 아니라, 서구와 아시아의 명사들이 모여드는 상하이 사교계의 심장부였다. 그곳에서 열리는 무도회와 연회는 도시의 화려함을 상징했고, 상하이는 점차 세계적 유흥과 자본이 교차하는 근대적 제국의 교차로로 변모해 갔다.
이 화려한 무대의 이면에는 두 유대인 가문이 있었다. 바로 사순 (Sassoon)과 카두리 (Kadoorie) 가문인 그들이 중국에서 유대인 상업 왕조 (Commercial Dynasties of Jews)를 이루었다.

그들은 단순한 외국인 사업가가 아니라, 바그다드 (Baghdad)에서 출발해 인도 봄베이 (Bombay)를 거쳐 상하이에 이르는 제국적 자본과 디아스포라 네트워크의 정점을 형성한 인물들이었다. 이 두 가문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상하이의 경제, 문화, 사회적 흐름을 좌우하며, 서양과 중국, 유대와 동양이 얽힌 복합적 근대성의 장을 만들어냈다. 카우프만 (Kaufman)은 이들의 이야기를 <상하이의 유대인제국>에서 자세히 묘사하며, 이를 통해 근대 중국의 세계사적 얼굴을 보여준다.
2. 바그다드 유대인의 역동적 역사
이 두 유대인 가문은 바그다드에서 출발했다. 바그다드는 8세기 무슬림 아바스 왕조 (Abbasid Caliphate)의 수도였으며, 그 이전부터 이미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해 왔다.
유대인들은 이라크 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기원하며, 바빌론 유수 (BC 587) 이후부터도 그 터전을 유지했고, 바그다드는 유대인 교육과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19세기 초 바그다드 유대인 공동체는 무역, 금융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인도 무역로와 연결되면서 봄베이 캘커타 일대에 ‘바그다디 유대인 (Baghdadi Jews)’이라 불리는 무역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처럼 바그다드는 단순히 중동의 유대인 집단이 머물던 공간이 아니라, 아시아로 뻗어 나가는 상업적, 디아스포라적 통로의 출발점이었다. 오스만 제국과 영국 식민주의 하에서 유대인 상인들이 인도양, 중동, 동아시아를 잇는 무역망을 구축했고, 그것이 인도 봄베이에서 상하이로 이어지는 흐름과 연결되었다.
2.1 세파르딕 &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흐름
유대인 전체를 단일하게 이해하기보다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두 흐름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 세파르딕 (Sephardic) 유대인: 원래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 · 포르투갈) 출신으로, 15세기 스페인 추방 이후 북아프리카, 중동, 오스만 제국 영역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중동 인도양 무역로에도 관여하며, 바그다드, 봄베이, 상하이 같은 제국적 상인 네트워크의 중요한 축이었다.
• 아슈케나지 (Ashkenazi) 유대인: 동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대인 공동체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대규모 이주와 난민 흐름을 겪었다.
이 두 흐름은 서로 다른 출발과 이동 경로를 지녔으나, 상하이 같은 글로벌 도시에서는 접점을 가지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복합적 정체성과 활동 양식을 보여주었다.
2.2 바그다드의 유대인 상인 네트워크
19세기 초 오스만제국 하의 바그다드는 유대 상인 공동체의 허브였다. 이들은 인도 페르시아, 영국을 잇는 무역로를 따라 면화, 비단, 향료를 거래했고, 그중 데이비드 사순 (David Sassoon, 1792–1864)은 그 네트워크를 세계 규모로 확장했다.
영국 식민정부와 협력하며, 인도 봄베이에 ‘David Sassoon & Sons’ 회사를 설립한 그는 영국 제국의 상업적 틈새 속에서 ‘비공식적 식민자본가’로 성장했다. 그의 후손들은 자연스럽게 “아편무역–면직물–은행” 삼각체계를 통해 중국 시장에 접근했다.
사순 (Sassoon) 가문은 로스차일드 (Rothschild)가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동아시아에서 제국의 금융을 상징했다.
2.3 상하이의 개항과 유대 자본의 진입
1842년 난징조약으로 상하이가 개항되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조계지가 형성되었다. 사순 (Sassoon)의 후계자 엘리아스 사순 (Elias Sassoon)은 곧바로 상하이에 지점을 설립했다.
그들은 중국인 노동력과 서구 자본을 결합한 최초의 다국적 기업 구조를 만들었다.
카두리 가문 역시 비슷한 시기에 홍콩으로 진출했다가, 상하이로 확장했다. 엘리 카두리 (Elly Kadoorie)는 원래 사순 가문의 직원이었지만, 이후 독립해 전력, 철도, 호텔 사업을 전개하며 경쟁자로 부상한다.
상하이는 이들에게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제국의 중심이자 자유항 (Free Port)” – 즉, 제국적 자본이 제약 없이 흐르는 공간이었다.
3. 유대인 가문들의 ‘상하이 제국’
3.1. 사순 가문의 건축적 제국
1920~30년대 상하이는 이미 세계 금융가들이 몰려든 국제도시의 중심이었다. 그 중에서도 번드 (The Bund)는 유럽풍 석조건물들이 늘어선 ‘황금의 제방’으로, 영국, 미국, 프랑스의 은행과 상사들이 본거지를 두었던 곳이다. 이곳의 하이라이트이자 상하이의 상징적 건축물로 자리한 것이 케세이 호텔 (Cathay Hotel)이다.2) (주2 케세이 <Cathay>는 중세에 서양에서 중국을 일컬은 이름 중 하나로, 거란을 가리키는 ‘기탄’이나 ‘키타이’가 와전된 것이다.)
데이비드 사순 (David Sassoon)의 후손인 빅터 사순 (Sir Victor Sassoon, 1881–1961)은 홍콩의 영국계 건축사무소 Palmer & Turner Architects & Surveyors와 협업하여 아르데코 (Art Deco) 양식의 고층 건물 케세이 호텔 (Cathay Hotel – 사순 하우스: Sassoon House, 현 페어몬트 피스호텔)을 완공했다. 호텔 내부에는 프랑스산 대리석과 유럽식 샹들리에, 미국 오티스 엘리베이터 (Otis Elevator Company), 그리고 중국 장인의 자수 벽화와 자개 패널이 어우러졌다. 그는 “서양의 기술과 동양의 정취를 융합한 공간”을 구상했으며, 이 건물은 상하이 근대성이 시각적으로 구현된 대표적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Sassoon House was not merely a building but a cathedral to Western modernity.” — Kaufman, The Last Kings of Shanghai, p. 185

이 호텔의 개장은 단순한 상업적 사건을 넘어, 서구 자본이 중국의 근대화를 건축적으로 형상화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케세이 호텔은 곧 상하이 사교계의 중심지가 되었고, 각국 외교관, 은행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국제적 네트워크의 거점이 되었다.
사순 가문은 이와 같은 부동산 개발과 더불어 면직물 수출입, 은행업, 보험업을 장악하며, 동시대 언론으로부터 “상하이의 로스차일드 (The Rothschilds of Shanghai)”라 불렸다.
카우프만은 이를 두고 “사순의 제국은 건물의 형태를 빌려 자본을 시각화한 근대적 미장센이었다”고 평한다.
3.2. 카두리 가문의 산업적 제국
한편 카두리 (Kadoorie) 가문은 사순보다 실용적이고 기술 중심적이었다. 가문의 실질적 창립자인 엘리 카두리 (Elly Kadoorie, 1865–1944)는 젊은 시절 사순 가문의 회사에서 일하며 상업 감각을 익혔으나, 곧 독립하여 자본과 기술을 결합한 새로운 산업 모델을 구축했다.
그는 홍콩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 전력사업 (China Light & Power Company, 1901 설립)을 주도하며 도시의 전력망 확충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회사는 훗날 홍콩과 마카오 전력 공급의 주체로 성장했고, 현재까지 CLP Group으로 이어지고 있다.
엘리의 아들 로렌스 (Lawrence)와 호레이스 (Horace) 카두리 형제는 부친의 사업을 확장해 호텔, 금융, 보험 등으로 진출했으며, 1928 년 개관한 홍콩의 페닌슐라 호텔 (The Peninsula Hotel)은 그들의 대표작이 되었다. 이 호텔은 영국과 중국, 유럽의 상류층이 모여드는 사교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으며, 사순의 케세이 호텔이 상하이의 얼굴이었다면, 페닌슐라는 홍콩의 현대성과 호화로움의 상징이었다.

카두리 가문의 산업 제국은 “눈에 보이는 빌딩”보다 “보이지 않는 시스템” – 즉 전력, 통신, 철도, 서비스망 – 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기반은 상하이보다는 홍콩의 도시 인프라 발전에 기여했으며, 영국령 아시아 식민도시의 근대화를 이끈 실질적 동력이 되었다.
사순이 ‘보이는 제국’ (건축, 부동산)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면, 카두리는 ‘보이지 않는 제국’ (산업, 기술, 서비스)을 구축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카두리 가문은 노동자 복지와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엘리 카두리는 홍콩과 상하이에 학교를 세우고, 기술 교육을 통해 현지 노동자의 숙련도를 높이려 했다. 그의 아들 로렌스와 호레이스는 이후 카두리 가문의 자산 일부를 자선재단으로 전환해 교육, 보건, 환경 분야에 기부함으로써 “사업가이자 사회적 근대화의 후원자”로 평가받고 있다.
3.3. 제국 간의 경쟁과 상호 의존
사순과 카두리, 두 가문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미묘한 공생관계를 유지했다. 두 가문 모두 바그다드 출신의 세파르딕 유대인이었고, 영국 국적 혹은 영국령 보호 아래 활동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국의 경제질서 속에 편입되었으나, 모두 “유대인–영국인 복합 네트워크 (Jewish-British hybrid network)”의 일원이었다. 사순은 고급 부동산, 금융, 사교계의 제왕으로 군림했고, 카두리는 산업 기반, 전력, 호텔, 교통망의 제왕으로 자리했다.
이 두 가문은 상하이 유대인 공동체의 상층부를 형성하며, 자선사업과 교육, 의료 지원을 통해 공동체 내부의 결속을 강화했다.
이들의 경쟁은 종종 상하이 경제의 활력을 촉진했다. 사순이 도시의 외형과 문화적 자본을 담당했다면, 카두리는 기술적 · 산업적 토대를 담당했다. 카우프만은 “두 가문이 만들어낸 상하이는 하나의 복합체였다. 사순의 건물은 카두리의 전력으로 빛났고, 카두리의 공장은 사순의 자본으로 돌아갔다”고 요약한다.
결국 이들의 활약은 상하이를 ‘유대인 제국의 경제수도’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동서양의 자본, 기술, 문화가 뒤섞인 근대 도시 모델을 구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상하이는 그들의 손에서 “제국의 창구”이자 “근대의 실험장”으로 변모했고, 유대인 왕조의 흔적은 오늘날 와이탄의 건축물과 홍콩의 전력선, 그리고 아시아 호텔 문화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4. 난민의 도시: 리틀 비엔나, 카두리 가문과 상하이 난민 구호
4.1 유럽에서 상하이로 – 비자 없는 마지막 피난처
1938 년, 나치 독일의 ‘수정의 밤 (Kristallnacht)’3) 이후 유럽의 유대인들은 대륙 전역에서 추방과 구금을 피하기 위해 탈출을 시도했다. (주3 수정의 밤 <Kristallnacht, 1938년 11월 9–10일>’은 나치 독일 전역에서 일어난 조직적 유대인 박해 사건으로, 유대인 상점과 회당 약 7,000곳이 파괴되고 30,000명 이상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유리창이 깨져 거리가 유리 조각으로 덮인 데서 ‘수정의 밤’이라 불리며, 이 사건은 나치 정권이 반유대주의를 폭력적, 체계적 박해로 전환한 홀로코스트의 전조로 평가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는 이미 문을 걸어 잠근 상태였다. 그때 유일하게 입국 비자 없이 도착할 수 있는 도시가 상하이 (Shanghai) 였다.
국제조계, 프랑스조계, 중국 구역이 복잡하게 얽힌 ‘법적 공백지대’였던 덕분이다.

1938년부터 1941년 사이 약 18,000명의 유럽 유대인 난민이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들은 대부분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에서 온 아슈케나지 (Ashkenazi) 계통의 유대인으로, 중산층 전문직, 예술가, 음악가, 교사 등이 많았다. 그들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블라디보스토크와 일본을 거쳐 상하이에 도달했고, 이 도시는 그들에게 “마지막 남은 문 (the last open port)” 이었다. 난민들은 주로 일본 점령하의 홍커우 (Hongkou) 지역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중국 노동자, 러시아 백군 이민자, 일본군이 뒤섞여 있는 공간이었으나, 유럽 유대인들은 이곳에 ‘리틀 비엔나 (Little Vienna)’라 불릴 정도로 활기찬 문화 공동체를 세웠다. 그들은 카페, 오페라 극장, 음악학교, 신문사를 운영하며 상하이의 다문화적 풍경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심지어 클래식 연주회와 문학 살롱이 열렸고, 난민 의사와 교사들은 상하이 사회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 시기 상하이는 폭격과 점령의 긴장 속에서도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도시”, “망명자들의 마지막 항구”로 기록되고 있다.
4.2 카두리 가문 – 유대 디아스포라의 후견인
이 절망의 시기에 카두리 (Kadoorie) 가문은 상하이 유대인 공동체의 실질적 후견인으로 등장했다. 바그다드 출신의 세파르딕 (Sephardic) 유대인으로서, 엘리 카두리 (Elly Kadoorie, 1865–1944)와 그의 아들 로렌스 (Lawrence), 호레이스 (Horace)는 홍콩과 상하이를 잇는 거대 기업망을 통해 이미 지역의 대표적 자선가이자 지도층이었다. 그들은 Shanghai Jewish Relief Committee와 Joint Distribution Committee (JDC)에 자금을 지원하며 난민 정착과 생계 구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홍커우 난민지구 내 임시주거단지 (Refugee Housing Project) 건설에도 기부금을 제공했고, 전기·식량·의약품 공급을 보조했다.
Shanghai Jewish Refugees Museum의 기록에 따르면, “The Kadoorie family donated substantial funds to aid European refugees in Shanghai, financing housing and welfare projects in Hongkou district.” (上海犹太难民纪念馆 자료집, 2017, p. 43)
이처럼 카두리 가문은 재정적 후원자이자 행정적 조정자로서 구호 네트워크의 중심에 섰다.
Jonathan Kaufman도 기록한다.
“The Kadoories, who had long supported Jewish education and welfare in Shanghai, opened their purse again to help the desperate refugees pouring in from Europe.” – Kaufman, p. 158–160
당시 홍커우 일대에는 이들의 이름을 딴 “Kadoorie Quarter”라는 구역이 있을 정도였다.
카두리 형제는 병원과 학교 건립에도 자금을 냈고, 난민 아동의 교육비와 기술훈련비를 지원했다. 그들은 단순한 시혜적 기부자가 아니라,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사회적 책임을 체현한 근대 자본가”였다.
4.3 리틀 비엔나의 유산
오늘날 상하이 홍커우 지역에는 상하이 유대인 난민기념관 (Shanghai Jewish Refugees Museum)이 세워져,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당시 난민이 남긴 다국어 신문, 난민들의 여권, 학교졸업사진, 카두리 재단의 기부 영수증 등이 전시되어 있다. ‘리틀 비엔나’의 존재는 단순한 이민사 (移民史)가 아니라, 세계사적 윤리의 실험장이자, 자본과 신앙이 교차한 인간적 기록이었다. 상하이는 그 시기, 제국의 식민도시이자 동시에 인류애의 피난처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카두리 가문의 후견적 인도주의가 있었다.
5. 제국의 몰락 – 공산혁명과 두 가문의 퇴장
5.1 1940년대의 상하이: 제국의 해체와 전쟁의 끝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상하이는 다시 국제도시로 복귀했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폐허속에서, 도시의 외형은 남았으나 내부의 권력질서는 흔들렸다.
1946년부터 국공내전 (國共內戰, Nationalist–Communist Civil War)이 본격화되며, 국민당 정부의 통화개혁 실패, 인플레이션, 사회 불안으로 상하이의 상업경제는 사실상 붕괴 직전이었다. 이 시기 사순과 카두리 가문은 여전히 막대한 부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공산주의 혁명 세력의 부상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변화였다.
5.2 사순 가문 – 제국과 함께 떠난 마지막 세대
사순 가문은 1930년대까지만 해도 상하이의 금융과 사교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1941년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영국계 자산가였던 빅터 사순 (Sir Victor Sassoon)은 영국과 일본이 적대국이 되자 즉시 상하이를 떠나 인도 봄베이와 영국령 인도양 지역으로 피신했다. 전쟁 기간 그는 자산의 상당 부분을 인도, 홍콩, 런던으로 이전했고, 케세이 호텔을 비롯한 부동산은 일본군 통제하에 놓였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그가 상하이에 복귀했을 때, 그가 지배했던 번드 (The Bund)의 금융권은 이미 정치적 불안정과 중국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빅터 사순은 잠시 호텔과 부동산 운영을 재개했지만, 공산당의 세력 확대가 가시화되자 1948년 최종적으로 상하이를 떠났다.
그는 영국령 바하마로 거처를 옮기고, 이후 호텔 체인 (Cathay Hotels Company)을 정리하며 생을 마감했다.
카우프만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As Mao’s Red Army closed in on Shanghai, Victor Sassoon packed his belongings and fled. For the dynasty that once ruled Shanghai’s skyline, the revolution marked the end of empire.” – Kaufman, p. 180
결국 사순 가문의 상하이 제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그들의 부동산과 기업은 국유화되었고, 이름만 남은 ‘사순 하우스 (Sassoon House)’는 이후 ‘피스 호텔 (Peace Hotel)’로 개명되어 사회주의 상징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5.3 카두리 가문 – ‘탈출’이 아닌 ‘이전 (移轉)’의 전략
반면 카두리 (Kadoorie) 가문은 훨씬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대응을 선택했다. 엘리 카두리는 이미 1944년에 사망했고, 그의 두 아들 로렌스 (Lawrence)와 호레이스 (Horace)가 홍콩과 상하이 사업을 함께 관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1940년대 중반부터 상하이의 불안정성을 감지하고 핵심 자산 (특히 전력, 호텔, 금융)을 홍콩 중심으로 재배치했다.
홍콩은 여전히 영국령이었고, 그들의 주력 회사 China Light & Power (CLP)와 Peninsula Hotel은 이미 그곳에서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공산군이 상하이에 진입하기 직전, 카두리 형제는 대부분의 상하이 자산을 매각하거나 포기하고 홍콩으로 철수했다. 그 결과, 사순 가문이 제국과 함께 몰락한 반면, 카두리 가문은 제국 이후의 시대에서도 ‘생존한 자본’으로 남을 수 있었다.
카우프만은 이를 “제국의 두 얼굴”이라 부른다.
“The Sassoons had built the symbols of empire; the Kadoories built the systems that survived it.” – Kaufman, p. 183
이 결정은 이후 수십 년간 그들의 운명을 갈랐다. 사순 가문의 이름은 역사 속에 사라졌지만, 카두리 가문은 오늘날까지 홍콩을 대표하는 재계 명문으로 존속하고 있다. 그들의 기업 CLP Group, The Peninsula Group (Hongkong and Shanghai Hotels)은 현재도 카두리 재단 (Kadoorie Foundation)의 통제 아래 운영되며, 환경, 교육, 문화유산 보존 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5.4 공산혁명 이후의 상하이와 유대 공동체의 해체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상하이의 유대인 공동체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외국 조계지는 폐지되었고, 모든 외국자본은 국유화되었다. 유럽 난민 유대인 약 18,000명 중 대부분은 1949~1952년 사이 이스라엘, 미국, 호주 등으로 이주했다.
상하이에는 약 100명 내외의 유대인만 남았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의료인, 기술자로서 새정부에 흡수되기도 했다.
홍커우의 회당과 유대 학교들은 폐쇄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고, 사순과 카두리의 건축물은 국가 소유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 공간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상하이는 이 유산을 “다문화 도시의 기억”으로 재해석하며 관광, 문화자산으로 복원하기 시작했다.
6. 결론 – 제국의 빛과 그늘
사순과 카두리, 두 유대인 가문이 세운 상하이의 제국은 근대 세계의 빛과 그늘을 함께 품고 있다. 그들의 부와 영향력의 출발점에는 영국 제국주의의 확장과 맞물린 아편무역 (Opium Trade)이 있었다. 사순 가문은 인도 봄베이에서 아편과 면직물 무역으로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고, 카두리 가문 또한 사순 회사의 하청망 속에서 출발하여 전력, 철도, 호텔 산업으로 확장했다. 즉, 이들의 근대적 성공은 도덕적 논쟁을 동반한 제국 경제의 부산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문은 단순한 식민자본가로 머물지 않았다. 사순은 상하이에 서양식 금융과 건축문화를 도입하며 도시의 외형을 바꾸었고, 카두리는 전력과 인프라를 확충하고 교육, 구호사업에 헌신하며 근대적 복지의 씨앗을 뿌렸다. 특히 1930~40년대 유럽 유대인 난민들을 돕는 과정에서 카두리 가문은 ‘자본의 윤리’를 실천한 드문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사례를 남겼다.
1949년 공산혁명은 유대인 제국의 종말을 알렸다. 사순 가문은 상하이를 떠나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들의 사옥은 ‘피스호텔 (Peace Hotel)’로 개명되어 사회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반면 카두리 가문은 홍콩으로 거점을 옮겨 CLP Group과 The Peninsula Group을 중심으로 제국 이후의 시대를 살아남았다. 오늘날 그들의 재단은 환경, 교육, 문화유산 보존에 투자하며 ‘과거의 죄책 위에 세워진 자본’이 어떻게 인류적 책임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결국 상하이는 제국과 식민, 자본과 인도주의가 교차한 근대사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사순과 카두리의 이야기는 근대의 번영이 언제나 도덕적 모순 위에 세워졌음을, 그리고 그 모순 속에서도 인간적 윤리를 모색하려는 시도가 존재했음을 증언해준다. 그들이 남긴 호텔의 조명과 전력선은, 여전히 상하이의 밤을 밝히며 “제국 이후의 근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조용히 던지고 있다.

주경식 (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