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택 목사의 신학논단 : 천로역정강해 (제2강의)

십자가 밑에서 짐이 풀어지다
기독교 고전 가운데 천로역정 만큼 신앙의 여정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은 드물다.
이 책의 저자 John Bunyan은 신앙을 추상적인 교리 체계가 아니라, 실제로 걸어가야 하는 삶의 길로 이해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였다. “사람은 어떻게 죄의 짐에서 자유로워지는가?” 그 질문에 대한 문학적 대답이 바로 십자가 밑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기독도는 멸망의 도시를 떠난다. 그는 이미 결단했다. 성경을 읽었고, 심판의 현실을 깨달았으며, 안전한 일상을 뒤로하고 순례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등에 얹힌 짐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는다. 이 짐은 단순한 인생의 고난이 아니다. 그것은 죄의 책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자만이 느끼는 무게다.
길을 걷던 어느 날, 기독도는 한 사람을 만난다. 그는 잠시 함께 걸어주는 친절한 동행자다.

“당신은 왜 그렇게 괴로워 보이십니까?”
기독도는 한숨을 쉬며 대답한다.
“이 짐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도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렇다면 조금 쉬어가면 어떻겠습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기독도는 잠시 흔들린다.
‘혹시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닐까?’
‘이 정도 짐은 다들 지고 사는 것 아닐까?’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다시 고개를 젓는다.
“아닙니다.
이 짐은 견뎌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 말을 들은 동행자는 불편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면 이 길은 나와 맞지 않는군요.
난 여기까지만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길로 떠난다.
기독도는 홀로 남는다.
이 장면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다. 존 번연은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진실을 드러낸다.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국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죄를 짐으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까지 동행할 수 없다. 이별은 아픔이지만, 동시에 순례가 진짜 길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표지이기도 하다.
기독도는 다시 걷는다. 짐은 여전히 무겁다. 다리는 지치고, 마음은 흔들린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길 위에 십자가가 보인다. 존 번연은 이 장면을 극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놀라울 만큼 담담하다.
기독도는 말없이 십자가 앞에 선다.
“이곳이… 내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곳인가?”
그는 무릎을 꿇지도 않고, 어떤 기도도 드리지 않았다. 그저 선다. 그리고 바로 그때,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의 등에 매여 있던 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것이다. 마치 오래된 매듭이 저절로 풀리듯, 짐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떨어져 굴러갔다.
기독도는 놀라 외친다.
이럴수가 ! “내가 한 일이 아니다…
정말로, 내가 한 일이 아니다.”
짐은 언덕 아래 무덤 속으로 굴러 들어가 다시는 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천로역정』 전체의 신학적 중심을 본다. 짐은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벗겨진다.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이다.
이 지점에서 사도 바울의 말이 떠오른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가 능력인 이유는 감동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짐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죄를 없애지 못한다. 도덕은 방향을 제시하지만, 책임을 옮기지 못한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지만 용서하지 못한다. 오직 십자가만이 그 일을 한다.
천로 역정에서 말하고있는 십자가의 만남과 자유의 의미
『천로역정』의 십자가 장면은 단순한 감동적 회심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이 만남을 구원론의 결정적 중심으로 이해했고, 분명한 신학적 언어을 상징으로 설명한것이다.
1. 신학에서는 이것을 칭의 (Justification) 라고 부른다.
십자가 밑에서 기독도의 짐이 벗겨지는 사건을 청교도들은 무엇보다 칭의(Justification) 라고 불렀다.
칭의란 죄인이 점점 선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해 단번에 “의롭다”라고 선언하시는 법정적 사건이다. 중요한 점은, 이 사건이 기독도의 내적 변화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독도의 감정, 결단, 헌신이 짐을 벗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의 신분을 바꾸었다는 점이 핵심이다.
성경은 이 진리를 반복해서 증언한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시 103:12). 죄는 인간의 노력으로 처리되지 않는다. 죄는 전가(transfer)된다. 십자가는 그 전가가 실제로 일어난 자리다. 지적한것처럼 청교도 신학은 이 순간을 칭의(Justification)라고 정의했다. 칭의는 점진적 변화가 아니라, 단번에 일어나는 선언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해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사건이다.하나님이 죄인을 십자가아래서 죄인을 의롭다 선언하신것이다. 죄의 정죄 아래서 은혜 아래로 이동시킨 사건을 칭의라부른다.
2. 이 자유를 크리스찬은 양심의 자유 (Liberty of Conscience) 라 부른다.
짐이 벗겨졌다는 것은 단지 마음이 가벼워졌다는 뜻이 아니다. 신학에서 이것을 양심의 자유,( Liberty of Conscience)라고 말한다. 이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 정죄의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유
- 자기 의가 아니라 은혜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
이를 가르켜 양심의 자유라고한다. 짐을 다시 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그의 양심은 이미 십자가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3. 십자가의 만남은 은혜의 전가 (Imputation of Grace) 로 이해한다.
신학에서 십자가는 “교환의 자리”다. 기독도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기독도에게 전가된다. 이를 이중 전가(double imputation) 라고 부른다.
그래서 짐이 굴러 떨어지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그 짐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장소가 바뀐 것이다.
인간의 어깨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옮겨진 것이다. 존 번연에게서 십자가는 “죄가 무시된 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므로 우리죄가 그리스도에게 이전되여 나의죄가 그리스가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시여 못박혀죽으시고 그분때문에 나는 자유인이 되였다. 철저한 교환이다.
영어의 “Imputation” 이란 말은 “ 전가, 돌려 계산하다, 다른 사람의 것으로 인정하다” 뜻이다.
영어 Grace는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선물” 을 뜻한다. 은혜의 전거런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자가 선물로받았다는것이다. 십자가에서의 의롭다함을받는것은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사랑의 선물이다. 죄로부터의 자유는 나의 자랑도 공로도아닌 하나님이주신 선물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루워진 결과이다. 이를 가르켜 은혜의 전가 (恩典轉嫁)라 한다.
4. 신분을 바꾼 자유: 십자가와 오네시모의 이야기
존 번연이 말하는 십자가의 자유는 단순히 죄의 무게가 가벼워졌다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상태가 달라졌다는 선언이다. 십자가는 죄인을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고쳐 놓은 자리가 아니라, 전혀 다른 신분으로 옮겨 놓은 자리다. 이 점에서 『천로역정』의 기독도가 짐을 벗는 장면은, 성경 속 또 하나의 작은 서신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오네시모의 이야기다.
오네시모는 본래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친 노예였다. 그는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보호받을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의 이름 ‘오네시모’가 “유익한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는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친 ‘무익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변화된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사용한 언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몬 16절)라고했다. 오네시모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었고, 같은 길을 다시 걸어가고 있었지만, 그의 신분은 완전히 달라졌다. 노예에서 형제로, 소유물에서 인격체로, 빚진 자에서 사랑받는 자로 바뀌었다.
신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십자가는 죄인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죄를 제거한 자리가 아니라, 죄인을 새로운 신분으로 옮겨 놓은 자리다. 이제 죄의 자리에서 신분이 바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되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시민이 된 것이다. 베드로전서 2:9-10,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여기서 핵심은 신분의 변화이다. 더 이상 “백성 아니던 자”가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기독도의 순례는 멈춘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천성을 향해 순례의 여정을 계속하게된다. 『천로역정』에서 기독도는 혼자 출발했지만, 순례길에서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나고, 함께 걷고, 서로 격려하며 천성을 향해 나아간다. 청교도 신앙에서 순례는 개인적 결단으로 시작되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숙해 간다.
다음 강의에서는 순례자와 교회의 역할을 다루고자 한다., 교회는 순례의 길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오늘 우리의 교회는 어떻게 순례자들의 쉼터이자 훈련장이 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에 계속)

이상택 목사
(아오나 콜럼바 대학 학장, 신학과 실천신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