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설교 : 성서속에 던져진 질문들 (7)

주제 : 성서속에 던져진 하나님과 예수님의 질문들 (The Great Questions in the Bible)
오늘의 본문 : 열왕기상 3장 4-15절
오늘의 제목 : (7) 내가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는냐? (What would you like me to give you?)
내가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는냐? (열왕기상 3:4-15)
다윗에게는 성경에서 확인된 자식만해도 모두 열넷인데 그 중 아들이 열셋이고 딸이 하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고져하는 솔로몬은 그 중에서 열번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이라는 아들은 다윗이 혼외정사를 통해서 얻은 아이였습니다. 부하 지휘관인 우리아는 전선에 나가 목숨을 걸고 전투 중인데 다윗은 왕궁에서 한가하게 그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내려다 보다가 그녀의 육체미에 음욕이 발동하여 낳은 아들이 솔로몬이었습니다.
솔로몬이 태어났을 때 선지자 나단이 처음 지어준 이름은 여디디아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여디디아>란 <여호와께서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참 떳떳하지 못하고 챙피한 모습으로 태어난 아이였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어 그를 사랑하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은 여디디아는 그후 이름을 개명하여 솔로몬이라 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태어난 후 한나라의 임금이요, 가장으로써의 다윗의 인생길은 불행과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느날 선지자 나단은 다윗을 찾아와서 말합니다. <폐하, 어느 마을에 소떼와 양떼가 많은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 곁에는 겨우 작은 새끼 암양 한마리 뿐인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지나가던 길손이 찾아와서 먹을 것을 구걸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는 자기의 그 많은 양떼 중에서 한마리를 잡아 그 손님을 대접하지 않고 힘없고 가난한 이웃의 한마리 뿐인 그 양을 끌어다가 잡아서 그 행인을 대접했습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윗은 노하여 소리를 질렸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일지니라> 그 때 나단 선지자는 이렇게 말 합니다. <폐하,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는 저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의 양심을 두드리는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이후 다윗에게는 비극적 일들이 연이어집니다. 큰 아들 암논은 배다른 누이 동생 다말을 겁탈하여 욕을 보입니다. 이를 보고 분노한 셋째 아들 압살롬은 형 암논을 살해합니다. 마침내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켜 다윗을 왕좌에서 쫓아내려고 쿠테타를 일으킵니다. 다윗은 수도 예루살렘에서 도망을 쳐 겨우 목숨을 부지합니다. 다윗은 반쪽짜리 이스라엘 왕국을 최초로 통일 왕국으로 만들어낸 왕이요, 이스라엘 국기에 세겨져 있는 <다윗의 별> 처럼 빛나는 왕이었지만, 이렇듯 솔로몬이 태어난 후 부터는 참 아프고 쓰라린 일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솔로몬은 법적으로나 관행에 의하면 도저히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있질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10번째 아들인 데다가 정실부인도 아닌 혼외정사를 통해 불륜으로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그는 왕위 계승권에서 한참 밀리는 순서였습니다. 다윗의 임종이 가까와졌을 때 그 뒤를 이을 왕위를 놓고는 아주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배다른 아들들이 여럿이나 있었습니다. 맏아들 암논을 비롯하여 둘째 길르압, 셋째 압살롬, 넷째 아도니아, 다섯째 스바댜, 여섯째 이드르암 등이 줄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제 1순위는 아도니아였습니다. 이미 아도니아는 국방장관 요압을 비롯하여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전푹적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백성들로 부터도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정권 다툼에서 밀려나고 마침내 솔로몬에 의해서 처형되고 맙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의 계략과 아첨이 있었습니다. 밧세바는 늙어 몸과 마음이 어눌해진 다윗왕을 찾아가 장황하게 지난날의 이야기 길게 늘어놓으면서 자기가 낳은 아들 솔로몬을 왕위에 앉히도록 설득하여 마침내 성공하게 됩니다. 밧세바에게 설득당한 다윗은 마침내 솔로몬을 불러들여 <네가 나를 대신하여 이스라엘과 온 유다의 통치자가 되리라>고 선포하면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을 불러 솔로몬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공식적으로 그의 왕위를 확정짓게 됩니다. 그 때는 기원전 970년, 솔로몬의 나이는 21살 때였습니다. 하여튼 고대 중국이나 이집트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도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통털어 왕들을 좌지우지 하던 여인들이 적지 않았지만 첩의 몸으로 아들 솔로몬을 왕으로 만든 밧세바란 여자는 참 대단한 여자였습니다.
솔로몬은 이렇듯 선왕 다윗의 쓰라린 인생여정 중에 태어나 마침내 왕좌에 앉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대로 솔로몬 통치의 전반기에는 긍정적 요소들이 많았습니다. 그의 왕실조직과 외국과의 평화관계, 무엇 보다도 솔로몬의 성전이라고 불리운 제 1성전 건축과 왕궁건축, 잠언을 비롯한 많은 지혜의 글들을 짓고,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한 것은 솔로몬 치세의 최정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으로 성전을 건축했고, 버려졌던 언약쾌를 성전으로 옮겨오고, 주변에 있던 강대국들을 점령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론몬 역시 그의 통치 후반기에는 엄청난 잘못을 져지르게 됩니다. 그는 시바의 여왕 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이방여인들을 끌어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이 가져온 온갖 이방신들을 허용하여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왔던 이스라엘 나라는 드디어 온갖 잡신들과 우상을 섬기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이 나이가 많아지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더라, 왕상 11장 4절>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났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왕상 11장 9, 11절> 이리하여 마침내 이스라엘나라는 그의 임종에 이르러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다윗 때 하나로 통일되었던 이스라엘나라는 겨우 한 세대를 지나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남왕국 유대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시작에서 슬픈 마침으로 이어진 것이 솔로몬의 일생입니다. 사실 모든 역사와 개인의 일생에는 끊임없는 반전이 이어집니다. 始終一貫, 정말 어려운 일니다. 시작은 좋았지만 끝은 나쁜 경우는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龍頭蛇尾 – 용의 머리처럼 웅장하게 출발했지만 뱀의 꼬리 처럼 빈약한 것이 인생이요, 역사입니다. 솔로몬 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처음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솔로몬이 왕좌에 오른 어느날 하나님은 꿈에 나타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이것이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질문>이라는 주제에 따른 6번째 물음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한번 말해 보아라> 우선 하나님의 이런 물음에는 커다란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全知全能하신 분이요 無所不爲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외에 인간 중에는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독재 국가의 권력자들이나 초강대국의 집권자 중에는 더러 허세를 부리며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듯이 큰 소리치며 무엇이든지 다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할 것 처럼 떠드는 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또 가끔 술취해서 허세를 부리는 남자들 중에도 아이들이나 아내에게 큰 소리 치는 인간들이 간혹 있습니다. <말만해! 뭐든지 다 줄께!> 그러나 이런 말은 다 허세요, 허풍이요,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로, 참으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은 무소불위하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하나님은 솔로몬이란 사람, 이제 나이는 겨우 스물 하나요, 출생 역시 그리 자랑스럽지 못하고, 군사적 용맹에서는 검증되지도 못한 이런 햇내기의 어디를 보시고 이렇게 백지수표를 건너신 것일까요? <내가 너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네가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다 들어주마> 도대체 어떤 경우에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아니하시고 무조건 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실까요? 여기엔 하나의 정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감동을 먹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네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줄테니까 한번 말해 보라>고 백지수표를 주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일 때, 하나님의 마음이 뜨거워 질 때, 하나님의 가숨이 뭉클해 질 경우, 즉 하나님이 감동 먹었을 때, 그 때 하나님은 두 손 들고 그를 향하여 선언하십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말해 봐! 말만 하면 뭐든지 다 들어 줄께! 나 너 한테 감동 먹었어!>
그럼 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감동 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 감동을 먹으시는가? 하나님을 감동 시키는 비결은 무엇일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 정답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1천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라 1천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1천 번제란 무엇입니까? 물론 여기에는 숫자적 의미를 넘어서는 깊은 뜻이 있을 겁니다. 소나 양을 천마리 쯤 잡아서 번제로 드리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솔로몬 이전에도 1천 번제는 물론이고 1만 번제도 드렸을 것 아닙니까? 시쳇말로 새벽제단 천일 쌓고 천번 감사헌금 드리고, 천번 기도하면 그게 솔로몬의 1천번제와 같은 것일까요?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감격이 되어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신앙 경험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때를 따라 하나님을 감동 시킬 때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을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감동시키는 것도 아주 아주 중요한 신앙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하나님을 감동시켜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솔로몬의 1천 번제의 본질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솔로몬이 드린 1천 번제는 그가 왕위에 오른 후 제일 처음으로 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누구처럼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축제를 벌리고 국민임명식을 거행하고 불꽃놀이를 하고 거리에 나가 행진을 하며 국민의 대표란 사람들을 만나 거대한 잔치를 벌리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자마자 제일 처음으로 천부장과 백부장, 방백들과 족장들, 그리고 온 회중을 불러 기브온으로 올라가 거기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것도 1천 마리나 되는 소와 양을 잡아 불태워 드리는 최고 최대의 충성 맹세를 했습니다. 이 행위는 근본적으로 왕의 자리란 하나님이 내리신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를 포함한 모든 인간 행위의 밑 바닥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에 대한 충성심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를 이 자리에 세운 것은 선왕 다윗이 아닙니다. 내 생모 밧세바가 아닙니다. 제 주변에 있는 충신들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아닙니다. 저는 저를 잘 압니다. 저는 혈통으로나, 서열로나, 나이로나, 능력이나 신앙 등 그 어디를 보아도 왕될 사람이 아님을 잘 압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저를 이 자리에 앉친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약속합니다. 다짐합니다. 여기 1천 번제를 드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왕의 왕이요, 주의 주이심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저를 받아주시옵소서> 바로 이런 신앙적 태도와 정신적 자세와 영적 의미가 1천 번제에 담겨진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서 감동을 받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진심, 솔로몬의 충성심, 솔로몬의 신앙심, 솔로몬의 정직함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감동을 않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하자면 하나님은 마음이 찡하고 울컥하신 겁니다. 우리가 때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눈물을 흘릴 때가 있는 것 처럼 하나님께서도 그 날 솔로몬의 행동에 감격이 되어 눈물이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의 주제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랴? 네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마!> 사실 이런 식의 백지수표 위임장 같은 말은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마음에 깊은 감격이 오고 울컥했을 때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감동을 먹었고, 솔로몬은 하나님을 감동시킨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평생 예수 믿고 목회했지만 단 한번도 하나님께로 부터 그런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야, 홍길복아, 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머뭇거리지 말고 다 말해라. 너의 소원, 내가 다 들어주마!> 왜 저는 하나님께로 부터 이런 음성을 한번도 들어보질 못했을까요? 저는 한번도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참 마음으로,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이 울컥해 하실 만큼, 하나님을 감동시킬 만한 예배를 드리고, 또 하나님께서 울컥하실만한 삶을 살아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저에게서 한번도 감동 받으신 적이 없으시니 하나님께서는 어찌 저 같은 인간에게 <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다 말해 보아라. 내가 다 들어주마> 말씀하시겠습니까? 제사란 <드리는 행위>입니다. 솔로몬도 1천 번제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제사란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를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직접, 내가 가져온 제물을, 제단 위에 올려 놓고 불태우는 행동입니다. 마찬가지로 예배도 <드리는 것> 입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예배 본다> <예배 보러 가자> <예배보고 왔다>고 말합니다. 굿은 보는 것입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다>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예배란 굿처럼 보고 구경 하는 게 아닙니다. 예배란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내가 직접 <드리는 행동>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내 몸을 산 제물로 받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습관화된 예배자들이 되고, 또 종교적 의식 집행자들이 되어 예배를 보고, 예배를 구경하는 사람이 되었거나,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나오는대로 기도하고, 뜻도 모르고 그냥 찬송을 흥얼거리며 의식과 형식과 절차에 따라 예배를 하나의 종교적 의식으로 집행해온 사람은 아니었던가? 돌이켜 보며 회개합니다. 저는 솔로몬 처럼 친히 내 몸을 하나님께 받쳐 <1천 번제를 몸으로 드린> 사람이 아니라 예배의식의 집행관으로 살아온 사람이었으니 어찌 나같은 인간에게서 하나님이 감동을 먹고 감격하여서 <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나 오늘 너 한테 감동을 먹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마!> 하시는 말씀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마음이 울컥하시도록 감동을 먹었을 때만 <네 소원이 무엇이냐? 네가 말하는 것은 내가 이제 다 들어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 하나님을 감동 시키는 것은 1천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전존재를 받쳐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나누고, 더 나아가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온 몸으로 산제사를 드릴 때, 그 때 하나님은 울컥하시고 감격이 되시어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나 오늘 너한테 크게 강동 먹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에 은혜 받고 감동 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나로 인하여, 우리로 인하여 은혜도 좀 받으시고 감동도 받으시게 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길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동 받고, 하나님은 우리로 인하여 감동 받으시는 상호 감동과 감격의 관계가 형성 되어지길 소망합니다. 그날 솔로몬으로 인하여 감동 받고 감격해 지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솔로몬은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님, 저는 어린 아이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저에게 들을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요. 그리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솔로몬은 진짜로 하나님을 감동 시킬줄 안 사람이었습니다. 마침내 감격에 감격을 더하게 된 하나님은 솔로몬을 인류 역사상 최고로 지혜스런 왕이 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 까지도 더해 주셨습니다. 잘 아시는 옛날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한 나뭇꾼이 연못가에서 나무를 베다가 도끼를 물속에 빠뜨렸습니다. 어쩔줄 몰라 울고 있는데 마침 물 속에서 산신령이 올라왔습니다. 그 산신령은 손에 금도끼와 은도끼를 들고 물었습니다. <네가 물 속에 빠뜨린 것이 이것이냐?> 나뭇꾼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빠뜨린 도끼는 쇠도끼입니다> 그러자 산신령은 잠간 기다리라고 하더니 물속에 들어가서 쇠도끼를 가지고 나오더니 그걸 나뭇꾼에게 주면서 이리 말했습니다. <이왕 가지고 나온 것이니 이 금도끼와 은도끼도 그냥 가지고 가거라>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 시키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2026년, 우리 진짜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이 되어 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